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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부동(伏地不動)3
―쏴아아아아아….
소낙비가 시원스레 내리고 있었다. 라혼은 비교적 한산해진 백호나한부 자신의 거처에서 차를 마시며 시원스레 내리는 비를 지그시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 시절은 어느새 한여름이었다. 지금 백호나한부에는 세 명의 선자들과 호파와 그녀들을 보필하는 여인들이 남아 있었다. 모두 18명의 여인천궁 여인들이 남고, 여인천궁주 상유란을 비롯한 두 장로와 일단의 여인들은 북지성(北智省)에 있는 여인천궁으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로 설화는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연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라혼은 조용히 설화의 결정을 기다렸다.
“서방님.”
“….”
라혼은 설화가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에서 설화 모친의 시신을 꺼내 뒤늦은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어제가 49제였다. 라혼은 소복은 아니지만 백의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이제 십이세지만 겉보기에 16~17세로 보이는 설화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아직은 젖살이 남아 있는 볼을 말없이 쓰다듬었다.
“서방님, 결정했어요!”
“….”
설화는 서방님의 부드러운 미소와 볼에 닿는 손길에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끼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언니들에게 들었어요. 제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그리고 내게 지금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어요. 저는 어머니의 유언을 따를 거예요.”
“….”
라혼은 가만히 설화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꼭 껴안아주었다. 설화의 결정은 바로 라혼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모친인 강무혜는 딸을 자신에게 맡겼었다. 그리고 라혼은 설화에게 그것을 지나가는 투로 언급했다. 설화의 말은 라혼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말이었다. 설화는 지금 무척 애매한 처지에 있었다. 여인천궁주는 가끔씩 설화의 눈이 묘안으로 바뀌어 상경묘가의 손(孫)인 줄로만 알았다가 호인(虎人) 그것도 제왕(帝王)의 운(運)을 가진 상서로운 백호(白虎)인 것이 드러나자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현재 조정은 지난 400여 년 간 천하를 다스리던 용황이 부재이고 호제가 천하를 다스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다음 호제의 뒤를 이를 호태자(虎太子)가 호황(虎皇)의 위(位)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백호(白虎)의 출현은 그것을 한순간에 뒤엎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관과 무림의 영역이 틀리다고 하지만 여인천궁에서 설화를 후계자로 두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설화의 곁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라혼이 항상 옆에 있어줄 것이란 사실이었다.
“내 이름에 맹세코 너를 보호하겠다. 너는 그저 네 뜻대로 살아가면 된다.”
“서방님.”
라혼은 이 아이를 이토록 사랑하게 될 줄은 진정 몰랐다. 처음 거둘 때만 해도 그저 도와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에 갓 태어난 아기를 거두었다. 그리고 여인의 마지막 유언대로 자신이 키울 생각을 했다. 서제가와 강무세가가 끼어든 복잡한 사건이었다. 일개 무림세가가 조정의 서제가를 향해 주저 없이 살검(殺劍)을 휘두르며 생사투를 벌인 일이었다. 아기도 아기를 받아 키운 자도 뻔히 다칠 것이란 걸 알면서 다른 사람에게 아기를 맡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라혼 자신이 평생 옆에서 지켜만 주겠다는 생각으로, 또 그전에 꾸었던 꿈도 있고 해서 아이를 아내라 부르며 맡았다. 하지만 사실상 설화는 딸이었다. 그러나 설화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본신으로 화해 두려움에 떠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에 한 긴 입맞춤은 자신도 어느새 설화를 딸이 아닌 한 명의 여인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설화는 긴 고민을 끝내고 서방님 품에 안긴 채 심장 고동 소리를 들으며 스르르 잠에 빠졌다. 라혼은 이제야 자신의 품에서 아무 걱정 없이 아이다운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잠든 설화와 함께 가만히 침상에 누웠다. 그리고 설화의 몸에서 풍기는 기분 좋은 냄새를 맡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자고 일어난 설화는 예전의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와 라혼에게 새 옷을 사달라며 졸랐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몸이 커지는 바람에 여인천궁의 여인들에게서 얻은 옷이었기 때문에 조금 헐렁했다. 그리고 그날 라혼은 설화가 이것저것 사달라는 것을 모두 사주는 바람에 백미 100섬, 약 500냥의 은자를 단 하루 만에 써야 했다.
하루 종일 설화가 이끄는 대로 가서 물건을 고르며 이것저것 묻는 설화의 질문에 대답해주며 주머니를 여는 것을 반복한 라혼은 붉은 노을이 질 무렵, 그때 그 화공(畵工)의 노점으로 찾아갔다.
“그림 그려주세요!”
해가 지기 시작하자 걸어놓은 그림을 챙기며 정리를 하던 화공은 눈앞에 고금(古今)에 보기 드문 미남 미부(美男美婦)를 보고 이것이 꿈이 아닌가 했다. 그리고 화흥이 돋는지 두말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해가 저물어 그림은 채 완성되지 못했다. 라혼은 안타까운 표정이 역력한 설화와 화공을 보고 길가에 자갈 하나를 주워 마법 주문을 새겼다.
“심벌(Symbol)! 컨티뉴얼 라이트(Continual light)!”
라혼은 [컨티뉴얼 라이트Continual light : 영원한 빛] 주문이 새긴 돌을 화공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림이 완성되면 백호문 백호나한부로 갖다 주시오. 이것은 그림의 대가요.”
“시, 신선…?”
화공은 환하지만 눈은 부시지 않은 빛나는 돌을 받아들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비밀은 반드시 지키시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돌은 당신 외 사람이 사용하면 불이 꺼질 것이오.”
“예, 명심하겠습니다.”
라혼은 설화를 데리고 이제 인적이 뜸해지는 시전을 떠났다.
“서방님! 어떻게 한 거예요? 도술이에요?”
“도술이다.”
“와~! 가르쳐줘요.”
“그럼 무공을 못하는데?”
“에?”
무공을 하지 못한다는 말에 설화는 잠시 고민하더니 불쑥 말했다.
“그럼 아까 그거 설화도 만들어줘요!”
라혼은 이공간(異空間) 에텔 스페이스에서 오늘 설화가 사들인 물건 중에서 백옥 노리개 하나를 꺼내 광석(光石)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아까 미처 생각지 못한, 시동어를 통해 껐다 켰다를 할 수 있게 하는 것까지 추가했다.
“와! 신난다. 켜져라! 꺼져라! 야아! 된다, 돼!”
시약이나 마법 재료 없이 마법진만으로 [컨티뉴얼 라이트Continual light]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마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옆에 있었다면 정말 두 눈이 휘둥그레질 일이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오늘은 밖에서 맛있는 거 먹어요.”
“하지만 집에서 언니들이 기다릴 텐데?”
“….”
그러나 설화의 기대에 찬 눈빛 공격에 라혼은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라혼은 다시 설화의 손에 이끌려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곳으로 갔다. 설화가 선택한 요릿집은 규모가 크고 화려하게 치장한 곳이었다.
“서방님, 여기, 여기요.”
“….”
라혼과 설화가 안으로 들어서자 점소이가 달려와 맞이했다.
“어서 옵셔! 무…?”
천호루의 점소이 달평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습관적으로 허리를 꺾으며 인사하고 이내 그윽한 향기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들었다가 할 말을 잃었다.
‘뭐, 뭐야? 뭐가 이렇게 예쁜 것들이 있다지? 사람 맞나?’
점소이 달평은 말없이 큰 눈을 깜빡이는 백의 소녀와 서늘한 눈빛의 남의사내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소녀의 고개가 사내 쪽으로 향하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자리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그리고 요리를 먹으며 시끄럽게 떠들던 식당 안의 사람들도 그제야 두 남녀를 발견했는지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저게 사람이야? 선녀야?”
“혹시 사람으로 둔갑한 구미호 아닐까?”
“그럼 사내놈은?”
“암컷이 있는데 수컷이 없을까?”
라혼과 설화는 점소이의 배려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최대한 차단된 곳에 자리잡았다.
“뭘로 드시겠습니까?”
“자네가 추천해주게….”
“저희 가게는 어떤 것이든 천상의 신선이 도 닦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맛있지만, 우리 숙수장이 최고로 자신하는 요리가 있으니 그걸로 드셔보십시오.”
라혼은 점소이가 추천한 요리와 술을 주문하고 그에게 약간의 은자를 내주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턱을 괴고 앉아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설화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보느냐?”
“그러고 보면 우리 서방님 참 예쁘게 생겼어요.”
“풋!”
설화는 언제나 여유만만하던 서방님의 표정이 무너지자, 뭔가 재미난 놀이를 발견한 아이처럼―십이세면 아이 맞다― 눈빛을 반짝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서방님이 여장을 하면 누구라도 반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예요. 그럼 설화는 언니라고 불러드릴게요.”
설화에게 흡인한 옥녀진기는 이미 모두 에텔 스페이스에 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아직 그 영향이 남아 있었다. 피부가 옥 같은 아기 피부처럼 매끄러워진 것이다.
“설화 너 자꾸 그러면 뽀뽀해버린다.”
“할 수 있으면 해봐요, 자!”
라혼은 오히려 설화가 눈을 감고 입술을 내미는 시늉을 하자 내심 당황했다. 그러나 요리가 나오기 전 입맛을 돋우기 위해 나온 다과(茶菓) 중 쫀득하지만 맛도 향도 없는 떡을 들어 차에 씻은 뒤 설화의 내민 입술을 살짝 두드리고 입으로 소릴 내었다.
“쪽!”
“어맛~!”
설화는 천연덕스럽게 미소짓는 서방님의 모습을 보고 당했다(?) 생각해 얼굴이 빨갛게 익은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깜찍한 설화의 모습에 라혼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하하하….”
그렇게 즐겁게 노는 사이 점소이가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던 요리가 나왔다. 요리는 점소이가 자랑할 만했다.
***
“어서 오십시오.”
“그동안 잘 있었는가?”
“방주님 덕분에 잘 있었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일단의 거친 사내들이 천호루에 들어서자 계산대에서 점소이들을 지휘 감독하던 중년의 지배인이 직접 그들을 맞이했다. 이들은 이곳의 뒷골목을 지배하는 염사방(艶事幇)의 무리들이었다.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창기를 등쳐 먹고 사는 모리배들이었다. 염사방의 방주(幇主) 포자진(胞子進)은 자신의 구역은 아니지만 가끔 천호루의 요리를 먹으러 오곤 했다.
“그럼 조용한 자리로 부탁하네.”
“예이 예, 절 따라오십시오.”
천호루의 지배인은 과장된 행동을 하며 이들을 2층의 특실로 안내했다. 마치 황제를 모시는 내관 같은 지배인의 태도에 흡족해하던 염주왕(艶柱王) 포자진은 특실 입구에서 거만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그런 티나는 행동에 천호루의 지배인 만적석(滿積石)이 내심 비웃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헉!”
“왜 그러십니까, 방주?”
“하늘 아래 저런 물건이 있다니…?”
“예?”
방주 포자진을 따라온 염사방의 무리들은 방주가 보고 있는 방향을 살폈다. 그리고 저마다 감탄성을 토했다.
“이야~!”
“꿀꺽!”
“포 방주님.”
만적석은 이들의 심상치 않은 태도에 불안한 마음에 조용히 포자진을 불렀다.
“음? 허허험! 들어가지….”
“예, 방주!”
방주 포자진은 아쉬운 마음을 접고 특실로 들어갔다. 천호루의 지배인이 밖으로 나가자, 포자진과 그 수하들은 저마다 감탄성을 발했다.
“내 살다, 살다 저런 물건은 처음일세!”
“어찌할까?”
“저런 물건이 내 눈에 띈 것은 하늘이 정한 인연이 분명하다.”
“방주님, 그럼…?”
“저걸 보고 그냥 지나치면 나는 염주왕 포자진이 아니다.”
전혀 말도 안 되는 곳에다 하늘을 파는 무시무시한 발언을 하는 포자진에게 수하들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포자진은 호기롭게(?) 말하며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럼 저희도….”
“그럼 물론이지. 우리는 한 형제나 다름없지 않은가?”
“역시 방주님은 영웅호걸이십니다.”
“내가 호호탕탕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
천호루의 지배인 만적석이 들으면 게거품 물 이야기를 주저 없이 하는 포자진이었다. 그렇게 호호탕탕한 자가 무전취식도 아니고 유전취식을 일삼느냐고 따지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헉, 방주님. 물건이 자리를 뜨는데요?”
“뭐야? 음~!”
포자진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물건도 건드릴 수 있는 물건과 건드릴 수 없는 물건이 따로 있는 법이었다. 확실하게 조사해서 뒤탈 없는 물건만 건드려야 장수(長壽)에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물건이 천호루를 나서는 뒷모습은 쓸 데 있는(?) 걱정을 지우기에 충분했다.
“가자! 먹는 것은 나중에 먹을 수도 있지만, 달아오른 몸을 푸는 것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다.”
“존명!”
염사방주 염주왕 포자진이 이렇듯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품속에 있는 한 권의 비급(秘笈)과 목갑(木匣) 안의 물건 때문이었다.
***
“서방님?”
“그래, 누군가 우릴 미행하고 있다.”
비록 옥녀심공의 공력을 잃었지만 덕분에 선천진기가 활성화된 설화는 지금으로도 무시못할 내공의 고수였다. 그랬기에 지금 자신들을 뒤쫓는 무리가 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다만 경험이 없는 설화는 그것이 미행이란 것을 깨닫는 데 시간이 걸렸고, 긴가민가해서 서방님에게 물었던 것이다.
“그럼 어쩌죠?”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실력이 썩 뛰어난 자들은 아니다. 곧 집에 도착하니까 일단 내버려두자!”
그러나 라혼과 설화가 백호나한부로 통하는 인적이 뜸한 으슥한 곳에 접어들자 그들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복면을 쓴 열두 명의 사내들이 라혼과 설화를 포위했다. 저들은 자신들의 움직임을 모른다고 판단했는지 조심스럽게 움직여 라혼과 설화가 걸어가는 길목에서 마치 천둥 소리 같은 심장 소리―어디까지나 고수의 입장에서…―를 흘리며 매복해 있었다. 그리고 설화는 모르겠지만, 라혼은 그들에게서 진득한 욕념의 기운을 감지하고 주저 없이 몸을 움직였다.
―퍽, 뻐벅. 쿵….
―컥,
라혼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녀석들을 쥐어박고(?) 그들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자기들이 어떻게 제압당한지도 모르게 제압당하고 의복까지 걸레가 되어 그 명을 다하고서야 사내들은 정신을 차렸다.
“있는 거 다 내놔!”
“대, 대협. 저희들은 그저 지나가던 선량한 사람들입니다.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은데…?”
“시꺼, 내가 어딜 봐서 대협이야! 나는 강도다. 그러니까 있는 거 다 내놔!”
“흐엑~!”
라혼은 스스로 강도라 칭하며 놈들이 가지고 있던 박도(朴刀)로 변명을 늘어놓는 놈의 목을 그어 피를 보게 했다. 진득한 혈향(血香)이 밤공기를 따라 흐르자, 놈들은 누더기가 된 품속을 뒤져 자신이 꽁꽁 숨겨두었던 은자까지 탈탈 털어 바쳤다. 그러나 놈들 중 뭔가를 숨기는 놈이 라혼의 시야에 잡혔다.
“야! 거기 너!”
“저, 저 말씀입니까?”
“아니, 네 앞, 땅바닥에 고개 처박은 놈!”
무서운 고수를 잘못 건드린 포자진은 최대한 선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느끼한 표정 지으면 죽어! 그리고 품속에 숨긴 거 꺼내!”
“나리, 별거 없습니다. 그저 상거래 장부책에 불과합니다.”
“봐서 장부책이 아니면 너 죽어!”
포자진은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생명과 같은 물건을 내놓으라 겁박하는 고수를 보고 평생 하지 않던 승부를 걸었다.
“네놈이나 죽어라!”
―휫!
―땅!
라혼은 놈이 갑자기 있는 힘껏 던진 뭔가를 잡아채고 도면(刀面)으로 놈을 후려쳐 기절시켰다. 그리고 놈이 던진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아이! 징그러~!”
그것은 어른 엄지만한 구더기였다. 특이하게도 그 구더기는 손바닥을 파고들려고 계속 꿈틀거렸다. 하지만 금강불괴(金剛不壞)인 라혼의 손바닥을 파고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구더기가 심상치 않은 것임을 알게 하기에 충분했다.
“야! 너! 거기 기절한 놈 품을 뒤져 책 꺼내와!”
“예? 예!”
염사방의 무리들은 꼴같잖게 발작한 방주 때문에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그가 별로 화난 것 같지 않자 얼른 방주 포자진의 품속에서 거의 너덜너덜한 책을 꺼내 최대한 겸손한 태도로 그에게 바쳤다. 라혼은 책을 속독으로 읽어나갔다. 책은 파락호의 품에서 나온 것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대단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목을 알 수 없는 비급은 다름 아닌 독경(毒經)이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독이 아닌 고충(蠱蟲)을 다루는 비급이었다. 비급의 내용대로라면 고독으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거나 잠재력을 격발시켜 일순간 큰 힘을 내는 것까지 가능했다. 그리고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손바닥 살을 파고 있는 흰 구더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은섬충(銀蟾蟲)이란 것인데, 바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흉물이었다. 라혼은 책의 내용을 암기하고 삼매진화(三昧眞火)로 책을 태운 뒤 구더기 같은 벌레 은섬충을 에텔 스페이스에 넣었다. 그리고 재가 된 책 속에서 잘 타지 않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은색의 천이었다.
―연자(緣者)는 들으라. 나는 원래 양잠(養蠶) 전문가였느니라.
어느 날 우연히 은섬충을 발견한 나는 그것이 돌연변이한 누에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다른 누에에 영향을 끼칠까 손으로 집어내려 했는데 그것이 내 손안으로 파고 들어가 깜짝 놀랐다. 그렇게 하루를 기절해 깨어나보니 은섬충이 파고 들어간 손바닥은 흉한 흉터를 남기고 거의 아물어 있었다. 그리고 온몸에 활력이 넘쳤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은섬충을 찾으러 온 괴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나의 손을 보더니 살수를 휘둘러왔다. 순간 나는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살의(殺意)를 품었다. 순간 그는 목불인견의 모습으로 고통스러워하며 내게 용서를 빌었다. 나는 살의를 거두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전과 다르게 무척 공손한 태도로 은섬충의 정체를 털어놓았다. 나는 그에게 은섬충을 다루는 요령과 기타, 다른 고충(蠱蟲) 다루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비밀리에 누에들과 함께 은섬충을 번식시키고 그것을 이용해 평소 마음에 두었던 여인에게 처음으로 실험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허무했다. 사랑하던 여인이 날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아니면 은섬충 때문에 사랑하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밀회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인의 아비에게 그것을 들켰다. 죽음의 위기에 몰린 나는 다시 또 한 번 은섬충을 사용했다. 내가 살던 고장의 패자(覇者)였던 그를 손아귀에 넣고 세상을 지배하고자 했지만 그는 사랑하는 여인의 아비였다. 나는 세상에 나갈 뜻을 접었다. 그리고 은섬충에게서 여인을 풀어주기 위해 고독(蠱毒)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어리석은 자다. 여인을 풀어주기 위해 시작한 연구에 빠져 오히려 여인을 실험 도구로 삼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 글을 새긴 이 천이 바로 은섬충에서 실을 뽑아 만들어낸 그 천이다. 나는 나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얻어낸 심득을 한 권의 책에 담고, 후회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책 속에 숨긴다.
사랑하오. 그리고 미안하오. 그러나 두렵소.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았을까 봐 진정 두렵소. 절대로 나를 용서하지 마시오. 하양-.
책을 쓴 자의 한탄 어린 글을 읽은 라혼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삼매진화에도 끄떡하지 않은 천을 살펴보았다. 크기로 보건대, 두세 번 접어야 크기가 책과 같아질 텐데 책을 읽을 때 전혀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얇았다. 불에도 타지 않고, 들고 있는 박도로 잘라보려 했지만 베어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약간의 신축성까지 있었다.
“이거 갑옷 만들면 좋겠군.”
라혼은 천도 에텔 스페이스에 넣고, 자신의 눈치만 살피는 놈들을 바라보았다.
‘오늘 설화 때문에 출혈이 심했는데 잘됐군.’
라혼은 놈들에게 한 방씩 먹여 기절시킨 뒤 설화를 데리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서방님, 대단해요! 어떻게 열두 명을 한꺼번에…. 그리고 그 사람들 불쌍해요. 그런데 뭐 하는 사람들이었을까요?”
“복면에 칼 들고 있으면 뻔하지! 강도다. 떼로 몰려 있으니 떼강도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서방님은 관리잖아요. 관리가 강도에게 강도짓 해도 되는 거예요?”
“그건 장물 압수라고 하는 거다. 강도의 물건은 일단 모두 장물이니까! 그리고 그 녀석들은 내 부하들을 풀어서 잡을 거니까 설화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음,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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