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즈라·느헤미야기
1.성립
이 두 책의 편집 연도는 역대기-에즈라기-느헤미야기를 함께 고려해야 해서 정확히 알 수 없다. 신앙에 대한 소견과 사상, 표현, 저자의 출신 환경 등을 고려할 때, 기원전 4세기 말엽에서 3세기 중엽 사이에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백주간 주전 330~250년) 그러나 이 시기는 이 두 책의 최종 편집에만 해당될 뿐, 거기에 사용된 문헌 사료들은 분명히 그 훨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에즈라·느헤미야기는 본디 ‘에즈라’라의 이름으로 한 권 책이었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여전히 한 권이다. 15세기 이후 대중 라틴 말 성경의 영향으로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로 두 권으로 나뉜다.
우선 구약 성경의 그리스 말 옛 번역본(70인 역본)에는, 이 두 책이 하나로 묶여 번역되었다. 또한 이 번역본에는 히브리 말 성경의 에즈라기와는 상당히 다른) 또 하나의 에즈라기가 들어 있다. 이 그리스 말 에즈라기는 제1 에즈라기라 불리고, 히브리 말의 에즈라-느헤미야기가 번역된 책은 제2 에즈라기라 불린다. 그리스 말 에즈라기에는 역대기와 에즈라기의 몇몇 구절, 예컨대 다리우스의 세 시동의 이야기와 같은 외경적인 설화들도 들어 있다.
라틴 말 번역에는 네 개의 에즈라기가 알려져 있다. 첫째는 히브리 말 에즈라기, 둘째는 히브리 말 느헤미야기, 셋째는 그리스 말 에즈라기에 해당되는 책이다(그래서 오늘날에는 이 그리스 말 에즈라기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때로는 제1 에즈라기로, 때로는 제3 에즈라기로 표기되는데, 우리는 후자를 택하기로 한다). 넷째는 에즈라를 저자로 내세우면서도 구약 성경의 에즈라-느헤미야기와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후대의 묵시록이다. 대부분의 현대 성경 번역본에는 히브리 말로 된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만 포함되고, 경전에 든 적이 없는 그리스 말 에즈라기와 ‘에즈라의 묵시록’은 제외시켰다.
문학적 자료>
*오래된 문헌 사용: 히브리 말로 된 공식 문서(에즈 2;느헤 7장;10,3-30;11,3-36;12,1-26과 같은 명단과 통계), 아람 말로 된 공식 문서(에즈 4,9-6,18;7,12-26와 같은 행정 서신과 공식 명령서가 있다.)
-에즈라 회고록(에즈 7-10;느헤 8-9). 여기에는 에즈 7,27-9,15와 같은 1인칭으로 쓰인 부분과 에즈 7,1-10;10장‘느헤 8-9장처럼 3인칭으로 쓰인 부분들이 있다.
-느헤미야 회고록(느헤 1-7장 12,31-13,31) 에즈라의 대부분은 히브리 말로 쓰여졌지만 어떤 부분은 아람 말로 쓰인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에즈 4,8-6,18과 7,12-26) 이러한 언어의 이중성도 이 책에 여러 가지 문헌이 이용되었음을 드러낸다.
2. 저자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신앙에 대한 소견과 사상 표현들로 보아 역대기 상·하에 이어지는 경서로 세 책이 모두 동일 인물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주장하는 설이 있다. 이 주장은 역대기 하권의 마지막 두 절 36,22-23과 에즈라기의 첫 세 절(1,1-3)이 같다는 사실로 제기된다.
그러나 에즈라와 느헤미야는 동시대에 소명을 받아 활동하였지만 본문의 내용은 서로에 대해 모르는 채, 각기 다르게 활동한 것처럼 제시되고 있다. 또한 두 주인공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활동이 구약 성경 다른 곳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 책의 가치는 유다와 페르시아 제국 시대에 대한 중요 자료를 알려주고 있다.
3.내용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왕은 바빌론을 멸망시킨 뒤, 여러 나라에서 끌려온 포로들을 해방시키고 귀국을 허락했다. 이 책은 바빌론 포로살이를 마치고 여러 차례 걸쳐 귀환한 유다인들이 한 세기가 넘는 동안 일어난 일들을 서술한다. 귀환 이후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새로운 공동체로 회복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바빌론 유배 기간 동안 팔레스티나 지역은 일부 가난한 유다인, 가나안인, 사마리안인,다수의 이방인들이 정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소유지나 가옥들은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되어 있었다. 귀환자들은 예루살렘 도성 주변에 자리를 잡아야 했으며 계속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으며 왕)통치자를 세울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유다인들은 사회적 종교적으로 정체성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백성들의 지도자로 실권을 행사한 사람은 대사제와 종교적 입장에 있던 자들로 율벅학자인 에즈라와 페르시아 정부 고관이었던 느헤미야는 이런 시대에 활약하였다.
4.구조:
4-1.에즈라기
에즈라기는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반부는 귀환과 성전 재건(1-6장)과, 후반부는 에즈라의 귀환과 개혁 특히 국제결혼 정리(7-10장)이다.
4-2. 느헤미야기
느헤미야는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반부는 1-7장으로 느헤미야가 반대 세력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성벽 재건을 오십이일 만에 복구한다. 후반은 8-13장은 경신례 복원과 서약과 여러 가지 명단, 그리고 십여 년 뒤에 예루살렘에 두 번째로 머무르게 된 느헤미야가 수행한 일련의 개혁에 대한 이야기이다.
편집 과정 난제>
1) 유배에서 돌아온 귀환자 명단이 에즈라 2장과 느헤미야 7장에 같이 언급된다. 이는 같은 명단이 매우 다른 두 역사적 상황에서 쓰인 것이다. 즉 에즈라의 명단(2장), 기원전 538년에 키루스 귀환 해방령에 의한 1차 귀환자 명단이다. 느헤미아 명단(7장), 기원전 445년경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된 뒤 조사에 해당된다. 이 명단은 즈루빠벨과 예수아 대사제 시대의 상황을 드러내는 명단일 수 있다.
연대기적 충돌>
첫째 문제는 성전 재건 공사의 중단에 대한 것이다. 에즈라 4장에 나오는 성전 재건 공사는 지방 이민족들이 방해하여, 페르시아 임금 아르타크세르크세스(기원전 464-424)가 명령을 내려 중단된다(에즈 4,6-24). 그런데 이 본문은 연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실제로 성전 재건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520년 다리우스왕 2년이고(에즈 4,24; 하까이 1,15), 완성된 것은 같은 임금인 다리우스 임금 6년 곧 기원전 515년경이다(에즈 6,15). 에즈 4,6-23이 말하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에 의해 성전 재건이 중지되었다는 515년 실제 성전 완공에서 적어도 50-60년 뒤가 되는 것이다. 다른 가설로 에즈 4,6-23에 들어 있는 문서가 성전 건축이 아닌 다른 작업일 수 있다. 둘째 문제는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언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였는냐는 문제이다. 현재의 본문이 말하는 연대순은 다음과 같다. 에즈라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 7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에즈 7,7) 개혁 활동을 한다(에즈 8-10). 그 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제 20년에 느헤미야가 와서(느헤 2,1) 성벽 건축 활동을 수행한다(느헤 1-7장) 그런데 느헤 8장에 따르면 그 이전 느헤 1-7장에서 언급 되지 않던 에즈라가, 갑자기 등장하여 백성 앞에서 율법을 장엄하게 봉독한다.(느헤 8-9장) 끝으로 느헤미야는 바빌론으로 돌아갔다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제 32년에 두 번째로 귀환하여 다시 활동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느헤 13,6). 그래서 이 두 사람이 같은 시간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면서도 서로 관련 없이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일한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는 두 사람이 다 같은 임금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서서 공적인 사명을 받고 귀환한 사람들(에즈 7,11;느헤 2,7-8)이기 때문에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다.
5.에즈라와 느헤미야 시대(기원전)
539년: 페르샤의 키루스 왕이 바빌론을 점령하고 멸망시킨다.
538년: 키루스 왕이 각 국 포로들을 해방시키고 귀국 허가를 선포한다.
-유다 제후 세스바차르를 지도자로 한 유다인들의 귀환하고 키루스 왕은 바빌론이 갈취한 성전기물을 돌려준다.
-다윗왕가 후손인 즈루빠벨과 대사제 여호수아를 지도자와 유배자들이 귀환한다. (귀환자 수는 6만정도 추정함)
-예루살렘에서 경신례가 거행되고 성전 재건 공사는 방해를 받아 중지 당한다.
-예언자 하까이와 즈카르야가 활약한다.
520년: 성전 재건 공사를 다시 시작한다.
515년 성전 봉헌식과 파스카 축제를 지낸다.
496년: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를 시작 사마리안들의 반대로 중단된다.
458년 에즈라가 예루살렘으로 간다(428? 398년)
445년: 페르시아 왕이 느헤미야를 예루살렘에 파견한다.성벽 재건되고, 느헤미야는 페르샤의 일시 귀환환다.
432년:느헤미야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간다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공동 지도로 백성들은 모세 율법을 다시 배우고 따르기를 서약한다.
333년: 그리스가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무너뜨린다. 팔레스티나는 그리스 영향을 받게된다.
330-325년: 역대기 에즈라서 느헤미야서 편집한다.
250년경: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구약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된다.(70인역)
167-164년: 유다 마카베오 사건이 발생한다.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전력했던 것은 다음 세 가지이다.
1) 예루살렘 성전 재건
귀환 후 가장 중요시한 첫 과제이다. 하느님의 집은 백성 한가운데에 계시는 하느님 현존의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표징으로 하느님과 당신 백성을 이어주는 경신례가 거행되는 곳이다. 이러한 성전의 재건이 늦어진 것은, 하까이 예언자는 성전 건축 지연의 이유가 백성의 무관심이라고 보는 반면(하까 1,2-9) 에즈라는 유다가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적들의 방해를 강조한다.(에즈 4,4) 그 밖에 경제적인 여건도 건축 지연의 요인이다.
2) 예루살렘 성벽 재건
아브라함 이래 거룩하고 역사 깊은 거룩한 도읍 예루살렘 도읍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그들 새활 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공사였다(느헤 2-6장). 이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파괴와 백성의 유배로 중단된 하느님 백성의 유구한 역사를 재개하는 것이다.
3) 유다 사상 강화
유배지는 물론이고 예루살렘 귀환 후에도 이교도들과 섞여 살 수 밖에 없었던 이 공동체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이루어야 했다. 이 점에서 에즈라와 느혜미야가 이룬 업적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그들은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한 유다 백성은 이제 더 이상 자주 국가를 복원할 가능성이 없다. 이 백성은 이제 종교 공동체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과거의 종교 전통을 현 상황에서 쇄신하고 강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것은 첫째 정신교육과 경신례이다.
에즈라는 초막절을 지내기 전에 말씀)율법을 봉독하고 백성에게 설명해준다. 지금까지 경신례는 주로 축일과 제사의 거행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유배후에는 말씀)율법이 경신례 안으로 들어오고 중심을 잡아가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에즈라가 시작한 율법 봉독과 해설은 후대 복음서에서 보듯이(루카 4,16-22), 유다교 회당에서 거행되는 전례의 주요 요소들이 된다. 율법은 이렇게 유다교 생활의 근본 바탕이 되는 것이다. 율법을 중시하면서도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추구하는 신앙은 율법주의를 넘어선다. 이들에게 율법은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느님 참 된 경신례와 자발적 기도로써 찾을 수 있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율법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글로 고정된 율법에 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다(에즈 3,11;6,21-22;7,27-28;느헤 1,4-11;4,4-5;5,19).
(1) 경신례
탈출기의 파스카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자유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기념한 것이다. 그리고 주전 515년에 지낸 파스카는 그 백성의 역사가 새롭게 다시 시작되었음을 기념한다. 귀환자들은 유배지에서 50년 귀환하여 토착민들과 20년 대립과 갈등을 겪은 다음 성전을 재건하고 파스카와 무교절 경신례를 거행한다(에즈 6,19-22;느헤9,4-8).
(2)기도
에즈 9장과 느헤 9장을 보면 이들은 기도의 사람들이다. 이 두 기도 안에는 이후 유다교의 경신례를 이루는 주요 전례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다(참회. 불충의 역사에 대한 반성,하느님께 대한 신뢰) 이들의 기도는 유배 전 예언자들이 리더쉽이 어떻게 말씀과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되었는지 잘 보여 준다.
(3) 배타주의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헌신과 율법에 대한 열성에 기인한 것이다(느헤 8장 참조). 경계를 강화하고 규정을 엄격히 지키지 않으면, 여러 종교와 타협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하느님 백성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지역 갈등(에즈라 4장)
여기에서 유다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일어난 갈등과 대립 사건도 볼 수 있게 된다. 사마리아 지역은 북 왕국의 멸망(기원전 722년)과 유다왕국 멸망(기원전 587년) 이후 유배를 가지 떠나지 않고 남아 살던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로 이루어진 토착민들과 충돌이 발생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특히 북 왕조 멸망 후 아시리아 제국의 이주 정책에 의해 이방 민족들로 형성된 지역으로 이들은 자연히 다민족 다종교 사람들이다. 따라서 순수한 종교와 혈통을 추구하는 유다인들과 갈등과 대립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결혼 정책(에즈 10장;느헤 13,23-29)
에즈라는 귀환 공동체의 결속과 순수성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로 결혼 관계를 이용한다. 이것은 이미 여러 번 문제로 드러나고 있었고(3,3;4,1), 이에 맞서는 유다인들의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지만(10,15), 귀환자 대부분은 에즈라의 정책에 동조하였다. 다른 백성과 결혼하지 못하게 한 금령은 탈출 34,15-16;신명 7,1-4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지지를 받았다.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이 조치는 아마도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작용했을 것(제한된 땅, 서로 다른 다수의 사람들)이다.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4년 8월 15일 pm 09:18
참조:성서백주간 도움책 예언*교훈편,가톨릭 주석서,해설판 공동성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