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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惠空)스님 이야기
혜공(惠空) 스님은 천진공(天眞公)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는 노파의 아들로
공이 일찍이 등창이 나서 거의 죽게 되자 문병하는 사람들이 길거리를 매울 정도였다. 우조의 나이 일곱이었는데, 어머니에게 물었다.
말했다. 백약이 무효인 상태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며 고통을 참느라 애쓰던 천진공에겐 아무리 어린 아이의 말이었지만 반가운 소리였다. 임도 보이질 않았다. 뿐이었다.
흐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주인은 우연한 일로만 생각하고 별로 이상히 여기 지 않았다.
공의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 천진공의 동생이 벼슬을 얻어 지방으로 부임하게 되자 천진공은 매를 한 마리 골라 주었다. 동생이 매를 갖고 임지로 떠난 뒤 얼마 안 되어 천진공은 갑자기 그 매 생각이 났다. 녘에 천진공에게 바쳤다. 의한 것임을 깨달았다. 행동으로 욕을 보였으니 그 죄를 어찌 씻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부디 도사께서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되었다. 미친 듯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부궤화상(負簣和尙)이라 부르고 스님이 사는 절을 삼태기란 뜻에서 부개사(夫蓋寺)라 불렀다. 이는 삼태기의 신라 말이다.
이름을 따서 우물 이름을 지었다. 또 우물 속에서 나올 때면 푸른 옷을 입은 신동(神童)이 먼저 솟아 나왔으므로 대중들은 이를 조짐으로 스님이 우물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미리 알았다. 더욱이 몇 달만에 우물에서 나와도 스님의 옷은 젖지 않는 기이한 현상을 보여 대중을 놀라게 했다.
했다. 그 무렵 원효대사(元曉大師)는 많은 불경의 소(疏)를 찬술하고 있었는데, 매양 스님에게 와서 의심나는 곳을 물었다. 간혹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하였는데, 하루는 두 분이 시냇물을 따라가다 물고기를 잡아 구워 먹고는 돌 위에 똥을 누웠다. 스님이 그것을 가리키며 희롱하듯이,
"자네는 똥인데 나는 물고기 그대로야"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오어사(吾魚寺)라 이름지었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원효의 이야기라기에는 외람되다고 하기도 한다. 마을에서는 시냇물을 잘못 불러 모의천(芼矣川)이라고 한다.
혜공 스님의 이적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것을 보았다. 시체가 부어 터지고 살이 썩어 구더기가 난 것을 보고는 오랫동안 슬피 탄식하다 말고삐를 돌려 성에 돌아오니, 혜공이 술에 몹시 취해 시장 안에서 노래하며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구참공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으나 틀림 없이 여느 날과 다름없는 혜공 스님이었으므로 재삼 스님의 도력에 감탄했다.
과 경루(經樓), 남문의 회랑 둘레를 묶어 놓고 강사(剛司)에게 말했다.
강사는 이상히 여기면서도 따라 했다. 과연 3일만에 선덕왕이 절에 왔는데, 선덕왕을 연모한 지귀(志鬼)의 심화(心火)가 절의 탑을 태웠지만 새끼로 맨 곳은 화재를 면하였다.
신인종(神印宗)의 창시자 명랑(明朗)스님이 금강사를 새로 짓고 낙성회를 열 었다. 큰스님들이 모두 모였는데, 오직 혜공스님만이 가지 않았다. 명랑은 분향하고 기도를 올렸다. 잠시 후 혜공이 이르렀다. 때마침 큰비가 내렸는데도, 바지며 저고리가 젖지 않았고, 발에도 흙이 묻지 않았다. 명랑더러 이르기를,
"부르심이 매우 간절해 이렇게 왔소이다."
라고 하였다.
신령스런 자취가 자못 많았으며, 마지막에는 공중에 떠서 입적을 알렸다. 사리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일찍이 『조론(肇論)』을 보며,
"이는 내가 옛날에 편찬한 것이다."
고 하였다. 그렇다면 승조(僧肇)의 후신임을 알겠다.
찬하다.
벌판에서 사냥질하고 침실에 누웠고 술집에서 노래하고 우물 밑에서 잠잤다. 외짝 신 남기며 허공에 뜨며 어디로 떠갔는가 한 쌍 귀중한 불 속의 연꽃이어라.
註)
승조(僧肇) : (384~414) 중국의 승려로 장안 사람이다. 노장(老莊)의 학을 좋아하여 심요(心要)라 주장하다가, 지겸(支謙)이 번역한 유마경(維摩經)을 읽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 뒤 구마라습(鳩摩羅什)의 제자가 되어 역경 사업에 종사하고, 승계(僧계)ㆍ도항(道恒)ㆍ승예(僧叡)와 함께 구마라집 문하의 사철(四哲)이라 불리웠다. 구마라집 문하에서도 교리에 제일 능통 하였다. 저서로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ㆍ<보장론(報障論)>ㆍ<열반 무명론(涅槃無名論)>이 있으며 진나라(後秦) 의희(義熙) 10년(414)에 장안에서 31세로 입적하였다.
『조론(肇論)』은 승조가 지은『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등 4론과 『종본의(宗本義)』를 합친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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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특하고 독특한 스님이시군요. _()_
이번 오어사를 참배하면서 이 혜공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렸지요. 잘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혜공스님은 경전에 두루 통하시고 법력이 대단하셨던 모양입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