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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5:6~9(290)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2024. 6. 2.
19세기 미국의 저명한 설교가로 꼽히는 헨리 워드 비쳐(Henry Ward Beecher 1318-1887) 목사가 전하는 비유입니다. “바닷가재(lobster) 한 마리가 어쩌다가 높은 바위 위에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메마른 바위 위에 남겨진 가재는 바닷물이 바위 꼭대기까지 밀려들어오지 않는 한 말라 죽을 것이 뻔합니다. 그런데 이 바위는 비록 우뚝 높이 서 있는 바위였지만, 바로 그 아래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따라서 바닷 가재는 파도가 자신이 있는 지점까지 밀려오기만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무섭더라도 눈 감고 아래로 떨어져 바다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이 문제를 고민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바닷물이 가재가 있는 곳까지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바위 위에 머물러 있으면 죽게 됩니다. 그렇다고 파도가 무섭다고 바위 위에서 떨고만 있으면 이것 또한 끝내 말라 죽고 말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바닷가재가 살 수 있는 방법인가요?”라고 말합니다.
비쳐 목사님은‘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나오는 바닷 가재와 같이 인생을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또는 나의 잘못이나 실수가 아닌데도 내가 외딴 것 높은 바위 꼭대기에 홀로 내팽개쳐 질 때가 있습니다. 높고 메마른 바위 위에 나 홀로 남겨져서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또한 도움을 얻을 수 없는 상태인 것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인생에 깊은 위기가 찾아 옵니다. 한평생 인생을 성실하게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 주지 않고, 나쁜 사람이라는 욕 듣지 않고, 나름대로 건실하게 인생을 살아 왔다고 자부하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극한의 위기에 처하게 되면, 대부분 사람들은 깊은 좌절과 실망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성도들이 이런 상황에서 쉽게 좌절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설교를 하는 김목사에게도 찾아 올 수 있고, 설교를 듣는 여러분 모두에게도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찾아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앙생활을 엉망으로 하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경고의 차원으로 주는 것이라 100%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인생의 위기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는 위기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에게도 찾아오고 장로와 권사와 성도들에게도 찾아오는 위기입니다.
이렇게 인생에 갑자기 찾아 온 위기 앞에서 일부의 사람들은 인생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높은 바위위에 홀로 남은 바닷가재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상상해 보십시다.‘내가 이 바위 꼭대기에 홀로 떨어져 있는데 내가 어떻게 살 수가 있나? 하늘을 보니 독수리가 나를 낚아 채어가려고 머리위로 빙빙 날고 있고, 파도가 나에게 밀려 들어와 나를 살려 줄 모습은 보이지 않고, 검푸른 바다로 뛰어내리면 내가 죽을 수도 있는데, 내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여기서 내 인생을 포기해야 하는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렇게 고민과 번뇌가 쌓이고, 부정적이고 우울한 생각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인생을 포기합니다. 그렇게 쓰라린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인생에 어려움이 찾아 올 때,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믿음으로 이 어려움과 위기를 극복하고 넘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몸을 굴려 나아가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선한 길을 열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에 직면할 때, 부정적이고 어두운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 그 아픈 것 때문에 오만가지 부정적인 생각을 다하게 됩니다.
금번에 김장로님과 김권사님이 건강 문제 때문에 많은 불편이 있고 걱정도 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건강이 나를 괴롭히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믿음으로 걱정과 고민을 다 날려 버려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더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믿음의 담대함으로 두려움과 걱정을 물리치게 되면, 더 성숙한 인생과 신앙인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바닷속 깊은 곳에 빠져 있던, 또는 외딴 곳에 나홀로 머물러 있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은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항상 안전하게 받쳐주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을 때,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적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어려운 일이 가로막는다 해도 항상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함께 복음성가 ‘이제 내가 살아도’를 부릅니다. “1)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주며 날 오라 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2)이제 내가 떠나도 저 천국 가고 이제 내가 있어도 주 위해 있네 우리 예수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천군 천사 나팔 불며 마중 나오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울러 이 땅에서 나의 생명이 다하는 그 날이 와서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고 해도, 천군천사가 나를 영접하러 마중 나온다는 사실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가는 내 모든 삶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또는 기쁘고 감사할 그 어느 때에라도 한순간 순간에 나타나는 것에 일희일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담대히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담대한 믿음과 행동에 대해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6절,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헬, 다르룬테스 판토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언제나 용기를 가지다’라는 뜻입니다. 항상 담대하게 용기를 가지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생활 속에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충격적인 일을 마주 대하게 되면, 사람은 손이 떨리고 심장이 크게 두근거려서 정신이 혼미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큰 충격 때문에 실신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더러 ‘항상 담대하라’고 권면합니다. 운동을 열심히 하여 육체미 선수처럼 근육을 우락부락하게 만들면 담대해 지는 것인가요? 아니면 해병대 캠프를 다녀와서 몸과 정신을 강하게 하면 담대해지는 것인가요? 이런 담대함은 일시적인 담대함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담대함은 이런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일시적인 담대함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담대함은 5절에 언급한 대로 성령으로 보증 받은 성도들이 가지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5절,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리고 말씀으로 약속하신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하나님입니다. 보증으로 베풀어 주신 성령을 받은 성도이기에 항상 담대하여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가진 주님이 내 곁에 계실 때에나 또는 내 곁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때에라도, 그 여부와 상관없이 바울은 항상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시므로 나는 담대하고 말합니다.
2천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미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십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육체를 가진 예수님이 지금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는 주님이 남아 있는 제자와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승천하고 몇 날이 되지 못하여 너희들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그 말씀대로 오순절 성령이 임하였고, 그 오순절 성령이 오늘날까지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는 성령하나님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은 바울이 말하는 대로 항상 담대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항상 담대할 수 있나요?
1. 믿음으로 행동할 때에 담대해집니다.
7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7절 말씀은 아주 중요한 신앙인의 생활방식 또는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행동 지침에 대하여 기준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은 아주 쉬운 내용입니다. ‘모든 일에 믿음으로 행동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얽매여서 행동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기의 ‘믿음으로 행하고’라는 말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믿음으로 행하라’라는 내용입니다. 내가 상식적으로 믿어지고, 내 머리로 이해가 되고 믿어지는 내용만 믿지 말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상식과 판단에 맞아 떨어지면 이해를 하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내 경험과 상식에 따르면 이것은 믿어도 되’라고 먼저 판단하고 믿음을 가집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으로 얻게 되는 이런 상식적인 믿음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내 상식과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믿음을 가지고 접근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능력과 기적은 내가 가딘 지식과 경험을 뛰어 넘는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 눈에 보이고 내가 판단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이고, 항상 진리이며, 항상 올바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여전히 계셔서 나를 이끌어 주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이 내 눈에, 그리고 내 귀에 들리고 확인되지 않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여전히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 안에서 담대함으로 행동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항상 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환난과 시련 가운데도 담대히 믿음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공허한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항상 담대하게 믿음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이지선 교수가 ‘꽤 괜찮은 해피엔딩’이란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지선교수는 이화여대 4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0년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빠의 차를 타고 귀가하던 중, 음주 운전자가 낸 추돌사고로 차량이 불타면서 전신 55%에 3도의 중화상을 입게 됩니다. 이때가 꽃다운 23살입니다. 죽음보다 더 끔찍한 고통으로‘대한민국 화상 1등’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심각한 화상이었지만 그는 30번이 넘는 수술과 재활치료를 이겨낸 후에 2023년 모교였던 이화여대에 교수가 됩니다.
이교수는 이 책에서 ‘기도했더니 온 몸이 한순간에 깨끗해졌다’는 기적을 말하지 않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끔찍하고 절망적인 수 십번의 화상수술과 치료 중에서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붙잡은 이야기를 말합니다.
이 교수는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만 기적이 아니라, 일상의 삶 자체가 기적이며 해피엔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 합니다. 이 교수는 책을 통해 지금 고통스러운 순간을 통과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웃을 날이 더 많아질 거예요. 여기가 끝이 아니에요”라고 믿음으로 행한 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가 고통 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믿음 안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 확신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항상 믿음으로 행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뛰어 넘는 신앙으로 6월의 모든 시간을 보내시길 소망합니다.
2. 주를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9절,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 말씀에 보면,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말한‘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라는 말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세요.
그것은 ‘몸으로 있든지는 살아 있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고, 떠나든지 라는 말은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죽은 것’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즉 9절 말씀은 내가 살아 있든지 죽었든지, 그 생사여부와 상관없이 내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도록 힘써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설교 초두에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라고 불렀던 찬송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원하는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철저한 순종을 통해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바울은 증거합니다.
모름지기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고 하나님이 기쁜 것이라면, 나의 즐거움과 나의 쾌락도 내려 놓고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비신앙적인 행동은 결단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성도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법입니다.
금세기 최고의 설교가로 인정을 받는 마틴 로이드 존스 (Martyn Lloyd Jones, 1899-1981) 목사는 가난한 집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꿈은 의사였습니다. 환경과 여건은 나빴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26세에 영국 왕립 의학협회로부터 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촉망받는 영국 황실의 의사가 됩니다. 성공한 의사로 부와 명예가 따랐지만 전스 목사님은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20세 중반에 예수님를 믿고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은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영혼의 질병을 고치는 의사라는 사실을 깨닫고 40세에 목회자의 길로 들어섭니다.
부와 명예를 뒤로한 체 고향인 시골 웨일즈의 조그마한 교회의 설교자로 12년 동안 섬깁니다. 그 후 런던 중심가 웨스트민스트 채플에서 목회자로 설교합니다. 존스목사님은 항상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우리의 목표이어야 한다” 외쳤습니다. 개인의 신앙심을 충족하는데 멈추는 ‘종교 서비스’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도 하였습니다.
존스 목사님의 대화에서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목사로서 일하다 죽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텐데, 그때 하나님이 심판대 앞에서 나를 보시고 ‘한평생 나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았구나’라고 칭찬하실 것인지, 아니면 ‘한평생 너 자신의 성공과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만 살았구나’라고 책망하실 것인지 그것이 두렵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모름지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합니다. 우리 덕민교회 모든 성도님들 역시 나의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내 말 한마디로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이 기뻐할 수도 있고 슬퍼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는 우리 모든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미워하지 마십시오. 욕하면서 어떤 상대방을 깍아 내리고 험담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그저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시면서 보듬어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담대함으로 나아가는 6월의 모든 시간이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