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히 여기사 ....
본문 :눅 7:11-17
한번은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11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나인"이라는 말은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슬픈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장례행렬을 만난 것입니다.
그 장례는 여느 죽음과는 다른 기막힌 사연을 담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12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이 말에...
그 여인이 겪어왔고.....,
앞으로 겪어야 하는 험난한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에는 과부가 홀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성경 곳곳에는 사람들이 돌보아주어야 하는
세 부류의 사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여행을 다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떠돌이 노숙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 축에도 끼지 못하는,
가장 밑바닥의 인생을 살아가는
최극빈층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 두 끼를 먹고사는 실정이었는데....
이들은 그나마도 먹지 못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아내를 넷까지 둘 수 있게 만들었는데......
맨 처음 그 율법을 만들게 된
동기는 가난이었습니다.
고대 중동지방에는 그 어느 곳보다
전쟁이 많았습니다.
수많은 남자들이 전장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과부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네 명의 아내를 두게 하여,
남편의 그늘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그 과부를 먹여 굶어 죽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이 과부에게 유일한 희망은 바로
이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마저 죽은 것입니다.
생계도 생계지만,
마지막 위안도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 과부에게 남은 것은 슬픔과 절망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그런데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의 차원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창자까지 뒤틀리다."는 뜻입니다.
과부의 슬픔을 목격하신 예수님은
속 내장까지 뒤틀리는 듯한 비통함과 연민을 느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통받는 인간들을 보시는
주님의 시각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마음을 빼앗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음성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 마 9장에 보면 두 소경이 예수님께 나아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소리치며 따라오자....
주님이 그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 귀신들린 딸을 가진 가나안 여자도
예수님께 나아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자 주님이 고쳐주십니다(마15:22).
- 소경이요 거지인 바디매오도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막10:47)라고 외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말로 예수님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어떤 때는 예수님 스스로
그 마음이 들어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마14:14).
예수님 스스로 병자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사실 구원의 문제도 예수님의 이 마음과 연결이 됩니다.
‘죄의 노예’로 절망과 고통 가운데 헤메는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셨기에 자유를 주시려고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의 가장 낮은 자리에 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앓고 절망과
고통 가운데 울부짖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사 ....
가시던 길을 멈추신 것처럼.....
죄 가운데 절망하고 고통받는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영광의 길을 멈추시고....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성육신 하신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 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발을 멈추게 했던 바로
그 말 “나를 불쌍이 여겨 달라”는 외침입니다.
바로 세리의 기도입니다.
이것이 은혜받는 비결입니다.
이런 심정을 가지고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 우리 교회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 내 가정을 그리고 내 자녀를
그리고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면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가까이 가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단어가 있습니다.
14절a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님은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시고
끝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 가셨습니다.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야곱의 우물에서
물 길러 온 여인과 대화를 통해 여인을
변화시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상종조차 하지 않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의 영혼과 정신적인 우울증과 상처를 치유하시고
그 여인을 통해 수가성 전체를 변화시키십니다.
그 때 그 여인이 예수님께 하는 말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하니 ...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요 4:9).
아무도 다가가기를 원치 않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시는
사랑의 주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관에 손까지 대셨습니다.
여기서 관이란 우리나라식의 관이 아닙니다.
시체를 베로 싸매고서
들것에 들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들것에 손을 대는 것은
시체와 접촉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율법에 의하면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정함조차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고서 깨끗함을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죄인들과 한 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시며
그들과 교제하셨습니다.
그들의 부정함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의미가 큽니다.
말로만, 입과 혀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행동으로 ‘사랑’해야 함을 교훈하여 줍니다.
약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다가가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언 - 일어나라>
예수님은 그 관에 손을 대시고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14절)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자 놀라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5절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죽었던 외아들이, 관에 누웠던
그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
이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
생명의 주관자시라는 증거입니다.
“청년아 일어나라”는 말씀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요,
인간의 몸에 생명을 불어 넣어준 생기인 것입니다.
그 말씀은 죽음에 있는 젊은이에
육체 안에 들어갔고...
그 말씀은 생명을 주어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살아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다시 그 어머니에게로
돌려보내 주셨습니다.
15절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이것이 그를 다시 살리신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교회에 가면 드려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헌금도 강요하고, 시간도 강요하고,
이것 저것 요구하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보다 주시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비교도 할 수 없는 귀한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가까이 다가오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장 원하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
아들을 살려 어머니에게 주셨습니다.
-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영생의
물을 주어 다시 목마르지 않게 했습니다.
-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 질병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병 고침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말씀처럼 주님은 구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가져가시는
분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 헌금을 가져가시는 분...
- 시간을 가져가시는 분....
- 세상적 재미를 가져가시는 분....
- 나의 소중한 것을 달라고 요구하시는 분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십니다.
자기의 외아들 예수님까지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까지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신 분이 무엇인들 안 주시겠습니까?
<나오는 말>
사랑하는 금산교회 성도님들 !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절망과 필요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가까이 다가와 만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따라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명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간 저와 성도님들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온전케 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몸이지만 주님께
온전히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상한 몸을 치유하여 주실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성도님들
전 인격을 드려 찬양하세요.....
그리하면 크고
놀라운 비밀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저와 우리 금산교회 온 성도들이 !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여...
더욱 세상에 증거하는 삶을 사시기를 ...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