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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년 전, 요즈음의 날씨보다 더 뜨거운 함성이 우리 강산을 뒤덮은 일이 있었지요. 일제의 강점아래 우리의 삶을 유린당하며 치욕의 36년을 보내다가 8월 15일 벅찬 가슴으로 광복을 맞았으니 바로 내일이 그 54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라의 소중함이라든지 주권의 가치를 입에 올리지만 사실 현장세대가 아니면 그 아픔을 온전히 소화할 수가 없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역사의 기록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그 상흔을 짐작하고 숙연히 고개 숙여 봅니다.
그리고 억압의 사슬에서 해방되고, 뭉쳐진 국민들의 힘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몸을 바친 수많은 애국 선열들의 얼을 우리는 기억하고, 사위어 가는 국가의 운명을 붙들고 통곡하다 불의에 항거하며 목숨을 던진 우국충정의 깊은 뜻을 헤아립니다.
이분들 가운데 우리 울산에서도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계셨는데, 전국적으로 조직된 최초의 무장독립단체인 광복군 총사령으로 우리의 기상을 떨치신 고헌 박상진 의사를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판사시험에 합격해 보장된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조국 광복을 위해 한결같은 마음으로 가시밭길을 걸은 조국광복의 큰 횃불 박상진 의사! 그러나 서른 여덟 젊은 나이에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시며 남긴 절명시는 오늘날 흩어지는 우리의 가슴에 회초리가 되어 들려 옵니다.
“다시 태어나기도 어려운 이 세상에 다행히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한 가지 일도 이루지 못하고 가니 청산이 비웃고 녹수가 빈정거리는구나” 지난 8월 11일은 박상진 의사의 순국 78주기였습니다. 우리는 의사께서 남기신 이 한편의 마지막 시에서 그 분의 심정을 헤아리고 새삼 옷깃을 여며 봅니다.
1884년 12월 6일, 울산 농소면 송정리의 대갓집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정3품의 당상관 벼슬인 부제학 박시규와 부인 이석태 사이의 첫 아들이 출생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 아기는 출생한지 100일만에 경주 녹동에 있는 그의 큰아버지인 교리 박시룡의 양아들로 출계하여 큰어머니인 조동원 부인의 품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기질이 곧고 옹골찼으며 한문을 수학하여 시문을 짓자 신동이라 불리기도 하였답니다.
하루는 이 아이의 집 앞에서 한 거지노파가 동냥을 받아 가면서 중얼거립니다. “이렇게 큰 대갓집에서 돌이 반이나 섞인 나락을 주는감...” 이 소리를 들은 아이는 노파의 남루한 치맛자락을 끌고 집으로 도로 들어가서 불쌍한 거지할머니에게 돌나락을 줄 수 있느냐고 어머니에게 조리 있게 말씀드립니다. 이에 어머니는 아이의 말이 너무도 당찬지라 들어가 깨끗한 벼 한말을 노파에게 건네니 이것을 받아간 노파는 가는 곳마다 자랑이 대단하였겠지요.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 그 아이는 분명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떡잎부터 당찬 아이 이이가 바로 박상진이었습니다.
박상진의 가계는 밀양박씨로 누대에 걸쳐 벼슬을 한 문인의 집안으로 8대조인 창우공 때 영천에서 울산으로 이주해 왔다고 합니다. 이 집안은 이후에도 계속 벼슬길에 나아갔고, 당시 울산에는 문한이 많지 않았던 관계로 울산의 대지주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부를 축적해나갔는데, 조부인 북부도사 용복 때에는 7천 석에 이르는 재산을 이루었고, 부친대에도 가산은 계속 늘어만 갔다고 하니 박상진은 ‘유학자 집안이자 대지주의 자제’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자, 이만하면 그저 호사스럽게 생활할 수도 있으련만, 그의 가슴에는 저물어 가는 조정과 바람 앞에 놓인 등불 같은 나라의 운명에 피끓는 울분을 감추지 못하였나 봅니다. 한학을 공부하던 13세 소년 박상진에게 오히려 울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태백산 호랑이의 별명을 갖고 있는 여섯 살 위인 신돌석 소년 의병장이 더 선망의 대상이었으니까요.
이 신돌석 의병장과의 만남은 이외로 빨리 이루어 졌습니다. 1897년 고종의 밀지에 의해 의병을 해산한 신돌석이 울산 송정에서 2년 가까이 체류하였는데, 이를 안 박상진은 녹동에서 한걸음에 달려와 이내 의기투합하여 의형제를 맺었으니 신돌석 20세, 박상진 14세의 나이였습니다.
신돌석과의 만남은 훗날 박상진이 투쟁적 기질로 자라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이 무렵 또 한 분의 의병장 왕산 허위선생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대항하여 이은찬 등과 의병을 일으켜 김천 일대에서 활약하였는데, 이 분 역시 고종의 해산 종용에 자진 해산하여 내일을 벼르고 있었겠지요.
박상진은 15살 때 두 살 위인 최영백을 부인으로 맞아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뒷날 서울 평리원 수석판사 그러니까 오늘날 대법원장을 지낸 허위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정치, 병학, 의열사의 전기 등을 탐독하였는데, 이때 허위의 가르침이 박상진 의사에게는 항일운동을 하게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그는 계속 학문에 정진하는 한편 항일 사상을 구체화시키고 있다가 22살이 되던 1905년 전문학교 과정인 양정의숙에 입학하여 법률, 경제, 국제법 등 신학문을 공부하였는데, 이것은 유학자인 스승이 신학문을 접하면서 애국계몽사상을 갖게되자, 그 역시 국권은 무력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고, 그 첩경이 신학문에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지요.
그는 이듬해 녹동에 있던 가족을 서울로 이사시켰는데, 이것은 부친이 서울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기도 했지만 그 속내는 부친의 마음을 뜻하는 바대로 움직이고자 했던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박상진이 스승으로부터 받은 의식이 절대적이었음은 스승과의 관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24살 때 스승 허위가 경기, 황해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부친을 설득하여 거금 5만원을 군사자금으로 제공하는 한편 그는 고종 양위반대 데모에서 주동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스승이 체포되어 경성감옥에서 순국하였지만 의병장의 문상을 엄격히 단속하는 서슬에 아무도 접근을 하지 못하였지만 그는 과감히 스승의 시신을 거두어 스승의 고향인 경북 선산군에 옮겨 장사 지냈습니다. 물론 일체의 경비를 부담했고, 이곳에 여막을 지은 다음 제자로서 1년간 상주의 예를 다했다는 점만 보아도 스승과의 관계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지요. 허위의 가족은 밀고자에 의해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허위의 형 허혁선생이 가족을 모두 인솔하여 만주로 망명해 버리고 말았으므로 장례를 치를 가족마저 없었답니다.
스승의 장례와 여막생활을 마친 박상진은 26살이 되던 1909년 제1회 사법시험에 응시하여 7명의 합격자 명단 가운데 맨 앞줄에 그 이름을 올립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평양재판소 판사로 발령을 받았지만 나라의 꼴이 위급함을 보고 취임을 거부하는데요, 그의 마음을 바꾸게 한 결정적인 동기는 작년 사법고시를 본 며칠 후인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은데다, 이 사건을 다루는 일본의 재판과정을 지켜보며 일본인 법관들이 좌지우지하는 당시의 사법제도에 환멸을 느껴 보장된 앞길을 헌신짝처럼 버리므로 일제의 식민지 관리는 되지 않겠다는 강렬한 민족의식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에 박상진은 전 가족을 녹동 옛집으로 내려보낸 다음 “나라 잃은 국민이 공부는 더해서 무엇하랴? 오직 전 생명을 국가에 바치노라”고 하며 곧바로 만주로 떠나 안중근이 거사한 하얼빈 역과 안의사가 수감되어있는 봉천의 감옥 주변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면서 독립운동의 의지를 불태웠다고 합니다.
자, 여기다가 그 해 8월 22일 국치의 한일합방조약이 조인되면서 일제의 무단통치가 시작되었지요. 이런 시기에 그는 만주지역에서 스승 허위의 중형 허성산을 비롯한 우재룡, 이상용, 손일민 등 혁명지사들을 만나 자금을 전하면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관학교 설립을 논의하고 실행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는 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국제정세를 살펴보니 중국에서는 작년 신해년에 혁명이 일어났고, 이들의 혁명에 많은 감명을 받은 박상진은 그들의 행동강령을 독립운동에 접목시키기로 작심합니다.
그것은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의 4대 강령이었는데, 이 강령은 바로 박상진 의사의 행동지침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는 귀국길에 서상일 등과 함께 돌아와 대구의 오늘날 약전시장 골목 어귀쯤에 ‘상덕태상회’라는 곡물 무역상을 설립하였는데, 이 상덕태상회가 바로 우리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 상회지 자본금의 규모라던가 제반 여건이 여느 회사를 능가하는 규모였는데, 이 자본은 처음 고향의 전답 모두인 900두락을 저당 잡혀 10만원을 마련하지만 구상하고 있는 규모에는 턱없이 모자라는지라 전부터 뜻이 맞았던 동지들인 평양의 김덕기와 전주의 오혁태를 참여시켜 총 자본금 24만원으로 설립했는데, 상회의 이름은 박상진의 ‘상’자와 ‘덕’은 김덕기의 이름에서, ‘태’는 오혁태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와 지은 이름이었습니다.
수년 전부터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펴오던 박상진 의사는 서른 한 살이 되던 1914년 스승 허위의 아들 허형과 임병찬이 중심이 되었던 ‘대한독립의군부’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이들이 모두 대구의 상덕태상회에를 중심으로 연락하더니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2백 수십명이 모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므로 명실상부한 전국규모의 독립단체가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채기중 등이 중심이 되었던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 중앙본부는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여기서 박상진의사는 광복회 총사령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들은 여기서 「우리들은 대한의 독립 및 광복을 위하여 우리들의 생명을 희생함은 물론 우리들이 일생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때에는 자자손손이 계승하여 원수인 일본을 완전히 축출하고 국권을 되찾을 때까지 절대 불변하고 일심 협력할 것을 천지신명께 고함」이라고 피로서 맹세하는 한편 구체적인 투쟁방법도 채택하고 하나하나 실천해 나갔는데,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부호들의 의연금과 일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하고, 남북만주에 군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전사를 양성하는 한편 종래의 의병 및 한말에 해산된 군인들을 모으고 만주 이주민들을 훈련시키며, 중국과 러시아제국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또 본회의 군사행동 및 집회왕래 등 일체 연락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에 두고 한국과 만주의 각 요지, 북경과 상해 등에 그 지점을 두어 연락기관으로 하는 한편, 일본 고관과 한인 반역자를 수시, 수처에서 처단하는 행형부를 두고, 무력이 완비 되는대로 일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곧 유명한 노백린, 김좌진, 신현대같은 분들이 새로이 참가하므로 전열과 사기는 막강하였는데, 총사령 박상진의 휘하에 김좌진 장군이 부사령에 임명되고, 재무부, 선전부의 부서와 각도에 이르기까지 지부장을 두면서 대대적인 항일 운동이 펼쳐졌습니다.
이 항일운동의 성과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대단하였습니다만, 노백린 등 동지 10명을 상하이로 보내고, 김좌진과 박성태는 만주로 출발하여 눈부신 활약을 하였는데, 박상진 총사령은 전국의 부호들에게 국권회복운동의 군자금 제공 통고서를 광복회 이름으로 내는 한편 경주 광명리에서 일제가 불법 징수한 경주, 영일, 영덕 3개군의 세금 8,700원을 탈취하여 무기를 구입하기도 합니다. 또 스승 허위가 살아 계셨을 때 나라가 어려우면 지체없이 20만원을 내어놓겠다고 약속하고 벼슬을 산 칠곡의 부호 장승원이 자금의 희사는 고사하고 오히려 이들을 밀고하므로 광복단의 이름으로 처단하므로 친일 부호들을 각성시키기도 했습니다만 이 사이 대구에서 일순 검거되어 6개월의 징역형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지요.
상황이 이러하니 이제 왜경은 그를 다시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는데, 그만 생모가 돌아가셨다는 기별을 받습니다. 전통적인 양반가문에서 자란 박상진 의사는 효는 충의 근본이라는 사고에 한걸음에 녹동 집으로 달려왔다가 그만 빈청에서 일경에게 체포되고 맙니다.
경주수비대에 끌려간 박상진 의사는 곧바로 충남경찰서로 넘겨졌고, 이제 그 동안 싸워왔던 일제보다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동지 천 여명이 관련 체포되었으나 의사께서 총책임을 안고 일체의 자백을 하지 않으므로 서울과 대구로 이감되면서 갖은 악행을 받았습니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문이 계속되다가 사형 판결을 받고 1921년 8월 11일 38세의 일기로 대구감옥에서 동지 김한종과 함께 순국하였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분의 행적이 왜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여기에는 친일 행위를 청산하지 못한 얼룩진 현대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광복단에 의해 처단된 친일 부호 장승원의 아들이 광복 후 수도경찰청장에 내무장관까지 지내면서 광복회를 재건하려한다는 말을 듣고 “안돼! 그 자들은 우리 아버지를 살해한 집단이다.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밟아 버렷!”하며 펄쩍 뛰었다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그가 박 의사의 기록을 보이는 대로 없애버렸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현재 북구 송정동에 있는 박상진 의사의 생가를 지방문화재로 지정은 하였지만, 다른 사람이 매입하여 들어와 살면서 재산권 문제를 둘러싼 문화재 지정 제외를 고집하고 있고, 박의사 이후 집안은 몰락하였지만 그의 후손들에 대한 대접이 전무한 현실이고 보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경주 내남면 노곡리의 산소는 물론 학성공원의 추모비, 북정공원의 동상 앞에 변변히 한 송이 꽃도 올리지 않는 우리들이니 그 부끄러움은 더합니다. 광복54주년에...
1999.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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