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아8_5)
서 론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8장은 성도의 탄식과(8:1~4) 영원한 사랑을(8:5~14)노래하고 있습니다.
월치만리는 8:5~14까지는 주님의 재림이라는 주제 하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필자 역시 그 해석을 따르면서 설명하고저 합니다. 성도는 이 땅위에서 완전해 질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과 지식과(엡4:13) 그리고 거룩도(딤전4:5) 완전할 수 없고 더군다나 주님을 향한 사랑도 부족하기가 이를데가 없습니다. 성도는 늘 탄식합니다.
시119:20에 “주의 율례를 항상 사모하므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이와 같이 자기의 부족한 것을 보고 늘 상심이 됩니다. 이것을 저는 거룩한 상심, 거룩한 갈증이라고 풀이하고 싶습니다(시42:1)
부족한 것의 깊은 자각으로 완전하신 주를 더 사모하게 됩니다. 그것이 재림에 대한 대망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완전하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3:2).
고전13:11~12에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5절에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자가 누구인고”
히브리원문의 어순으로 고쳐 놓는다면,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자가 누구인고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여”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체험상으로 보아 히브리 원문을 그대로 따라서 해석하기로 합니다.
4~5절 사이에 급급히 변화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4절은 성도의 잠을 묘사하고 있는데 갑자기 장면을 바꾸어서 거친들로 변하고 있습니다. 신앙경험상 4절은 성도의 탄식 중에서 주님이 주시는 영적 휴식을 의미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거친 세상에서 이제 곧 다가오는 대 환란을 목전에 둔 성도는 전투적인 신앙의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잠자리는 돌연히 거친 들로 변하는 감이 있습니다. 거친 들에 대해서는 3:6에서 방황하는 영혼의 모습으로 설명한 바가 있으나 본장에는 그 뜻을 좀 더 깊이하고 있습니다.
3:6에서는 거친 들이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성도가 주님을 만나서 주님과 영교하던 한적한 곳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장의 거친 들은 이제 재림을 앞둔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말세의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친 들은 세상이요, 환란과 핍박이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그 환란에서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하나님 앞으로 달려오는 장하고도 늠늠한 모습을 보고 외치는 주님의 탄성입니다.
계7장을 읽어보면 많은 무리가 흰옷을 입고 종려가지를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을 봅니다. 이때 24장로 중에 한 장로가 “이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고 사도 요한에게 물어왔습니다. 요한은 “그것은 당신이 알리이다”하였습니다.
장로는 묻고 답하기를 7:14에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란에서 나은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을 이긴 성도들이 재림의 주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모습에 주님은 기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승리할 수 있는 신앙의 잠재력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그것은 자기의 신념으로부터가 아니라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데서 부터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일5:4에 “이제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2.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라고 하였음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요일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피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는 이 땅위에 사는동안 두 가지 면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과 육이 아울러 함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서 건강도 얻고 물질도 얻고 명예도 얻어서 출세하게 됩니다. 그것은 무한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축복입니다.
둘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속죄의 사랑을 힘입게 됩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경건치 않을 때,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화목제물이 되어주셨으니(롬5:6~11). 그 사랑 참으로 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받은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리지 않고 항상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보답하는 일입니다.
은혜를 받고 저버리는 것은 죄중에 가장 큰 죄이며 지옥에 갈 죄 중에도 가장 큰 죄가 됩니다.
단테는 그의 저서 〈신곡〉 지옥편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지옥 밑바닥에는 은혜를 저버린 가롯유다와 부루터스와 망언의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수양의 종교가 아닙니다. 도를 깨달아서 차근히 쌓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은혜로 시작했다가 그 과정도 은혜, 마침도 은혜로서 이루어져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승리의 비결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성도는 차원높은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거친 들에서 신앙의 승리자가 되는 그 저력은 오직 사랑하는 주님을 의지하는데서만 있었던 것입니다. 거듭 말해서 그는 땅 위에서 사는동안 주님이 은혜와 사랑으로 축복하셔서 지식이나 물질이나 명예를 얻어 누리지만 결코 그것을 의지하지 아니했습니다. 주님만 의지하였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총만 의지했습니다.
시63:8에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하였으며
사26:3~4에는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이와 같이 이 성숙한 여인은 그 성숙의 밀도가 주를 전폭으로 의지하는데 있었으며 그것이 대 환란을 이기는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보내시면서 핍박을 당하고 심지어 법관이나 임금 앞에 설때도 도무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너희를 넘겨줄 때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19~20) 하신 말씀을 통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받기 때문입니다.
3. 그곳 사과나무 아래서
5하절에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辛苦)한, 너를 낳은자가 애쓴 그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성도가 어떻게 구원 받았나를 되새기며 회상시키는 장면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해산과 깨우침에 있습니다.
① 해산
해산은 어머니 방(교회, 성령)에서 이루어졌으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창35:16에 라헬이 베냐민을 출산할 때 산고가 심해 라헬은 죽고 베냐민만 살아서 출생한 것입니다. 어머니의 귀중한 생명과 베냐민의 생명과 바꾼 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영혼의 산고입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는 새 생명을 얻게 되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고기를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정하시면서 하신 말씀에 먹을 수 있는 고기라도 피는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창9:4에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되는 피체 먹지 말것이니라”
레17:10~11에는 “무릇 이스라엘 집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 끊어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범죄한 영혼은 죽으리라”(겔18:4)하셨습니다. 이는 성경의 법칙입니다. 피는 피로써, 생명은 생명으로써 대신 갚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영혼을 속하고자 하려면 자기가 죽어 피를 홀리던지 살고 싶으면 다른 사람의 피를 흘려야 합니다.
히9:22에 “피 흘림이 없이는 사유함이 없느니라”
이렇게 해서 범죄한 우리 영혼을 속하고 살리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대신 죽으시고 속량하셔서 새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②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에덴동산에는 두종의 나무가 있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였습니다.
창2:9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칼빈의 해석을 따르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더라면 영생할 뻔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고쳐 말해서 조상이 생명나무그늘 아래 머물고 그 생명나무 열매로 족하게 여겼더라면 인간에게는 불행이 없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마귀의 유혹으로 선악을 아는 나무그늘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밀톤의 〈실락원〉 시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인류최초의 불순종이여!
그 금단의 과실을 따 먹음이여!
그 치명적인 맛이
인류에게 있어서 에덴동산의 상실과 함께
모든 불행과 죽음이 들어왔도다
한 뉘 위대한 분이 오셔서
우리를 회복하시고
복된 자리를 회복해 줄 때까지
하늘의 MUSE신이여! 노래를 부릅시다”
저주의 나무 아래 머물러 조상은 물론 그 후손들도 항상 그 열매를 따먹고 죄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저주 받은 땅에 살고 있습니다.(사9:1~2, 마4:15~16) 그러나 그리스도의 산고로 새 생명을 얻은 성도를 생명나무그늘 아래로 인도하여 주시고 그 열매를 따먹게 하셨습니다.
아가서에서는 그 생명의 나무를 사과나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사과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영생을 얻기에 족한 생명의 열매를 보유하고 계시며 그 열매를 먹는 자는 영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11:25~26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6:53~54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술람미 여인이 세상을 이기고 환란과 핍박 중에서도 굴하지 않고 천성을 향해서 달려갈 수 있음은 능력의 팔에 의지하므로 새 생명을 얻었고 새 능력을 얻어서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핍지 아니하겠고 걸어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