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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후강해(마지막)
때마다 일마다
살후3:16-18
지난 한 주간 예수님 때문에
여러분의 삶의 중요한(사소한 것이라도)
선택이 달라지신 것이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는 누구나 신실한 성도...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관심과 사랑>....
우리는 그 동안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통해
그 교회가 처한 상황과 그 교회를 향한 ...
사도 바울의 관심과 사랑을 엿 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불과 3주간 데살로니가에서 선교를 했음에도
그 교회는 아름답게 성장하였습니다(회당과 야손이 집).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급히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바울의 마음에는 늘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떻게든 다시 데살로니가를
방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되질 않았습니다(살전 2:17-18).
왜 길이 막혔는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다”고 극단적 표현을
쓰는 것으로 보아 매우 절망적인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바울은 대신 디모데를 보냅니다.
자신이 없는 동안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서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로 파송한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고린도를 향해 갔는데
거기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행18:2).
바울은 이 부부의 도움으로 천막을 지으며
고린도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마음은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궁핍한 상태였고,
지금까지 했던 모든 선교활동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몹시 괴로운 상태였습니다.
이 때 데살로니가로 갔던 디모데가 돌아와
그에게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 가운데 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얼마나 기뻤던지
그 감격스런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살전3:7-9>
7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8절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9절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참 목회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감격에 겨워 그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전서입니다
((A.D. 51년경,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책).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 대한 권면과
경계도 들어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한 기쁨과
칭찬, 감사와 애정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살전1:2-3)로
충만한 것을 칭찬합니다.
그 소문에 각 처에 퍼져(마게도냐와 아가야)
좋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살전2:13)
때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얼마 뒤에 두 번째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이 이 두 번째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첫 번째 편지와는 달리....
데살로니가 교회에 뚜렷한 경계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임박한 재림을 핑계로
잘못된 행동을 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살후 2:2).
게으르게 행하면서 일만 만들기만 하는,
즉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해를 가져오는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살후3:11).
주의를 주었지만 교정되지 않자
두 번째 편지를 통해 강력하게
그들과의 교제를 끊고 권면하여
돌이키게 할 것을 명령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교제를 금하지만(6절 “떠나라”),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15절)고 가르치십니다.
<때마다 일마다>....
이제 바울은 두 번째 편지를 마치면서
마지막 인사를 남깁니다.
16절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때마다”는 “항상” 또는 “끊임없이”라는 뜻으로
모든 시간을 포괄하는 의미입니다.
“일마다”는 “모든 점에서”
또는 “모든 환경에서”라는 뜻으로
우리의 공간을 포괄하는 의미입니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가 사는 모든 일상 속에서의
평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강이 가능합니까?
세상 속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주변의 현실을 보십시오.
세계적으로는 작종 전쟁과 테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중동의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리아 내전은 끝을 알 수 없고, ....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IS)은 테러를
부추기고 일삼습니다.
끝없이 밀려드는 난민 문제로
유럽은 하나의 공동체로 살아가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국수주의와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실제로 영국은 유럽연합에서 뛰쳐나갔습니다.
프랑스의 니스에서는 한 트럭이 프랑스 혁명을
기념하는 축제장소를 덮쳐 80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터키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났다가 진압되었습니다.
미국도 흑백갈등으로 혼란스럽습니다.
백인 경찰이 흑인 운전사를 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이 페이스북으로 중계되자,
시위가 일어났고 그 와중에 이라크 파병 되어
훈장까지 받은 전직 흑인 병사가
백인 경찰을 조준하여 쏘아..
5명의 백인 경찰관이 죽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 흑백갈등이 최고조에 달해 있습니다
(우리 교민들이 새우등이 터질까 걱정).
일본은 전쟁 가능한 국가가 되려고
평화 헌법까지 고칠 태세입니다.
중국과 필리핀 등 남아시아 국가들(미국)과
동중국해 관할권을 둘러싸고
전쟁을 불사할 태세입니다.
국내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은 여전히 핵과 미사일로 무장하고 있고,
남한은 사드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전쟁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또한 장기 불황이 전망되는 가운데
성도님들의 일터와 가정은 안전합니까?
어디 “때마다 일마다”,
곧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이 있습니까?
그저 불안하고, 근심이 생기고
두려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이
다 성경에 예언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세에 일어날 징조를 설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4:4-14>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절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절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절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절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절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절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절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즉 세상이 말세로 갈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믿음을 지키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때마다 일마다” 평강할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그런데 주목할 것은 오늘 본문을 기록하는
바울이 살던 시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입니다.
심각한 핍박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미 사도 바울도 경험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16절에서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16절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즉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실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부분에서도
“평강의 주께서 친히”라는 주어를 달았습니다.
이 평강은 우리 안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십니까?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주십니다.
성도에게 가장 좋은 것은 주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부활하신 주께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을 통해 이 약속은 성취되었습니다.
어떤 위험 속에서도 어머니의 품속에 있는
아이는 담대하고 평안합니다.
그 평안은 그 아이의 내면에서
스스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을 느낄 때 오는 평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의 약속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는다면....
“때마다 일마다”, 곧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평강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평생 15분 이상 걱정이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본 적이 없다.
두려움이 엄습할 때면 ....
으레 두 눈을 감고 여전히 보좌에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면 그 분이 나의 만사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이 나를 휘감는다.”
<주님께서 주는 평강의 의미>...
그럼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강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평안을
‘끼치겠다’,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지셨던 평안을 믿은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육신생활을 살펴보면
아무리 보아도 그가 결코 평안한 생활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실 만큼 불안정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의 삶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마굿간에 나시고, 어려서 애굽에 피난살이하셨고,
갈릴리 나사렛 가난한 목수의 집에서
어릴 때부터 수고스럽게 목수의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전도하시는 동안에도 많은 고생을 하시고
핍박을 받으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일생을 회고해 볼 때 육신적인 면에서는
결코 평안한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평강을 누리며 사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한 뜻을 이루어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평안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상대적인 평안’이 아니라....
상황을 초월한 ‘절대적인 평안’,
곧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을 누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고”,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 안에서 나오는 평안이 아니라
주님께 함께 할 때 얻어지는
선물로서의 평안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세상이 주는 평안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이고 조건적입니다.
세상에서 얻게 되는 평안은
힘으로 유지되는 평안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절대적인
힘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눈에 들고,
거기서 한 자리를 차지해야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평안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뜻의 ‘팍스 로마나’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평안이 아닙니다.
힘으로 유지 되는 평안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힘의 공백이 생기면 언제든지 사라져버리는
안개와 같아서 일시적입니다.
영속적이지 못합니다.
요사이 우리는 한 힘 있는
검사장(진경준)의 추락을 보고 있습니다.
한 때 권력과 명예와 돈을 다 가졌다고
자부하며 살았겠지만
지금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검찰 조사 중 불안 증세를 보여(극단적인 행동을 할까봐)
조사 현장에서 바로 체포하였답니다.
또한 인간의 육체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느낄 수 있는 평안이라 조건적입니다.
그에 비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신다는
믿음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그리고 이 평안은 최후 승리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영원한 평안입니다.
지금 당장 여기에서는 가시적인
평안이 없다하더라도 ...
하나님의 최후 승리에 대한 확신과
신뢰로 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갈 뿐 아니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신앙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해주신다는 확신과
하나님께 주신 꿈을 하나님께서 끝내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최후 승리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은 외부적인 조건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일시적이지도 않고,
조건적이지도 않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신다는 약속을 부여잡고,
최후 승리를 확신할 때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여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이제 바울은 마지막 친필 싸인과
축도로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17절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갈6:11, 고전16:21, 몬19절)
18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로써 데살로니가 전후서 강해를
마무리 짖습니다.
저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우리 금산교회의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살전1:2-3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
그러지 위해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살전2:13)
더욱 말씀에 굳게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재림의 그날이 다가올수록 ....
게으르지 말고 더욱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최후 승리를 기대하면서
주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시며.....
날마다 담대한 삶을 살아가시는 .....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