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란애(於蘭愛)
정의송 작곡
김다현 노래
(17) 김다현-어란애-[원곡정의송] - YouTube
매봉에 초승달이 떠오르는 밤이면
여낭터에 산새소리 고요히 우네
가슴속에 한가득 오직 내 나라
님의 곧은 그 절개 어이 헛되리
파도치는 물결위에 고이고이 떠가라
청순한 님의향기 천년만년 흘러 흘러라
갈매섬 저녁놀이 붉게물든 밤이면
만호바다 격랑소리 메아리 치네
끓어오른 분노를 바다에 던진
님의 곧은 그 충정 어이 헛되리
넘실대는 물결위에 고이고이 떠가라
님을향한 모종소리 온누리에 울려 퍼지네
청순한 님의향기 천년만년 흘러 흘러라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해남 여성의병 ‘어란’
그토록 무덥던 여름이 지나가고 바람이 선선하니 가을이다. 자연의 섭리란 참으로 대단하다.
유난히도 요란스러웠던 21년의 여름은 코로나19의 그에 따른 여파와 부동산 정책의 실패의 경제적 혼란, 세대간의 갈등 등이 기억될 것이다. 그 어느 것 하나 논란이 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이지만, 역사 이래 가장 세금이 많이 걷히고, K-방역이라는 국제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위기의 시대, 위험은 대비하고, 기회는 살리는 것이 현명의 일이다. 여러 사회적 담론 중에서도 ‘페미니즘’과 관련한 논란이 여전하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여성의 역할과 중요성을 인정하는 사회이다. 진즉부터 그랬어야 할 양성평등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은 어떤 형태로는 차별받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여성의 권리와 존중이 더 향상되어야 할 일이다. 다만, 너무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은 금물이다. 임진전쟁에서 활약한 남도의 의병장들을 소개해왔다. 그런데 조선사회에서 의병장들을 이야기하다 보면 거의 남성들 중심이었다. 사실 전근대 사회는 남성 중심의 사회였고, 또한 중요 역할을 남성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난의 전쟁 앞에서 남녀는 따로 없었다. 전쟁에서 수많은 승리들은 남성과 여성이 따로 없었다. 남녀노소가 모두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명망가 중심의 의병이야기에서 이름없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드러내고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해남의 여성 의병이었던 호국 여인 ‘어란'의 삶을 찾아가보기로 한다. 해남의 호국 여인 ‘어란’을 아시나요?
명량대첩 이튿날인 1597년 9월 17일, 해남의 어란 마을 앞바다에 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된다. 이를 본 한 어부가 여인의 시신을 근처 소나무 밑에 묻어 주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그 여인의 무덤 앞에 석등을 세우고 불을 밝히고 넋을 위로했다. 지금도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동네주민 모두가 정성스러운 제사를 지내고 있다.
명량대첩은 이순신도 “하늘이 내린 승리였다”라고 말할 정도로 세계 해전사에서도 전무후무한 기적의 승리였다. 하지만 이러한 승리는 단순히 운이 아니었다. 이순신의 지략과 전술, 그리고 첩보에 의한 사전 준비로 인해 얻은 승리였던 것이다.
▲해남 어란마을 전경(전남 해남군 송지면)
이순신은 군인들에게는 매우 엄격한 잣대를 요구했지만, 백성이나 의병들에게는 따뜻하고 각별하였다. 덕망이 높았기에 군영 인근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백성들 역시 자발적으로 이순신을 따르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백성들은 우리 수군의 승리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을 자발적으로 수집하여 제공하였다. 이순신은 특히 명량해전을 앞두고 날씨는 물론 지형까지 세밀하게 점검했다. 울돌목이라는 특수한 해저지형을 파악하여 전쟁에 어떻게 활용할지 미리 구상해 놓았고, 밀물과 썰물의 시간대까지 해남과 진도의 바닷가 백성들로부터 수집해 놓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우리 수군의 전력은 매우 열악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뜻하지 않는 결정적인 제보가 들어왔다.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를 보면, 명량해전을 이틀 앞둔 시점인 1597년 9월 14일에 육지를 정탐하고 온 임준영이 보고하기를 "김해인이라는 여성이 포로 김중걸에게 9월 16일에 왜적의 대규모 출전 기밀을 알려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 '김해인'이 해남의 호국 여인‘어란’이다. ‘어란’은 일본군의 배에 갇혀 있는 김중걸이라는 포로를 일본군 장수였던 칸 마사가게에게 풀어주라고 간청하고, 자신이 입수한 기밀을 김중걸을 통하여 이순신에게 전달하였다. 그 기밀은 일본군들이 이순신에 대한 공격을 실행하려는 시간과, 일본군 함대가 어떤 경로로 이동하는 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김중걸을 통해 정탐한 정보를 임준영이 이순신에게 전달하자, 이순신은 “모두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 없는 것도 아니어서 백성들에게 모두 육지로 올라가 있으라” 하고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이순신은 이 첩보를 바탕으로 울돌목의 특수한 지형과 바닷물의 조수 흐름을 현지 백성들과 또한 자원하여 싸운 그 지역 의병들로부터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분석하여 전략과 전술을 세웠던 것이다. 만일, 그 때 전력상 형편없는 열세 상황에서 ‘어란’이 전해준 일본군의 군사정보와 출전기밀이라는 정보를 몰랐더라면 명량대첩은 실현 불가능하였을지 모른다. ‘어란’이 포로로 잡힌 김중걸에게 전달한 일본군의 군사력과 출전기밀은 그만큼 매우 정확하고 세밀한 정보였다. 명량대첩이 승리로 끝난 다음 날인 1597년 9월 17일에 ‘어란’은 바다에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어란’의 삶은 자신의 희생으로 나라를 살릴 수가 있다면 기꺼이 목숨을 던진 의병의 삶 그 자체였다. 해남지역의 지역민으로서, 조선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임무를 충실하게 완수하였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어란마을 입구에 있는 ‘명량해전과 어란여인 이야기’
아쉽게도 절벽에서 투신하여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남아있지는 않다. 하지만 부모와 형제들이 전란 중에 다 죽임을 당해 돌아 갈 곳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로운 행동이 작게는 가족에 대한 복수도 있지만, 크게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 걸고 해 냈으니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목숨을 던져 충절을 다했다. 해남에 새겨진‘어란’의 자취를 찾다 ‘어란’이라는 인물이 과연 실존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해남 곳곳에는 호국 여성 ‘어란’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증거물이 있다. ‘어란’은 마을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는 바위 절벽에서 스스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그곳은 명량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곳으로,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여자가 떨어져 죽은 곳이라 하여 여낭터라고 하고, '여낭치'라고 부르고 있다. 호국 여성 ‘어란’이 떨어져 생을 마감한 낭떠러지인 여낭터에는 일제강점기에 해남에서 거주한 일본인 후손들의 모임인 ‘해남회’에서 2013년에 어란 상과 비석을 세웠다. 또한 ‘어란’이 투신한 다음 날 한 어부가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여 소나무 밑에 그 영혼을 달래기 위해 묘를 썼다고 한다.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이름 없는 무덤이 여낭터 근처에 있어 명절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벌초를 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군부대가 마을로 들어온 후 무연고 묘로 처리된 후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이 지역 어민들은 여낭터 근처에 '석등롱'을 세워 놓았다. '석등롱'은 나라를 지켜 낸 ‘어란’의 혼령을 위로함과 동시에, 바닷길을 오가는 선박을 지켜달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즉, 배의 안전에 필수적인 등대 불을 밝혀 어두운 밤바다를 지키게 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 '석등롱'은 훼손되어 없어졌고, 받침대인 헌 등대 형태로 흔적만 남아 있다. 이렇듯 호국여성 ‘어란’은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이순신에게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여 공을 세웠고, 죽어서는 어둠 속의 빛으로 다시 살아나 후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석등롱 아래에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에서 호국 여성 ‘어란’을 기리기 위해 2012년에 <‘어란’여인 이야기>라는 비석을 세워 놓았다.
▲어란마을 앞바다에 있는 석등롱
‘어란’이 주는 현재의 무엇일까를 생각하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남성들이 의병으로 나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선 사례는 많다. 하지만 여성이라고 해서 나라가 어려울 때 의병에 참여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다만 당시의 상황에서 여성이 전쟁에 참여하여 싸우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국 여성 ‘어란’은 질곡 같은 사회구조와 참혹한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뛰어넘은 자랑스러운 여성 의병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어란’의 의병활동과 관련하여 사실 유무와 관련한 논란이 있다. 사료와 근거의 부족으로 ‘어란’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란'은 잘 알려진 대로 일본인 사와무라 하치만타로(1898~1988)의 유고집을 근거로 한다. ‘문록·경장의 역’이라는 부제가 붙은 유고집이다. 그리고 최근 연구 성과에 따르면 해남의 어란의 지명과 일치하는 근거들이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는 차후에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해남 여성의병‘어란’은 지명인 어란 마을과 이름이 같다. ‘어란’은 난초를 뜻한다.
사군자 중 하나인 난초는 겉은 부드럽지만 속내는 강한 외유내강의 덕목에 빗대어 많이 쓰인다. 난초를 뜻하는‘어란’이란 이름은 그녀의 행적과 가장 잘 부합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의 몸으로 적의 일급비밀을 알 내어 이순신에게 전달한 여성의병 ‘어란’은 그 이름처럼 외유내강의 모습을 지니고 있던 여성이었다. 전쟁 앞에서 여성도 호국의병으로 나섰던 ‘어란’을 기억하는 것은 오늘날의 여성운동에도 시사점을 준다,
여낭터와 어란여인[於蘭女人]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에 여낭터와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
개설
「여낭터와 어란 여인」은 명량해전(鳴梁海戰)[1597]을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이 왜군 수군 대장의 애인인 어란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여낭터와 어란 여인」은 2016년 4월 28일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1508-26에서 채록하였으며, 구술자는 김학채[남]이다. 2017년 해남군에서 펴낸 『설화로 꽃피는 땅끝해남』 하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왜군들이 조선 수군을 점멸시키기 위하여 회의를 하였다. 왜군 수군 대장에게는 어란이라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어란은 왜군의 애인이었지만 조선 사람이었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 와 있던 김중걸(金仲傑)에게 왜군의 계획을 알려 주었다. 어란의 도움으로 풀려난 김중걸은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에게 왜군의 계획을 알렸고, 김중걸을 믿고 전술을 짠 이순신은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 수군은 승리했지만 어란은 “나의 애인이 죽었는데 내가 살아봤자 더러운 년이다.”라고 말한 후 벼랑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기를 잡던 어부가 어란의 시신을 발견하여 만호 바다와 우수영(右水營)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묻어 주어 주었다. 사람들은 어란이 묻힌 곳을 ‘여낭터’라고 불렀다. 여낭터는 지금의 어란리 서북쪽에 있는 낭떠러지이다. 어란 주민들은 어란을 당신(堂神)으로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여낭터에서 제(祭)를 지내고 있다.
모티프 분석
「여낭터와 어란 여인」의 모티프는 ‘명량해전의 숨은 주역’, ‘어란리 당신의 좌정 내력’ 등이다. 「여낭터와 어란 여인」은 ‘왜군 수군 대장의 애인이었던 어란의 충절로 명량해전에서 조선군이 승리하였다.’라는 중심 플롯과 ‘어란리에서 어란 여인을 당신으로 모시고 있다’는 보조 플롯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란리의 당에서 모시고 있는 신격은 할머니이다. 당신으로 좌정하게 된 내력이 정확하게 전해 오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낭터와 어란 여인」에서는 어란이라는 여인이 당신으로 좌정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낭터와 어란 여인」에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증거물로 제시하여 어란리의 역사적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나아가 어란리의 당에서 모시고 있는 신격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는 지역 주민들의 의식이 담겨 있다.
참고문헌
『난중일기(亂中日記)』
오세정, 『설화와 상상력』(제이앤씨, 2008)
해남문화원, 『설화로 꽃피는 땅끝해남』하(해남군, 2017)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관광산업[觀光産業]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관광객을 대상으로 교통, 숙박, 오락을 제공하는 산업.
개설
해남군은 한반도의 최남서 지역으로 수많은 도서들이 산재하고 있으며, 침강해안으로 심한 굴곡을 이루고 있고 해침에 의해 가파른 해식절벽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해남군에는 땅끝관광지와 우수영 등 많은 관광지와 다양한 축제가 있으며, 역사와 관련된 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지역발전 전략으로서 관광산업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1990년대 국토순례와 문화유산 답사가 인기를 끌고, 2005년 이후에는 도보여행과 트레킹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해남군에는 ‘국토 최남단’, ‘국토순례의 시발지’인 땅끝을 보유하고 있어 연간 만여 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다.
주요 관광 자원과 지역 축제
해남군의 유형 관광자원 중 주요 자연관광자원은 두륜산, 달마산, 주작산, 가학산 등이 있으며, 문화관광자원으로는 해남 대흥사, 미황사, 사적 제167호 해남윤씨 녹우당 일원(海南尹氏綠雨堂一圓), 국가민속문화재 제232호 해남 공재 고택(海南恭齋古宅) 등이 있다. 해양 수변관광자원은 땅끝송호해변, 땅끝 사구미해변, 고천암호 등이 있다. 해남 산악 관광자원의 대표격인 두륜산은 높이 700m로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8개의 높고 낮은 봉우리로 이루어진 해남군의 영봉이다. 정상에서는 완도와 진도를 비롯한 다도해의 해양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두륜산 대흥사 일원(頭輪山大興寺 一圓)은 명승 제66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남군의 대표적인 문화 관광자원인 해남 대흥사는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에 위치한 유서깊은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로 해남, 목포, 영암, 무안, 신안, 진도, 완도 등 8개 시군의 말사 역할을 하고 있다. 13대종사와 13대강사를 배출한 우리나라 31본산의 하나로 조선 후기 불교 문화권의 산실이다. 해남 대흥사는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8호로 지정되었고,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산사 7곳 중 하나이며,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해남의 대표적인 축제로는 명량대첩축제가 있다. 2019년 제12회를 맞이하는 명량대첩축제는 매년 9월 중, 울돌목 일원[해남우수영관광지, 진도녹진관광지]에서 개최된다. 프로그램으로는 해전 재현, 온겨레 강강술래 한마당, 명량대첩 해상 퍼레이드, 미디어파사드 등 야간 프로그램, 조선시대 저잣거리 체험 등이 이루어진다.
관광 현황과 정책적 노력
2017년 12월 현재 해남군 내 등록된 관광숙박업체는 호텔 3개소, 휴양콘도미니엄 1개소가 있다. 해남군 내 등록된 여행업체는 국외 8곳, 국내 11곳이다. 방문객수는 유료 관광지에 106만 2791명이 방문하고 있다. 많은 문화유산, 자연자원이라는 관광자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광시설은 매우 미비하다. 관광지별 관광객은 주로 땅끝 관광지, 두륜산국립공원, 우수영 관광지, 우항리 공룡화석지, 달마산 미황사, 해남윤씨 녹우당 일원 등을 방문하며, 자연자원인 땅끝사구미해변 등에는 관광객이 극히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남군의 경우 지리적 여건의 불리함, 주변 관광시장의 미비함, 이로 인한 관광 인프라 부족 등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와 반대로 깨끗한 자연환경, 유서깊은 문화와 문화유적, 드넓은 농지와 긴 해안선 등 다양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해남군은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한편, 부족한 여건을 감안하여 관광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해남군은 해남문화관광재단을 설립하여 전문적이고 독창적인 해남만의 문화관광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땅끝 관광지는 국내 관광을 넘어 세계적 명소가 될 수 있도록 세계땅끝공원을 조성하고, 우수영 울돌목은 우수영 역사관광촌으로 조성하여, 주민들이 경제효과를 체감할 수 있는 체류하는 관광지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참고문헌
『해남군지』중(해남군지편찬위원회, 2015)
『해남통계연보』(해남군, 2018)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해남군의 교통관광
해남을 중심으로 13번 국도와 18번 국도가 교차하면서 완도에서 광주·목포·강진으로 연결해주고 진도에서 광주·목포·강진으로 이어준다. 최근에는 해남군의 서쪽 및 남쪽 해안지역을 끼고 달리는 813번 지방도가 완전히 확장되었고, 해남만의 만구를 제방으로 막는 대규모 간척공사가 완공되어 화원반도의 영호리에서 금호도를 거쳐 삼호면과 연륙이 된 황도로 이어지는 도로가 개통되면 목포와 광주로의 도로 교통이 더욱 편리해져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게 될 것이다. 도로 총연장은 530km이고 도로포장률은 75.4%에 달한다.
상록수림이 울창한 두륜산도립공원의 대흥사에는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 서산대사를 모신 표충사가 있다. 우수영 앞바다의 울돌목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비(보물 503)가 있으며, 달마산의 기암절벽과 미황사,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단, 한반도의 남쪽 끝인 땅끝의 전망대에 오르면 다도해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송호리해수욕장·금호해수욕장·송평해수욕장은 여름철이면 많은 피서객이 몰려온다. 명산으로는 금강산(481m)·병풍산(313.1m)·흑석산(650.3m)·갈두산(122m) 등이 있다. 또한 군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감성돔·참돔·농어·능성어·도다리 등 다양한 어종의 바다낚시로 유명하다. 바다낚시터로는 송호앞바다 양도와 하도 사이가 있고, 죽굴도, 어령도 해역, 어불도 해역 등이 있다.
갯바위 낚시터로는 송지면 내장리 초소밑, 갈산 왕바위밑 갈산초소밑, 사자봉 토말탑 아래, 갈두석탄 탄광밑, 어란방파제 초소밑, 어불도 뒤쪽, 송호리 초소밑, 송호리 신방파제, 대바위 초소밑, 화산면 송평리 초소밑 등이 있다. 날씨가 좋고, 어장이 잘 갖추어지면 낚시꾼이 주말에 500명 이상이 몰려오기도 하고 휴가철에는 하루 1,000여 명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룬다. 문화재는 2003년 현재 국보 1점, 보물 22점, 사적 4점, 사적 및 명승 1점, 천연기념물 4점, 중요민속자료 2점 등의 국가지정문화재 34점과 기념물 12점, 무형문화재 3점, 유형문화재 9점, 민속자료 1점, 문화재자료 8점 등 도지정문화재 33점이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윤두서상(국보 240)·해남윤씨가전고화첩(보물 481)·해남윤선도유적(사적 432) 등이 있다.
참조항목
윤두서 자화상, 탑산사 동종, 해남윤씨가전 고화첩, 해남윤씨
녹우당 일원, 해남 미황사 응진당, 표충사, 미황사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해남군의 산업
2011년 12월을 기준으로 총경지면적은 346.7㎢, 이 가운데 논이 223.9㎢, 밭이 122.8㎢이다. 농가구는 11,829가구이고, 가구당 경지면적은 2.93ha이다. 이농현상이 두드러져 농업인구가 연평균 0.9%의 감소율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의 경지면적과 최근 개발한 고천암 및 영산강 지구의 간척농지 등을 이용하여 식량생산량은 해마다 늘고 있는 가운데 1997년에는 쌀 생산 종합대책추진 전국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해남만의 만구를 막는 대규모 간척공사가 완공되어 앞으로 더욱 많은 농경지가 확보될 것으로 전망된다. 주요 농작물은 쌀·보리·목화·고구마 등이다. 농업·어업의 겸업가구가 많은 것이 특색이다. 축산사육 현황으로는 2002년을 기준으로 한우 1만 2652마리, 젖소 1,765마리, 돼지 3만 313마리, 닭 29만 8391마리 등이다.
육지 226km, 도서 76km 등 총연장 302km의 해안선과 65개의 유·무인도를 가지고 있는 해남군에는 수산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3,799가구에 3만 2951명으로 총가구의 10.6%를 차지하며, 어선의 규모는 5t 이하가 99.3%를 차지하고 5t 이상은 0.7%에 그쳐 주로 영세한 규모이다. 동력선 2,418척, 무동력선 175척 등 총 2,593척의 어선을 보유하고 있다. 연안의 해역으로는 김·미역·굴·고막의 양식업을 많이 하고 낙지·삼치 등의 수산물도 풍부하다. 상설시장 1개소와 5일시장 9개소가 있다. 광산물로 옥매산의 납석, 백반석, 화천광산의 고령토가 유명하다. 가내공업으로 옥돌공예품의 제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산물로는 참다래·화원요(청자)·궁중술진양주·옥석공예·녹향주·월동배추·땅끝벌꿀·신령버섯 등이 있으며, 해남의 청정해역에서 자라는 무공해 김을 생산하고 있다. 광업, 음식료 및 담배제조업, 비금속광물제조업, 목재 및 나무제품제조업이 발달하였다. 2010년 12월을 기준으로 군 내에는 총 195개의 제조업체가 있으며 음식료업이 171개 업체로 가장 많고, 비금속 11개 업체가 있다. 2011년 12월 현재 옥천에 있는 농공단지는 8만 평을 분양 중이고 23개 업체가 가동 중이다.
참조항목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전남 해남군 8경
고천후조 : 1988년 화산면과 황산면을 잇는 방조제가 조성이 되면서,고천암은 간척사업으로 넓은 농경지로 변모하고, 이 후 새들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해양성기후와 대륙성 기후가 마주치는 점이지대에 위치한 고천암호 50만평 갈대밭은, 생물과 조류에겐 더할나위 없는 좋은 환경이 되주었고, 텃새와 나그네새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고 있다. 천연기념물인 황새. 먹황새 및 국내 최대 갈대밭에서 펼쳐지는 보호조류인 가창오리의 군무와 낙조는 철새탐조객과 사진작가들에게 최고로 손꼽히는 명소다. 주광낙조: 해남의 또다른 땅끝!! 최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화원면 매월리. 수루미등대에 이르는 굽이굽이 해변은 점점히 흩뿌려져 있는 서해의 섬들을 조망할 수 있으며, 서해바다로 떨어지는 낙조는 모든 사물을 황금색으로 변화시키고 만다. 미래의 무릉도원을 꿈 꾸는 154만평의 주광리 오시아노관광지. 바다를 끼고 환상의 라운딩을 할 수 있는 천연골프장. 동계훈련장으로 각광받고 있는 축구경기장은 한국 스포츠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오지에서 역동적인 꿈의지역으로 변모하고 있다. 달마도솔: 나루터와 바닷가 주변에는 역사와 문화가 존재하듯이, 달마산 자락 미황사의 창건설화도 땅끝 마을 포구에서 시작되는데, 전해지길 인도의 한 석선이 사찰을 지을 만한 불구를 담고서 육지에 이르러 달마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서 미황사라 이름하였다 한다. 스님의 가사장삼처럼 펼치고 있는 기암괴석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 아래 살포시 들어앉은 절집에는 하나님의 마누라라 불리는 괘불이 있는데, 매년 10월이면 괘불을 걸고서 야단법석을 벌린 후, 종교와 장르를 넘어선 산사음악회가 펼쳐진다. 땅끝 마을 작은 절에서의 템플스테이...알려진대로 문화의 전령사라고나 해야할까.서해바다로 떨어지는 일품의 낙조, 단청이 벗겨진 고즈넉한 풍경, 그리고 속세를 벗어난 듯 한 천상의 도솔암... 가보시라. 그리하여 자연과의 합일을 이루어 보세요 두륜연사: 백두대간 호남기맥에 불쑥 솟아오른 두륜산. 그 중심에 천년고찰 대흥사가 있다. 매표소에서 시작된 구곡구교의 터널숲 십리길 속에, 100여년 된 유선여관이 첫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곳. 부처의 세계인 피안교를 따라 또 하나의 일주문 앞에 서면, 서산대사로 인해 중흥기를 맞이한 국내 최고의 부도전을 만나게된다. 경내에 들어서면 8개의 봉우리가 대흥사를 빙 둘러 분지를 이루어내고, 일지암을 비롯한 9개의 암자가 꽃잎처럼 본사를 껴안고 있는 곳.호국성지로서 서산대사를 주벽으로 한 표충사와, 대흥사의 백미 천불전의 옥불. 국내 최장 길이 케이블카.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천갤러리의 석학들의 서체와, 철학과 사상을 논했을 초의, 그리고 추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명랑노도: 명량해협(鳴梁海峽)의 진도대교. 해남 문내면 학동과 진도 녹진 사이의 약 2km 협수로로 수심은 약20m이며 넓은 바다에서 좁은 해협으로 들어오는 조류에 따라 급물살을 이룬다. 이순신장군이 감옥에서 풀려나 백의종군하며 임한 첫전투. 정유재란 때 13척의 판옥선으로 적의 130여척을 격파했던 명랑대첩현장. 조수간만의 차가 국내에서 강화해협 다음으로 커서 현재 조력발전소가 건설 중에 있다. 썰물때면 급물살이 암초에 부딪혀 우는 물소리가 뇌성벽력과도 같이 우렁차 20여 리 밖에서도 들릴 정도라 하여 한자어로 풀어 울돌목이라고 한다. 또한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현깃증이 나서 차마 바라볼 수가 없을 정도다. 문내면은 조선 초기에 해군의 전라수영이 설치되었고, 광범위해서 좌우로 나뉘어 우수영이 되었습니다. 133척의 왜선을 맞아 대승을 거둔 3대 승첩지로서 7년여의 전쟁을 종식시키는 명량해전이였습니다. <현재 거북배 유람선이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해전루트를 따라 장군과 휘하의 병사, 그리고 민초들의 호국정신을 계승하고자, 벽파진까지 운항하고 있습니다. 연봉녹우: 덕음산 자락의 연동마을에는 해남윤씨 시조이자 조선시조문학의 대가 고산 윤선도의 종가 녹우당이 있다 우람한 비자나무숲으로 유명함. 다양한 국보와 보물이 보존되어 있는 해남윤씨 고택에서는 금방이라도 옛 선인들의 거문고 가락이 튕겨 질 것 같다. 종가의 역사와 함께 한 500여년 된 은행나무 이파리에서- 시조문학의 대가 고산선생의 시어 속에서-동양을 대표한 공재선생의 자화상 속에서- 그리고 호남 제일의 조선 상류고택 녹우당 주변 대나무 숲, 비자나무 숲에도 따라 아름다운 녹색비가 내립니다. 연꽃의 향기를 맡으며 녹색비를 따라 돌담길을 걸어 보십시오. 해남 팔경 고천암을 찾은 철새들의 군무 미황사의 대웅보전 도솔암을 향해 800미터의 오솔길을 따라가면 1만불상이라고 불리는 달마산의 바위절경을 만난다 하늘 끝에 숨겨진 작디작은 암자인 도솔암에 서면 발아래 해남의 땅끝이 펼쳐진다 등뒤로 바위가 품어주는 도솔암은 아늑하다. 도솔암 아래에는 삼성각이 있어 축대 끝에 매달린 도솔암을 올려다볼 수 있다 오솔길을 따라가다보면 달마산의 절경 사이로 발아래 해남의 땅끝이 펼쳐진다 (사진자료제공 : 해남군청) 우항괴룡: 1992년 한국자원연구소의 지질학 연구조사 중, 황산면 우항리에 서 공룡발자국이 발견되었는데, 세계적인 권위자들로부터 세계 최대, 최고, 최초 등의 다양한 수식어로 인증을 받았답니다. 1994년 금호지구의 방조제가 조성이 되면서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9천만년전의 물갈퀴새 화석, 절지동물 흔적, 익룡의 보행흔적, 커다란 용각류 발자국과 함께, 정교한 퇴적층 군을 형성하고 있으며, 화석지로서 가치뿐만 아니라 지질학사적으로 무수한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2,400여평 공룡박물관은 중생대 백악기시대를 열었습니다. 진품화석 및 다양한 희귀화석이 전시되어, 고생물 화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으며, 국내 최대 규모의 박물관에서, 공룡의 신비와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보길 바랍니다. 육단조범: 백두대간을 타고 숨 가쁘게 달려온 호남기맥의 끝점 갈두산.남쪽 끄트머리이면서 대륙문화의 시작을 동시에 알리는, 동북아의 중심 횃불형상 전망대가 사자봉 정상에 우뚝 솟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최서남단! 2009 네티즌이 선정한 가보고 싶은 국내 명소 땅끝!! 서해와 남해의 물이 만나 하나를 이루고, 끝이 아니라 시작을 알리는 땅! 바로 희망이 시작되는 첫 땅입니다. 국토를 등에 지고 가쁘게 내려와 숨을 돌리면, 다시 국토를 가슴에 안고 시작하는 설렘이 있는 곳입니다. 순례자들의 발길이 땅끝 탑에서 소망을 담고, 끝없이 펼쳐진 다도해에서 새로운 나를 찾아 떠나는 땅.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며, 국토의 끝자락을 끼고 달리는 해안도로에 송호해변. 사구미해변, 땅끝 자연사박물관, 땅끝오토캠핑카, 모노레일이 육단의 아름다움을 더 해주고 있습니다. 자료제공 : 해남군청 2013년 가을 재광해남군향우회(소식지)제작 |
2022-09-03 작성자 명사십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