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천국열쇠를 가지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는 비밀한 곳입니다(마16:18-19)
그럼에도 혈과 육에 속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고린도교회나
입으로 오직 예수, 십자가의 복음 하면서 여전히 음부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현재의 교회들의 모습을 보면 아연해 집니다. 고린도교회처럼 사람에 의해
피동이 되어 우왕좌왕하며 능동적인 기쁨, 능동적인 기도와 감사가
없이 어느 누군가 동기부여를 하고 가르쳐야만 되는 종의 영을 가진 것이
바로 그 증거가 됩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을 얻는
믿음은 능동적인 자유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영적이며 거룩한 산제사입니다.
그러나 아직 고린도교회는 사람을 좇고 서로 원망과 시기와 질투가 있는
어린아이들 곧 그리스도 안에 있어도 젖만 먹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갈보리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어서 온 세계가 다 알고 있지만
십자가의 도(고전1:18)는 성령만이 알게 하시는 교회의 비밀입니다.
14절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어쩌면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진술대로
이런 말을 듣게 되면 고린도교회가 부끄러움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무안하게 하는 목적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까지 낮추어 그 안에서 참으로 존귀하게 높이려 하는 겁니다.
15절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 곧 가정교사는 있지만 아비는 적다고 말합니다.
만약 바울이 성경을 잘 가르치는 선생이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낳은 자식들에게 바울은
아비의 사랑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는 선지자의 역할로
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사역으로 기도와 중보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사역을 잘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신학교 중에 선지동산이라는 이름은 있어도
제사장 동산이라는 말을 듣지 못함과 같이 다 유명설교자가 되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은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시듯(약1:18) 사역은 아비처럼 진리의 복음으로 낳는 겁니다.
16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
고린도교회의 수준이 아직 낮으므로 바로 그리스도를 본 받을 수 없고
사람을 본받아야 할 정도이므로 자신을 본 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어 능동의지로 성령을 좇는(갈5장) 차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7절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게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리스도 안에 나의 행사라 함은 바울의 길, 방법, 목표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의와 거룩함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에
나아가는 로드맵을 가진 바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담은 에베소서를
기록할 수가 있는 겁니다. 삼층천을 본 바울이 어떻게 하면 자신과 같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가를 그 길과 방법과 원리를 자세히 설명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는 천사들도 감히 구경밖에 할 수 없는 교회만이 가진 고유의 비밀인 겁니다(엡3:10)
사실은 이와 같은 바울의 서신들이 현재 기록된 말씀이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고전이
될 뻔한 서신이 정경으로 채택이 되어 우리 구원의 교과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바울의 일을 생각나게 하는 겁니다.
18절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 졌으나"
심지어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은 이제 바울은 끝난 사람이라는 말도 했답니다.
한물 간 사람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조지 휫필드 같은 분도 그 당시에는 한쪽에 밀린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2세기가 지난 지금 그가 옳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야깁니다.
칼빈의 예정론이 비성경적이라고 하는 목사들은 이분의 글을 좀 읽었으면 합니다.
19절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주께서 허락하시면,
주께서 원하신다면 교만한 자의 말 보다 능력을 한 번 알아보겠답니다.
종합감사를 해 보겠다는 말입니다. 진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가짜를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성전의 문에서 지성소의 법궤까지 나아가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그 안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의 법궤와의 거리가 어떠한지 측량줄로 잴 수가
있는 겁니다. 아무리 사자후를 토해도 하나님과의 거리는 금방 들통이 나고 맙니다.
20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말과 능력의 차이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말잔치 시대인 것 같습니다.
토크쇼가 대세입니다. 더군다나 인터넷의 발달로 지식과 정보가 신속하게
전달되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화려하긴 하나 지푸라기
같은 말과 글들이 얼마나 많이 깔려 있는지... 거기다가 팬덤을 만들어 비슷한
내용의 댓글을 여럿이 달아 진리로 둔갑시키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찔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그와 같은 행태를 두고 거대한
가라지의 숲을 본다고 표현했는데 과연 그렇다고 여겨집니다.
21절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말이냐 능력이냐? 복음으로 낳았다는 것은 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나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를 가지고 갈까? 온유하고 신령한 사랑 곧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갈까? 묻는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구절입니다.
참으로 어머니와 같은 마음입니다. 선생으로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사랑입니다.
아비로 복음으로 낳는 바울이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가슴에 담고 돌보는 사도의 마음을 엿보게 됩니다.
고전4장의 요절은 6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또 하나의 요절은 20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이 능력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나옵니다.
따라서 기록된 말씀 안에 있는 십자가의 도를 따라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하고 그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능동적으로 질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세례(침례)로 수용하고 따르지
않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행2:38) 회개를 풀을 뜯듯 철저하게
하려들지 말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고 다시 산 사실을 철저하게 수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다는 말을 실감하므로 능동적의 의지가 발동될 겁니다. 요즘은 고철덩어리로
만든 탱크에도 첨단장비를 설치하여 능동방어를 한다고 하는데 하늘의 비밀을
담은 교회가 능동 찬양, 능동 행함, 능동 섬김, 능동 사랑이 없으면 안 되지요.
첫댓글 아멘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잃은것이 가장 큰 손실인
차원에서 다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다시 얻는(은혜의보좌 앞에 나아가는) 자리에 나오는것은 인간이 누릴수 있는 최고의 행복 입니다.
이 행복을 전달(제사장 사역)해 주신 목사님도 분명 행복한 분이심 을 압니다.
순간의 감동만을 위한 서정적인 신앙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과 성령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서사(story)가 있는 신앙을 가진 것이 복이니 행복자가 된 것 맞습니다. 알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