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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트레일 9구간 제1부
충의사주차장-저한당-대치천-광현당-
호곡천-노곡길-둔리임도-뫼넘이고개-
용봉산전망대-마애여래입상-용봉사
20260507
1.매헌 윤봉길 의사
-선비의 기개 맑고 맑아서 만고에 빛나리
올해 1월 15일부터 안내 도보여행팀을 따라 동서트레일을 탐방하고 있다. 1구간부터 시작하여 지난 4월 16일 7구간까지 탐방을 마쳤다. 그런데 8구간을 건너뛰어 9구간부터 탐방한다고 한다. 그대로 진행하면 좋을텐데, 주최측에서 결정한 일이니 따를 수밖에 없다. 5월 7일 동서트레일 9구간 탐방을 위해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윤봉길 의사 유적' 주차장에 도착하여 9구간을 탐방하였다. 동서트레일 9구간은 내포문화숲길의 내포역사인물길 1코스와 동일하다. 내포문화숲길 사이트에서는 내포역사인물길 1코스를 다음과 같이 개략한다.
"충의사~이응노생가기념관 11.1km, 우리나라 대표 독립운동가 윤봉길의사 사당인 충의사에서 출발하여 예산과 홍성의 경계인 뫼넘이고개를 지나 용봉산에 오르면 충남도청과 내포신도시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내포전망대와 작은 금강산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용바위, 병풍바위 등 수많은 기암괴석을 지나가게 된다. 특히나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입상의 섬세한 아름다움과 용봉사 마애불의 투박한 미소도 만나게 되며 이후 용봉산 아래 마을길을 따라가면 대한민국 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고암 이응노 화백의 생가 기념관에 도달하게 된다."
위의 설명에서 뫼넘이고개를 예산과 홍성의 경계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고 뫼넘이고개는 예산군 덕산면 둔리와 예산군 삽교읍 목리의 경계이다. 그리고 내포전망대는 용봉산전망대라고, 내포문화숲길·동서트레일 종합안내판에 분명히 적혀 있고, 이정목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동서트레일 9구간 탐방 체험을 홍성군 홍북읍 신경리 용봉사를 경계하여 2부로 나누어 정리한다.
제1부(충의사~용봉사) : '윤봉길 의사 유적' 주차장에 도착하니 날씨는 맑은 듯 구름이 끼어 있다. 서남쪽에는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수덕산)이 반가이 인사한다. 동서트레일 9구간은 내포역사인물길 1코스와 동행하여 남쪽으로 이어가며 서쪽의 덕숭산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원효봉과 가야산을 조망하게 될 것이다. 이번 9구간이 통과하는 지역을 개관하면 이렇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충의사 입구에서 출발하여 도중도를 지나 덕산면 둔리로 넘어간 뒤, 뫼넘이고개에서부터 덕산면 둔리와 예산군 삽교읍 목리의 경계를 이루는 수암산~용봉산 능선을 따라 홍성군 홍북읍 신경리 용봉산전망대로 넘어간다. 이곳에서 신경리 마애여래입상과 용봉사를 거쳐 구룡대를 지나 홍북읍 상하리로 넘어가 용봉초등학교로 이어간다. 용봉초등학교 맞은편 용봉천 둑방을 따라 동막마을 입구에서 홍북읍 중계리로 넘어가 용봉천 둑방을 계속 따라 이응노생가기념관까지 이어간다. 9구간이 통과하는 지역은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와 둔리, 삽교읍 목리, 홍성군 신경리와 상하리, 중계리 지역으로, 예산군 덕산면 2개 里(시량리와 둔리)와 삽교읍 1개 里(목리), 홍성군 홍북읍의 3개 里 지역(신경리와 상하리, 중계리)이다.
윤봉길 의사 유적을 다 살피지 못했다. 충의사, 사적비, 윤봉길의사기념관, 어록탑, 의거기념탑, 저한당, 도중도의 광현당과 부흥원 등을 상세히 살피지 못하고 지나쳤다. 충의사에 참배하지 못했고, 사적비와 기념관은 바라만 보고, 의거기념탑은 가까이서, 어록탑은 하나하나 살펴 보았다. 그의 25세 짧은 생애가 눈부시게 눈물겹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 민중 계몽에 힘쓰다가 뜻을 더 크게 가지고 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결의문을 남기고 1930년 3월 6일 집을 떠났다.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선생을 찾아가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날 홍커우(紅口)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전승 축하 기념식에 물통 폭탄을 투척하여, 대한의 독립과 침략국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렸다.
순국 전 윤봉길 의사는 아들 종(淙)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너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서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 잔 술을 부어놓으라." 이 비장한 유언은 조선의 젊은이들을 대한 독립의 가열찬 무장 투쟁으로 이끌어 조국 광복의 날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40분, 윤봉길 의사는 일본 이시가와현 가나자와 육군 공병 작업장에서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 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머지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 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간다." 그의 말대로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되고, 1946년 3월 6일 재일동포들의 노력으로 윤 의사의 유해가 발굴됐고, 5월 15일 부산으로 봉환됐다. 이후 7월 6일 국민장을 거행하고 윤봉길 의사 유해를 서울 효창공원에 모셨다.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자리한 윤봉길 의사 유적을 지나 덕산면 둔리 지역으로 넘어간다. 예산군 덕산면은 덕숭산(수덕산)을 중앙에 두고 동서남북에 펼쳐져 있는데, 둔리는 덕숭산 동쪽과 수암산 서쪽, 용봉산 북쪽의 넓은 들녘에 자리하며, 중앙에 용봉저수지라고 불리는 둔리저수지가 차지하여 들녘에 물을 공급한다. 동서트레일은 둔리 들녘을 지나서 둔리 임도를 따라 수암산 등산로 나들목에서 수암산-용봉산 능선의 중턱으로 올라간다. 길가에는 보랏빛 오동나무 꽃들이 눈길을 끌고, 덜꿩나무 하얀 꽃들이 반짝인다. 봄에는 자잘한 하얀 꽃으로, 가을에는 자잘한 붉은 열매로 눈길을 끄는덜꿩나무는 들꿩이 붉은 열매를 먹는다고 하여 덜꿩나무라고 불린다고 하는데 유래가 정확한지는 확실하지 않다.
둔리 들녘과 둔리저수지, 덕숭산, 원효봉과 가야산을 조망하며 둔리 임도를 따라가면 수암산 등산로 나들목에 이른다. 둔리 임도와 작별하고 등산로를 따라 10분쯤 올라가면 수암산-용봉산 능선의 뫼넘이고개에 이른다. 뫼넘이고개는 예산군 덕산면 둔리와 삽교읍 목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고개 너머 삽교읍 목리 지역은 내포신도시 개발이 한창이다. 뫼넘이고개에서 수암산-용봉산 능선 남쪽 방향으로 따라가면 북쪽에 수암산, 서북쪽에 가야산 산줄기와 상왕산, 서쪽에 덕숭산과 둔리 저수지가 조망된다.
예산군 삽교읍 목리와 덕산면 둔리의 경계를 이루는 수암산-용봉산 능선을 따라 쉬엄쉬엄 풍경을 조망하며 40분쯤 가면 홍선군 홍북읍 신경리 용봉산전망대에 이른다. 용봉산전망대에서는 홍성군과 예산군에 걸친 내포신도시의 눈부신 발전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포신도시는 남부의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읍 지역(충남도청 본관, 충남교육청, 충남개발공사 등 이전)과 북부의 예산군 삽교읍 지역(충남도청 별관, 충남도의회, 충남지방경찰청 등 이전)으로 나뉘며, 이를 면적으로 환산할 경우 조기 개발되었던 홍성군이 63%의 부지를 차지하고 예산군이 37%의 잔여 부지를 차지한다고 한다.(나무위키 참조)
전망대에서 내포신도시의 솟구치는 발전상을 확인하고 용봉산 방향으로 내려간다. 용봉산전망대-용봉산 능선은 예산군 덕산면 둔리와 홍성군 홍북읍 신경리의 경계를 이루며 이어진다. 용 형상이라고 하는 용바위에 이르자 남쪽으로 풍경이 활짝 열린다. 용봉산전망대에서는 동쪽으로 활짝 열린 내포신도시의 문명상을 조망하는 가슴설렘이 있었는데, 용바위에서는 남쪽에 솟은 용봉산 악귀봉과 용봉산 최고봉의 자연을 조망하는 장쾌한 멋이 있다. 용봉산 능선 남쪽에 백월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백월산 동쪽에 홍성의 자존심 홍주읍성이 자리한 홍성읍 시가지가 흐릿하며, 백월산 북쪽에 자리한 이응노생가기념관을 어림한다.
용바위에서 내려오면 용봉사 갈림길인 임간휴게소, 남쪽으로는 용봉산 악귀봉과 정상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마애불과 용봉사로 이어진다. 그런데 임간휴게소 명칭이 비위를 건드린다. '숲속쉼터'라는 친근하고 다정한 용어가 있는데 임간휴게소라니? 상업적인 고속도로 휴게소 냄새가 아름다운 암릉의 용봉산 능선에 진동한다.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입상(洪城 新耕里磨崖如來立像)으로 내려갔다. 넓은 터 북쪽 언덕에 마애여래입상이 서 있고, 그 아래 예불대와 설명안내판 등이 설치되어 있다. 마애여래 입상 설명안내판의 내용이 자세하고 친절하다. 비종교인이요, 예술적 감각도 부족한 탐방객은 호사가의 겉멋으로 보물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을 살폈다.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자연 암석을 살짝 파내 감실형 공간 안벽에 돋을새김한 높이 4m의 불상, 잔잔한 미소와 온화한 인상, 마애여래상 아래에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마애여래입상을 겉멋으로 감상하고 용봉사로 내려간다.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2.6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52분
충남 예산군(禮山郡) 덕산면(德山面) 시량리(枾梁里) 윤봉길 의사 유적 주차장에 도착했다. 정면 뒤에 덕숭산이 보이고, 주차장 끝에 충의사 해설 안내소가 있으며, 오른쪽에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봉안한 충의사(忠義祠)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왼쪽 앞에 충의사 해설 안내소, 그 오른쪽에 예산 관광안내도, 바로 앞 오른쪽에 윤봉길 의사 유적 종합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충의사(忠義祠)로 올라가는 계단 왼쪽에 윤봉길 의사 유적 설명안내판과 종합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禮山 尹奉吉 義士 遺蹟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윤봉길(1908~1932) 의사를 기리고자 1972년에 그의 출생지와 농촌계몽운동이 펼쳐진 지역 일대를 사적으로 지정한 곳이다. 영정을 봉안한 충의사忠義祠, 윤봉길 의사 출생 이후 4세 때까지 살던 생가 광현당光顯堂,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23세 때까지 살며 성장한 저한당抯韓堂, 윤봉길 의사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현 광현당)에서 윤황과 김원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 11세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식민지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자퇴하였다가, 13세에 한문 공부를 시작한 후 성주록 오치서숙에서 수학했으며 이때부터 한학과 더불어 신학문과 민족문제, 농촌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20세에는 야학교재로 3권의 농민독본을 저술하여 농본국가의 당위성을 강조하였으며, 부흥원 설립 및 월진회를 조직하는 등 문맹 퇴치운동과 농민운동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감시 속에 농촌계몽운동만으로는 식민지의 삶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독립운동의 길을 찾아 1930년 3월 고향을 떠났다. 1931년 상하이에 도착하여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된 이후, 1932년 4월 29일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졌다. 이로 인해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비롯한 여러 명의 일본인 수괴를 죽이고, 부상 입혀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해 12월 19일 25세의 나이로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한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1946년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환국하여 현재 서울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언덕에 충의사가 자리하고, 주차장 왼쪽에 충의사 해설 안내소와 예산 관광안내도, 윤봉길 의사 유적 설명안내판이 있다.
윤봉길 의사 유적 주차장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 앞에 윤봉길 의사 기념관 안내판과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다.
윤봉길의사기념관尹奉吉義士紀念館은 민족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매헌 윤봉길(1908~1932) 의사의 생애와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1년 건립되었으며, 2021년 제1종 전문 박물관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이곳에는 윤봉길의사 유품인 보물 65점을 비롯하여 윤의사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여러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운봉길 의사는 농촌 계몽운동과 야학을 통해 농촌부흥 운동을 주도하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 활동의 한계를 느끼고,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選)이란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망명 이후,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였으며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겸 상하이 사변 승전 축하 기념식에서 일제 수뇌부를 향해 폭탄을 던져 대한의 민족혼과 독립 정신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25년의 짧았던 삶을 뒤로한 채 군법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윤의사는 그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순국하셨습니다. 운봉길 의사의 삶과 업적을 올바로 알리고, 농촌계몽과 의열투쟁을 위한 애국애족의 나라사랑 정신을 선양하고자 1968년부터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기념관을 비롯해 충의사, 광현당(생가), 저한당(성장가) 등은 사적으로 지정, 윤봉길 의사 유적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윤봉길의사기념관은 윤의사의 고귀한 애국정신을 체계적으로 계승·발전시키고, 윤의사의 삶과 업적을 기리며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 사적비(梅軒尹奉吉義士史跡碑)의 비문을 옮긴다. 비문은 김동욱 선생이 지었다.
伽倻修德龍鳳(가야수덕용봉)의 靈山에 에워싸인 이 마을 목바리에서 義士 梅軒 尹奉吉은 태어났다. 마을에서는 지도자로 농촌운동에 앞장서고 一九三二年 上海에서는 폭탄을 품고 死地에 들어가 日本軍의 首腦部(수뇌부)를 爆殺(폭살)시키어 우리나라 국권 회복의 大義를 밝히고 二五세로 민족을 위하여 散華하니 참으로 殺身成仁의 忠이었다. 梅軒은 六鎭을 개척한 高麗의 功臣 文肅公(문숙공) 尹瓘(윤관) 장군의 二七세 손이요 坡平 尹堭(파평윤황)공과 慶州 金元祥(경주김원상) 여사의 장남으로 一九O八년 六월 二十一일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本名은 禹儀요 字는 鏞起이며 梅軒은 雅號이고 鳳吉은 別名이다. 어려서 어머니의 엄격한 薰陶(훈도)를 받았고 성품이 강직하여 옳은 일에는 뒤로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백부 尹垌(윤경)공에게 글을 배우고 十一세에 德山普通學校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一九一九년 三·一운동이 일어나자 항일 시위를 벌이고 학교를 自退하여 한문을 배우다가 十四세에 烏峙書塾(오치서숙)에서 梅谷 成周錄 선생에게 經書와 詩文을 익히는 한편 신학문의 습득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농촌운동의 경륜과 思想의 기틀이 여기서 잡혔다. 一五세에 星州 裵用順과 결혼하여 아들 淙(종)을 두었다. 一七세에 鳴椎(명추)와 玉唾(옥타) 등 漢詩集을 펴내고 학문이 깊어짐에 따라 修身治國의 大道를 깨닫고 자기의 갈 길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깊은 省察을 하였다. 어느 날 烏峙書塾 앞에서 한 청년이 공동묘지의 무덤을 찾아달라 하니 자기 아버지의 무덤은커녕 다른 사람들의 무덤도 구별할 수 없게 되자 梅軒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이 청년은 무식함으로 父母의 묘를 잃고 우리 겨레는 무식함으로 나라를 잃었음을 깨달은 梅軒은 文盲退治와 農村運動에 앞장서기로 다짐하였다. 一九세에 烏峙書塾을 마친 뒤 角谷讀書會를 조직하고 곧 夜學을 열어 젊은이들의 교육에 앞장서는 한편 黃鍾震, 鄭鍾甲, 尹殷儀 등과 함께 月進會와 修岩體育會 및 沐溪購買組合을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펴고 다시 이를 한데 묶어 一九二九년 復興院을 세우고 農民讀本을 저술하여 애국사상을 길렀으며 모든 弱小民族의 解放과 自由平等을 외치며 월례강연회를 열어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一九二九년 봄 학예회에서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면서 우리나라와 日本帝國主義를 비유 諷刺하다가 일경에게 잡히어 곤욕을 치르고 감시를 받게 되자 매헌은 一九三十년 三월 六일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이란 유서를 남기고 二三세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滿洲와 靑島를 거쳐 이듬해 八월 上海로 가 上海英語學校에 다니는 한편 臨時政府의 狀況을 탐문하던 중 安恭根과 朴震의 주선으로 白凡 金九 선생을 만나 서로 肝膽相照 意氣相通하였다. 이때 상해 주둔 일본군은 그들 天皇의 생일 경축식 거행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헌은 일본군의 수뇌부를 폭사시키기로 결심하고 韓人愛國團에 엄숙히 선서하고 四월 二九일 물통과 도시락으로 가장한 폭탄 두 개를 가지고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虹口公園에 들어 갔다. 식이 시작되고 日本의 국가가 울려퍼질 때 단상을 향하여 폭탄을 던지니 폭음과 함께 식장은 일대 수라장이 되었다. 사령관 白川義則(시라카와 요시노리)과 거류민단장 河端(가와바타)은 폭사하고 重光公使(시게미쓰미모루) 등 십여 명은 중상을 입었다. 이를 바라본 매헌은 가슴에 품었던 太極旗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는 乾坤一擲의 쾌거였고 그 轟音은 上海는 물론 중국 천지와 온 세계를 뒤흔들었다. 五월 二五일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자 梅軒은「너희와 우리는 歷史와 風俗과 言語가 다른 異民族이다. 너희가 우리를 통치한다는 것은 極東의 平和를 파괴하고 人類의 自由를 말살하는 야만적 행동이라」고 꾸짖었다. 곧 일본에 호송되어 一九三二년 十二월 一九일 오전 七시 四十분 金澤(가나자와) 郊外에서 총살형으로 殉國하니 享年이 二五세였다.매헌은 죽음에 앞서 엄숙한 표정으로「남아로서 당연한 일을 하였으니 만족하게 느낄 뿐이라」고 하였다. 이때 고향에서는 抯韓韓堂(저한당)의 대문 띳장이 부러지고 將軍峰이 무너지는 異變이 있었으니 어머니 金元祥(김원상) 여사는「내 아들은 죽지 않았다. 이 나라 이 겨레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이라」고 숙연히 말씀하였다. 이 義擧로 말미암아 中國을 위시하여 강대국들은 우리 臨時政府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國際聯盟은 일본을 극동의 侵略者로 규정하였으며 蔣介石總統은「중국의 백만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했다」고 찬양하였고 중국 洛陽軍官學校에 一九三三년 韓國光復軍特別班을 창설했으며 카이로회담에서도 한국의 즉시 독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조국이 광복되자 一九四六년 五월 매헌의 유해를 일본으로부터 고국에 봉환하여 國民葬으로 서울 孝昌公園에 모시고 一九六二년에 建國功勞勳章 重章을 追叙하였다. 一九六五년 매헌기념사업회가 조직되고 一九六八년에 忠義祠를 창건하였으며 一九七二년에 遺品, 遺墨 五三점이 寶物 제五六호로, 光顯堂, 抯韓堂과 復興院 및 忠義祠가 史蹟 제二二九호로 지정되었다. 忠義祠 경내에는 梅軒農民像, 梅軒紀念館, 梅軒紀念塔이 세워졌다. 한편 재단법인 梅軒獎學財團이 설립되어 育英事業을 펴고 社團法人 梅軒紀念事業會와 月進會는 해마다 추모제와 매헌문화제를 거행하여 이곳을 독립운동의 요람지로 가꾸어 그 업적을 길이 宣揚하고 있다. 매헌이 그리던 祖國의 光復이 이룩된지 三九년 아직 분단의 슬픔은 안고 있지만 그동안 우리나라는 괄목할만한 발전을 하였다. 매헌이 순국한지 五二년을 맞이하여 매헌 기념사업회는 大韓民國 援護處와 國會議員 尹碩淳, 株式會社大地 鄭東祐의 獻石을 받아 金東旭은 글을 짓고 金榮基는 글씨를 써서 이 碑를 세우다. 다음은 농민독본의 한 구절이다.
1. 나는 농부요 너는 노동자다. 우리는 똑같은 일하는 사람이다. 높지도 낮지도 아니하다. 나는 밭을 갈고 너는 쇠를 다룬다. 우리는 세상이 잘 되도록 쉬지 말고 일을 하자. 千 가지 萬 가지로 낡고 물들고 더럽고 못생긴 것을 무찔러버리고 새롭고 순수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놓자. 2. 인생은 자유의 세상을 찾는다. 사람은 天賦의 자유가 있다. 머리에 돌이 눌리고 목에 쇠사슬이 걸린 사람은 자유를 잃은 사람이다. 자유의 세상을 우리가 찾는다. 개인의 자유는 민중의 자유에서 낳아진다.
一九八四년 四월 二九일 社團法人 梅軒紀念社業會 會長 李康勲 建立
정면에 윤봉길의사기념관이 있고, 오른쪽에 예산군관광시설 사업소가 있다.
윤봉길의사기념관 왼쪽에 매헌윤봉길의사 어록탑이 서 있다. 어록탑비 받침돌에 '월진회가'와 '월진회 금언', 어록탑 오른쪽에 인생관, 왼쪽에 학습관이 적혀 있고, 어록탑 뒤쪽 벽에 어록이 새겨져 있다.
학습관(學習觀) : 不朽名聲士氣明(불후성명사기명) 士氣明明萬古晴(사기명명만고청) 萬古晴心都在學(만고청심도재학) 都在學行不朽聲(도재학행불후성) 길이 드리울 그 이름 선비의 기개 맑고/ 선비의 기개 맑고 맑아서 만고에 빛나리/ 만고에 빛나는 마음 학문에서 우러나며/ 그 모두가 학행에 있으니 그 이름 스러짐이 없으리
월진회가 : 조화신공 가야산의 정기를 받고 절승절기 수덕산의 정기를 모아 금수강산 삼천리 무궁화원에 길이길이 빛을 내는 우리 월진회/ 가야산은 우리의 배경이 되고 온천들은 우리의 무대장이다 두팔 걷고 두발 벗고 출연하여서 어서 바삐 자작자급 실현을 하자/ 암흑동천 계명성이 돋아오나니 약육강식 잔인성을 내어버리고 상조상애 넉자를 철안(鐵案) 삼아서 굳세게 단결하자 우리 월진회
월진회 금언(月進會金言) : 月, 월지광(月之光)으로 日落之暗(일락지암)을 다시 밝힐 수 있다. 進, 행진곡(行進曲)에 발을 맞추어 한마음 한뜻으로 전진(前進)하자. 會, 회(會)의 준분(俊分)을 폐부(肺肺腑府)에 굳세게 명각(銘刻)하자. 金, 금(金)과 같이 단단한 만중(萬衆)의 숭배물(崇拜物)이 되자. 言, 언약불수(言約不守)면 불신(不信)이요 불신이면 비인(非人)이다.
인생관(人生觀) : 沐溪一曲水(목계일곡수) 修德源自流(수덕원자류) 滌吾身汚穢(척오신오예) 無盡格千秋(무진격천추) 목바리 한 구비 시냇물/ 수덕산 근원에서 스스로 흐르네/ 내 몸의 더러운 때 깨끗이 씻어 버리고/ 오랜 시간 마르지 않고 영원히 흐르리.
●이상을 실천하자 :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세우기 위하여 산다. 이상이란 무엇이냐? 목적의 성공이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나도 이상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하였다. (이는 의거를 뜻하며 준비된 의사로서의 변신이다.) ●큰 사랑을 깨닫자 : 큰 사랑에 눈을 뜨자!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일층 강인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다. 나의 우로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떠나간다는 결심이다.
●자유를 쟁취하자! : 사람은 자유의 세상을 찾는다! 사람에게는 천부의 자유가 있다. 머리에 돌이 눌리고 목에 쇠사슬이 걸린 사람은 자유를 잃은 사람이다. 자유 세상을 우리가 찾는다. 자유의 생각은 귀하다. 나에 대한 생각 민중에 대한 생각 그리고 개인의 자유는 민중의 자유에서 나아진다. ●생명 창고를 지키자 : 생명창고는 농민의 몫이다! 농민은 세상 인류의 생명 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다. 우리 조선이 돌연히 상공업 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은 그 자취를 잃어 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있을 것은 사실이다.
●바로보고 배우자 : 미래를 현재의 토대 위에서 준비하자! 우리가 울긋불긋한 단풍잎을 꽃으로 알면 우리는 망할 것이다. 시절은 봄철이 아니요 만물을 죽이는 가을철이다. 우리는 삼동을 살아나갈 양식도 많이 준비하여야 하고 의복도 많이 준비하여야 격렬한 추위를 당할지라도 겁내지 않을 것이다. ●다같이 나가자 : 희망의 나라로 가자! 나는 농부요 너는 노동자다. 우리 똑같이 일하는 사람이다. 높지도 낮지도 아니하다. 나는 밭을 갖고 너는 쇠를 다룬다. 우리 세상이 잘되도록 쉬지 않고 일하자. 앞으로 앞으로 더욱 앞으로. ●뜻을 세우다 : 일본글은 가짜다! 힘으로 우리나라를 덮쳐 국모를 살해하고 민족 정기를 말살하고 국왕을 몰아내고 나라를 뺏어 우리의 목숨과 재물을 업신여겨 인륜을 저버렸다. 이런 자들의 글을 배워 무엇하니?
매헌 윤봉길의사 어록탑을 살피고 나오며 윤봉길의사기념관과 매헌 윤봉길의사 어록탑을 뒤돌아보았다.
동서트레일 8·9구간 시종점 '충의사'는 내포역사인물길 1코스 시종점이며, 내포천주교순례길 4코스 시종점이기도 하다.
동서트레일 8·9구간 시종점에 내포문화숲길·동서트레일 종합안내판이 서 있다. 동서트레일 9구간은 내포역사인물길 1코스와 동행한다.
충의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중앙의 매헌 윤봉길의사 사적비, 왼쪽의 예산군관광시설 사업소를 지나 왼쪽 윤봉길의사 기념관 옆 매헌 윤봉길의사 어록탑을 살피고, 바로 앞 동서트레일 8·9구간 시종점으로 와서 덕산온천로의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소시(小柿)와 조량(鳥梁)의 이름을 따서 시량리(柿梁里)라 부른 데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 덕산군(德山郡) 현내면(縣內面)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궁평리(宮坪里), 신동(新洞), 노곡리(蘆谷里), 조량리(鳥梁里), 소시촌(小柿村)의 각 일부를 병합하고, 시량리라 하여 예산군 덕산면에 편입되었다. 동부, 남동부 및 북서부에 해발고도 100~200여m의 구릉지가 발달되어 있는데, 남동부 경계의 수암산(秀岩山)[260.1m]이 일대에서 가장 높다. 대치천 및 호곡천 일대에는 곡간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다. 시량리는 덕산면의 중동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삽교읍 신리, 서쪽으로 대치리, 남쪽으로 광천리·둔리, 그리고 북쪽으로 옥계리·사동리·신평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행정리는 시량1~3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새재벌, 고용나무골, 목바리, 수암산골 등이 있다. 주요 시설로는 시량초등학교, 윤봉길의사 생가지 등이 있다. 유적과 유물로는 예산 윤봉길의사 유적[사적 제229호], 윤봉길 의사 유품[보물 제568호]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저한당 담장길을 따라 윤봉길의사 기념관 맞은편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저한당(抯韓堂) 출입구로 내려간다.
저한당(抯韓堂) 동쪽 출입문인 만유문(萬有門)으로 들어간다. 梅軒尹奉吉念事業會禮山支部 월진회 표지판이 붙어 있다.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禮山 尹奉吉 義士 遺蹟) 설명안내판 내용은 충의사 입구의 설명안내판과 동일하다.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윤봉길(1908~1932) 의사를 기리고자 1972년에 그의 출생지와 농촌계몽운동이 펼쳐진 지역 일대를 사적으로 지정한 곳이다. 영정을 봉안한 충의사, 윤봉길 의사 출생 이후 4세 때까지 살던 생가 광현당(光顯堂),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23세 때까지 살며 성장한 저한당(抯韓堂), 윤봉길 의사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현 광현당)에서 윤황과 김원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 11세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식민지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자퇴하였다가, 13세에 한문 공부를 시작한 후 성주복 오치서숙에서 수학했으며 이때부터 한학과 더불어 신학문과 민족문제, 농촌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20세에는 야학교재로 3권의 농민독본을 저술하여 농본국가의 당위성을 강조하였으며, 부흥원 설립 및 월진회를 조직하는 등 문맹 퇴치운동과 농민운동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감시 속에 농촌계몽운동만으로는 식민지의 삶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독립운동의 길을 찾아 1930년 3월 고향을 떠났다. 1931년 상하이에 도착하여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된 이후, 1932년 4월 29일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졌다. 이로 인해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비롯한 여러 명의 일본인 수괴를 죽이고, 부상 입혀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해 12월 19일 25세의 나이로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한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1946년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환국하여 현재 서울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매헌윤봉길의사상(梅軒尹奉吉義士像)과 윤봉길의사의거기념탑(尹奉吉義士義擧記念塔)이 저한당 북쪽에 서 있다. 의거기념탑 비문의 내용을 옮긴다. "민족의 정기 드높인 윤봉길의사 이곳에서 낳고 자라다. 거치른 만주벌판에서는 이 나라의 운명 크게 통곡하시고 상해 홍구 공원에서는 의분의 폭탄 던져 이 겨레의 혼 크게 들깨우셨네. 그는 동지의 어려움을 앞서 감당하기를 즐겨하였고 젊음과 생명을 받쳐야 할 곳을 알았으며 이를 몸소 실천하기를 힘쓰던 참 애국자였다. 모든 것 나라 위해 바친 그대 위에 영광 길이 빛나고 이곳 그대의 고향에 고이 잠드소서. 1965년 6월 30일 건립"
'한국을 건져 내는 집'이라는 뜻의 저한당(抯韓堂)은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4세 때인 1911년부터 23세 때인 1930년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기까지 살았으며, 야학회와 농촌부흥운동을 이곳에서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봄을 맞이하여 매헌 윤봉길 의사 유적 저한당(抯韓堂)의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있다.
저한당(抯韓堂)은 바깥채, 안채,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에 야학방이 있다.
사랑채 방의 작은 앉은뱅이 책상 위에 윤 義士의 사진과 야학방 안내판이 놓여 있다. "이곳은 윤 의사(義士)가 오치서숙(烏峙書塾)을 마치고 돌아와 문맹퇴치운동의 일환으로 야학회와 농촌부흥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한 방이다."
저한당(抯韓堂)은 '한국을 건져 내는 집'이라는 뜻이며,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 의사가 4세였던 1911년에 아버지 윤황을 따라 이사와 살던 집이다. 5남 2녀 가운데 장남인 윤봉길 의사는 동생들과 우애가 남달랐고, 어린 시절 이 집에서 여러 학문을 익혔다. 윤봉길 의사는 1930년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며 민족 운동을 꾸준히 펼쳤다. 따라서 1932년에 윤봉길 의사가 순국하고 1945년에 해방이 되던 날까지 저한당은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받았다. 1972년 8월까지 윤봉길 의사의 유족이 이곳에서 살았으며, 10월에 저한당을 비롯한 윤봉길 의사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74년에 낡고 헌 부분을 수리하였다.
저한당(抯韓堂) 맞은편에 현장학습토론장이 있고, 그 왼쪽 만유문 옆에 梅軒尹奉吉念事業會禮山支部 월진회가 자리한다.
저한당(抯韓堂)은 바깥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바깥채 앞에 백송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저한당(抯韓堂) 유적 남쪽 출입문인 계명문(啓明門)을 나와서 뒤돌아보았다.
충의사 0.2km, 용봉사 5.5km 지점, 대치천이 동쪽 방향으로 건너편 도중도 옆으로 흘러간다.
대치천은 덕산천에 유입하는 삽교천 수계의 제2지류이다. 예산군 덕산면 대치리에서 발원하는 대치천은 덕숭산 북쪽사면을 비롯하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에서 지표수가 모여 흐르는 지방하천이다. 대치천은 예산군 덕산면 윤봉길 의사 생가가 있는 도중도 앞에서 삽교천의 제3지류인 호곡천과 합수한 뒤 덕산천과 합류한 후 본류인 삽교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대치천은 유로연장 5.7㎞, 유역면적 23.98㎢이며, 제3지류인 호곡천은 유로연장 4.77㎞, 유역면적 8.75㎢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치천의 도중도교를 건너 도중도(島中島)로 넘어간다. 오른쪽 뒤에 덕숭산이 솟아 있다.
저한당(抯韓堂)에서 계명문(啓明門)으로 나와 도중도교를 건너다가 저한당(抯韓堂)을 다시 돌아보았다.
도중도 서쪽 출입구에서 동서트레일은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앞에 탐방로 안내판이 서 있고, 그 뒤에 공중화장실이 있다.
'내건너'라 불리던 도중도(島中島)는 목계천이 양쪽으로 갈라져 배 형태의 자그마한 섬 모양으로 윤의사가 태어난 광현당(光顯堂)이 있는 곳이다. 후일 윤 의사는 일본인이 절대 발을 들여놓지 못할 '섬 속의 섬'이란 뜻으로 도중도(島中島)라 명명했다. 도중도는 매년 범람하여 버려진 땅이었으나 '땅두더지'라 불릴 정도로 부지런했던 조부(윤진영)의 노력으로 윤봉길 의사의 집안은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게 된다. 현재 이곳에는 광현당 및 윤 의사가 1928년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설립한 부흥원(復興院)이 복원되어 있다.
도중도 서쪽 출입구에서 동서트레일을 벗어나 광현당과 부흥원을 살피고 되돌아오기로 한다.
산악의 신령한 기운을 받아 매헌이 탄생한 곳을 기리는 매헌악강유허비(梅軒嶽降遺墟碑)이 1985년 6월 21일 건립되었다.
광현당은 윤봉길 의사가 1908년 6월 21일에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의 장남으로 태어나 4세까지 살던 집이다. 윤봉길 의사는 고려 시대 명장 문숙공 윤관 장군의 후예로, 본명은 우의, 아호는 매헌이며 봉길은 스스로 붙인 별명이다. 광현당이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윤봉길 의사의 증조부인 윤자 때부터 이곳에서 살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윤봉길 의사는 훗날 이 집의 사방으로 냇물이 흐르는 모습이 섬과 같다고 하여 이곳을 한반도 가운데 위치한 섬이란 뜻의 '도중도'라고 불렀고, 일제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 하여 이곳에서 독립운동의 앞날을 설계하였다. 1974년 정부에서 낡고 헌 부분을 수리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앞에 연자방아, 오른쪽 뒤에 부흥원이 있으며, 그 앞쪽에 무궁화동산, 그 오른쪽에 동쪽 출입구가 있다.
연자(硏子)방아는 곡식의 껍질을 벗겨내거나 가루내는 용도의 방아, 연자매라고도 한다. 이것은 한번에 많은 곡식을 찧거나 빻는 도구로서, 둥글고 판판한 큰 돌 위에 둥글고 작은 돌을 옆으로 세워 얹고 아래 위가 잘 맞닿도록 한 후 돌리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조선시대에는 연자방아가 마을마다 하나씩 있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이 연자방아는 평소 윤봉길 의사 유적에 관심이 많으신 주민이 도중도 사적지 조성을 위하여 기증해 주신 것입니다. - 안내판
부흥원은 윤봉길 의사가 문맹 퇴치를 위해 세운 교육기관이다. 윤봉길 의사는 한 청년이 글을 몰라 공동묘지 팻말을 모두 뽑아들고 와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한 사건을 계기로 농촌계몽 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처음에는 저한당의 사랑방에서 야학당으로 시작하였고 점차 인원이 늘면서 부흥원을 세웠다. 부흥원에서는 주로 배운 내용을 발표하고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는 학술활동을 했으며, 공동구매와 저축, 지역특산물 애용, 부업활성화 등 생활을 개선하는 계몽활동도 펼쳤다. 또 윤봉길 의사는 농촌개혁 운동을 추진할 사람을 모아 월진회를 세우고 건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자는 뜻으로 수암체육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나 초상을 당했을 때 서로 도와주는 위친계 활동을 하는 등 지역민이 화합하는 여러 활동을 펼쳤다. 1928년 2월 25일에 윤봉길 의사가 부흥원의 대들보에 상량을 축하하는 글을 직접 써 상량식을 하였고, '지식 쌓기, 가난 극복, 단결'을 목표로 매월 14일에 농촌계몽 애국강연회를 열어 농촌계몽 정신과 애국정신을 전파하였다. 대들보는 윤봉길 의사의 다른 유품과 함께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어 윤봉길의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현 부흥원 모습은 1974년 충의사 성역화 사업을 추진할 때에 복원한 것이다. *상량식 : 새로 지은 건물에 재난이 없도록 땅과 집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
광현당과 부흥원을 살피고, 공중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는 도중도 서쪽 출입구로 나가 도중도를 왼쪽으로 돌아간다.
충의사 0.3km, 용봉사 5.4km 지점, 도중도를 나와 시랑부흥길을 따라 내려간다. 정면 뒤에 수암산 능선이 이어진다.
대치천(목계천)이 양쪽으로 갈라져 배 형태의 자그마한 섬 모양을 이루는 도중도(島中島)에 광현당과 부흥원이 복원되어 있다.
시랑부흥길을 따라 호곡천의 다리를 건넌다. 호곡천은 둔리저수지에서 흘러내려 대치천에 합수되어 삽교천에 유입된다.
삽교천의 제3지류인 호곡천은 예산군 덕산면 윤봉길 의사 생가가 있는 도중도 앞에서 삽교천의 제2지류인 대치천에 합수되며, 호곡천은 유로연장 4.77㎞, 유역면적 8.75㎢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호곡천의 다리를 건너 이정목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간다.
충의사 0.7km, 용봉사 5.0km 지점, 시랑부흥길을 따라 국도 제40호선 윤봉길로의 수암교 아래를 통과하여 노곡길로 이어간다.
윤봉길로의 수암교 아래를 지나 도로명이 버뀌는 노곡길을 따라 예산군 덕산면 둔리 들녘을 지난다. 오른쪽에 덕숭산이 솟아 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둔리(屯里) 북부에는 대치천과 호곡천 연변에 범람원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다. 대치천은 북부 경계를 동서 방향으로 흐르고, 호곡천은 북중부에서 남서-북동 방향으로 흘러 용봉저수지로 유입된다. 둔리는 덕산면의 동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삽교읍 신리·목리, 서쪽으로 광천리·사천리, 남쪽으로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그리고 북쪽으로 광천리·시량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행정리는 둔1~2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 마을로는 궁리, 큰말, 한냇벌, 벌뜸, 노곡리, 아랫가루실, 윗가루실 등이 있다. 국도40호선과 국도45호선은 둔리의 북부 경계에서 연결되고 있다. 기타도로들은 둔리의 곳곳을 지나면서 개설되어 있는데, 여러 곳에서 국도40호선과 국도45호선에 연결된다. 북부의 대치천 범람원 충적지 및 북중부의 호곡천 범람원 충적지에서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고, 북서부, 북중부 및 남부의 구릉지에서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노곡길을 따라 고향촌 음식점을 지나면 꽃산딸나무 꽃길이 이어진다.
흰색과 붉은색 깃발이 날리는 깃대가 서 있는 당집을 지난다.
중앙 앞에 원효봉, 그 왼쪽 뒤에 가야산이 보인다. "가야산(伽倻山)은 충남 서산시, 예산군 및 홍성군에 걸쳐 있으면서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는 가야산맥의 주봉이다. 가야산에는 주봉인 가야봉[677.6m]을 중심으로 원효봉(元曉峰)[677m], 석문봉(石門峰)[653m], 옥양봉(玉洋峰)[621.4m], 일락산[521.4m], 수정봉[453m], 상왕산[307.2m] 등의 봉우리가 연결되어 있다. 특히, 석문봉은 가야산 봉우리 중에서 가장 바위가 많은 곳으로 대문처럼 서 있는 바위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노곡길을 따라 덕산면 둔리 덕산참숯랜드 입구를 지난다. 왼쪽 뒤에 해발 260.1m 수암산(秀岩山)이 솟아 있다.
옛 지명 노곡리(蘆谷里) 지역을 지나기에 노곡길이라 명명한 듯. 노곡길을 따라 오른쪽 언덕에서 왼쪽 임도로 올라간다.
충의사 2.0km, 용봉사 3.7km 지점의 둔리 임도 입구에서 노곡길과 헤어져 둔리 임도를 따라간다.
둔리 임도를 따라 수암산 등산로 나들목으로 올라간다. 정면에 수암산이 솟아 있다.
둔리 임도 양쪽에 덜꿩나무들이 자잘한 하얀 꽃들을 피우고 있다. 북쪽에서는 덜꿩나무 꽃들이 모두 떨어졌는데.
둔리 임도는 고갯길을 올라 오른쪽 돌고 왼쪽으로 돌아간다.
예산군 덕산면 둔리 임도에서 덕숭산, 오른쪽의 원효봉, 그 왼쪽 뒤의 가야산을 확인한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의 중앙부에 있는 덕숭산(德崇山)[495.2m]은 수덕산(修德山)이라고도 부르는데, 덕숭산의 지명 유래는 수덕산의 지명 유래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수덕산 지명은 “옛날 이 지방 현인들이 모여 수양을 하다 산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라는 데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수덕 도령과 덕숭 낭자의 전설」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수덕 도령이 관음보살의 화신인 덕숭 낭자와 혼인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절을 짓고 청혼을 하였는데, 덕숭 낭자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덕숭 낭자의 몸에 손을 대는 바람에 덕숭 낭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수덕 도령은 덕숭 낭자의 버선을 손에 쥔 채 바위로 변하였다. 그 뒤 절은 수덕 도령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 이름 지었고, 산은 덕숭 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덕숭산 일대는 1973년 3월에 인접한 가야산(伽倻山)과 함께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덕숭산은 기암괴석이 많고 경관이 아름다워서 ‘호서(湖西)의 금강산’이라 불린다. 남쪽 기슭에 수덕사(修德寺)와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천년고찰 수덕사는 우리나라 선종의 유서 깊은 수선도량이며, 예산 수덕사 대웅전[국보]이 유명하다. 주변에 덕산온천이 있어 수덕사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에 덕숭산이 솟아 있고, 아래에 둔리저수지가 펼쳐져 있으며, 낚시좌대들이 설치되어 있다.
덕산면 둔리 둔리저수지 남쪽 중앙 뒤 덕산면 사천리 지역에 해발 308.9m 홍동산(弘東山)이 봉긋하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둔리는 조선시대에 덕산군(德山郡) 현내면(縣內面) 지역일 때 둔지미, 둔지산 또는 지산이라 부른 데서 둔리(屯里) 지명이 유래되었다. 백제 때는 마시산군에 속하였고 신라 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덕풍현에 속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덕산현에 속했다가 조선 후기 덕산군 현내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정리(九井里), 궁리(宮里), 노곡리(蘆谷里), 조량리(鳥梁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고, 둔리라 하여 예산군 덕산면에 편입되었다. 둔리 북부 일대를 제외한 전 지역에 100~400여m의 구릉지가 발달되어 있는데, 서부 경계의 수덕산(修德山)[495.2m]이 일대에서 가장 높고, 동부 경계의 수암산(秀岩山)[260.1m]이 그 다음으로 높다. 중부에는 용봉저수지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둔리 임도를 따라 돌아나가면 수암산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둔리임도와 작별하고, 왼쪽 수암산 등산로를 따라간다.
충의사 3.5km, 용봉사 2.2km 지점의 수암산 등산로 나들목에 동서트레일 이정목과 9구간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동서트레일은 한반도 남쪽 중간에서 동과 서를 연결하는 최초의 숲길이며, 경북 울진군에서 충남 태안군까지 5개 시도, 21개 시·군·구가 연결되어 소통과 화합의 장이 될 것이다. 숲길 내의 다양한 생태적, 환경적, 역사적, 문화적 자원을 발굴하고 활용함으로써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다. 또한 울진금강송, 속리산정이품송, 안면송을 연결하는 소나무 대표 숲길이다. ●동서트레일 9구간은 충의사에서 용봉산을 지나며, 이응노 생가까지 이어지는 구간으로, 윤봉길의사 생가, 용봉사 매애불, 신경리의 마애여래입상 등 역사문화자원이 풍부하고, 용봉산자연휴양림에 산재한 용바위, 병풍바위 및 내포신도시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내포전망대 등 산림경관자원들이 풍부한 노선으로 내포문화숲길 내포역사인물길 1코스가 연결된 구간이다.
수암산 능선으로 올라가는 산길에 국가지점번호 수암산 2-6 표지목을 지난다.
뫼넘이고개는 예산군 덕산면 둔리와 예산군 삽교읍 목리를 이어준다. 동서트레일은 오른쪽 용봉사 방향으로 이어간다.
충의사 3.8km, 용봉사 1.9km 지점의 뫼넘이고개에서 왼쪽 수암산 정상은 2.4km 거리, 오른쪽 용봉산전망대는 1.1km 거리이다.
뫼넘이고개 수암산 방향에 수암남장군 목장승과 수암산 등산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뫼넘이고개 북쪽 수암산 방향 언덕에서 뫼넘이고개 남쪽 용봉산전망대&용봉사 방향을 바라본다.
뫼넘이고개에서 수암산-용봉산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이어가며 쉼터를 지난다.
둔리저수지(용봉저수지)가 아래에 보이고, 그 뒤에 덕숭산, 오른쪽 뒤에 가야산, 그 오른쪽 앞에 원효봉이 보인다.
중앙에 원효봉, 그 왼쪽 뒤에 가야산, 오른쪽 맨 뒤에 상왕산이 보인다.
용봉사 1.3km, 충의사 4.4km 지점의 쉼터에서 왼쪽으로 내려간다.
예산군 삽교읍 목리와 덕산면 둔리의 경계를 이루는 수암산-용봉산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이어간다.
홍성군 홍북읍 신경리 지역으로 넘어와 수암산-용봉산 능선은 예산군 덕산면 둔리와 경계를 이룬다.
충남 홍성군 홍북읍 신경리 용봉산전망대 난간 앞에 내포신도시 전망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내포신도시는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읍 신경리 및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목리에 조성된 충청남도 도청 및 산하 행정기관 대상 이전 관련 계획도시를 이르며, 충남혁신도시라는 명칭도 사용한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북동쪽 방향을 살피면 예산군 삽교읍 지역이 펼쳐지고 아래쪽은 삽교읍 목리 내포신도시 지역이다.
중앙 호수 왼쪽 위의 충남도청부터 오른쪽은 내포신도시 남부의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읍 신경리 지역이고, 그 왼쪽은 내포신도시 북부의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목리 지역이다.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목리는 조선시대에 덕산군(德山郡) 대덕산면(大德山面) 지역일 때 ‘찬샘’이 있어서 ‘목욕’을 하였으므로 목리(沐里)라 부른 데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덕산군 대조지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리와 홍주군 치사면의 치사동 비지를 병합하고, 목리라 하여 예산군 삽교면에 편입되었다. 목리는 1973년 삽교면이 삽교읍으로 승격되면서 삽교읍에 편입되었다. 목리의 서부에는 해발고도 100~200m의 구릉지가 발달되어 있는데, 북서부 경계의 수암산(秀岩山)[260.1m]이 일대에서 가장 높다. 중부와 동부는 100m 이하의 평지가 대부분인데, 동부에는 삽교천의 지류인 신경천의 범람원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다. 목리는 삽교읍의 남서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이리·수촌리, 서쪽으로 덕산면 둔리, 남쪽으로 홍성군 홍북면, 그리고 북쪽으로 신리·이리·수촌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현재 목리의 동부와 서부의 일부를 제외하고 중부의 대부분은 내포신도시 행정 관할에 속해 있어서 내포신도시의 교통망에 편입되어 있기도 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내포신도시 홍성군 홍북읍 신경리 지역 오른쪽은 홍북읍 상하리 지역이다.
용봉산전망대에서 전망을 마치고, 용봉사 0.7km·충의사 5.0km 지점의 용봉산전망대 이정목을 지난다.
병풍바위 갈림길인 용바위 언덕에 용봉산 등산로 안내도와 이정목, 동서트레일 안내판 등이 설치되어 있다.
병풍바위 갈림길에서 병풍바위로 내려가지 않고 용바위-임간휴게소-마애석불-용봉사 구간으로 이어간다.
병풍바위 0.3km, 악귀봉 0.7km·용봉산 정상 1.2km, 용봉사 0.7km·충의사 5.0km 지점, 동서트레일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앞에 용바위가 솟아 있고, 오른쪽에 용봉산 안내판 그리고 용봉산 능선이 중앙에 이어진다.
용봉산, 홍성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홍성 여행의 필수 코스인 용봉산은 산세가 용의 형상과 봉황의 머리를 닮은 데에서 유래하였으며, 또한 8개의 산봉우리로 형색을 갖췄다고 하여 팔봉산이라고도 한다. 홍성군 홍북읍과 예산군 덕산면에 걸쳐있으며 해발 381m로 그리 크거나 험하지 않지만, 수려한 자연경관과 산 전체가 바위산이라 병풍바위, 장군바위 등 전설을 간직한 기암괴석이 많아 '제2의 금강산'으로 불린다. 용봉산 정상에서는 예산의 덕숭산, 서산의 가야산, 예당평야가 한데 어우러진 모습을 볼 수 있어 경치가 일품이다. 산세가 험하지 않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어 사시사철 등산객이 끊이지 않으며 새롭게 조성된 충남도청 내포신도시를 한눈에 내려볼 수도 있다. 더불어 정약용도 유람한 용봉사와 고려시대의 불상인 보물 제355호인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용봉사마애불, 상하리미륵불, 상하리마애보살입상 등 다양한 문화재가 산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명산이다. - 설명안내판
용바위를 아래쪽에서 올려보았다. 용바위는 용봉산 정상의 봉황을 바라보는가?
오른쪽의 369m 악귀봉, 그 바로 왼쪽의 노적봉, 중앙의 381m 용봉산 최고봉, 그 왼쪽 뒤의 투석봉을 확인한다.
아래는 홍성군 홍북읍 상하리, 용봉산 투석봉 왼쪽 뒤에 백월산이 보이며, 그 왼쪽 동쪽 지역에 홍성읍 시가지가 펼쳐진다.
정면으로 용봉산 악귀봉을 바라보며, 국가지점번호 병풍바위 53 표지목이 서 있는 쉼터를 통과한다.
용바위에서 0.3km 지점의 임간휴게소에서 왼쪽 0.4km 아래의 용봉사로 내려간다. 직진하면 악귀봉 0.4km, 정상 1.0km 거리이다.
위쪽의 임간휴게소에서 마애석불 삼거리로 내려와, 마애석불 0.1km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은 구룡대 0.7km 방향으로 내려간다.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북쪽 출입구에 이정목이 서 있고, 언덕에 마애석불과 그 아래 설명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보물 제355호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입상은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며, 높이는 4m라고 한다.
자연 암석을 살짝 파내고 돋을새김한 높이 4m의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을 살폈다.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입상(洪城 新耕里磨崖如來立像)은 돌출된 자연암석의 바위 앞면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감실형(龕室形)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돋을새김한 거대한 불상을 조각하였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肉髻)을 큼직하게 표현하였다. 얼굴은 몸에 비해 크고 풍만하며, 잔잔한 미소가 흘러 온화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눈썹은 반원형이며, 눈은 가늘게 표현하였는데, 눈꼬리 부분은 약간 쳐져 있어 인자한 느낌을 준다. 코와 입은 얼굴에 비해 작고, 코는 오똑하고 인중은 깊게 파여 있다. 입은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턱은 통통한 편으로 이중으로 묘사되었으며 귀는 어깨 부분까지 길게 내려오도록 하였다. 짧은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신체는 얼굴에 비해 다소 왜소한 느낌을 주지만 균형이 잘 잡혔다. 옷주름은 U자형으로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통견의通肩衣), 목 밑에서는 4조의 굵은 선각으로 표현되었지만, 아래로 내려가면서 가느다란 음각선으로 도식화되었다. 수인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수인과 달리 오른손은 내려 다리에 붙이고, 왼손은 들어 가슴 위에 올리고 있다. 광배(光背)는 거신광(擧身光)으로 파낸 바위 면을 이용해 3조의 음각선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나타내었다. 머리 위에는 후대의 것으로 보이는 사각형의 개석을 올려놓고 있는데, 팔작지붕 형태로 앞면의 밑 부분에는 연화문이 음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얼굴의 인상이 풍만하고 입체감이 있고 신체의 비례도 좋은 편이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양감이 약해져 있는데 이것은 불상의 아래에서 바라보는 예배자들의 시선을 배려한 것이다. 조각 양식으로 볼 때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 아래에서 기와 조각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설명안내판
바로 앞 마애여래불 남쪽 출입구로 내려간다. 중앙 뒤에 용봉산 주능선에서 갈래친 지능선(枝稜線)이 동쪽으로 벋어내린다.
남쪽 출입구에서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을 돌아보았다. 맨 왼쪽에 북쪽 출입구가 있다.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남쪽 출입구에서 200m 아래의 용봉사로 내려간다.
용봉사로 내려가는 계단길 옆에 산죽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산죽길을 지나 용봉사를 내려보았다. 바로 아래 지장전, 왼쪽 위에 대웅전, 왼쪽 맨 뒤에 산신각인 삼성각이 자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