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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일신 우일신(日新 又日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로워지고 또 날마다 새로워지고…’
오늘날의 시대는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없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핸드폰을 봐도 그렇잖아요?
제 아내는 아직도 위로 밀어 올리는 슬라이드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는데, 7년 전인가 8년 전인가 제 처형한테서 얻은 것을 아직도 쓰고 있거든요.
아깝기도 하겠지만, 늘 쓰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쓰자니까 그것도 변화라고 변화가 두려운 거예요.
두렵다고 하니까 좀 거창하게 들립니다마는 어째든 새로운 것에 다시 적응하려면 시간도 걸릴 것이고, 아무래도 번거롭겠죠?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실 겁니다.
돈 낭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까지 멀쩡한데 굳이 뭣하러 또 새 것으로 바꾸느냐라는 생각 때문에 남들은 다들 최첨단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데, 아직도 아날로그를 고집하면서 사시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남들은 초스피드로 갈 때에 나 혼자서 슬로우 슬로우, 느리게 느리게 천천히 걷는 것도 참 좋은 거예요.
각자마다 취향대로 사는 거니까요.
그런데 교회는 어떻습니까?
어떻게 보면 가장 고전적인 것을 고수해야 하는 곳이 바로 우리 교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교회는 아주 클래식컬하다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래야 좀 어딘가 경건해 보이기도 하고, 참된 안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그러다 보니까 교회가 제일 변화에 둔감햇던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은 다 변하고 바뀌었는데, 교회는 통 변할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옛날에는, 뭐 별로 옛날이라고 할 것도 없겠습니다마는 불과 3, 40년 전만 해도 교회가 세상 문화보다 앞서 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교회에 가지 않으면 심심해서 못 살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레크레이션이나 여러 가지 모임이나 활동 같은 것들을 교회가 아니면 어디 가서 할 데가 없었단 말입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문학의 밤’이라고 해서 시 낭송도 하고 연극 공연도 하고 합창이나 중창, 또 무슨 악기 연주 같은 것도 하고 말이죠.
교회에서 이런 것들을 안하면 어디 가서 소위 말하는 ‘문화 생활’을 할 데가 없었단 말예요.
그런데 지금은 세상은 최첨단으로 가고 있는데, 교회는 제일 구닥다리 구식으로 남아 있어요.
우리 교회 말고요, 저기 어디 다른 교회들이 그렇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안 오는 거예요.
교회를 무슨 재미로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세대가 교회를 찾지 않으면 우리 세대가 지나고 나면 교회는 누가 지킬 겁니까?
그런 면에서 교회도 일신 우실신, 날마다 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 오랫동안 공무원 생활을 하시고 우리 단성면에서도 부면장을 지내셨고, 옆에 시천면에서는 면장님으로 계시다가 정년이 되셔서 은퇴를 하신 우리 노재덕 성도님께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계시지만, 어떠세요?
공무원 세계도 만만치 않죠?
요즘은 그래도 많이 트자도 하고 시설도 바꾸고 해서 많이 달라졌습니다마는,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서비스 정신이나, 창의적인 사고 방식은 아직도 멀었다고 봅니다.
삼성이나 현대나 대우, 대우는 망했습니다마는 아무튼 이런 대기업 사원들을 보면 그 사람들 어영부영 시간이나 보내고 그저 자리나 지키고 앉아 있다가는 당장에 모가지가 달아나고 맙니다.
경영도 혁신이라고 말을 하는데, 이노베이션(innovation)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되는 거예요.
모든 낡은 기술이나 설비, 낡은 방법 등은 과감하게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누구보다도 먼저 선진 기술이나 공정을 도입해야 살아남을 수가 있는 시대가 되었거든요.
지금까지는 변화에 대한 일반적인 것을 말씀드린 것이고요.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변화, 새로워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 말씀을 다 같이 봉독하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이것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처럼 시골에 있는 교회들은 점점 연세 드신 어르신들이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는 젊은 학생들이 더 많아서 참 감사합니다마는 대부분의 교회들을 보면 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면 점점 몸은 늙게 마련이고요, 몸이 늙으면 아무래도 모든 것들이 다 쉽지 않게 되겠죠?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자신감도 없어지고, 그러다 보면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까지도 생기게 됩니다.
저도 작년이었나? 재작년이었나? 약간의 갱년기 증상을 겪은 적인 있었습니다.
예상이가 고3 때였으니까 작년이었나 보군요?
저에게는 아들만 둘인데, 저는 내 집 아이나 남의 집 아이나 가릴 것 없이 아이들을 참 좋아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자녀 교육에는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아주 열심입니다.
마침 지난주에 기말 고사가 다 끝이 나서 예상이가 서울에서 내려 와서 오늘 같이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요, 제가 돈으로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열과 성을 다해서 뒷바라지를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엔가 한번은 괜히 마음이 우울해지고 울적해지는 거예요.
예상이가 고 3이었고, 또 그 밑으로 혜상이가 고 2였고요, 작년에 말이죠.
그러니까 나도 물론 그랬습니다마는 제 아내도 아이들에게만 신경을 써 주는 것 같고 나는 은근히 소외가 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제 아내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런데 그땐 남의 생각할 겨를이 어디에 있었겠어요?
괜히 나 혼자 삐져가지고 섭섭한 마음에 심통을 부린 적이 있었습니다.
밥도 안 먹고요, 집에서 말도 안 하고요, 뭘 물어봐도 시큰둥하게 퉁명스럽게 툴툴거리면서 말을 하고요, 내가 그랬다니까요.
그래도 아무도 나한테 관심을 안 갖는 것 같아서 얼마나 섭섭하든지 내가 나가서 어디 가서 안 들어 와야겠다고 생각을 하고서는 일부러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습니다.
내가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는 배기량이 120cc짜리 옛날 오토바이인데, 이 놈을 타고 나가서 밤 12시가 넘도록 집에 안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전화 오기만 기다렸는데 전화도 안 오는 거예요.
그거 정말 죽겠대요. 배는 고프고 말이죠.
아무리 못난 가장이라도 그렇지 아빠가, 그리고 남편이 집을 나가서 어디 간 다 소리도 없이 이렇게 늦게까지 안 들어오면 전화라도 좀 해서 어디냐고 물어 보기라도 좀 하고, 왜 안 들어오는 거냐고 하기도 하고 말이죠? 언제 들어올 거냐고 하고 말예요. 좀 그래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아무도 전화도 안 하는 겁니다.
눈물이 다 나올려고 하더라고요.
남의 집에 가서 놀아도 밤새도록 그 집에 있을 수도 없잖아요?
짐에 간다고 나왔는데, 집에는 들어가기 싫고 말이죠.
나한테는 관심도 안 가져 주는데, 그 집에 가고 싶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집을 나오니까 어디 갈 데가 없는 거예요.
찜질방요? 나는 정말 찜질방을 싫어하거든요.
베개도 불편하고 그 딱딱한 바닥에서 손바닥만한 헝겊 조각 같은 거 하나 덮고 자다 보면 정말 잔 것 같지도 않고 말이죠.
그것도 그거지만, 첫째는 배가 고파서 못 참겠더라고요.
그래도 누가 전화라도 해 주면 못 이기는 척하고 들어갈텐데 전화도 없죠?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서 안 들어오면 걱정이 되어야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참, 나! 집을 나갈 때에는 사고라도 나서 병원에 누워 있으면 가족들이 다들 달려와서 걱정해 주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혼자 별 상상을 다하면서 소설을 몇권씩이나 썼는데, 새벽에 춥기는 왜 그렇게 춥던지 말이죠,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오는데 손이 시려워서 혼이 났습니다.
그리고 혼자 터덜터덜 들어왔더니 예상이만 혼자서 공부하고 있고, 제 아내는 쿨쿨 자고 있고 말이죠.
사춘기도 아니고 사추기(思秋期)라고 해야겠죠?
저의 사추기(思秋期) 방황은 이렇게 정말 재미없게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무슨 애길 하다가 여기까지 왔나요?
그래요, 고린도 후서 4장 16절 말씀에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는 이 말씀 말입니다.
이 말씀이 진리라니까요.
이 자리에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우리 지리산 고등학교 학생들이 열 댓명 나와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요, 그에 비하면 우리 어르신들은 연세들도 많으시고 몸이 많이 불편하시잖아요?
그러나 오늘 말씀을 읽어보니까,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지만,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은 어떻게 된다고요?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할렐루야!)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었거든요.
사도 바울은 출신성분도 좋은 사람이었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그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사람이 180도로 달라지게 된 거예요.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그 분이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 감사해서 평생 동안 주님을 위해서 살았던 사도 바울이었거든요.
그러면 주님께서 복을 주셔서 편안하게 잘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고난이 따라 왔습니다.
박해가 있었어요.
고린도 후서 1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들을 일일이 다 열거를 해 놓았는데요, 고생 고생을 해도 그런 고생이 없었습니다.
감옥에는 내 집 드나들듯 했고요, 매도 수없이 맞았고요,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기면서 복음 하나 전하겠다고 그러고 다녔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세 번씩이나 맞았고요,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은 돌에 맞아서 거의 다 죽어서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시체를 갖다 버렸던 적도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고 배를 타고 가다가 배가 파선해서 바다 한 가운데에서 죽을 뻔한 적이 세 번씩이나 있었고요, 배가 파선해서 일주일을 밤낮으로 망망대해 가운데에서 표류한 적도 있었습니다.
가는 곳 마다 바울을 죽이겠다고 잠복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어요.
사도행전 23에 보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이 40여명이나 있었다고 그럽니다.
강으로 가면 강의 위협이 있었고요, 광야에 가면 광야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죽이려고 덤벼들죠,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덤벼들죠?
잠 못자고 먹지 못하고 헐벗는 생활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을 아주 많이 받아서 배터지게 잘 먹고 잘 살 거라고요?
예수 믿어서 장로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고 대통령도 되었으니 복을 받은 거예요?
땅도 많이 사고 부와 명예를 다 거머쥐었으니 성공한 거예요?
예수를 잘 믿어서 그렇게 된 거예요?
예수 잘 믿으면 고생합니다. 손해 봅니다. 망합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 그 분만 흥하고 나는 망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왜 그 고생을 한 거예요?
사도 바울에게는 변치 않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집에 가셔서 오늘 본문 말씀을 천천히 다시 한 번 더 읽어 보세요!
우리들의 몸은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잠시 머물고 있는 집입니다.
이 몸은 껍데기에 불과한 거예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진짜 알맹이, 우리들의 본질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들의 영혼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지으실 때에,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하셨잖아요?
그 생기(生氣)라는 것이 히브리어 원어로는 ‘루하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후~~’ 불어넣으셨어요.
그것이 들어가서 생령, 곧 영혼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육신은 우리들의 영혼을 담는 그릇이요, 집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좀 날씬하고 쭉쭉빵빵한 집에 살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좀 평수가 넓은 집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뚱뚱하다고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을 거예요.
머지않아서 얼마 있으면 우리 이 육신의 집은 다 허물어지고 맙니다.
육신의 집이 허물어지고 나면 그때는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영원한 집을 우리들에게 주실 줄 믿습니다.
새로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되는 거예요.
그걸 모르니까 보이는 것만 가지고 판단하는 겁니다.
‘저 사람은 부자래. 저 사람은 학벌이 좋대. 저 사람은 삼성맨이래.’
‘저 사람은 배가 많이 나왔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못 생겼지? 저 사람은 코끼리 다리네!’
심지어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호칭이 그거였잖아요?
‘갈릴리 목수 요셉의 아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 할 때에 그랬거든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엿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는데, 그 분은 바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시다. 너도 같이 가자!”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듣고 뭐라고 그랬어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사렛 그 깡촌에서 무슨 대단한 선지자가 나온다고 그러는 거냐는 겁니다.
예를 들면, ‘지리산 시골 구석에서 무슨 대단한 교인들이 나오겠느냐? 그 시골 조그만 미자립 교회에 있는 목사가 뭐가 그리 대단하겠느냐?’라는 식이었을 겁니다.
아무도 예수님에 대해서 주목을 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외모만 봤습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6절 말씀을 다 같이 봉독하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사람을 겉모양을 가지고 판단하면 큰일납니다.
우리 교회는 시골에 있는 미자립교회라서 외부의 보조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운 교회입니다.
그래서 총회에서는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를 통해서 우리 교회에 다달이 25만원씩 도와주도록 연결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연말에 그 교회에 국내선교부장인가 하는 장로님이 그 교회 안수집사님들을 대동하고 오셨더라고요.
도와주시는 입장에서 한번씩 돌아 보니는 건 좋은데,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교회가 왜 이렇게 부흥이 안 되는 거냐? 내가 몇 번을 왔는데 올 때마다 한 번도 못 만났다. 도와주면 감사하다고 인사도 한텐데 인사도 안 한다. 내가 이 일을 해 보니까 얼마든지 선교비를 끊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끊을 수도 있다.”라고 하면서 으름장을 놓고 협박아닌 협박을 하고 가시더니 아닌 게 아니라 금년 1월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돈을 안 보내 주는 거예요.
참 그 장로님 대단해요.
그 교회는 담임 목사님 뿐 아니라, 예수님도 그 장로님한테는 꼼짝도 못할 걸요?
그런 교회에서 어떻게 무슨 보람으로 목회를 하나 몰라요?
하나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 눈치 보면서 목회를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돈 몇푼 쥐고 있다고 시골 교회를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훅~~ 불어 버리시면 금방 날아가는 것이 돈이고 건강이고 생명인데 그러면 못 쓰는 거예요.
이게 다 사람을 외모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자, 이제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을 다 같이 봉독해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믿음으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늙었어도 괜찮고, 돈이 없어도 괜찮고, 시골에 살아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만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안는다면(고후5:7) 마지막 날에 우리가 주님 앞에서 다 아름다운 상급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0절 말씀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딸라 받으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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