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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람도 모르는 ‘라인강의 기적’
‘라인 강의 기적인가?', '경제적 기적인가?'
우리는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을 참 많이 들어왔고, 지금도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독일에는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은 없다. 이 말의 내용은 라인강과 루르 지방의 ‘경제기적(Das Wirtschaftswunder an Rhein und Ruhr)’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 이후 폐허 상태와 다를 바 없었던 서독이 1950년대에 보여준 급속도의 경제 성장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1960∼70년대의 경제 발전을 비유하는 ‘한강의 기적’ 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하는 동기가 되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경제 성장을 그냥 ‘경제기적(Wirtschaftswunder)’이라고만 표현한다. 한국인들이 ‘한강의 기적’이라는 용어와 유래를 독일인들에게 소개할 때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말을 빗대면 그런 말을 처음 듣는다는 독일인들이 많다. 영미권에서도 ‘miracle on the Rhine’이라는 표현이 쓰이기는 하지만 보통 독일어 ‘Wirtschaftswunder’를 그대로 차용해서 쓴다.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은 우리가 쓰는 다분히 자가 선전적인 ‘한강의 기적’에 빗대어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한다. 당연한 말인 줄 알지만, 독일인들을 접촉해보면 그들이 ‘라인강의 기적’이란 단어는 생소하게 생각하고 그냥 ‘경제기적’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라인강의 기적’은 한국 사람들이 자기만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어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뜻하는 ‘한강의 기적’이란 표현을 돋보이게 만들려고 독일의 경제성장에 빗대어 부르기 위한 한국식 표현이다.
독일인들은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을 안 쓰고 ‘경제기적(Das Wirtschaftswunder)’이라고 한다. 최근에 들어서야 한국을 비롯한 일부의 학자들이 ‘das Wunder am Rhein(The Miracle on the Rhine)’라고 쓸 뿐이다. 왜냐하면, 기적이란 말이 그들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경제부흥을 한 것이지만 패전 전에는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막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선진적 사회기반시설과 정책 추진능력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패전 후에도 경제적 부흥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중 연합군이나 패전국이나 미국을 제외하고는 전쟁의 피해는 엄청난 것 이었다. 전후 참전국들이 경제부흥을 위해 경쟁적으로 정책 집행을 했는데 전승국이나 패전국이나 경제회복 기간은 대체로 비슷하다. 하지만 전승국의 경제부흥은 기적이라 하지 않는다. 패전국이 패전의 피해가 더 크지만, 정책수행능력은 비슷하기 때문에 경제회복기간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전승국에 대해서는 기적이란 말은 안 붙이고 패전국인 독일에만 붙이는데 사회전반적인 기적이란 표현인 ‘라인강의 기적’보다 ‘경제기적’ 이라고 하는 것 같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주택의 20%가 파괴되었고 1947년 산업생산은 1938년 수준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1947년 1인당 식량 생산량은 1938년의 51% 수준에 불과했다. 1947년 겨울에는 기아로 인한 수천 명의 사망자에 대한 항의가 있었다(1947.3.31.). 1945년 패전 후 독일은 배급제를 시작하는데 독일인들은 배고파 귀중품을 식량으로 바꾸면서 살았다. 도시인들은 모든 귀중품을 농촌에 가서 식량과 바꾸고 도시상점은 텅텅 비었다. 그 사이 미군들은 배고픈 독일인들에게 식품을 팔기 시작하고 미국인들은 이를 통해 이윤을 확보하여 미국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더구나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제국 마르크가 화폐가치가 없어 골동품 등 사치 희귀품을 모두 미군들에 헐값에 넘기면서 식품이나 공산품과 교환하였다.
또한 독일은 배상금을 영국, 프랑스, 소련에 배상하였고, 산업 시설은 해체되었으며 강제 노동에 배치되며 석탄을 빼앗겼다. 독일의 생활수준은 1932년대로 후퇴했다. 연합군에 대한 독일의 전후 ‘산업 구축’ 계획에 따라 독일 전역 또는 일부 영역에서 산업시설 해체가 이루어졌다. 1946년에 서명한 독일 최초의 계획은 1500개의 공장이 해체되어 1938년의 50% 수준으로 낮아졌다. 1951년에야 서독에서의 독일 산업시설 해체가 끝났다. 1950년 706곳의 공장이 해체되고, 철강 생산 능력은 67억 톤이나 감소했다. 독일은 항복 직후 2년 동안 미국과 영국에게 가져갈 수 있는 한 모든 ‘지적 배상’ 프로그램으로 모든 기술 및 과학 노하우, 특허를 가져갔다. 이를 포함한 모든 배상금은 약 10억 달러에 달했다
경제적 기적의 배경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 이후 서독은 1948년에 시작된 소위 ‘경제적 기적’으로 반등했다. 1950년과 1960년 사이에 서독 경제의 실질 생산량은 두 배 이상 증가하여 10년 동안 연평균 거의 8%의 성장률을 보였다. 이 놀라운 경제성장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는데 주요한 몇 가지만 살펴보자.
일시적인 요인 중에서 많은 수의 실업자(제대군인 및 실향민)가 고용주의 손에 상당한 투자 잉여금을 남긴 보수의 비율로 자신의 삶을 재건하고 싶어 했고 기꺼이 열심히 일하였다. 전후수습정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난민 정책이 있다. 1950년까지 서독은 오데르-나이세 선(Oder-Neisse line,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연합국에 의해 생겨난 폴란드-독일의 경계선이다. 이 선으로 독일 영토의 많은 부분이 폴란드로 넘어갔고 15년간 독일과 소련 사이에 일어난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동쪽 지역에서 450만 명이나 되는 독일인들의 새로운 생활의 본거지가 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동유럽 국가들에서 온 340만 명의 독일인, 동독으로부터 150만 명의 독일인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러한 난민들의 존재는 서독에 큰 사회적 부담을 주었지만, 그들의 동화는 의외로 쉽게 증명되었다. 많은 난민들은 숙련되고, 진취적이며 적응력이 뛰어났으며, 그들의 노동력은 서독의 경제 회복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전후 주요 정책으로는 1948년에 실시한 화폐 개혁과 물가 통제철폐가 크게 기여하였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d) 독일 경제부총리 시절 친시장적 경제개혁이 부활의 주요 원인이었다. 경제학자 빌헬름 뢰프케(Wilhelm Röpke)의 아이디어에 영향을 받은 에르하르트는 독일 마르크를 새로운 독일 통화로 도입한 급진적인 화폐 개혁을 통해 초인플레이션에 처음으로 대처했다. 그는 또한 몇 가지 필수품의 생산을 저해했던 전쟁 시간의 가격 통제를 해제하였다. 그의 정책은 생산 수단을 주로 자유 시장에 맡기고 시장 체제가 가격과 임금 수준을 정할 수 있도록 했다. 정부는 이윤 추구에 의해 창출된 부의 공평한 분배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로 사회 정의를 증진시켰다. 이러한 정책 아래, 산업 생산량은 급속히 회복되고, 생활수준은 꾸준히 상승했으며, 이어서 정부는 모든 배급제를 폐지하면서 서독은 ‘경제적 기적’이란 평판을 듣게 되었다.
독일의 재건은 무엇보다도 유럽의 경제 회복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인정하고 ‘새 질서에서는 유럽에서 안정적이고 생산적인 독일의 기여가 필요하다’고 정책적 선회를 하였다. 1946년 중반부터 독일은 GARIOA 프로그램( 미국의 점령지역 관리와 구호기금(GARIOA, Government and Relief in Occupied Areas)을 통해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특히 전후 경제회복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1948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Marshall Plan(1948∼1952)인데 전쟁으로 피폐해진 유럽을 재건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서독은 마셜 계획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은 1947년 6월 5일 하버드대에서 강연하면서 마셜계획이란 유럽 부흥방안을 발표하였고, 1948년 4월 3일 의회의 승인 후 유럽 부흥방안에 서명하고서 집행이 시작되었다. 서유럽 각국은 경제합작조직을 세우고 미국의 지원으로 자금과 기술설비와 식량원조 등의 원조를 받아 130억 달러를 경제회복에 투입한다. 이 계획이 종결 시 서유럽국가 중 독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국가들이 전쟁 전의 경제로 회복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정책과 정책 집행자의 정책수행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새로운 서독 정부의 시장 친화적인 정책 하에서 성장은 계속되었다. 에르하르트는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콘라드 아데나우어(Konrad Adenauer) 총리 밑에서 경제부 장관이 되었다. 아데나우어 내각의 경제 장관으로서 루드비히 에르하르드는 사회 시장 경제로서 경이적으로 성공적인 부활의 길로 연방 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경제기적의 평가
누가 무어라 하더라도 ‘경제적 기적’은 자유경제의 결과이다. 1970년대 이전의 독일 경제가 고도성장을 구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답은 명확하다. 그것은 자유경제이다.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라인강의 기적은 개인적 자유와 자유경제의 결과였다. 1950년 이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는 독일의 역사에서 경제적 자유와 기업 활동의 자유가 가장 잘 보호된 시기였다. 독일인들은 이 시기에 과거 어느 때도 누려 보지 못한 광범위한 자유를 누렸다. 거의 모든 부문을 자유와 경쟁의 원리에 따라 조직하는 시기였다. 기업 부문은 물론 노동 부문, 심지어 교육 부문까지도 그랬다.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최소한에 그쳤다. 기업들의 경제활동 자유가 광범위하게 보장되었다. 노동조합은 친목 단체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힘이 없었다.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개별적인 계약이 지배적이었다. 노동시장은 노동 공급을 신속하게 흡수할 수 있을 만큼 유연했다. 주주의 권리나 오너의 재산권은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모두가 자신의 미래와 가족의 삶을 스스로 책임진다는 태도가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복지국가의 정책도 지극히 미미했다. 소득 재분배도 아주 약했다.
서독은 프랑스와 영국보다 마샬 플랜의 원조를 훨씬 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그 나라들을 앞질렀다. 바로 이 시기를 ‘경제적 기적’의 시대라고 한다. 전후, 유럽의 경제는 파괴된 산업 인프라로 인해 70%나 감소했다. 소련의 재산 피해는 1710개의 도시, 7만 개의 마을, 3만 1850개의 산업 시설이 완파 또는 반파되었다. 전쟁 후 전 세계적으로 피해 정도는 컸으나 대부분 매우 빠른 경제 회복 속도를 보였다. 서독에서는 연합군 점령 첫해 동안 경제가 침체되었으나, 1950년까지 성장률을 두 배로 올리면서 경제기적이란 현상이 나타났다. 이탈리아는 전쟁 후 매우 경제가 극빈했으나 1950년대 이탈리아의 경제 성장은 고도화되었다. 프랑스는 모네 계획(제2차 세계 대전 후 피폐한 프랑스 경제를 부흥하기 위하여 모네(Jean Monnet)가 창설한 산업 부흥 4개년 계획) 아래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대조적으로, 영국은 전쟁 후 경제가 파멸적인 상태에 있었으며 수십 년 동안 경제 하락을 겪게 된다.
독일의 경제기적은 전후 시대적인 조류와도 무관하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73년 오일 쇼크 이전까지의 시기는 ‘자본주의의 황금기’(Golden Age of Capitalism)라 불릴 정도로 전 세계적인 경제 호황기였으며, 이 시기를 일본에서는 ‘전후 경제기적’, 타이완에서는 ‘대만기적’(台灣奇蹟), 프랑스에서는 ‘영광의 30년’(Trente Glorieuses), 이탈리아에서는 ‘경제기적’(il miracolo economico)이라 표현한다. 독일 역시 이 시기에 고도성장을 이루었으며, 두 차례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서 폐허가 된 국민경제를 일으켜 경제 대국으로서 발판을 마련했다. 어쩌면 아무리 전쟁의 피해가 심하더라도 이미 축적된 인간자본과 개발능력의 발휘되는 기간과 경제부흥의 시기는 무관하지 않다. 그래프에서 보듯이 종전 후(1945~1960)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모두 10년에서 15년 사이에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 이는 이미 전쟁 전 수준의 인적개발능력과 경제개발능력이 회복된 것이라 볼 수 있다. [2021.4.28]
[참고자료: 심의섭, 곰곰이 생각하는 隨想錄 3, <우민화의 떡밥, 노답의 타령>, 한국문학방송, 2021.10.5.: 59~70]
연도별 1인당 GDP 국별 비교(1990 G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