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守愼(1515~1590)
노수신은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穌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 숭(嵩)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활인 서별제(活人 署別提) 홍(鴻)이다.
1531년(중종 26)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문인이 되었다.
1541년 이언적(李彦迪)과 최초의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한 이후 전적(典籍)·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다.
인종 즉위 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 서 이기(李芑)를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되어 1547년(명종 2)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유배되어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유배기간 동안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교하고 명확하여 사림 사이에 전해지고 암송됨으로써 명성이 전파되었다.
또한 『대학장구(大學章句)』와 『동몽수지(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다.
1573년(선조 6) 우의정, 1578년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