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3장21- 30 유다를 향한 초대 240310 원주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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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장 21절부터 30절까지의 거룩하신 말씀을 봉독하여 드립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 있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더라. 아멘.
Ⅰ. 영혼과 육체의 균형: 밀림 속의 가르침
한 선교사가 밀림을 뚫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목적지까지는 대략 사흘이 소요되는 거리였으며, 길 안내와 짐 운반을 위해 원주민 세 명을 고용하여 함께 등짐을 지고 험한 밀림을 헤쳐 나갔습니다. 이틀쯤 지났을 무렵입니다. 제대로 쉬지도 자지도 못한 채 강행군을 이어오던 중, 원주민들이 갑자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더는 발걸음을 떼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위협도 해보고 빨리 가자고 재촉하며 돈을 더 주겠다 제안하였으나, 원주민들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원주민들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길을 오느라고 한 번도 쉬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여기까지 당도하였으나, 우리 영혼은 너무나 지쳐 우리를 따라오지 못하고 저 뒤에 처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줄 시간이 필요합니다."
선교사는 그 말을 들으며 참으로 묘한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너무나 분주하고 바쁘게 살다 보니 정작 중요한 가치들을 놓치고 살지는 않습니까? 특별히 현대인들은, 심지어 예수를 믿는 사람들조차도 영혼과 육체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 시간, 잃어버린 그 균형을 되찾게 되는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임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영혼과 육체의 밸런스를 놓치게 되면 겉모습은 멀쩡해 보일지라도 속은 텅 빈 사람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마음속에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과 영혼의 평안함,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놀라운 은혜와 죽음을 뛰어넘는 능력, 그리고 죄를 이겨내는 성령의 능력을 모두 망각한 채, 그저 세상의 물결이 흘러가는 대로 떠내려가는 가련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Ⅱ. 타종교의 성찰의 시간: 하안거(夏安居)와 동안거(冬安居)
불교에는 '하안거'라는 수행 전통이 있습니다. 본래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는 여름철 기온이 너무나 높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 시기에 하안거를 선포하고, 스님들은 암자에 머무르며 정좌하여 자신을 정진하고 돌아보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습니다. 잠시 쉬어갈 때 제대로 쉬어가자는 취지입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겨울이 추운 나라이기에 주로 겨울에 수행에 정진합니다. 농한기가 되었을 때, 그 추운 날씨를 정진의 기회로 삼아 바깥의 시주를 끊고 절을 방문하는 이들조차 사절하며 '사문폐쇄'를 단행합니다. 그 안에서 오로지 자신을 성찰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동안거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성찰의 시간은 비단 승려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옛 조선 시대의 선비들 또한 관직에 나아가 국정을 돌보다가 마음이 분요해지고, 그 일상 속에서 유학자로서의 중요한 가치를 잃어버렸다고 판단될 때, 혹은 성현의 가르침에서 멀어졌다고 생각될 때 안거를 자처하였습니다. 그들은 상소문을 던져두고 고향 마을로 향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어린아이들에게 사서삼경을 가르치며 '공자 가라사대, 맹자 가라사대'를 읊조리고, 스스로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 어긋난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은가 치열하게 성찰하였습니다. 그러다 다시 나라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그제야 비로소 유학자의 길, 관리의 길을 온당하게 걸어갈 준비를 마친 채 국정의 현장으로 복귀하였던 것입니다.
Ⅲ. 이판사판의 혼란과 사순절의 영성
평상시 스님들은 '이판승'과 '사판승'으로 나뉩니다. 이판승은 참선과 경전 공부에 매진하며 종교적 열정을 불태우는 이들이고, 사판승은 절의 살림을 돌보고 시주를 받는 등 행정적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이 이판과 사판의 경계가 무너지고 뒤섞여버리면 그것을 '개판'이라 부릅니다. 수도에 전념해야 할 이판승이 시주받은 돈에 눈이 멀어 본분을 잊으면 정기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서가 뒤섞인 혼란스러운 상태를 일컬어 '이판사판'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 또한 세상을 살아가며 이러한 고비를 맞이합니다. 세상의 돈벌이와 가정사, 사람 사이의 복잡한 관계 속에 얽히고설키다 보면 신앙의 끈이 느슨해지고 마음이 녹슬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본질을 잃어버리면 우리 인생은 이판사판, 그야말로 무질서한 상태가 되고 맙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고 신발 끈을 조여 매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 의미의 안거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거룩한 시간인 사순절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의 그 고난의 시간을 묵상하며, 마치 안거 수행을 하듯 우리의 영혼을 추스르는 것입니다. 특히 고난주간은 내 영혼을 깊이 성찰하는 절정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안거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온전히 풀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Ⅳ. 목욕할 사람과 세족할 사람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한 주간 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세족의 예식을 행하셨습니다. 세족에는 두 가지 영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목욕'입니다. 이는 영혼이 완전히 거듭나는 사건으로, 단 한 번의 은혜로 깨끗함을 입는 시간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첫사랑을 경험한 이들이 누리는 근본적인 은혜입니다. 둘째는 '세족'입니다. 이미 거듭난 자라 할지라도 세상을 살다 보면 죄의 먼지가 묻기 마련입니다. 그때마다 손발을 씻고 세수하며 단장하듯 영혼을 정결하게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세족에 비유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의 외형적 삶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똑같이 땀 흘려 일하고 식사하며 수고로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예배에 있습니다. 예배의 핵심은 바로 영혼의 정결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 자리에 풀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3장 10절에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난 자는 날마다의 회개를 통해 발을 씻으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동시에 슬픈 진실을 선포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Ⅴ. 가룟 유다의 실체와 성령의 견인
주님의 말씀 중 "다는 아니니라" 하신 그 한 사람은 바로 가룟 유다를 지칭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에서 재정을 맡을 만큼 유능하고 명민한 자였으나, 정작 그 영혼은 피 묻은 십자가 앞에서 단 한 번도 거듭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주여, 발뿐만 아니라 온몸도 씻어 주옵소서"라고 간구했던 베드로처럼 고백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침묵하였고, 주님은 괴로운 심정으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재차 경고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죄를 지적하시는 이유는 판사처럼 벌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함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자에게는 성령께서 끝까지 이끄시는 '성도의 견인'이 있습니다. 우리가 낙심하여 주님의 손을 놓칠지라도, 주님은 결코 우리 손을 놓지 않으시고 손목을 꼭 잡고 가십니다. 어느 집사님은 신앙을 떠나 산 지 오래되었으나, 예배당 종소리나 찬송가 차임벨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어서 돌아오오"라는 찬송 소리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그분 안에 계신 성령님이 알람처럼 작동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도 우리 손목을 잡고 계십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그 손목조차 잡히지 않은 자였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배신할 자를 향해서도 마지막까지 사랑을 베풀며 회개의 기회를 주셨으나, 그는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Ⅵ.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초청과 도전
가룟 유다에게는 지난 3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회개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돈궤에서 사욕을 채울 때 양심이 가책을 느꼈던 순간도,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헌신적인 모습을 목도했을 때도 주님의 부르심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떡 한 조각을 적셔 유다에게 직접 건네십니다. 이는 유다를 향한 주님의 마지막 사랑의 액션이었습니다.
존 칼빈이 주창한 '영적 임재설'에 따르면, 성만찬의 떡과 잔을 나눌 때 그 자리에 성령께서 임재하십니다. 물리적인 떡을 먹는 것 같으나 실상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정결의 역사와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팔아넘길 유다의 입에 친히 떡 조각을 넣어주셨습니다. 그 거룩한 떡과 함께 성령의 감동이 유다의 육체 안에 임하였습니다. 이때 유다는 마땅히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주 보혈 흘렸네"라며 눈물로 찬양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합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에게는 믿음의 선택이 요구됩니다. 유다는 은혜를 붙잡는 대신 자신의 죄성을 따르기로 선택하였습니다. 이미 그를 지배하던 사탄이 그를 더욱 강력하게 사로잡은 것입니다. 주님은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분노의 저주가 아니라, 주님이 하실 일을 다 하신 후 유다의 자유의지에 맡기시는 마지막 권면의 슬픈 메아리였습니다. 유다는 그 떡 조각을 받고 곧 밖으로 나갔습니다. 성경은 그 시간을 '밤'이라고 증언합니다. 은혜의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인생의 영적 어두움을 상징하는 밤이었습니다.
Ⅶ. 십자가 앞에 정직하게 직면하십시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박차고 나가는 안타까운 인생들이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주를 찬양하던 자가 은혜의 자리를 멀리하며 방황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립니다. 하지만 여러분,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 영혼에 보혈의 능력은 오늘도 역사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라 예수 보혈의 권세로 이루어지는 실재입니다.
여러분의 내면에 어떤 고통과 괴로움이 있습니까? 십자가 앞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고, 치유 받지 못할 아픔이 없으며, 깨어지지 않을 사탄의 결박이 없습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십자가 앞에 정직하게 서는 회개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 곁에서 수많은 은혜를 목격하고 섬겼으나, 결국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다"는 비극적인 평가를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가슴 아픈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피 묻은 십자가의 능력을 온전히 덧입어 여러분의 영혼이 새롭게 거듭나고 삶의 자리가 치유되는 복된 역사가 일어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결론] 축복의 기도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날마다 보혈의 능력을 덧입고 십자가의 은총 안에서 승리하는 저희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묵은 허물을 벗겨 주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남은 인생이 넉넉한 이김과 승리의 역사가 가득하게 하옵소서.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그 사랑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주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지금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내주 교통 역사하심이,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며 정결한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여기 모인 모든 성도와 그들의 가정, 자녀들의 앞날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