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조는 왕방연이 노산군을 압송하여 영월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千萬里천만리는 심리적 거리. 실측을 해서 나온 거리가 아니다. 千萬里는 ‘머나먼 길’이라고 규정된다. ‘천만리 머나먼 길’은 한양에서 영월까지가 아니다. ‘千萬里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의’었으니 그 천만리의 길 어느 지점에 고운 임을 여읜 것. 그러니까 천만리의 어느 한 지점이 노산군의 유배처인 영월이다. 영월로 갈 것이 정해졌을 때에는 한양에서 영월까지 다시 영월에서 한양까지의 길을 가는 것으로 예정되었으나 고운 임과 함께 하면서는 그 길이 천만리가 되었고 막연하게 머나먼 길이 되었다.
‘고운 임’은 ‘머나먼 길’과 대조되고 또한 종장의 ‘밤길’과 대조된다. 고운 임이 감당하기에는 머나먼 길도 밤길도 모두 버겁다. 나는 머나먼 길이나 밤길이나 갈 수 있지만 고운 임은 머나먼 길도 밤길도 갈 수 없다는 것이 시어를 통해서 증명된다.
내 마음 둘 데는 어디였는가? ‘고운 임’이었다. 내 마음을 두어야 할, 두고 있었던 그 고운 임을 여의었으니 내 마음은 실상은 고운 임과 함께 있어야 하는데 내 마음은 지금 여기 나와 함께 있다. 내 마음을 둘 데가 없다. 당연히 고운 임이 不在하기 때문.
냇가는 川邊천변이다. 머나먼 길은 사람의 길, 시인의 길이었는데 川은 물의 길이다. 길은 사람이 가는 것이고, 川은 물이 가는 것이다. 시인은 川 가[邊]에 앉아 있다. 川을 따라 물과 함께 흘러가지 않는다. 나의 있어야 할 곳은 여전히 ‘머나먼 길’이다.
‘저 물도 내 안 같도다’라고 한다. ‘내 안’은 내 마음이 있는 곳. 내 마음은 고운 임과 함께 있었는데 고운 임과 이별을 하고 내 안에 있지만 ‘저 물’과 같이 가만히 있질 못한다.
‘밤길’을 가는 것은 川의 물. 내 안은 저 물과 같고, 그 물은 흘러가고 있고, 배경은 밤이다. 밤은 보이지 않는 것. 밤은 모두를 감춘다.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밤은 시인이 처한 현실을 상징하는 것. 밤과 같은 시간에만 울 수 있지 밝은 낮에는 울음을 울 수도 없다. 노산군을 위해 우는 것은 곧 역모와 연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저 물에 자기의 마음을 실어 고운 임에게 보내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