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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기는 단순히 족보를 끝내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지를 먼저 밝힌다.
불순종 → 포로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은혜 → 귀환 → 공동체 재건
이 두 절은 역대기 전체의 신학을 압축한다.
II. 예루살렘에 정착한 백성들 (3-9절)
A. 유다 지파 (3-6절)
B. 베냐민 지파 (7-9절)
유다와 베냐민이 가장 먼저 소개된다.
이유는
역대기는 모든 지파를 동일하게 다루지 않는다.
예배 중심의 공동체를 세우는 데 필요한 지파들을 우선 배치한다.
III. 제사장과 레위인의 재조직 (10-34절)
이 부분이 본문의 중심이다.
A. 제사장들 (10-13절)
제사장은
를 담당한다.
"큰 능력이 있는 자"(13절)는 전쟁이 아니라 성전 봉사를 감당할 능력을 의미한다.
역대기는 국가보다 예배를 먼저 세운다.
성전이 공동체의 중심이다.
B. 레위인 (14-16절)
레위인은
을 담당한다.
예배는 제사장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봉사자가 함께 예배를 완성한다.
C. 성전 문지기 (17-27절)
가장 긴 부분이다.
문지기는
를 맡았다.
25절은 지방에서 오는 동료들이 7일마다 교대 근무했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 문지기를 단순한 경비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들은 "거룩함을 지키는 사명"을 맡은 사람들이었다.
성전은 누구나 마음대로 드나드는 공간이 아니었다.
D. 성전 기물 담당자 (28-32절)
담당 업무
매우 세밀하게 기록된다.
역대기는 작은 봉사도 소홀히 기록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일도 거룩한 직분이다.
E. 찬양하는 레위인 (33-34절)
찬양대는 밤낮으로 성전에서 봉사했다.
이는 지속적인 예배를 의미한다.
예배는 행사나 이벤트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지속적으로 섬기는 삶이다.
IV. 사울의 족보 (35-44절)
이 족보는 이미 역대상 8:29-38에 등장하였다.
그런데 다시 반복된다.
이는 10장의 사울 이야기로 연결하는 문학적 장치이다.
구조는
사울의 조상
↓
기스
↓
사울
↓
사울의 아들들
족보를 반복하는 이유는
독자에게 "이제 첫 번째 왕의 이야기로 들어간다"는 신호를 주기 위함이다.
즉, 9장은 족보와 역사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
중심축(C, 10-34절)은 성전 봉사 체계입니다.
이는 역대기 저자의 핵심 관심이 왕권 자체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의 회복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포로 이후 공동체는 먼저 예배 질서를 회복해야 했고,
그 위에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마지막에 사울의 족보를 다시 제시한 것은 앞으로 이어질 역사 서술의 출발점을 마련하는 문학적 연결 장치로 기능합니다.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본문: 역대상 9:1-44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경험합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다시 일어서는 일,
관계가 무너진 사람이 다시 신뢰를 회복하는 일,
병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죄와 실패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은 큰 위로이면서도 쉽게 믿기 어려운 약속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바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살아가던 백성은 결국 바벨론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무너졌고, 하나님의 성전은 불탔으며, 다윗 왕조는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낯선 땅으로 끌려갔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마저 흔들렸습니다.
시편 137편은 당시 포로들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
그들에게는 눈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정하신 때가 되자 하나님은 포로 생활을 끝내시고 백성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현실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무너진 성벽, 폐허가 된 성전, 잡초만 무성한 땅, 흩어진 백성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기록된 말씀이 오늘 본문, 역대상 9장입니다.
처음 읽으면 이름이 반복되는 족보처럼 보이고,
제사장과 레위인, 문지기들의 명단이 이어지는 지루한 기록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단순히 사람들의 명단을 남기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셨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회복하실 때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성을 크게 짓거나 군대를 조직하지 않으셨습니다.
경제를 일으키는 일을 가장 먼저 시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예배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제사장을 세우시고, 레위인을 세우시고, 문지기를 세우시고, 찬양하는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가 회복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예상하지 못한 실패와 상실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건강이 무너질 수도 있고, 가정이 흔들릴 수도 있으며, 신앙의 열정이 식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부터 회복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한 답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예배를 회복하시고, 공동체를 회복하시며, 각 사람에게 맡기신 사명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회복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 자신이 계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자리에서 어떻게 신실하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회복의 하나님이십니다. (1-9절)
본문은 매우 짧은 두 절로 이스라엘의 비극과 희망을 함께 보여 줍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역대기 기자는 이스라엘이 포로가 된 이유를 숨기지 않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바벨론이 강했기 때문에 나라를 잃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국제 정세를 탓했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문제의 본질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유다가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범죄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단순히 실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리고 신실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사랑했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욕심을 따랐으며,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세상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결국 포로는 우연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삶의 결과였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도 인생의 어려움을 만날 때 환경만 탓하기 쉽습니다.
사람을 원망하고, 상황을 원망하며,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고난이 죄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움을 만날 때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 이 일을 통해 제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제가 놓치고 있었던 믿음은 무엇입니까?"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심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2절은 전혀 다른 분위기로 시작합니다.
이 한 구절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올 자격이 있어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잘해서 회복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다시 불러 주셨기 때문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을 끝까지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언제나 회복입니다.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만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노아 시대 이후에는 다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났을 때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기다리고 달려가 안아 주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도 예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다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넘어지는 사람보다, 넘어져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을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도 포로 생활과 같은 시간을 보내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가 메말라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기쁨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관계가 깨어지고, 삶의 의욕이 사라지고,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희망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포로를 끝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돌아올 길을 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회복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도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워야 했고, 성벽을 다시 쌓아야 했으며, 공동체를 다시 조직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은 과거를 지워 버리는 마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깊이 넘어졌는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께 돌아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회복의 출발점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를 품으시고, 새로운 은혜로 다시 세우시는 회복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예배 공동체를 먼저 세우십니다. (10-34절)
본문의 중심은 10절부터 34절까지입니다.
무려 25절에 걸쳐 제사장과 레위인, 문지기와 성전 기물을 관리하는 사람들,
그리고 찬양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역할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 읽으면 조금 의아합니다.
'왜 이렇게 많은 분량을 성전 봉사자들의 명단에 할애했을까?'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에게 더 시급한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무너진 집을 다시 지어야 했고, 성벽을 복구해야 했으며,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군대를 조직하는 일도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예배 공동체를 정비하십니다.
이것이 역대기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은 공동체가 다시 살아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회복은 경제나 정치가 아니라 예배의 회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배는 단순히 종교 행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설 때 삶도 바로 서고, 가정도 바로 서며, 공동체도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장을 세우시고, 레위인을 세우시고, 문지기를 세우시며, 찬양하는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첫째,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을 연결하는 사명을 맡았습니다.
10절부터 13절에는 제사장들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제사장은 단순히 제사를 집례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백성 가운데 나타내는 사람이었습니다.
13절은 그들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할 능력이 있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능력이 있다는 것은 세상의 권력이나 재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화려한 사람보다 신실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교회는 뛰어난 사람들 때문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사람들로 세워집니다.
둘째, 레위인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배를 섬겼습니다.
14절부터는 레위인들이 소개됩니다.
레위인의 사역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전을 관리했고, 어떤 사람은 성물을 준비했으며, 어떤 사람은 백성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방송실에서 봉사하는 사람, 안내하는 사람,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 차량을 운행하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섬김도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박수를 보내는 사람만 기억하지만,
하나님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충성하는 사람도 기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작은 봉사가 없습니다.
셋째, 문지기는 거룩함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17절부터 가장 긴 분량이 문지기들에게 할애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문지기라고 하면 단순히 출입문을 지키는 경비원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전의 문지기는 훨씬 중요한 사명을 맡았습니다.
그들은 아무나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고,
성전의 거룩함을 지켰으며, 성전의 기물과 제사를 보호했습니다.
24절은 그들이 동서남북 모든 문을 맡았다고 기록합니다.
25절은 지방에 있는 레위인들이 7일마다 교대로 와서 함께 봉사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배가 하루도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문지기의 사명은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문지기의 사명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과 귀는 마음의 문입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마음에 들이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적 상태가 달라집니다.
가정에도 문지기가 필요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신앙을 지키는 영적인 문지기입니다.
교회에도 문지기가 필요합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공동체의 거룩함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넷째, 찬양은 예배의 중심이었습니다.
33절은 찬양하는 레위인들을 소개하면서 "주야로 자기 직분에 전념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시간이 남을 때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찬양이 그들의 사명이었습니다.
밤낮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공동체 가운데 계속 유지되기를 소망했다는 뜻입니다.
찬양은 단순히 예배 순서 가운데 한 부분이 아닙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선포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환경이 좋아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전히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찬양하는 것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은 여전히 가난했고, 성전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며, 미래도 불확실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먼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문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는 경제가 먼저 회복되기를 원하고, 건강이 먼저 회복되기를 원하며, 환경이 먼저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예배를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가 살아나면 신앙이 살아나고, 신앙이 살아나면 삶이 살아나며, 삶이 살아나면 가정과 교회가 살아납니다.
하나님께서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에게 가장 먼저 예배 공동체를 세우게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제사장과 레위인,
문지기와 찬양대원처럼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수많은 성도의 충성으로 세워집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화려한 능력보다 신실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맡겨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충성하는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이어 가십니다. (35-44절)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읽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사울의 족보가 또 나오는가?"
사실 이 족보는 이미 역대상 8장 29절부터 38절까지 거의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대기 기자는 왜 같은 내용을 반복했을까요?
성경에는 의미 없는 반복이 없습니다.
이 반복은 이제 역대기의 새로운 장이 시작된다는 신호입니다.
1장부터 9장까지는 족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었다면,
10장부터는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사울입니다.
다시 말해, 이 족보는 단순한 명단이 아니라 역사를 이어 가는 연결고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사울은 성공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선택받았지만 끝까지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웠고,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했으며,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는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는 빨리 잊어버리고 싶어 합니다.
실패는 감추고 싶고, 지나간 일로 덮어 두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의 이름을 성경에서 지워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실패마저도 구속사의 일부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실패는 하나님 계획의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실패를 통해 다윗을 준비시키셨고,
다윗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그 언약을 따라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사람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끊임없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성경을 돌아보면 이러한 장면이 계속 이어집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지만 두려움 때문에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모세는 분노하여 반석을 쳤습니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실패에서 역사를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을 다시 일으키셨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완전함 위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위에 세워집니다.
만일 하나님의 계획이 인간의 능력과 완전함에 달려 있었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누구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연약한 사람을 붙드시고,
넘어졌던 사람을 일으키시며, 부족한 사람을 사용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에게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교회의 미래도 한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능력이나 성도의 재능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역사의 주관자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사명은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역사에 순종하며 참여하는 것입니다.
혹시 자신의 과거 때문에 낙심하고 계십니까?
'나는 너무 많이 실패했다.'
'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
'내 인생은 이미 늦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오늘 본문이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사람의 이름도 기억하십니다.
더 나아가 실패한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 가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사울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고, 그 불순종의 결과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한 사람의 실패 때문에 자신의 구원 계획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사울이 끝났을 때 다윗을 준비하셨고, 다윗 이후에도 선지자들을 보내셨으며,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같은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만 바라보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앞으로 이루실 일을 바라보십니다.
우리는 문이 닫혔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문을 여십니다.
우리는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끝까지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역대상 9장은 족보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역사의 중심에는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통해 역사를 이어 가십니다.
역대상 9장은 이름이 가득한 지루한 족보가 아닙니다.
이것은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의 회복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백성을 돌아오게 하셨고,
예배를 회복하게 하셨으며,
각 사람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시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는 내가 세우는 공동체 안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겠느냐?"
어떤 이는 앞에서 섬기고, 어떤 이는 뒤에서 섬깁니다.
어떤 이는 찬양하고, 어떤 이는 문을 지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크고 작은 일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거룩한 사명입니다.
무너진 삶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세우십니다.
무너진 가정도 다시 세우십니다.
무너진 교회도 다시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실패에 머물지 말고,
회복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맡겨진 자리에서 신실하게 예배하고
섬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