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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시리즈 6 )
작가/ 낭독: 김인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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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눈을 떴을 때 옆으로 누워 팔로 미자를 감싸고 있는 이현수가 보였다. 이현수는 깊은 잠 속에 빠져있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아침 햇살은 이현수의 얼굴을 복숭아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어젯밤 이현수와 몸을 나눈 일은 꿈속에서 일어난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현수는 여자를 정복했다는 만족감이 얼굴 전체에 배어 있어 보였다. 미소 뒤에는 어떤 교만함까지 엿보이는 듯했다.
실수였어, 라고 미자는 자신에게 말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압박해 왔다. 혼자일 때보다 더 큰 불안감이 몰려왔다. 대장암 1기, 정신병동에 갇혀 있는 약혼녀, 등등. 엄마와 남동생도 부양하기 벅찬 자신에게 또 다른 부양자가 생겨난 셈이었다. 미자는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기심이 두고두고 후회를 가져온다, 고 생각하며 이현수의 팔을 젖히고 가만히 몸을 뺐다. 이현수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어서 욕실로 들어갔다.
섹스가 끝나면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우를 이현수도 범하고 있는 걸까. 말할 수 없는 이 모호한 감정은 분명 언짢은 것이었다. 이 언짢음은 무엇 때문일까? 양치질하면서 어제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롤러코스터를 탄 하루였다. 옆집 여자의 양산속 정사 장면과 러브버그의 복상사, 작은 숲 전체를 헤매다니던 일, 묘지 옆에 앉아서 본 청초한 도라지꽃, 경운기를 타고 간신히 주차한 곳까지 찾아 돌아온 일등. 파노라마 같은 일들이 이현수와 같이 있는 동안에 일어난 것이다.
우연한 일들이었지만 그때마다 이현수는 당황하지 않고 노련하게 대처했다. 탄복할 정도였다. 약혼자의 인생을 책임지려고 사람을 물색했다는, 그 적임자가 바로 미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미자는 얼굴도 모르는 약혼녀에 대한 질투심이 들끓어 오르는 걸 느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자를 이용하려 하다니, 그걸 알면서 그냥 속아 넘어준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런 제안을 했을 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진짜 화가 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수를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벌써 가슴 속에 이현수가 가득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이현수가 영화 속 주인공이라면? 라는, 현실을 영화로 분리해 버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엉뚱한 상상을 한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실제와 다르게 보였다. 인생을 송두리째 발목잡고 있는 미친 약혼녀를, 자신의 사후까지 걱정하는 주인공에게 어이없게도 미자는 감동한 것이다.
샤워를 끝내고 가운을 벗어 바구니에 휙 집어넣고 나와 잠자는 이현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원래 입었던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어제는 많이 취했다. 와인 4잔과 캔맥주 한 캔은 주량을 훨씬 넘은 것이다. 파도와 모래알, 갈매기, 낙조와 낮달은 미자를 느슨하고 말랑말랑하게 주물러버렸다.
보통의 다른 여자와 어딘지 모르게 자신이 다르다는 걸 확연하게 알게 되었다. 아니다. 다른 여자와 다른 게 아니라 이미 나이를 먹은 것이다. 남자 보는 눈은 없었지만 사람 보는 눈은 있었다. 이현수가 좋은 남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좋은 남자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을 원했다. 보통 여자들은 자존심이라고 내세우며 밀당도 하겠지만 밀당은 피곤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이현수를 믿었다. 그의 사람됨을 믿었다. 이현수의 눈은 적중했다고 미자는 생각했다. 자신이 죽었을 때, 자신처럼 약혼녀를 돌볼 사람으로 미자만큼 적임자는 없을 것이다. 이현수는 용의주도했다. 무서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이 일을 인숙에게 말한다면 꼴랑 만났다는 남자가 암 환자에다가 미친 약혼녀까지 책임지라고 한다고? 너, 미쳤니? 사랑은 깨뿔? 순 사기꾼이네. 널 이용해 먹으려고 사기 치는 거야. 정신 차려! 이것아. 할 것이다.
살그머니 룸을 빠져나와 1층 로비로 내려갔다. 깊은 잠 속에 빠진 이현수를 더 재우고 싶었다. 아니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창가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썰물인 바다는 아침햇살에 갯벌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그들은 햇빛에 그림자처럼 흔들거렸다. 고요한 정경이었다.
그때 인숙에게 전화가 왔다. 이현수 문제를 의논할 생각에 휴대폰을 들었을 때였다. 이현수와의 동거와 약혼녀 얘기를 말할 생각이었다. 암치료 중이라는 사실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픈 사람을 아프다고 입 밖으로 꺼내기는 싫었다. 인숙에게도.
“너, 어디냐?”
“나, 어디 좀 왔어.”
“어디?”
“영종도.”
“거긴 왜? 요즘 한가한가 보네? 누구랑 왔어?”
“너에게 지금 전화하려고 했는데 전화가 왔네. 나 남자가 생겼어.”
“남자? 누구?”
“아침 먹고 오후에 너를 만나러 갈 거야, 만나서 얘기할게.”
이현수를 보내고 인숙과 만나서 다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어제 하룻동안에 일어난 일이 현실인지 꿈속인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냐? 내가 그리로 갈게.”
“안돼, 지금 같이 있어.”
“같이 있다고? 벌써 그런 사이가 됐니? 너 그 남자라 잤니?”
“응.”
“잤다고?”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 불쌍해서 그랬어.”
“뭐? 불쌍하다고? 불쌍한 남자를 왜 만나니? 다 늙어서 책임 떠맡을 일 왜 저지르니?”
“나도 몰라.”
“어떤 남잔지 내가 봐야겠어. 내가 갈 테니 인사 시켜줘. 아닌 건 아닌 거야. 내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어.”
인숙에서 호텔 주소를 찍어 보냈다. 다시 룸으로 올라갔다. 이현수는 욕실에서 씻고 있었다. 말끔하게 면도까지 하고 나온 이현수가 말했다.
“잘 잤소? 커피 한잔하고 해변을 걸을까요? 아침 겸 점심은 이 호텔 조식 뷔페로 합시다. 메뉴가 신선하고 괜찮은 편이요.”
“좋아요. 그런데 어쩌죠? 인숙이 여기로 오겠다고 하네요. 당장 보고 싶다고요. 말려도 내 말은 안 들어요. 집이 여기서 멀지 않거든요. 한 시간 이내로 도착할 거예요.”
이현수의 얼굴빛이 잠깐 어두워졌다고 미자는 생각했다.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소. 친구는 다음에 만나면 안 되겠소?”
미자는 인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다섯 번째 울렸을 때 인숙이 씩씩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왜? 금방 가.”
“그게 아니고 아침만 먹고 좀 시간을 보내다가 너한테로 갈게. 같이 갈 테니 집에서 기다려.”
“나, 벌써 택시 탔어. 우리 사이에 뭘 내외하니? 어차피 인사시켜 줄 거 아니었니? 좀만 기다려.”
인숙의 목소리가 방안을 크게 울렸다. 이현수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김에 인숙이 집에 들러 말하려던 참이었어요. 인숙이도 재혼할 남자가 생겼대요. 곧 재혼한다고 했어요. 겸사겸사 오늘 만나려고 했거든요. 괜찮죠?”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까? 그 누구도 지금은 불청객일 뿐이오”
의외의 대답에 미자는 당황했다.
굳이 달려오겠다는 인숙을 꺾을 수는 없었다. 둘은 가방을 챙겨 자동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1층 커피숍으로 내려왔다. 커피숍에는 아까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려와 바다를 향해서 앉아 있었다.
“뜨거운 커피, 아메리카노로 두 잔 주세요.”
이현수를 쳐다보았다. 이현수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무엇을 마실지 메뉴를 묻지도 않고 두 잔을 주문했다. 마치 취향을 알고 있는 부부처럼. 지금 이현수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신히 털어놓느라 진땀을 흘리던 불쌍한 어젯밤의 남자가 아니었다. 마치 남편이라도 된 듯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고 하던데 전남편은 미자가 노력해도 1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이현수는 완전히 다른 남자가 되어 있었다. 휴머니즘에 박력까지 갖춘 이현수는 완전해 보였다.
미자는 설레었다. 가슴에 온기가 아침 해처럼 가득 차오르는 걸 느꼈다. 잠깐 스쳤던 의심과 분노는 사라지고 스무 살처럼 설레었다. 아, 이렇게 황혼 연애를 하는구나. 60에도 사랑을 할 수 있구나. 인숙은 축복해 줄 것이다. 둘 다 황혼에 재혼하고 동거를 시작하다니. 세 번째 스무 살이라고 치자. 창밖 해변을 내려다보았다. 어느 사이 아침 해가 둥실 떠올라있었다. 어제와는 다른 새날이 시작된 것이다.
이현수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저만치 호텔 회전문을 열고 인숙이 나타났다. 인숙이 테이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인숙은 택시를 타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몹시 헉헉거렸다.
“어떻게 된 거냐? 얼마나 좋으면 니가 남자랑 잔다니?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지? 남자는 룸에 있니?”
“아니야, 방금 화장실에 갔어. 곧 올 거야.”
“언제 만났니? 몇 살이니? 사별했대? 아니면 이혼남이야? 사별이 나은데, 이혼남은 문제가 있을 확률이 높아.”
“일단 모닝 커피부터 시키자.”
미자가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가 세잔 나왔다. 커피잔은 뜨거웠다. 커피에서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났다. 그때 이현수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인숙씨.”
이현수가 미자 옆자리에 앉으며 인사했다. 이현수를 본 인숙은 얼굴이 새파래졌다.
“아니, 이현수씨가, 왜, 여기에, 계세요?”
인숙의 목소리는 떨려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인숙아, 이현수씨야. 아까 말한 남자.”
“뭐라구? 이 남자라고?”
“응.”
인숙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테이블이 흔들려 커피가 넘쳤다. 물티슈를 꺼내려고 맞은편 소파에 있는 핸드백을 집으려고 일어선 미자를 인숙이 밀쳤다.
“니가 동거하겠다는 남자가 이 새끼라구?”
이현수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바로 그때였다. 인숙이 핸드백을 집어 던지고 오른손을 들어 이현수의 뺨에 따귀를 올려붙인 것은.
“이 개새끼, 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미자야, 이 새끼 정말 맞냐?”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미자는 놀라 인숙을 붙잡았다.
“인숙아, 너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넌 빠져. 난 이 새끼를 오늘 살려두지 않을 거야. 혼인빙자 간음죄로 고소할 거라고.”
인숙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미자를 떠다밀었다. 그 바람에 미자는 소파에 걸려 벌렁 자빠졌다. 엉덩이뼈가 바닥에 부딪혀 몹시 아팠다. 이현수가 미자를 잡아 일으켰다.
“왜 그러는 거야. 내가 이현수씨와 재혼한다는 것도 아닌데 혼인빙자라니? 그냥 동거하기로 했다고 말했잖니?””
미자가 인숙을 붙들어 앉히고 이현수를 쳐다보았다. 이현수는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왼손으로 만지며 자세를 다시 고쳐 앉으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뭐? 무슨 일입니까? 이런 뻔뻔한 새끼가 다 있네. 나를 농락해? 사기꾼.”
인숙이 이현수 앞에 있는 뜨거운 커피잔을 들어 이현수의 얼굴에 또 뜨거운 커피를 뿌리고 커피잔을 허공에 던져 버렸다. 커피잔은 멀리 주문 데스크까지 날아가더니 쨍그랑 소리와 함께 바닥에 부딪혀 여기저기 파편이 흩어졌다. 앗, 하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뜨거운 커피로 범벅이 된 이현수가 벌떡 일어섰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안고 셔츠와 바지에 흘린 커피를 털어냈다. 인숙이 미자의 커피잔과 자신의 커피잔을 양손으로 잽싸게 들어 이현수의 정수리에 부었다. 직원들이 달려와 타월을 가져다주고 바닥을 청소했다. 홀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인숙아, 말로 해. 무슨 일인지 말로 하라고.”
미자가 인숙을 다그쳤다. 얼굴이 새하얗게 된 인숙은 테이블 위에 그대로 엎어지더니 게거품을 물고 그대로 바닥에 발라당 나자빠졌다. 이현수가 소리쳤다.
“119를 불러주십시오, 빨리요.”
인숙은 눈을 하얗게 홉뜨고 있었다. 심장이 멎은 것 같았다. 몇 년 전 뇌졸중 증세로 병원 치료를 받는 적 있는 인숙이었다. 고혈압약 말고도 병명도 알 수 없는 많은 약들을 복용 중이었다. 미자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119가 왔다. 미자는 보호자로 구급차에 올랐다. 이현수도 오르려 했으나 소방대원들이 한 사람만 타시오, 라고 해서 이현수는 도로 내렸다.
이현수에게 속았다는 걸 알았다. 인숙과 세트로 속아 넘어간 것이다. 달콤한 언변으로 미자를 꼬드겨 동거를 얻어냈다. 미친 약혼녀까지 미자에게 떠맡기려 했다.
미자는 머리가 하얘졌다. 아, 이렇게 60이 넘어도 남자에게 속아넘어가는구나. 하지만 아무리 되돌려보아도 어느 구석 하나 조작의 낌새는 없어 보였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간적인 공감대를 쌓으며 이루어진 관계가 아닌가. 사기는 이렇게 어이없이, 당한 당사자도 모르게 넘어간다고 하더니 딱 그랬다. 선우은숙이 유영재에게 넘어간 것처럼. 재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신속하게 하라는 이혼 전문 변호사의 책 제목이 떠올랐다. 재혼을 빠르게 결정했던 선우은숙은 이혼도 신속하게 했다. 미자는 약속을 신속하게 철회하리라 마음먹었다. 자질구레한 변명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변명은 추하고 비굴함이 섞여 있을 테니까.
응급실에서 응급조치를 받은 인숙은 한참 만에 의식이 돌아왔다. 이현수의 데인 빨간 얼굴이 떠올랐다. 그 정도의 화상은 인과응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건 약과였다. 인숙은 돌연사할 뻔했고 미자는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다. 엉덩이뼈는 점점 더 아파왔다. 얼음찜질로 얼굴을 식히고 환부에 재생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면 이현수는 멀쩡해질 터였다. 이현수는 크게 당황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뻔뻔하기 그지 없었다.
인숙이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동네 망신당할 뻔했다. 다 늙어서 고작 선택한 남자가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는 천하 난봉꾼일 줄이야. 인숙이 아니었다면 아니, 오늘 인숙이 오지 않았더라면 인숙도 미자도 둘 다 큰일 날뻔했다. 남자 하나 잘못 만나 고생하는 여자들은 수두룩했다. 굳이 이 나이에 인숙과 미자까지 거기에 합류할뻔했다.
연민의 눈으로 누워있는 인숙을 바라다보았다. 다 늙어서 무슨 팔자를 고친다고 한 남자에 둘 다 빠졌을까. 동거에 들어가기 전에 인숙에게 알린 건 아주 잘한 일이었다. 하마터면 아들 볼 면목이 없을 뻔했다. 자식 얼굴을 제대로 못 본다는 것은 인생을 잘못 살아왔다는 증거가 아닌가.
인숙은 입원해서 몇 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퍼렇게 멍이 들어 있는 발목 은 인대가 파손되었다고 했다. 엑스레이 촬영 사진에는 미세한 뼛조각도 보였다. Mra 검사가 끝나고 수술 일정이 나왔다. 내일 두 번째 수술 대상자라며 간호사가 금식 팻말을 달아놓고 갔다. 인숙에게 금식만큼 무서운 형벌은 없을 터였다. 관절이 좋지 않았던 인숙은 무릎 손상까지 입었다.
인숙은 응급실 침대에 눈을 꼭 감고 누워있었다. 옆에서 간호하는 미자를 그림자 취급했다. 인숙의 딸은 병원으로 오고 있을 터였다. 내일 오전에는 2인용 입원실로 옮겨갈 것이다. 휴대폰을 열어보았다. 부재중 통화가 5통이나 와 있었다. 이현수였다. 어떤 변명도 듣고 싶지 않았다.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인숙은 눈과 입을 억지로 꾹 닫고 있었다. 진통제 효과가 나타나는지 인숙의 숨소리가 고르게 잦아들었다. 미자는 광고지로 인숙을 부채질 해주었다. 미자가 물었다. 인숙의 딸이 도착하기 전에 꼭 알아야 했다.
“네가 재혼하겠다는 남자가 이현수였니?”
인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한테 증인 서 달라고 하더니, 재혼을 약속한 남자가 이현수 맞니?
인숙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입술은 꾹 닫혀있었다. 인숙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티슈로 눈물을 닦아주는 미자의 손을 인숙이 탁 뿌리쳤다.
“미자, 너도 그러는 게 아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이현수를 좋아하는 것 알면서 어떻게 동거할 생각을 다 했니? 어떻게 그 남자와 잤냐구?””
미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정작 그 말을 할 사람은 미자였다. 절친이 썸타는 남자와 재혼할 생각을 한 인숙이 이해가 안 되었다. 재혼할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인숙은 결혼식 때 보라며 거절했다. 똥싼 놈이 성낸다고 하더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카멜레온처럼 변장하고 인숙과 미자를 오가며 재혼과 동거를 추진한 이현수는 플레이보이인가, 카사노바인가, 돈주앙인가. 그도 아니라면 여신은 물론이고 인간의 여자와도 거침없이 사랑을 나눴던 제우스의 후예인가.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상대를 만나면 동물로 변신해서 접근했다는 신 제우스. 헤라와 사귈 때는 백조로, 에우로페를 사귈 때는 황소로 변신했다는 제우스 못지않다고 생각했다.
이현수의 따귀를 때리지 못한 것은 후회되었다. 약혼녀를 돌볼 사람을 물색했다고 말할 때 속시원하게 올려붙였어야 했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어중간하게 처신해 온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인숙의 딸이 병원에 왔다. 입원 준비물을 챙겨왔는데 대형 가방에는 손풍기 두 개까지 들어 있었다. 인숙은 언제나 만 땅으로 충전된 손 선풍기 두 개를 들고 다녔다. 에어컨이 창가에 있어 쪄 죽을 것 같다고 딸에게 부탁한 것 같았다. 인숙의 폰에 와이파이를 설정 해주고 딸의 전화번호를 폰에 입력하고 병실을 나왔다. 보호자는 1명만 남아야 했다.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인숙은 병실을 나오는 미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터덜터덜 신촌역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자꾸 눈물이 나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설움이 북받쳤다. 지하철을 타려고 가로수 길을 걸어가는데 전화가 왔다. 승규였다. 요즘 뭐하냐고 물었을 때 승규는 태평하게 웃으며 말했었다. 캐시워크로 한 달에 3천 원 번다고. 걸어 다니는 앱을 깔아서 포인트를 적립해서 편의점 커피를 사 먹는다고. 인생을 농담처럼 살아가는 승규는 하늘이 무너져도 겁내지 않을 것이다.
“누나, 큰일났어.”
도로 백수로 컴백한 거 말고 더 큰 일이 있나 싶었다.
“무슨 일이니?”
“엄마가 아무것도 못 먹는다고 원장이 전화 왔어. 어떻게 하지?”
“아무것도 못 먹으면 돌아가신대?”
“누나, 어떻게 그렇게 남 말하듯이 해. 엄마가 아무것도 못 삼킨다는데 그런 말이 한가하게 나와? 어쩜 누나는 그렇게 독해? 인정머리가 없냐구.”
“나보고 어쩌라구, 내가 의사야? 내가 신이야?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넌 왜 늘 나한테 그렇게 말하니? 내가 책임을 회피한 적이 있니? 내가 모르는 척 한 적이 있니? 대체 나한테 어떡하라고 사람들은 맨날 그러는 거니? 내가 독하다고? 그래, 나 독하다. 독해서 미안하다. 독하면 나쁜 거니? 너처럼 독하지 않으면 좋은 사람이니? 난 나쁘고 넌 좋은 사람이니? 나보고 어쩌라구.”
미자는 가로수에 기대어 섰다.
“누나, 왜 그래? 엄마가 아무것도 못 먹어서 다른 조치를 해도 되냐고 원장이 묻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전화한 건데 왜 그러는 거야, 누나. 누나 말대로 연명치료는 안 한다고 했어. 의사는 직업상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대. 그러니까 음식을 먹도록 다른 조치를, 안 그러면 집으로 도로 모셔가라고.”
전화를 끊었다. 미자는 가로수 옆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하느님, 왜 저한테 이러시는 거예요? 어떻게 할까요, 예? 길을 알려주세요. 친구와 절교하면 되고 남자와 헤어지면 되고 엄마는 연명치료 해서 생명을 연장할까요? 말까요? 이런 결정은 왜 제가 해야 하지요? 인간인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인가요? 그런가요? 하느님이 해주시는 거 아닌가요?’
병원에 전화했다.
“저, 이을순님 보호자입니다. 엄마 상태가 어떤지요?”
“일단 할 수 있는 조치는 취했습니다.”
“연명치료는 안 하겠다고 써드렸는데요?”
“압니다. 환자 상태가 긴급할 때 다시 물을 수 밖에요.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해야 하는 게 의사의 의무입니다. 영양을 공급하는 주사를 놓고 당분간 더 지켜보겠습니다.”
“제 생각은 몸의 기능이 다 했을 때 이물질을 투여하는 것은, 환자를 괴롭히는 것이 아닐까요? 엄마에게 편안할 방법을 알려주세요. 자연스러운 방법을요. 원장님 어머니라고 생각하시고 제발 저에게 좋은 방법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두 달 정도는 음식을 섭취할 수 있는 상태로 돌아오겠지만 또 이 상태로 되돌아올 겁니다. 우리가 하는 조치는 피할 수 없는 조치입니다.”
한고비를 넘었다는 말에 미자는 안도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별볼 일 없는 일상이지만 되돌아와 준 일상이 고마웠다.
첫댓글
나를 밝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
나를 따뜻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것,
그것은 사랑입니다...........................................
@박현환 작가
저도
힘 찬
박수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