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송지희 기자의 보살의 길 / 세조비 정희왕후
남편 손에 죽은 이들에 대한 참회로 한평생 불사 매진
세조, 즉위 후 피부병 시달려
세자 급사하고 예종도 단명
손에 묻은 피의 흔적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친족을 죽였다는 패륜의 낙인도 마찬가지였다.
단종을 밀어내고 조선 제7대왕으로 즉위한
세조는 평생을 역창과 정신질환으로 고통 받았다.
즉위 3년째에는 세자가 급사했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둘째아들 예종마저 스무 살에 죽었다.
왕실의 잇단 변고를 지켜본 이들은 세조의 죄업이 그 원인이라 수군거렸다.
세조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한 이는 바로 아내 정희왕후 윤씨였다.
그녀는 남편의 극심한 피부병과 정신질환을 돌봤을 뿐 아니라,
이후 세자와 예종 두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까지 감내해야 했다.
남편과 아들들이 죽은 뒤에는
성종의 할머니이자 자성대왕대비로 섭정하며 정치에도 깊숙이 개입하는 등
조선 전기 혼란의 과정을 온몸으로 겪었다.
동시에 부처님 법에 의지해 현생의 고통을 다스리려 했던 불심 깊은 여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한평생 수많은 불사를 통해
남편의 손에 죽어간 이들의 명복을 빌며 참회와 속죄의 삶을 살았다.
정희왕후의 남편 세조(1417~1468, 수양대군)는
왕이 되기 위해 무수한 사람들을 죽인 권력지향적 인물이었다.
즉위를 반대한 신하들을 척결한 것은 물론, 혈육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이 된 이후에는 확고한 왕권강화를 위해
이미 권력을 잃은 힘없는 단종의 목숨마저 거뒀다.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선 신하들은 늘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피 말리는 권력쟁탈전을 거쳐왔기 때문일까.
세조는 왕위에 오른 이후 평생을 심한 피부병과 정신질환으로 고통 받았다.
세조의 병은 일반적인 역창이 아니라
문둥병(나병)이었을 것이란 추측이 있을 정도로 심각했다.
밤이면 악몽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나날이 정신병적인 망상도 심해졌다.
그런 남편을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정희왕후의 고충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즉위 3년째에는 20살에 불과했던 아들 의경세자(덕종)가 돌연 세상을 떠났다.
호사가들은 세자의 죽음이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저주라고 숙덕거렸다.
아들이 죽은 뒤 세조의 병은 더욱 악화됐고,
결국 즉위 13년 만에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뒤이어 즉위한 아들 예종마저 1년반 만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상스레 이어지는 왕실의 죽음에 대해 궁궐 안팎으로 떠도는 말이 많았다.
현덕왕후의 저주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패륜의 꼬리표는 더욱 선명하게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세조는 즉위 후 현덕왕후의 악몽에 시달렸는데
조선 중기 문신인 이자가 쓴 ‘음애일기(陰崖日記)’에 관련일화가 전한다.
“1457년의 어느 날 세조가 궁궐에서 낮잠을 자다가 가위에 눌리자
소릉(현덕왕후릉)을 파헤치라고 명하였다.
사신이 석실(石室)을 부수고 관을 끌어내려 하였으나, 무거워 들어낼 도리가 없었다.
군민(軍民)이 놀라고 괴상하게 여겨 제사를 지내니 그제서야 관이 움직였다.
이를 평민의 예로 장사지내고 물가에 옮겨 묻었다.”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전대 왕비이자 상왕의 어머니 묘를 파헤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파렴치한 행위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같은 해 6월,
세조가 현덕왕후를 폐서인하고 개장했다는 기록이 있어 눈길을 끈다.
기록상 개장의 이유는 단종복위운동에 현덕왕후의 친인척이 연루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현덕왕후릉 개장 당시 정말 세자는 병환을 얻었으며
불과 3개월 만에 세자가 급사했다.
악재가 겹치자 궁궐 안팎에서 현덕왕후의 저주에 관한
소문이 기정사실화되어 퍼졌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를 괴롭혔던 고질적인 피부병도
꿈에서 현덕왕후가 저주를 퍼부으며 침을 뱉은 뒤 발병했다고 알려져 있다.
1984년 상원사 문수동자상 복장유물에서 피고름에 절은 세조의 속적삼이 발견돼,
당시 세조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었는지를 뒷받침한다.
상원사에는 세조가 문수동자를 만나 역창을 고쳤다는 일화도 함께 전하고 있지만,
실제 세조는 꾸준한 온천행궁에도 병에 차도가 없었으며
결국 피부병과 정신질환이 악화돼 죽음을 맞았다.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과 이후 평생토록 이어진
심신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 했기에 아내 정희왕후 삶도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정희왕후 윤씨는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가 가장 사랑하고 가까이 둔 며느리였다.
그녀는 성품이 온화하고 행실이 단아할 뿐 아니라 지혜롭고 배려와 화합에 뛰어났다.
이에 세종도 중신들 앞에서 직접 윤씨를 거론하며 칭찬하고
윤씨의 첫 출산을 궁궐에서 하도록 배려하는 등 각별히 아꼈다.
소헌왕후는 말년에 병환이 들자 궁궐을 떠나
수양대군의 집에 머물며 윤씨의 봉양을 받다 죽음을 맞이할 정도였으니
세종 부부의 윤씨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남편·아들 죽고 불교 귀의
사찰·경전 불사하며 참회
정희왕후는 명문가인 파평 윤씨 집안의 딸로 세종 10년,
불과 11살의 나이로 수양대군(세조)과 결혼했다.
이와 관련 ‘송와잡설’에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원래 세조의 베필로 거론되던 이는 정희왕후의 언니였다고 한다.
혼담을 나누기 위해 방문한 감찰각시가 언니와 선을 볼때
어린 정희왕후가 당당한 모양새로 나와 동석했다.
11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였지만 그 행동거지가 남달랐다.
그러나 국가의 혼담이 오가는 중대한 자리에 대상이 아닌 이를 함께 둘 수는 없는 노릇.
어머니 이씨는 그를 준엄히 꾸짖어 방으로 들여보냈다.
그런데 감찰각시가 동생을 다시 보길 청했다.
감찰각시의 눈에도 정희왕후의 행실이 남달라 보였던 까닭이다.
11살 어린아이로 치부한다면 눈치 없는 동석일 수 있으나,
그녀는 아마 이 자리가 국가 혼사를 위한 맞선임을 인지하고
감찰각시의 질문에 당차고 야무진 대답을 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감찰각시의 눈에 들어 언니의 혼사자리를 꿰차고
수양대군의 아내가 됐으니 말이다.
수양대군과 결혼한 윤씨는 어린 나이에도
근빈 박씨와 덕중 등 수양대군의 후궁들과도 원만한 사이를 유지했다.
21살 때는 세종에게 첫 손주를 안겼고 3년뒤 또 딸을 출산했다.
정도를 알아 불화를 조장하지 않았으며 세종의 첫 손자까지 낳았으니
시부모가 그녀를 끔찍이 아낀 것은 당연했으리라.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 당시,
망설이는 남편에게 갑옷을 입히고 거사를 마무리하도록 독려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평소 화합을 도모했던 성품상 아마도 그녀는 항시 남편의 권력욕을 말리는 입장이었을 겠지만,
결국 계유정난이 발생하자 마무리는 해야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어찌됐던 이 일화로 정희왕후는 남편을 부추긴 권력지향적 여인의 모습과
현명한 ‘내조의 여왕’ 이미지를 동시에 갖게 된다.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정희왕후는 본인과 남편의 정신적인 고통을 불교에 기대 치유하고자 했다.
세조대 지속됐던 호불정책과 잇단 불사에는 그녀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세조는 대군시절부터 아버지 세종의 영향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어왔지만,
즉위 초에는 일면 정치적인 의도가 적지 않았다.
유교적 사상에서 그는 결코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패륜아에 불과한 까닭에,
또 다른 방식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세조는 즉위 초 불교를 민심수습의 수단으로 삼아 다양한 불교정책을 펼쳤다.
도첩제를 실시하고 승려의 권익을 옹호하는 한편, 대규모 불사를 일으켜 사찰을 건립했다.
또한 불경을 한글로 번역, 간행하는 등 백성들이 불교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랬던 세조도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던 1462년을 기점으로
불교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엄경’, ‘법화경’, ‘능엄경’, ‘지장경’, ‘대승기신론’ 등을 연이어 간행하고
‘금강경’과 ‘법화경’은 직접 사경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더욱 본격적인 불경 간행사업을 위해 간경도감을 설치하기도 했다.
특히 이 시기부터 조선왕조실록에는 원각사 등을 중심으로 한
관음보살 화현, 사리분신 등 불교적 상서에 대한 기록이 급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상서를 이유로 한 죄수 사면과 은전(恩典)도 크게 증가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세조는 당시 거동이 힘들어 조회까지 생략할 정도의 육체적 고통에,
정신질환까지 더해져 힘든 시기를 보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가장 간절했던 것은 무엇보다 정신적인 위안이 아니었을까.
잇따른 불교적 상서들은 분명 지쳐있던 그에게
부처님의 가피가 함께한다는 믿음과 의지를 북돋아 주는 매개가 됐을 것이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당시 발생했던
불교적 상서들이 효령대군 등 왕실가족의 조작이라는 지적도 있다.
왕의 상태가 정상이 아닌 상황에서
세조의 정신을 돌보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목적이라는 설명이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길 없지만 정희왕후의 개입도 충분히 유추 가능한 대목이다.
세조의 죽음 이후 정희왕후의 행적이 오직 남편의 명복을 빌고
그의 죄업을 참회하기 위한 불교적 행위들로 점철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는 남편과 아들들이 죽은 뒤 잇단 슬픔과 회한 속에서도
불교적 업 사상에 대한 남다른 생각으로 불사에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아들 예종이 즉위 할 때부터 모든 불사를 직접 도맡았다.
예종대 진행된 낙산사와 봉선사 불사 사역과 간경도감의 관리 문제와 관련,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예종이 “대비의 분부”라는 이유로 물리친 기록이 여럿 남아 있다.
예종이 1년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슬픔 속에서도 손자 성종을 직접 즉위시키고
자성대왕대비로서 7년간 수렴청정했다.
성종대에 들어서 정희왕후는 권력의 총책임자로 더욱 본격적으로 불사를 진행했다.
신하들의 반대에는 ‘상왕 세조를 위한 일’이라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중국 사은사를 통해 불경을 사오고 또 간행하는 일에 대해서는
1년 가까이 신하들의 반대가 이어지자 직접 그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근래 대간과 경연관 등이
여러번 불경 사오는 일이 불가하다고 말하였으나 나는 모두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지금 불경을 구하는 것은 세조께서 일찍이 그 완질을 갖추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기에 내가 그 뜻을 따르는 것이다.
빈천하신지 얼마 되지도 않아 갑자기 중지하도록 간하니
내가 매우 통분하고 민망히 여긴다.
또 불교를 사도(邪道)라 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역시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
정희왕후는 불교외호와 왕권강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7년간 섭정하다가
성종이 20살이 되던 해 물러나 평생을 불교신행에 전념하며 살아갔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물러설 때를 알고 권력을 탐하지 않았던 지혜로운 섭정자였다.
또한 깊은 신앙으로 죄업을 참회하고자 노력했던 신심 깊은 불자이자,
숭유억불의 시대에 괄시 당하던 불교를 꿋꿋하게 외호하며
각종 불사를 통해 불교문화를 꽃피운 호법신장이기도 했다.
2012. 11. 28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