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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23장의 주해와 적용
예루살렘의 예수
정훈택 / 총신대신대원 신약학 교수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내다보시며 세 번 예고하셨던 대로 예수님은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약 일주일간 머무시며 활동하셨고 마지막 날 십자가를 지시고 예루살렘을 떠나셨다.
마태복음 21장~ 23장에는 벳바게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신 사건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주간의 첫 며칠 동안 있었던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이 때 주로 성전에서 활동하셨으며 무리, 유대 지도자들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하셨다. 24장 이후에는 일 주간의 후반기에 제자들과만 함께 계셨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21~ 23장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을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공개 사역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제자들도 함께 있었다.
마태 사도는 이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그냥 순서대로 모아 놓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치심을 ‘이스라엘의 운명과 새 백성의 출현’이라는 주제에 주도면밀하게 엮어 놓았다. 예루살렘의 예수에 의해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천국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를 꾸중하시고 그 특권과 위치를 박탈하시고 새로운 백성 교회의 출현을 선언하셨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마태복음 21장부터를 - 문학적 분석법을 사용한다면 - 마태가 전해준 복음의 절정(=클라이맥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첫 복음서가 시작할 때 암시, 예고, 기대 되었던 일들이 21장에 와서 이루어지기 시작한 때문이다.
설교자들은 이 부분을 설교함에 있어서 우선 그 역사적 의미를 살려 천국의 왕이 성도 예루살렘에 오신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입성과 활동은 정치, 군사, 사회 운동 등의 성격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 이런 관점에서 설교한다면 예루살렘의 예수는 정말 초라하고 보잘것 없이, 어쩌면 우스꽝스럽게 보이고 말 것이다. - 천국의 왕이 자신의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영적, 구원론적 성격만이 예루살렘의 예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설명이다.
유대인 무리 혹은 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보였던 태도나 언동을 우리는 일차적으로 실제적인 것으로 설명하면서도, 이차적으로는 사람들이 지금도 살아 계신 그 예수님께 표명할 수 있는 태도로 확대할 수 있다. 그들의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언동은 현대인들이 경계하고 피해야 할 부정적인 예로 작용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신 꾸중이나 권고는 현 시대의 신자들에게 직접 주신 교훈처럼 적용할 수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단언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성실히 믿고 따른다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렇게 될 위험이 있으므로 그들을 향한 책망은 곧 우리를 향한 경고 및 권고가 되는 것이다.
1. 예루살렘 입성(21:1~11)
감람산의 동쪽 기슭에 있는 마을 벳바게에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을 ‘벳바게와 베다니에’ 거의 다 갔을 때로 되어 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감람산의 동쪽 기슭에 있었다. 벳바게는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베다니와 붙어 있었거나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메마른 산길에는 양탄자 대신 때묻은 겉옷이, 급히 잘라온 나무가지들이 깔렸다. 가난한 사람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앞서거니 뒤따르거니 함께 걸으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 여!” 나사렛 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예루살렘은 금방 소동이 일어났다(9~10절).
하나님의 아들은 이렇게 초라하게 하나님의 성 거룩한 성을 방문하셨다. 군대도 풍악도 없었다. 종려나무 가지들이 군기와 무기 대신 햇빛에 번쩍거렸다. 예루살렘에 울려 퍼진 노래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였다.
누가 이 광경을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경제적 폭동도 민족적 봉기도 끼여들 틈이 없다. 예수는 혁명가도 민중 지도자도 아니었다. 인류를 호령하는 사령관의 모습도 아니다.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한다는 어떤 암시도 없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나사렛 예수! 하늘 높이 피어 오르는 뿌연 흙먼지와 사람들의 고함, 흥분과 소동만이 있었다. 이 광경은 며칠 후 예루살렘을 떠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더 많은 사람들의 고함과 흥분, 소동 속에 예수님은 혼자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오르시지 않았던가!
그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선택하신 방법이었다(1~3절). 그렇다면 이 장면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시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그렇게 입성하신 것이다. 홀홀 단신으로 하나님 앞에 서신 예수! 그것이 예루살렘의 예수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시하신 이 방법이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던 것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마태는 이 사건과 함께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이렇게 하셨다(4절)’고 기록했다. 그가 인용한 구절은 스가랴서 9장 9절이었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라. 보라 네 왕 이 네게로 가신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 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다.”
예수의 입성 광경과 이 예언을 연결해 주는 연결 고리는 나귀였다. 그렇다면 나귀를 타고 가신 예수는 예언 속에 나오는 시온의 왕이시다.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예수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하에 기꺼이 십자가를 지셔야 할 예수! 예수는 죄인들의 왕이 되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이다. 천국의 왕은 죄인들의 구원자였다.
예루살렘 입성에는 겉으로 드러난 사건들, 즉 사람들이 내보인 기대와 함성 속에 하나님의 계획과 예수님의 의도가 스며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 선지자라고 했다(11절). ‘다윗의 아들(9절)’이라고 불렀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고 찬송했다.
이런 점만 감안해도 예루살렘 입성은 메시아적 성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용어들로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민족의 해방자로 생각했다. 그들의 노래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에 대한 흥분에서 나왔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무슨 기대를 가졌던지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은 자기 나름대로 이 찬송을 들으셨고 자신의 의도대로 자신의 길을 가셨다.
2. 성전정결사건(21:18~17)
예루살렘의 예수는 성전을 가장 먼저 찾으셨다. 그러나 그곳에서 순례객들을 위해 돈을 바꾸어주고, 제사에 쓸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을 발견하시고 이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 내셨다.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마련된 특별한 장소가 ‘강도의 소굴(13절, 사56:7의 인용)’로 보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심으로 자신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베푸시는 그 메시아이심을 나타내셨다(14절). 성전은 이렇게 사람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은총이 만나는 곳이어야 했던 것이다.
변화하는 상황에 동화되며 성전 안에서 편리라는 이름으로 환전과 매매를 허용했던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등 당시 성전을 관리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지도하던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이런 행동이 오히려 ‘이상한 일(15절)’로 비쳐졌다. 예수님의 행동으로 이 지도자들은 곤경에 빠졌고 권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그들이 승인한 적도 없는 예수에게 ‘호산나 다윗의 아들이여!’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들의 찬송을 받아들이셨다. 하나님의 집에서 무슨 내용인지도 잘 모르면서 순진하게 예수님을 찬송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엉뚱한 기대와 개인적, 민족적, 역사적 선입관념으로 찌든 어른들의 환호보다 훨씬 듣기에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이 광경을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다(16절, 시8:3에서 인용)고 설명하심으로 그들이 보고 항의하는 이 광경이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임을 알려주셨다.
3.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 (18-22)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산길 가의 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사실이면서도 다분히 상징적이고 교훈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이 부수적인 의미는 사건 후 있었던 대화와 뒤따르는 사건에서 밝혀졌다.
사건의 핵심은 이 때가 과연 열매가 맺힐 시기였는지, 꽃이 핀 뒤에 먹을 수도 있는 작은 열매가 잠시 달렸다 떨어지는지가 아니다. 열매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열매가 없었고, 이 때문에 예수님이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상징적인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또 제자들의 뇌리에 인상적인 교훈을 새겨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열매가 없어서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 할 것이다’라고 선언하심에 따라 나무가 말라죽었다는 이 사건은 잠시 후에 진행될 이스라엘에 대한 교훈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해서 이제 그 독특한 위치를 박탈당한다는 예수님의 선언에 대한 상징적 교훈을 담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고 - 이것은 기적에 대한 신념 혹은 자신도 능력이 있다는 자신감과는 다르다 -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을 의심치 않는다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무엇이든 다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교육적 의미가 있다.
4.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21:23~27)
예수님께서 다음날 다시 성전에 들어가시자 전날의 사건으로 분노했고 아마 이 때문에 그 대책을 심사숙고했던 이스라엘의 지도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예수님께 질문했다. 이런 일이란 포괄적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활동을 지시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는 상인들, 환전상들 등을 성전 마당에서 쫓아내신 권한을 묻는 것이다.
성전 마당을 그런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 바로 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 그들 나름대로는 합법적으로 - 이 권한을 하나님께 받았고 상인들에게 허락했다고 믿고 있었다. 반면에 예수에게는 그들이 아무런 권한을 준 적이 없다. 따라서 이 질문으로 그들은 예수님의 활동을 제재할 근거를 찾고 손상 당한 권위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엉뚱한 역공세로 나타났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말한다면 예수님도 대답하시겠다는 것이었다. 이 역 질문의 의도는 대답을 회피하시려는 데 있지 않고 - 잠시 후에 예수님은 충분히 대답하신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더라도 그들은 믿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예수님의 활동을 막을 것이므로 예수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자격이 그들에게는 없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데 있었다.
‘하늘로서’는 유대인들이 흔히 ‘하나님에게서’ 의 대용어로 사용하던 말이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준 것이 하나님이 시키신 것인지 아니면 요한이 혼자 그렇게 한 것인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혼란에 빠졌고 당황해 했다. 예수님의 활동을 제재하자면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해서는 안 되었다. 합법적 지도자들인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 백성들의 지탄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면 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는 반문이 예상된다. 둘째,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라고 부르는 이 마당에 예수님의 활동도 전혀 제재할 수 없게 된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대답은 ‘모른다’ 뿐이다. 예수님도 당연히 ‘나도 말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시 후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권위에 대해서 만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유대 지도자들의 불신과 위선에 대해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해서 명쾌한 대답을 주셨다. 예수님(과 요한)의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며 이스라엘 특히 그 지도자들이 이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 답이었다.
5. 두 아들의 비유(81:28~32)
이 비유는 예수님의 질문에 ‘모른다’고 대답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그들이 요한의 권위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였으면서도 진실을 숨기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연장선에서 그들은 지금 예수의 활동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미명 하에 그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말 것임을 예고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큰 아들, 작은 아들의 순서로 말씀하셨는지 거꾸로 작은 아들, 큰 아들의 순서로 말씀하셨는지 사본상의 문제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순서는 비유의 의미를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 비유는 두 아들이 있었는 데 한 아들은 처음에 일하러 가겠다고 하였지만 가지 않음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어겼고, 다른 아들은 처음에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일하러 포도원에 들어감으로써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는 내용이다.
한글 성경(개역)은 큰 이들, 작은 아들의 순서를 따랐다.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31절)’에 대한 비유어이다. 아버지의 뜻을 행한 사람이 누구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유대 지도자들은 작은 아들입니다고 대답했다. 이 작은 아들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온 요한을 믿고 그의 세례를 받은 세리들과 창녀들에 대한 비유어이다. 큰 아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세례자 요한을 믿지 않은 합법적 유대 지도자들을 지시하는 비유어이다. 예수님의 결론은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간다였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세레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다. 반면 그들은 이런 현실을 눈으로 보면서도 끝내 세례자 요한을 거부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어겼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의 때부터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새롭게 시작되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천국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조건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나라 사람으로 인정된다. 반대로 이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확정하는 것이 된다. 회개와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서나 보기를 원하시는 삶의 아름다운 열매인 것이다.
6. 악한 일꾼들의 비유(21:33-47)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이 공식적으로 제기한 질문 ‘무슨 권위로?’에 대한 답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비유는 앞의 두 아들 비유와 기본적으로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적용 범위가 예수님을 거부한 ‘이스라엘 전체’와 예수님을 믿은 새로운 하늘 나라의 백성으로 확대되었다.
포도원을 만들고 이를 세주고 멀리 떠난 집주인은 하나님에 대한 비유어이다. 포도원을 세내어 일하는 일꾼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유어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나라. 영적 축복의 나라를 맡기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 율법과 약속을 맡았으면서도 - 마치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에 서 있었던 그 무화과나무처럼 -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고 아무런 소산도 바치지 못했다. 이들을 각성시키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박해하고 죽였다. 그 마지막에 주인은 사랑하는 아들을 그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일꾼들은 아들을 공경하기는커녕 그를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었다(39절).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자신이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셨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절, 배반의 연속으로 요약하셨다. 그 정점이 아들을 죽이는 것이다. 이 시점에 이 비유는 예수님 자신의 미래 즉 자신이 바로 그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버림을 받고 성 밖으로 끌려나가 죽임을 당하실 것을 예언, 예고하신 것이 된다. 마태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유대 지도자를 향해 예고하신 말씀 그대로 정말 그렇게 되었음을 회고하는 증거의 역할을 한다.
예수님은 앞의 비유에서처럼 듣는 사람들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하셨다. 포도원 주인이 이 일꾼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유대 지도자들은 이 질문에 그들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비유의 겉만 핥고 대답했다. ‘그들을 죽이고 제 때 열매를 바칠 수 있는 다른 일꾼들에게 포도원을 세주어야 합니다(41절).’ 비유를 듣는 누구나 내릴 수 있는 이 결론이 예수님을 거부한 이스라엘의 미래였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긴다’라는 말을 왕이신 예수님의 직접 선언으로 바꾸어 보면, ‘이제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에게서 빼앗아 다른 사람들 즉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다른 백성에게 줄 것이다’가 된다.
물론 과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천국에서 쫓겨났다는 표현은 아니다. 지나간 것은 그대로 인정된다. 그러나 시간의 선로 위에서 이 순간부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 특별한 역사는 그 단절에 도달했다. 이스라엘의 특권과 위치는 이제 역사 속에서나 기억되는 과거의 실체로 완성되었다. 예수님 당시에 살면서 과거의 이스라엘과 미래의 이스라엘을 연결할 수 있는 고리의 역할을 해야 할 유대인들, 이를 합법적으로 대표하고 현실적으로 이끌어 가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등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보내신 아들을 거부함으로써 미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 비유의 더 중요한 내용은 그 긍정적인 면에 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 자신의 미래를 담아 말씀하셨다. 건축가들 즉 유대인들이 버린 돌 예수는 다른 곳에서 모퉁이 돌이 되고 그 위에 한 새로운 건물이 지어져갈 것이다(42절, 시118:22,23의 인용). 버림받았지만 하나님에 의해 새로운 건축물의 기초 가될 ‘산돌’, 그가 예루살렘의 예수였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들을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관련짓고 계셨다. 겉으로 나타나는 일들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일들이 진행되는 역사적 껍질들일 뿐이었다. 이 점이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다’는 감탐문에 담겨 있다.
새로운 백성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진다. 예수님의 선언이었다.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그것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예고였다. 이 예고에는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는 길에서 말씀하셨던 그 때의 예언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그 때 예수님은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다(16:18). 여기서는 ‘이 돌 즉 천국의 이 새 백성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44절)’고 하셨다. 나사렛 예수는 이 새 백성을 출현시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셨고 잠시 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영적, 구속적 축복의 사역은 이제 교회를 통하여 구현된다. 교회는 이 땅에 심기고 자라고 큰 나무로 변하는 그 ‘하늘나라의 새로운 백성’이다.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서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비유의 주인공들로 묘사되었음을 눈치채였다. 그러나 그들은 뉘우치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여전히 불신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오히려 예수님이 비유에 그려놓은 그들의 부정적인 모습 때문에 그들은 흥분하였고 예수님을 잡고자 했다. - 무리가 무서워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고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처럼 - 예수님을 선지자로 생각하고 있는 무리가 무서워 어떻게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국면으로 전환된다.
7. 혼인잔치 비유(22:1~14)
예수님은 앞의 주제를 이어 가시면서도 새 백성에 초점을 더 강하게 맞춘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스라엘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백성이 등장한다.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이런 전환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란 관점에서 하나로 통일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이들의 혼인잔치를 마련하고 이 잔치에 참여할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다.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은 하나님에 대한 비유어이다. 먼저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옛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비유어이다. 때가 무르익어 왕은 잔치를 시작하려고 했으나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오기를 거부했다. 모두 자기 일에 분주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을 모독하고 죽였다. 임금은 군대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죽여버렸다. 여기까지는 앞의 비유와 비슷하다.
잔치를 위해 왕은 길에 가서 아무나 데려오도록 명령하고 혼인자리는 악한 자나 선한 자 등 종들이 만나는 대로 데려온 손님들로 곧 가득해졌다. 이 점이 이 비유의 다른 강조점이다. 새로운 하늘나라의 백성을 특별히 규정할 용어가 없다. 닥치는 대로 끌어온 것이다. 민족적 경계선이나 정치적 울타리도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혼인잔치에 들어오라는 초청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은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천국에 가담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축복이 이스라엘이란 민족적 한계를 벗어나고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확산될 것을 이렇게 비유로 미리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 제한은 남아 있다. 닥치는 대로 데려온 사람들이지만 잔치자리에 들어가기 전에 임금이 준비한 예복을 누구나 입고 들어와야 한다. 어떤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비유 속에 나오는 임금이 그에게 질문했다. ‘왜?’, 그러나 그는 대답이 없다. 결국 초청 받았고 묵묵히 따라 들어왔지만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는 결박되어 밖에 던져져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은 조건은 하나님의 선택이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기 때문에 그의 후손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축복과 약속을 상속해왔다.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 혈통, 혈연이 조건이었다. 그 위에서 하나님의 계명들을 준수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이스라엘이 그 특권을 잃고 다른 백성이 천국을 상속하면서 이 조건은 사라졌다. 천국의 새 백성들에게 제시하신 하나님의 조건 즉 ‘예복’은 무엇일까?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들어왔다는 면에서 예복은 그들이 실패한 것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믿음’이라고 보아야 한다. 마태복음 전체의 문맥에서 보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만이 긍정되므로 ‘예복’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14절)’는 예수님의 최종 선언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한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에 적용되는 말씀이다. 동시에 혼인잔치에 들어오도록 만나는 대로 초청을 받은 새 시대의 백성들 즉 교회에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8. 세금에 관한 질문(22:16~22)
예수님의 활동을 통제하려는 일차 시도가 빗나갔을 뿐 아니라 창피만 당하고 분노만 더 크게 안게 된 유대 지도부는 오랜 토론 후에 묘책을 발견하고 제자들과 헤롯당을 함께 보냈다. 그러나 앞에 보도된 사건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의 새로운 시도도 예수님을 막거나 정죄하기는커녕 오히려 이것이 동기가 되어 교회에 필요한 하나님의 뜻이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지도자들이 보낸 질문은 세금에 관한 것이었다. 이 질문에 잘못 대답할 경우 이를 꼬투리 잡도록 헤롯 당원들이 함께 왔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유대 율법에 의해 그는 선지자가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
바치지 말라고 하면 헤롯 당원이 예수를 황제를 대항하는 사람으로 고소할 것이다. 어떻게든 걸릴 수밖에 없는 두 대답 중 성실하게 어느 한 편을 택하도록 그들은 - 이런 사실을 믿지 않으면서도 - 예수를 진실히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체면치레로 혹은 건성으로 대답하는 분이 아니라고 추켜 세웠다(16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악함을 대뜸 간파하셨다. 그들의 아름다운 말과 칭찬은 입발림이었다. 주목적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근거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대답하심으로 현실에 타협하기 위해 율법을 변형시키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류하거나 거부하는 길을 선택하도록 하지도 않으셨다.
세금을 낼 때 쓰는 특수한 동전은 황제가 바로 그 목적으로 자신의 초상을 만들었으므로 황제에게 당연히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항상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다. 예루살렘의 예수는 - 비록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 나사렛에서처럼 지혜와 지식, 능력이 넘쳤으며 어떤 어려운 문제로도 흠잡을 데 없었다.
9. 부활에 대한 질문(22:23~33)
유대인의 최고 행정 • 정치 • 종교권을 쥐고 있는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또 다른 한 부분이 동원되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유대 사회의 대부분을 독점하고 헬라 • 로마의 통치세력에 협력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사두개인들이다. 모세오경 이외에는 거의 어떤 책도 인정하지 않고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부활도, 영생도, 영적 존재도 믿지 않은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왔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제거하겠다는 산헤드린의 단호한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려하시는 예루살렘의 예수 앞에서 서로 경쟁하고 시기하며 싸우던 이 사람들이 모두 의기투합했다는 사실은 묘한 역설적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악을 성취하기 위한 악의의 연합이었을 뿐이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형의 가계를 잇기 위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게 해야 한다는 계명과 관계되어 있었다. 부활이 있다면 일곱 형제와 다 관계를 맺은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그들에 의하면 부활은 이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으니까 없어야 한다.
그들의 질문은 오히려 예수님이 부활의 성격을 설명하는 동기가 되었다. 그들의 혼란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인정하지 않는, 그리고 예수님을 적대하는 오해와 불신에서 나온 것이다. 부활은 이생의 모든 관계를 초월하고 육체의 한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들의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말씀 중 ‘죽었다’거나 ‘살았다’는 표현은 특별한 성경적 용어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날 모든 사람이 부활한다. 현재의 삶과 대조되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 부활은 두 종류로 구분된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다. 심판의 부활은 하나님의 심판에 따른 영원한 죽음을 뜻하기 때문에 성경적 의미로는 부활이라고 부를 수 없다. 즉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한 축복과 영생, 영광을 위한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들의 하나님이라고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생명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셨다는 것이다.
10. 가장 큰 계명에 관한 질문(22:34~40)
앞의 부활에 대한 대답은 사두개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는데 이런 소문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 그들도 부활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한 편으로는 후련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예수님을 고소할 꼬투리를 찾으러 모여들었다(막12:28~ 34절 참고). 마가복음에는 이 질문을 던진 서기관의 태도가 예수님을 향해 상당히 우호적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예수님의 대답에 대한 서기관의 반응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는 예수님의 결론은 마태복음의 분위기와는 상당히 다르다. 사건의 끝 분위기는 마태복음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질문하는 시작만 비교해 보면 두 복음서의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바리새인들은 모두 사두개인들의 패배를 듣고 모여들었다. 그들이 사두개인의 실패에 고소해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시험하는 분위기는 여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지만 이 모두를 늘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변화하는 역사적 환경이 그 문자적 이행을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현실적 문제와 관련하여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을 변하는 시대에 맞추어 그래도 준수할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고심하던 사람들이었다. 그 현실적 대안으로 그들이 찾아낸 것은 소위 장로들의 유전이었다. 구약 계명의 상황적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 따른다면 구약성경에 수록되어 있는 613개의 금지나 명령에 경중을 두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 기록된 계명과 유전의 가치를 구별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따라서 어느 한 계명을 선택하는 것은 기록된 계명이든 유전에 속한 것이든 다른 계명들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예수님을 공격할 재료가 된다. 하지만 유명한 랍비들도 종종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한 계명을 얘기한 흔적이 있어서 가장 큰 계명에 관한 질문은 예수님을 붙들 치명적인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두 가지를 지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째, 그들이 준비한 비장의 무기들은 이미 바닥이 났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차선의 질문을 가지고 왔다고 생각된다. 둘째, 그들은 사두개인들이 물러간 이 상황에 적대적인 분위기를 좀 누그러뜨리고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가지셨다는 것에 고무되어 있었던 것 같다.
어떻든 이들의 질문 때문에 예수님의 율법관이 보다 분명히 소개되었다. 모든 계명은 두 가지 방향을 가지고 있다. 계명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점에서 모든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계명이 모두 사람들 사이에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 결부되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중첩된 단어 ‘사랑’을 율법과 선지자들 즉 구약 계명들의 강령으로, 하나님의 뜻에 녹아있는 근본 정신으로 요약해 주셨다.
11. 예수님의 메시아관(22:41~46)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셨지만 예수님의 활동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메시아관과 같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란 칭호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모호한 태도가 나타났다. 즉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그러한 내용을 가지고 메시아란 칭호를 사용하면 예수님은 긍정적으로 대답하셨다. 칭찬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기대와 생각을 가지고 접근해 오면 예수님은 마치 메시아가 아닌 것처럼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셨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무엇보다 먼저 메시아가 어떤 분이며 어떤 역할을 하시는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셔야만 했다. 제자들은 삼 년의 체험을 통해서 이 점을 충분히 배웠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님은 이 사실을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확실하게 설명하셨다. 이 알림은 바리새인들에게 던진 예수님의 질문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장면을 연상시키는 대답이다. 사람들은 그 때 모두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찬송하며 열광했었다. 사람들은 모세와 같은 해방자를 기다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칭호는 인간 예수의 출발점을 지시할 뿐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의 더 깊은 신분을 담지 못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인간 예수로만이 아니라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것을 요구하셨다. 믿도록 여러 가지 표적을 보여 주셨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이들 그리스도십니다’라고 고백할 때 비로소 만족하시고 칭찬하시며 교회의 설립을 약속, 예고하셨고 이 일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자신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알려 주셨다. 사람들이 기대하던 다윗의 아들은 예수님을 설명하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칭호였던 것이다.
다윗과의 관계만을 조명한다면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이 점을 성경을 통하여 가르치셨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답은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이미 주어져 있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이 답을 이미 여러 곳에 수록해 놓았다. 따라서 마태복음을 읽어온 독자라면 충분히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더 강하게 확신시키는 역할을 했고 그를 믿지 않는 사람들, 처음 만나는 무리들, 바리새인들에게는 이 말씀이 의문만 증대시켰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와 관련된 문제는 증거가 확실한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증거라도 믿음으로 수용하느냐와 관련되어 있었다.
12. 가르치는 사람에 대한 교훈(23:1~18)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들’ 즉 구약성경의 계명들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신 바 있다(5:17~20). 그 계명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누구도 파기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도 이를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러 오셨다고 하셨다. 본문에 같은 입장을 표명하시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말하는 것은 모두 행하고 지켜라(2~3절)’고 하셨다.
‘모세의 자리’란 유대인들이 율법 교육과 예배를 위해 사용하던 건물 회당 앞자리에 마련되어 있었던 높은 의자에 붙은 이름이다. 랍비가 이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읽고 설명하곤 했다. 그들의 주임무는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들을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세의 이름으로 낭독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누구나 지켜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물론 그들이 만들어낸 계명의 상황적 해석과 적용까지 삶의 규범으로 인정하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여러 곳(예를 들면 5:21~48 등)에서 배척하셨다. 여기서는 그들의 가르침과 행실을 비교하셨기 때문에 규범의 문제는 더 이상 다루지 않으신 것으로 보인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은 잘못된 선생들의 예로 거론하셨다. 주된 이유는 말만하고 행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4절)’.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행동에만 열중했다. 명예를 좋아했고 존경받는 것과 인사 받는 것을 좋아했다. 선생으로 살지는 못하지만 랍비라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이러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예수님은 여러번 지적하신 바 있다. 이스라엘의 최종 포기를 선언하시기 위해 다시 한 번 이들의 실패를 집중적으로 모아서 말씀하신 것으로 보인다. 선생이 이렇다면 그들에게서 배운 보통 사람들은 그들보다 더 잘 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새 백성을 위해 같은 역할을 맡아야 할 선생들은 그리스도 아래서 형제들이요 자매들이다. 선생은 한 분뿐이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나사렛 예수 그리고 예루살렘의 예수가 교회의 선생님이시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제 모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지도자는 한 분뿐이다. 그 지도자 그리스도 아래서 모든 사람은 동등하고 공평하다. 따라서 서로 섬기는 것이 삶의 주된 태도가 되어야 한다. 가장 잘 섬기는 사람이 교회에서 큰 사람이다.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
이 원칙은 비단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들어가 있는 어느 사회에나 철저하게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잘 섬기는 사람들을 지도자로 뽑고 다스리는 사람의 위치에 앉히라는 것도 우리 주님의 명령인 것이다.
13.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화의 선언(23:13~36)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팔복을 선언하신 바 있다(5:3~10). 그것은 예수님을 따라 나선 사람들 즉 왕이신 예수님에 의해 천국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축복이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곳에 예수님은 일 곱번 화를 선언하셨다. 이 화의 선언은 일차적으로 당시 유대인의 지도자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넓은 범위에서는 이 사람들에게 배워서 더 나쁘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전체를 향해서 주신 말씀이다.
이들을 책망하신 주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사람인 것처럼 꾸미는 것 즉 외식 혹은 위선에 있었다. 그들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외식적, 위선적 삶과 역사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이것이 예수님의 눈에 비친 이스라엘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잠시 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미리 결별을 선언하신다. 화의 선언은 이스라엘의 독특한 역할과 위치가 담긴 구 시대를 마감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 예수님의 고별사인 것이다.
그들은 천국 문을 맡았으면서도 천국 문을 닫았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13절). 메시아를 낳은 백성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기다렸으면서도 그를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아 무도 보지 못하도록 막았다. 바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죄는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에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가르쳤으면서도 결과적으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몇 배나 더 악한 사람이 되게 하고 말았다(15절). 눈에 보이는 성전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은 귀하게 여기고 지키고 사랑하면서도 그 성전을 짓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을 버렸다(16~22절). 율법의 형식과 절차는 귀하게 여겼으나 더 중요한 것, 하나님을 향한 진실함과 사랑과 믿음을 버렸다(23~24절). 겉을 깨끗이 하는 모습은 있었으나 이 겉을 조절하는 인간의 마음에는 탐욕과 방탕, 위선과 불신 등 온갖 더러운 것으로 꽉 차 있었다(25~28절).
마지막 화의 선언은 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꾸미며 선지자들의 편에 서있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이는 편에 서 있었다는 것을 향했다(29~36절). 이 마지막 화의 선언은 다분히 예언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즉 잠시 후 그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조상들이 남긴 분량을 모두 채우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32절). 뿐만 아니라 이들이 교회를 핍박할 것도 예수님은 예고하셨다(34절).
이스라엘은 결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예언했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한 민족이면서 동시에 선지자들과 메시아를 죽인 그 민족이 된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하나님의 성전도 율법도 그들의 역사와 함께 모두 구약시대라는 한 묶음으로 묶어졌다. 그들이 낳은 메시아는 새로운 한 백성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축복을 이 땅에 실어 나르신다.
14. 예루살렘을 향한 애가(23:37~39)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마태는 예수님의 모습을 시온의 딸을 찾아가는 나귀를 타신 왕으로 설명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예수는 성전의 더럽혀진 모습에 분개하시고 이스라엘의 역할 마감을 선언하셨다. 그 정신적 지주였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모두에게 화를 선언하시고 하나님의 집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슬픔을 표현하셨다. 이것은 화의 선언의 결론에 해당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하나님의 사람들 선지자들을 죽였고 또 예수와 예수께서 보낼 선지자들을 죽일 것이다. 예루살렘이 그렇게 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고, 제자들을 보내셨으며(10:6) 이렇게 여러 번 시온의 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모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원하지 않았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게 되고 버린 바 될 것이다(38절)’ 역사는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려 준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말았다. 성과 성전을 구성하고 있던 바위들은 이러 저리 사방으로 버려졌으며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분해되고 말았다. 그 흔적은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 있고 세계의 화약고가 되어 그 버린 바 된 역사를 묵묵히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이제 무엇인가? 예수님의 마지막 한 말씀에 그들의 미래가 담겨 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은, 과거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약속을 경험했고 보존하고 있었던 아브라함의 후예들은 그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나귀를 에워싸고 걸어갔던 소수의 사람들의 입에서만 찬송이 터져 나왔다. 성전에서 ‘호산나’ 찬송하는 아이들을 오히려 못마땅해 했다. 그들은 이제 바로 그 예수, 잠시 후에 그들이 죽일 예루살렘의 예수를 향하여 진심으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고백할 때까지 결코 메시아를, 그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녀들은 이제 평범한 민족의 하나로 전락했다. 그들도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복음의 문이 모든 이방인에게로 열렸다. 이스라엘도 이제 그 이방인 속에 들어있는 것이고 복음은 그들에게도 열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으로 고백한다면 그들도 천국의 새 백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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