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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15:16~18(926) 행복한 가정의 기준 2022. 5. 15.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세계보건기구(WHO)는 ‘팬데믹(pandemic-감염병 세계적유행)’과 ‘인포데믹(Infodemic)’주의보를 세계에 내렸습니다.
코로나 사태이후로 팬데믹이란 단어를 많이 들어 보셨죠? 팬데믹이 무슨 뜻인가 하면, 팬데믹은 ‘어떤 감염병이 세계적인 대 유행을 할 때에 이런 현상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생하고 거의 3년 동안 바이러스가 전세계 대 유행을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경제가 무너지고, 사람과 사람간의 교류가 끊어져 버린 모습을 두고 ‘코로나 팬데믹’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인포데믹’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팬데믹이란 단어는 귀에 익지만, 인포데믹이라는 말은 낯선 단어입니다. 인포데믹은 ‘정보(information)와 전염병(epidemic)의 두단어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신조어입니다.
인포데믹이란 단어는 어떤 때에 사용할까요? 위험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온갖 헛된 소문과 루머들이 스마트폰 또는 인터넷을 통해 세상에 퍼져 나갑니다. 이런 과장되고 헛된 소문 때문에 사회, 정치, 경제에 위기가 발생합니다. 이럴 때에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인포데믹입니다. 특히 코로나 전염병의 팬데믹으로 인해 사람들은 쉽게 자극적인 정보에 귀를 기울이면서 쉽게 동요되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1930년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휩쓴 경제 대공황 당시 파탄이 가중된 원인도 악성루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경제공황이 닥쳐온다. 증권이 휴지가 된다. 은행에 돈이 떨어져 예금을 찾을 수 없다”라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은행으로 몰려가 예금을 찾아서 집에 보고나합니다. 결국 은행마다 잔고가 바닥이 나면서 건실한 회사들마저 연쇄적 도산을 일으킵니다. 결국 통제 할 수 없는 경제 대공황으로 빠지게 되었다는 연구자료가 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90여년 전 휴대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었던 미국에서만 발생한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지난 주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중국 상하이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사진을 보세요. 하얀 옷을 입은 수백명의 사람들이 담을 넘어서 도망치는 모습이 촬영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애플 제품을 생산하는 콴타 컴퓨터의 상하이 공장입니다. 500여명이 넘는 직원이 안전 요원들을 밀치고담을 넘어 탈출하는 모습입니다.
왜 이런 무지성적인 집단행동이 발생한 것인가요? 이날 소동은 ‘공장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해 노동자들이 공장 안에 그대로 갇힐 수 있다’는 루머가 퍼지면서 벌어졌습니다. 지금 상하이는 도시봉쇄로 인하여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온다고 합니다. 코로나 의심환자 한명이 발생하면, 중국 당국은 확산을 막는다고 아파트 전체의 문을 닫아 잠궈 버립니다. 이런 몰상식적인 일들을 본 사람들이, 회사 문을 잠궈 버리기 전에 회사를 야밤에 탈출한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앞날에 대한 미래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미래에 대한 두려움입니까? 질병에 대한 두려움입니까? 실패에 대한 두려움입니까? 실직에 대한 두려움입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까?
어떻게 처신하여야 합니까?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처럼 무서워하며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든든히 믿는 믿음 안에서 참된 행복이 찾아오는 법입니다. 집에 돈을 쌓아 놓는다고 해서 가정의 행복이 만들어지는 법이 아닙니다.
즉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외적 조건이 좋아도 심령이 평안하지 못하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불안하면 좋은 저택에 살고 권력을 가졌다고 해도, 비참하고 불행한 가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아울러 참된 행복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온전히 설 수 있습니다. 돈으로 집은 살 수 있어도 가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어도 행복한 잠자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돈을 가지고 근사한 시간을 보낼 수는 있어도, 평화로움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동료는 구할 수 있어도 진정한 친구는 얻을 수 없습니다.
본문은 즐거운 가정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만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나갈까요? 본문 말씀을 통해 지혜를 배우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첫 번째 출발점입니다.
16절,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온전히 아시나요? 쉽게 풀이하면 이런 뜻입니다. “가난하지만 여호와를 온전히 섬기는 것이 부유하면서도 늘 번민 속에 사는 것보다 낫다.”
잠언서 기자는 가난하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과 부자로 살면서도 번뇌에 둘러싸인 삶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비록 가난이 불편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의 조건이 충족되면, 부요함 속에 번뇌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하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본문에서 ‘가산이 적다’는 말은 ‘재산이 적다. 가난하다’는 것으로만 해석하면 본문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집에 대형 금고를 두고 수천만원 현찰을 쌓아 두고서도 마음이 한없이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풀어 주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반면 비교할 만 한 물질이나 자랑거리가 없어도 마음이 넉넉한 부자가 있습니다. 나누어 주고 베풀어 주고, 다른 사람의 어려운 형편을 내 처지인 마냥 받아 들이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은 부자인 분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적 상태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는 물질에 대한 신앙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돈이 필요 없다고 말함이 아닙니다. 돈과 재산이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기준이 무너지면 믿음 안에서 행복한 가정이 되지 못합니다.
2차 대전 당시 영국 화물선이 중대한 임무를 띠고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서양을 횡단하는 것은 매우 큰 위험이 동반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대서양에는 뛰어난 독일군함들이 활동하면서 수많은 연합군 군함과 화물선을 격침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발을 앞둔 선장에게 지시가 떨어집니다. “무조건 항로를 따라 앞으로 갈 것. 문제가 생기면 무전으로 연락하여 지시를 받을 것. 절대로 선장 개인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지 말 것.”
기선은 미국을 향해 떠납니다. 며칠 뒤, 선장은 독일 군함이 가까이 있다는 무선연락을 받습니다. “적의 군함이 있다는 보고 접수. 항로 수정 요청, 급히 지시 바람.” 곧 회신이 왔습니다. “두려워 말고 정해진 계속 항로를 따라 전진할 것.” 간단한 지시에 선장은 매우 불안에 떨게 됩니다. 하지만 명령이 있으니 앞으로만 나아갑니다. 무사히 미국 뉴욕 항구에 입항하는 순간, 배 뒤 저 멀리서 잠수함 한 척이 떠오르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선장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기선을 보호하면서 미군 잠수함이 계속 따라온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선장은 자신의 두려움이 쓸데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기선을 운전하는 배의 선장과 같은 모습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아직 겪지도 않는 두려움과 위험 때문에 하나님의 손을 놓아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화물선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잠수함의 보호를 받으며 대서양을 안전하게 건넜듯이, 우리도 먼저 가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산의 많고 적음은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의 기준입니다. 재산이 많고 적을 수도 있고, 나에게 건강이 좋을 때도 있고 좋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세상일이란 내 마음대로, 그리고 내 생각대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지 않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격랑의 파도 속에 던져 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가산의 많고 적음 때문에 나의 믿음이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총으로 세상의 세파를 너끈하게 승리하시길 소망합니다.
가산의 많고 적음에 흔들리지 않는 성도,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경외함으로 믿음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길 원하는 성도라면, 어떤 행동이 뒤따라야 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본문 17절에 등장합니다.
17절 보세요.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 보다 나으니라.”
두 단어가 서로 교차되면서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두 문장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면 훨씬 이해가 쉬운 내용입니다. 본문에 근거하여 제가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둘 중에 어떤 모습을 선택하실 건가요?
1)채소를 먹더라도 서로 사랑하는 가정.
2)진수성찬을 먹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가정.
이 질문이야 말로 정말로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어떤 분은 그리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저는 진수성찬을 먹으면서 서로 사랑하는 가정을 원합니다.” 저도 이 판단에 적극 동의합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가족의 행복 또한 누리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한결 같은 소망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런 유토피아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부귀영화와 가산을 믿음보다 먼저 챙기느라, 무너지고 망가지는 가정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서로 사랑하는 것(웨아하바)’인데 “서로 아끼며 사랑하다 또는 서로 아끼며 돌보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가난하게 산다고 부부의 금실이 좋고, 가족 간에 유대가 돈독하고 행복하다는 단순한 논리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전제 되는 것이 바로 ‘믿음 안에서’라는 단어입니다. ‘믿음 안에서라면 가난하더라도 서로 아끼며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그 가정은 진수성찬을 먹지만 서로 미워하는 가정이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물질의 소유 여부에 있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외형적인 부요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가족 전체가 하나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정의 행복은 사랑의 기초가 세워질 때 이뤄집니다. 값비싼 고기를 먹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평범한 채소를 먹으면서 서로 사랑하는 가정이 즐거운 가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물질에 대한 사랑의 우월성을 말하며, 가족끼리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돈이 없다고 불평하기 이전에, 가정 안에 온전한 믿음이 뿌리 내리고 있는지를 먼저 점검하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가정에 물질을 더하심으로 그 가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이 되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2. 분노를 통제할 줄 아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18절,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18절의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귀담아 들어야 하는 교훈적인 말씀입니다. 어떤 내용이에요? 분노를 쉽게 내는 사람은 불필요한 다툼을 더 만드는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분노하는 것과 화 내는 것을 더디 하는 사람은 불필요한 싸움과 다툼을 억제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을 잘 보세요. 분노하지 말라고 했나요? 화를 내지 말라고 했나요?
아니지요. ‘노하기를 더디 하는’이라는 전제 조건을 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격 중에 화를 내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성격입니다. 분노를 삭히지 못하고 가슴 안에다 담아 두면서 더 큰 울화병 같은 병으로 키우는 분이 있습니다.
적당한 때에, 그리고 지혜롭게 분노를 드러내고 화를 조절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노하지 말라가 아니고, 노를 더디 하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갈등과 싸움은 ‘조급한 성냄과 참지 못하는 분노에서 유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를 쉽게 내지 않으면서 유순한 말을 하게 되면, 다툼으로 이어지는 분위기에서도 다투지 않고 화해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분노를 더디 하여 다툼을 멈추게 하는 말이 나오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내가 던지는 말이 상대방의 분노를 일으키는 도구가 아니라, 상대방의 평안을 만들어내는 도구가 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가정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녀들 앞에서 노하기를 더디 하는 모습에서 출발합니다. 이 점을 절대 잊지 맙시다.
‘콩가루 집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안에 다툼이 끊이질 않고 가족들이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해서 엉망진창이 된 집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왜 엉망진창이 된 집안을 ‘콩가루 집안’이라고 표현할까요?
쌀가루나 밀가루 같은 다른 곡물가루는 물을 넣고 반죽을 하면, 잘 뭉쳐져서 떡을 만들기도 하고 빵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콩가루는 성질이 조금 다릅니다. 콩가루에 물을 넣고 아무리 반죽을 해도 뭉쳐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곡물 반죽이 서로 잘 붙는 것을 막기 위해 콩가루를 묻히기도 합니다. 쫀득 쫀득하여 잘 달라 붙는 인절미 아시죠? 찹쌀로 떡을 만들어 놓으면 서로 잘 붙습니다. 인절미가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곁에다 무엇을 묻히나요? 바로 콩가루입니다. 찹쌀떡에 콩가루를 묻혀 놓으면 서로 붙지 않습니다.
콩가루는 하나가 되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서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듭니다. 이런 콩가루의 성질을 알아차린 현명하신 우리 조상님들은 ‘가족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제멋대로 사는 집을 콩가루 집안’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콩가루 집안은 가족들 간에 서로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어서 늘 다툼의 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가정들 중에서도 콩가루 집안이 종종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가족 구성원들이 상대방에게 쉽게 화를 내면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기 때문입니다. 상처 받는 상대방은 배려하지 않은 체, 자신의 기분에서만 고함을 지릅니다. 심지어 분노하는 단계를 넘어서 가정 폭력으로 이어지는 신앙인 가정도 상당수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법적으로만 부부일 뿐이며 부모와 자식일 뿐, 사랑도 애정도 대화도 없이 제각기 인생을 살아가는 가정인가요? 저마다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가정을 돌보지 않고, 돈과 성공에만 매달려 사는 가정이 되어서 안 됩니다.
부디 믿음 안에서 즐겁고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물질이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하며, 배려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분과 노를 더디 하여 즐거운 가정으로 세워 나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