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안소근 수녀님-
욥기는 1-2장과 42장만 가지고도 욥기의 줄거리는 엮어진다 그래서 처음에 1-2장과 42장만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 중간부분은 삽입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간부분이 없는 욥기는 현실성이 없다. 즉 1-2장에서 42장으로 건너뛰기는 것은 매우 난처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왜 올바르게 살아온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가가? 이것이 욥이 질문이고 세 친구들은 나름대로 대답한다. 욥의 인과응보이거나 아니면 하느님이 욥을 가르치려 하신다라고
38장에 이르러 하느님은 폭풍 속에서(38,1)에서 말씀하십니다. 폭풍은 인간이 뜷고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그저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에 권능에 압도될 뿐입니다. 이 부분의 하느님 말씀은 욥에게 ‘응답또는 대답’하신다고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폭풍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아무리 보아도 그의 질문 내지 항변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욥기의 전반의 문제는 의인의 고통이다. 상선벌악이 주류이지 않은가? 그런데 의로운 욥이 무엇 때문에 하루 아침에 그렇게 큰 고통을 당해야 했는가? 하느님이 의로우시다면 왜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는가? 욥의 항변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은-대답이 아니라 일방적인 하느님의 말씀은 엉뚱하기만 합니다. 우이독경 마이동풍이다. 당신이 의로우시냐고 조물들의 창조적 질서의 주관자가 누구인가 반문한다.
사실은 이것이 욥기가 욥에게 제시하는 대답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창조 능력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당신의 권능에 대해 말씀하신다.
대답은커녕 도리어 반문? 이것이 결정적인 대답이다.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해를 깨워 아침이 되게 할 수 없다면, 내가 산양에게 새끼를 낳을 때를 알려 줄 수 없다면, 세상에는 내가 알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욥기가 말하는 것은, 대답 없는 질문도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고통 그 문제에 대답을 찾을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 신학적으로 아무리 대답을 제시해도 우리는 일곱 아들과 세 딸을 잃음녀 괴로워할 것입니다. 욥처럼 평온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 대답들이 결국은 충분하지 못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욥기를 읽어 봅시다. 1-2장과 (31장도)42장만 있다면 욥은 대단한 성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2장에서 42장으로 갈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3-41장이 삽입 될 때 우리는 욥에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욥은 그의 항거와 질문 그리고 기도에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3-41장의 기도를 통해 욥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대답을 얻지 못할 질문도(기도) 즉 부지(不知)의 지知도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로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태도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그것이 “지각 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욥 38,1)
“불평꾼이 전능하신 분과 논쟁하려는가?”(욥 40,1)
욥은 이러한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을 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욥 40,4)
욥의 기도는, 하느님께 부르짖어 설명을 듣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대답 없음을 받아 들이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기도도 이러한 경험을 한다는 것입니다. 욥이 이런 기도를 통해 인간의 머리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깨달았듯이,우리의 기도도 때로는 그저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대답 없음을 받아 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전설 같은 성인 욥이 이야기보다 끊임없이 항변하는 욥의 기도가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