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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절, 개인 구원
첫째 단원(1-3) 구원 얻기 이전의 나의 상태
둘째 단원(4-10) 그런 나를 구원하여주셨다
첫째 단원(1-3) 구원 얻기 이전의 나의 상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1).
첫째 단원의 주제는, “구원 얻기 이전의 나의 상태”인데, 각 절과 결부시켜 대의를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전의 나의 상태”는, ㄱ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1)였으며, ㄴ 공중 권세를 잡은 악의 영에게 “종노릇하던 우리”(2)였으며, 그래서 “이전의 나의 상태”는 ㄷ 본질상 “진노 하에 있던 우리”(3)였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첫째 단원의 요지입니다.
죽었던 우리
1절은,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는 말씀으로 시작이 됩니다. 어떻게 들리십니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선포하는 케리그마입니다. 그 아래의 말씀은 “살리셨다”는 명제(命題)에 대한 해설인 것입니다. 왜 죽었는가? ㄱ “허물과 죄 때문에 죽었다”고 말씀하는데, “허물”은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넘었다는 뜻이요, “죄”라는 뜻은 화살이 표적에서 빗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이전의 우리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는”이 아니라 “죽었던 우리”라고 말씀입니다.
ㄴ 그런 “너희를 살리셨도다” 합니다. “누가” 살려주셨는가? “그”가, 즉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려주셨는가? 이런 맥락에서 2:1절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1:13) 한, 성령의 사역과 결부되는 말씀입니다. 어떤 능력으로 살려주셨는가?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능력은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1:20) 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능력과 동일한 능력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라고 말씀합니다.
살아 있는 불신자들의 상태를,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말하는 것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말은 영적인 의미로,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사59:2) 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4:18), 즉 단절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분리된 불신자의 상태인 것입니다.
형제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무감각, 무반응을 대하면서 마치 죽은 시체를 향해 말하는 것 같은 답답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 대하여 지정의(知,情,意)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ㄱ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며(無知), ㄴ 감사하지도 아니하며(無情), ㄷ 복종하지도 아니하고 또한 할 수도 없는(無能) 의지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2절은, “그 때에 너희는” 하고 시작이 되는데, 살려주심을 받기 이전의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상기시킵니다. 1장에서 사도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1:17) 하시기를 구했는데 이제는, “너 자신을 알아라”(2-3)고 말씀하는 셈입니다. 구원받기 이전에 자신이 어떤 처지와 상태에 있었는가를 상기한다는 것은 침체되었던 신앙을 소생시켜주는 활력소 역할을 합니다. 사도는 우리를 향해서, “너희가 구원을 받은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는 것 같은데, 구원 받기 이전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울도 자신의 지난날의 상태를 자주 언급하는 것을 그의 서신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는데,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 고백하면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고 말합니다. 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 수고를 “더 많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박해자였던 자신을 사도로 세워주셨다는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아니하면서 지난날을 자주 상기했기 때문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목동이었던 다윗도 하나님께로부터 메시아 언약을 세움 받고는,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 7:18)고 감격해 하는 것을 봅니다. 산의 정상에 올라가서는 “야호”하고 외칩니다. 그런 다음에 발아래 펼쳐지는 산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저기 봐, 우리가 저기서부터 올라오지 않았어?” 바울은 지금 1-3절에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묻고 싶습니다. 형제가 구원 얻기 이전에는 어떤 상태에 있었으며, 지금의 변화된 신분과 지위와 위치에 대해서 말해줄 수가 있습니까? 이제야 우리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가를 실감하게 되었습니까?
종노릇하던 우리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2-3절은 구원 얻기 이전에는 어떤 인생관과 가치관으로 살았는가를 진술하는 내용인데, “이 세상 풍조, 공중의 권세 잡은 자(2), 육체의 욕심”(3)을 따라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구원”하는데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
1 첫째는 그 때에 우리가, “이 세상 풍조를 따랐다”(2중)고 지적합니다. “세상 풍조”는 마치 하나님을 대적하여 쌓은 바벨탑과 같은 인본주의 문명으로 지금 불신자들이 추구하고 있는 세속주의적인 삶을 가리킵니다. 계시록에서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계 14:8)고 말씀하는데 이것이 “세상 풍조”인 것입니다.
2 둘째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2하) 합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란 사탄을 가리키는 말인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을, “허물과 죄로 죽게”(1) 만든 자가 사탄이요, 종말적인 “이 세상 풍조”(2) 배후에는 어떤 악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세상 임금”(요 12:31, 16:11)을 추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점이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는 언급에 나타납니다.
3 셋째는,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肉體)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했다”(3상)고 말합니다. 이는 타락한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가고 있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가리킵니다. 사탄은 참으로 영리한 놈입니다. 그래서 먹으면 “내 종이 되리라”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나님같이 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련한 인간은 전에도 속았고 이제도,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2, 4)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세상 풍조, 공중의 권세 잡은 자(2), 육체의 욕심”(3)은 성도들이 물리쳐야 할 3가지 대적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중심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사탄이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지금 영은 구원을 얻었으나 몸은 “죄의 몸, 죽을 몸”(롬 6:6, 12)이어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고전 9:27) 해야 할 몸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서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라”(롬 6:12)고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현대교회는 3가지 세력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심히 우려되는 바입니다.
진노하에 있던 우리
4 3가지 결과로,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3하) 합니다. “진노”란 심판을 가리키는데 구원 얻기 이전의 상태는, 허물과 죄로 죽은 것만이 아니라, 심판받아 멸망을 당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는 것입니다.
“본질상과, 진노”라는 두 의미를 구속사적으로 보면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ㄱ 먼저 “본질상”(本質上)인데, 저들이 하나님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것은, 태어난 이후에 중간에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그런 상태로 태어났다는 것이 “본질상”의 뜻입니다.
로마서 5:12절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합니다. 이는 논리상으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죄를 범했다 하면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개인 자격으로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시조, 대표자로 죄를 범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아담 하와는 추방을 당했는데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추방당한 상태, 즉 분리된 상태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본질상”이라는 원죄교리입니다. 이점을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고 진술합니다.
ㄴ 다음은 “진노”라는 불신자들이 듣기 싫어하고 미워하는 말인데 심판인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사랑”은 동전 앞뒤와 같은 하나인 것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하시되,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이렇게 하시고야 우리 죄를 사하실 수가 있으셨는가?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사도라는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1:5),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고 증언합니다. 어떤 남성이 한 여성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 진실성이 없다면 그것은 유혹입니다. 사랑에는 진실성이 따라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실하십니다. 의로우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은,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신 6:15), 질투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에 도움을 주는 말씀이 아가서에 있는데,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한,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롬 5:10), 즉 원수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대신 죽음에 내어주신 그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의 사랑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하신 죽음보다도 강한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여, 이 사랑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대적하는 자들에게 여호와의,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고 말씀한다면,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롬 3:5), 형제는 불의하시다고 말하겠습니까?
이점에서 인식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진노는 궁극적으로는,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한 사탄에 대한 진노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허물과 죄로 죽게 만들고, 세상 풍조를 따르게 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게 한 배후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 한 사탄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해주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고 사탄을 추종한다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사탄과 함께) 불못에 던져지게”(계 20:15)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서에서,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는 말씀 속에 함의 된 뜻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이점에서 역설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진노”가 먼저가 아니라, 복음을 먼저 주셨다는 점입니다. 사도는 로마서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고 먼저 복음을 말씀한 후에, “하나님의 진노가--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7, 18) 라고 심판을 경고합니다. 왜 복음이 필요한가? “진노”의 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떠나 이 땅에 까지 오셔서 우리 대신 정죄와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만 했는가? 우리가 받게 될 진노를 대신 받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교리도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됩니다. 이는 우려가 아니라 현대신학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하나님의 사랑만이 아니라,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심판도 함께 전해주어야만 바른 복음 전도자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대신 진노를 받으셨다는 복음을 거부한다면 자신이 진노를 받을 수밖에 다른 구원의 방도는 없는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2-3절 안에는 “그 가운데”라는 말이 3번이나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2-3) 합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역사하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즉 사탄이 지배하는 영역(領域) 내에서 행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둘째 단원으로 나아가기 전에 정직한 마음으로 점검해보아야만 하겠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한 거듭난 이제의 나의 인생관, 가치관은 어떠한가 하는 점입니다. 만일 여전히, “세상 풍조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고 있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이, “지금 불순종(불신자)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인,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4-5)고, 결단을 촉구합니다.
묵상해 봅시다.
1.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2. 성도가 싸워야 할 세 가지 세력과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3.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요, 그 후에 진노가 따른다는 점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