1. 꾸르실료란?
'꾸르실료(Cursillo)'는 스페인어로서,
'과정. 코스(coudrse)'를 뜻하는 'Curso'와 '짧다(short)'는 의미의 접미사 '-illo'의 합성어이다.
말 그대로 번역하면 '단기과정(a short course)' 이라는 뜻인데, '짧은 시간에 갖는 회심의 여정'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꾸르실료'라고 할 때에는 꾸르실료 3박4일의 프로그램을 이야기하지만,
'꾸르실료운동'이라고 할 때에는 꾸르실료 이전, 3박4일의 꾸르실료, 꾸르실료 이후를 모두 포함한다.
'꾸르실료'의 정식 명칭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꾸르실료운동'이다.
꾸르실료를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꾸르실료운동이
'환경(세상)의 복음화'라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목적을 가진 교회운동이기 때문이다.
꾸르실료운동은 그 자체가 지닌 고유한 방법에 따라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
일상생활 속에서의 복음적 삶을 통해 각자가 속한 환경을 복음화하게 한다.
2. 심벌마크
우리나라 꾸르실료운동의 심벌마크는
'믿음의 방패'와 '성령의 칼'을 의미하는데,
이는 꾸르실료운동의 주보성인인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교회에 보낸 서간(에페 6,12-17)에 근거하고 있다.
이 심벌마크는 '믿음의 방패로 악의 세력을 막아내고, 성령의 칼로 악을 끊어냄으로써 개인의 성화,
더 나아가 우리 각자가 사는 환경을 복음화하겠다.'라는 꾸르실리스따들의 각오를 나타내고 있다.
성령의 칼 문양에 새겨진 I · S · C는 꾸르실료운동의 덕목인
I (Ideal : 이상), S (Submission : 순종), C (Charity : 사랑)을 의미한다.
꾸르실료운동의 심벌은 나라마다 다른 모양인데, 외국에서는 '무지개'나 '닭'의 모습을 한 문양이 많다.
제2차 바오로 사도의 영적 투쟁(에페6,12-17)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고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3. 꾸르실료운동의 역사
스페인은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등
거룩한 성인 성녀들이 태어난 가톨릭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부터 말까지 있었던 3번의 내전으로 혼란과 무질서에 쌓여 있었다.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목숨을 잃을 정도였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스페인이 직면한 문제를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풀어내려는 젊은이들의 그룹이 나타났다.
그들은 무질서 안에서 발생한 죄로 인해 비그리스도적인 환경이 생겨났으며,
그것이 사회적 모순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비그리스도화된 세상을 다시 그리스도화된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의 잘못을 바로 잡고 새롭게 쇄신해 나가자는 각오와 결의를 다지기 위해
스페인의 주보성인인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대대적인 순례를 시행하기로 했으나 또다시 발생한 내전으로 중단되었다.
1939년 내전이 끝난 후, 스페인 가톨릭 청년연합회는
"10만 명의 젊은이들을 산티아고로!"라는 구호 아래 대규모 성지순례를 준비하며,
순례자들을 이끌고 갈 지도자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했는데,
이 교육이 꾸르실료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모든 교구에서 '상급 지도자 순례를 위한 꾸르실료'를 실시했고,
각 교구의 모든 성당에서 '순례 지도자를 위한 꾸르실료'가 실시되었다.
마요르카 교구는 '상급 지도자 순례를 위한 꾸르실료'를 실시한 첫 번째 교구였다.
1948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의 성지순례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에르바스 주교와 어드와르도 보닌 등은 성지순례를 위한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이었던 꾸르실료를
교회운동으로 발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실시했던 모든 꾸르실료를 평가하고, 중요한 요소들을 정리하여 마침내
1949년 1월 7일, 마요르카의 성 오노라또 수도원에서 세계 제1차 꾸르실료를 실시했다.
꾸르실료운동은 1950년대 초반에 남미로, 1957년에 미국으로, 1960년 초반에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필리핀 등 아시아 국가는 미국을 통해 꾸르실료운동을 받아들였다.
초창기 모습과는 달리, 교계제도 내의 성직자 주도적 성격이 강했던 꾸르실료운동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년-1965년)를 통해 본래의 모습인 평신도운동으로서의 성격을 회복하게 되었고,
현재는 평신도와 성직자가 협력하는 신심운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꾸르실료운동은 처음에는 남성 청년만을 대상으로 했다가, 차츰 장년 남성과 여성들에게도 실시하였다.
최초의 여성 꾸르실료는 1953년 콜롬비아에서 개최되었다.
AOUI SE DIO EN ENERO DE 1949, EL PRIMERO DE LOS
CURSILLOS DE CRISTIANDAD OUE EL ESPIRITU SANTO
HA DIFUNDIDO HASTA LOS ULTIMOS CONFINES DE LA TIERRA.
1949년 1월에 신성한 정신이 세상의 끝까지 퍼지기 위해
크리스천 꾸르실료가 처음으로 여기에 뿌리를 내렸다.
EL SECRETARIADO DIOCESANO DE MALLORCA, CON OCASION
DEL Ⅲ ENCUENTRO MUNDIAL DE DIRIGENTES DE CURSILLOS,
DA GRACIAS A DIOS.
MALLORCA 교구 사무국은 세계의 꾸르실료 지도자들이
3번째 만나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5 - Ⅵ - 1972
1972년 6월 5일
전 세계로 퍼져나간 꾸르실료운동은 1970년에
'크리스천 생활의 꾸르실료 라틴아메리카 그룹(구: OLCC, 현: GLCC)'이 설립된 이후
국제그룹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1980년에 꾸르실료운동의 세계기구
(OMCC: Organismo Mundial de Cursillos de Crstiandad)가 설립되었다.
1989년에는 우리나라가 속해있는 아시아 · 태평양 그룹(APG)이 설립되었다.
1963년,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꾸르실료운동을 교회 내 신심운동으로 인정하면서
꾸르실료운동의 주보성인으로 성 바오로 사도를 정해주셨다.
또한 1966년에는 로마에서 개최된 제1차 꾸르실료 세계대회에 참석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와 교황은 여러분을 믿습니다."라는 말씀을 남겨주셨다.
꾸르실료운동은 교황님에 의해 사목적으로 수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에서 실시하는 평신도운동으로 인정받았지만,
교황청으로부터 명백히 인준을 받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흘렀다.
2004년, 교황청 평신도평의회는 OMCC를
"그리스도교 꾸르실료 체험을 조정하고 촉진하며 전파하는 사적 법인 조직"으로 인준하는 교령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꾸르실료운동은 사목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법적으로도 인정받는 평신도 운동이 되었다.
2014년 12월, 교황청 평신도평의회는 OMCC의 정관을 인준했음을 확인하였다.
현재 전 세계 60여개 국가에서 꾸르실료운동을 실시하고 있으며 포르투갈이 OMCC 회장국을 맡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4년 7월부터 1998년 5월까지 OMCC 회장국이었다.
4. 주보성인 사도 성 바오로
사도 성 바오로는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사도 22,3)
불행히도 바오로가 언제 탄생했는지에 대한 자료는 전혀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바오로가 예수보다 10여 년 늦게 출생했다고 한다.
바오로는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철저한 종교교육과 그리스문화의 교육을 받았으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엘리트 중에 엘리트였다.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는 바리사이파였던 바오로는 안식일을 지켜야한다는 계명을 무시하는 등
율법에 도전하던 예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교 신자를 잡아 가두는 등 교회를 박해하는 데에 앞장섰다.
그리스도교 신자를 잡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바오로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고 회심하여(사도22,5-11)
그때부터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거듭나게 되었다.
바오로의 회심은
악인에서 선인으로 돌아서는 윤리적인 '회개'도 아니고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의 '개종'도 아니었다.
바오로의 회심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
곧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심'(로마 8,9)으로써 그리스도께 소속되는 것을 말한다.
바오로는 3번에 걸쳐 전도여행을 통해 초대교회를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바오로는 초대교회 안에서 사도로서의 권위에 의심과 도전을 받았으나
그 때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주님에게 직접 받았음'을 거듭 강조하며
(갈라 1,1-2; 15-16; 1코린 15,9) 자신이 예수그리스도에게 임명된 사도임을 주장했다.
바오로는 3차 전도 여행 후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구금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갔다.
로마시민권자였던 바오로는 가택연금상태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바오로가 어떻게 순교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된 직후,
즉 1963년에 교황 성 바오로 6세께서는
복음선포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바오로 성인을 꾸르실료의 주보성인으로 정해주시며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일하는 꾸르실료를 교회 내 신심단체로 인정해 주셨다.
5. 까미노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 순례길은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세계 3대 가톨릭 성지순례 코스로 불리는 곳이다.
프랑스 길이 대표적이지만, 사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매우 다양하게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꾸르실료운동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꾸르실료운동의 시작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의 성지순례를 위한 봉사자 양성 프로그램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였던 야고보 사도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야고보 사도는 당시 사람들이 세상 끝이라고 믿었던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
야고보 사도는 예루살렘에서 순교했는데,
그의 제자들이 야고보 사도의 유해를 스페인으로 옮기던 중 풍랑을 만나 유해가 사라졌다.
야고보 사도의 유해는 9세기에 들판의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그곳에 세운 성당이 '성 야고보의 별이 빛나는 들판'이라는 뜻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다.
8세기 경, 아라비아반도와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이슬람 세력으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대신 비교적 안전했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성지순례를 갔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있는 스페인 역시 남부 지방에는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는 스페인 북부 지방은
가톨릭 왕국(아스투리아스 등)이 지배하고 있어서 안전했기 때문이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경제적, 정치적 힘을 키울 수 있었고,
그 힘으로 스페인에서 이슬람세력을 몰아내는 국토회복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8세기 초부터 15세기 말까지의 약 770년 동안,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국토를 되찾기 위한 국토회복운동이 벌어졌다.
국토회복운동은 단순히 빼앗긴 국토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다시 가톨릭 국가를 세우기 위한 일종의 신앙회복운동이었다.
국토회복운동은 1496년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완성되었다.
국토회복운동을 성공했던 경험은
1930-40년대에 생겨난 신앙회복운동인 꾸르실료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출처: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