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유감
윤옥자
눈부시게 찬란한 아침 해가 떠오를 때마다 해에게 독도 안부를 묻는다.
내 피붙이 하나 멀리 두고 있는 듯 안쓰럽고, 동해바다 한 가운데 우리의 수호신처럼 외로이 우뚝 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를 맞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96번지, 우편번호 799-805.
1500여년(신라지증왕13년부터) 동안 울릉도 어민들의 생활공간인 독도. 지금도 우리 조상들의 혼이 살아, 주권이 실효적으로 미치고 있고, 우리 후손들이 영원히 살아갈 독도.
겉으로 보기엔 여의도광장의 반 정도로 187.453제곱미터이다. 그러나 그 속엔 150조원이 넘는 <불타는 얼음산>을 끌어안고 있다. 매탄하이드레이트 구조1호는 국내 가스 소비량 30년 분인 6억 톤이 넘는다.
독도는 450 만 년 전부터 울릉도 제주도보다 먼저 태어나 바다의 온갖 외로움 혼자 곰삭인 참으로 장한 섬이다.
바다 속 2000m 거대 화산체 위의 돌출 섬의 작은 점인 바닷물 위의 독도는 동도 서도와 89개의 암석 군으로 이뤄져 있다.
독도 주변 바다 속에는 거대한 해산이 셋이 더 있어, 독도 왼쪽엔 <안용복 해산> 오른쪽엔 <심흥택 해산> 그 옆엔 <이사부 해산>이라고 2005년 한국해저지명 위원회가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800m 밑 독도심층해류도 발견했다. 특히 심층에선 독도 주변에서 최대 초속 28.47센치미터로 북쪽을 향하는 강한 해류가 새로 발견 됐다. 독도가 얼마나 기뻤을까?
아마 독도는 출렁이는 파도마다 너털 웃음 흠뻑흠뻑 쏟아 부었을 테다
“독도야, 이제는 대한민국이 과학으로 너를 지켜 줄게다.”
왜 내 눈에 이렇게 뜨거운 액체가 맺힐까?
고려 태조 13년엔 울릉도 사람들에게 벼슬도 내리고 ,의종 11년엔 강릉의 창고 감독관 김유림에게 울릉도를 시찰하게 하는 등 개척하려고도 했다. 다만 명종 때의 공도정책 시행과 태종 16(1416)년에도 주민 80 여명을 육지로 쇄환하고 태종 18년에도 공도정책을 실시했지만 고려시대 중기까지도 울릉도 독도를 잘 다스렸다.
고려말기 무인시대와 몽골의 침공으로 국력이 어지러워 죽을 지경에 여진족과 왜구들이 울릉도에 노략질을 했다. 결국 조선시대 까지도 공도정책을 실시했다.
그 무렵 즉 1617년 조선 광해군 9년에 일본의 오오타니,오야가 자기나라로 돌아가다 폭풍을 만나 울릉도에 표류하게 되었다. 큰 나무들과 짐승들 어패류가 무진장 있는 것을 보고 눈이 뒤짚혔다. 대접만한 점복이 너무나 탐이 나 돌아가자마자, 다른 선주 무라가와와 주인 없는 섬이니 꿀꺽하자는 작당을 하고,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 기관인 강호 막부 무사 정권에게 도해 신청을 냈다. 도해 신청을 낸 것은 울릉도 독도가 자기네 땅이 아님을 인정한 셈이다. 1618년에는 울릉도 도해 허가를 내고, 1661년에는 독도에 갈 수 있는 도해허가를 얻어 둘이서 1년씩 번갈아 가며 74년 간이나 재미를 봤다.
이렇게 오래도록 남의 것을 훔쳐 먹었으면 부끄러운 줄이나 알고, 미안함이라도 느껴야지, 배은망덕도 푼수가 있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다니, 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숙종 18년 (1692) 3월 27일 조선어민 일본어민이 울릉도에서 충돌하고, 숙종 19년(1693) 안용복의 1차 도일로 숙종 22년 (1696) 1월 28일 일본 에도 막부에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도해 금지령을 내렸다. 안용복이“울릉도 독도는 한국땅”이란 문서를 든 동상이 부산 수영공원 정상에 있다.
독도가 우리 땅인 증거는 일본지리학자 히야시 시해이가 1785년에 그린 삼국접양지도, 일본 기무라가 1882년에 작성한 동판조선국전도다 그리고 행기라는 일본 승려가 7세기 무렵 일본열도를 다니며 최초의 일본지도를 만든 인물인데, 그의 지도에 “안도(독도-기러기가 사는섬이란뜻)는 사람이 살지 않고, 신라 땅이며,신라는 566국으로 형성돼 있다”.는 기록이 있다. 더 중요한건 18세기 일본지도도 독도는 조선땅 임을 인정했다.
일본인이 제작한 지도는 물론이고 현종 8년 (1840) 김대건이 제작한 조선전도에 우산도(독도)가 울릉도 동쪽에 표기 되어 있다. 요약하면 조선 숙종때 안용복이 일본어민을 울릉도에서 축출하고, 일본 까지 가서 울릉도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 시켰다.고종 18년인 1881년에 독도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정부에서 울릉도에 주민 이주를 장려하였고, 대한제국시대에 울릉군으로 승격 시켜 독도까지 관할하게 하여 대한제국칙령 41호로 세계에 알렸다. 1900년엔 우리 관보에 개재하였다. 그런데 러일전쟁시 1905년 2월에 일본은 독도를 시네마에 편입하고 다케시마라는 명칭으로 자기네 땅이라는 망언을 하고 있다. 그래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전하여 1948년 12월 12일 국제연합으로부터 그 영토와 주권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아 독도와 울릉도는 우리 품에 돌아왔다.
“일본의 독도 고유 영토론 주장은 터무니 없는 속임수.” 란 나이토 교수의 주장은 그의 10년간 독도를 연구한 근거 있는 참으로 소중한 논문이다.
“분명히 에도막부는 1696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확인해 일본어부들의 출어를 금지했는데 어찌하여 외무성은 일본 에도막부 초기인 17세기 중엽에 다게시마 영유권을 확립했다고 주장하는지 웃기는 일이다.”란 그의 말에 큰 박수를 보낸다, 통쾌하다.
메이지 정부의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이 독도와 울릉도가 일본 영토인지 조사한 뒤 1877년 3월 “독도와 울릉도는 일본 영토와 관계 없으니 조심하라.”고 내무성과 시마네현에 지시한 공문서인 태정관 지령문의 근거도 있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동물세계의 약육강식과 인간세상의 이웃사촌이란 말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번갈아 가며 씁쓸한지 모르겠다.
이진명 파리대 교수가 낸 <독도 지리상의 재발견> 개정판에서 독도가 역사적으로 우리땅임을 입증하는 새로운 지도 4개를 국내 최초 공개 했다.
이 4개의 지도는 1550~1600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전도, 17세기 후반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 프랑스 라루tm 출판사가 발간한 1959년판 세계지도책, 내셔널지오그래픽 지도중 최초로 독도 명칭을 표기한 1971년판 아시아 지도, 모두 이진명 교수가 프랑스 국립도서관과 고문서 보관소등을 뒤져 그 사본을 직접 구입한 것이다. 제목 없는 조선전도는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e)의 수집품으로 1911년 경매때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이 구입. 현재는 BNF의 동양필사본부에 소장돼 있다. 이 두 섬을 육지 가까이 표시한 것도 이 섬들이 한국의 영토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 했다.
안용복해양과학기지가 울릉군 현포리 1만2천 제곱미터에 480억원을 투입한다는 기쁜 소식이 널리 알려졌다. 안용복 기념관 설립,해양자원산업화타운 독도문화관, 청소년수련원, 해저광케이불 설치, 안용복바다학교, 전망대, 독도관리선 건조 독도문학관, 독도현지사무소 설치등이 꼭 이루어짐을 입증해 더욱 기대된다. 경북에서 1단계로 150억 원을 투입, 2010년까지 해양자원연구센터 및 단지 기반조성을 완료하고 2단계로 232억 원을 투입해 2011년부터 2115년까지 한국해양연구원 울릉도 독도기지 및 에코그린타운을 조성한다는 반가운 소식도 있다. 그리고 산업자원부는 생산기술개발에 60억 원을 투입하는 등 가스하이드레이트 개발 2단계사업이 시작되는 내년부터 2011년 까지 850억 원의 예산을 투자 하기로 했다. 3단계 사업이 펼쳐지는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생산량 평가와 생산기법 개발을 위해 740억원을 추가로 투자할 계획이다. 독도(Dokdo)와 동해(East-Sea)라는 이름도 국제학계와 온 세계에 빨리 알려지고 튼튼히 자리 잡기를 빌고 또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