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드와 엘리엇이 충돌하고, 손택이 '해석'의 감옥을 부수려 했던 그 이후의 현대시는 크게 두 가지의 극단적인 방향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1. 극단적 난해함과 자율성 (콘크리트 시와 언어시)
파운드의 이미지즘을 계승하되, 아예 '의미'를 완전히 제거해버리는 방향입니다.
언어시(L=A=N=G=U=A=G=E poetry): 단어가 무언가를 지칭(해석)하는 기능을 거부하고, 단어 자체의 소리나 시각적 배치만 남깁니다. 비평가가 "이 시의 주제는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기획된 시들입니다. 해석의 '먹잇감'이 되느니, 스스로 해석 불가능한 물질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죠.
2. 고백시와 일상의 회복 (로버트 로웰, 실비아 플라스)
엘리엇식의 거창한 신화나 지적 허세를 버리고, 시인의 아주 사적이고 처절한 '육성'으로 돌아가는 흐름입니다.
지식인의 머리가 아니라 몸과 상처에서 나오는 시들입니다. 손택이 강조한 '감수성'과 '에로틱스'는 여기서 시인의 실존적 고통과 결합합니다. 독자는 시를 공부하는 게 아니라, 시인의 고통을 함께 '체험'하게 됩니다.
3. 신비평의 몰락과 해체주의의 등장
비평계에서는 작품을 하나의 완벽한 유기체로 보던 '신비평(엘리엇적 전통)'이 힘을 잃고, 데리다나 푸코 같은 이들의 해체주의가 들이닥칩니다.
이제 시는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가 어떻게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며 무너지는지 관찰하는 '게임의 장'이 되었습니다. 손택이 원했던 "예술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로, 고전적인 의미의 '해석'은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결국 현대시는 "해석할 테면 해봐라(난해함)"와 "느끼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고백)"라는 두 갈래로 나뉘며, 손택이 예견했던 대로 '지적인 주석'보다는 '강렬한 스타일과 감각'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오늘날의 시는 때로 너무나 사적이거나 지나치게 불친절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지금의 시가 독자를 잃어가는 과정은 크게 두 가지 비극으로 요약됩니다.
해석 없이는 읽히지 않는 시 (지식의 장벽)
비평가들의 '해석 열정'에 맞추다 보니, 시는 점점 고도의 훈련을 받은 소수만이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전유물이 되었습니다. 손택은 예술이 "전율"을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오늘날의 많은 시는 독자에게 전율 대신 '열등감'을 줍니다. "해석하지 못하면 감상할 자격이 없다"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독자를 멀어지게 했습니다.
공유되지 않는 '사적 감수성' (공감의 실종)
엘리엇의 거대 담론을 밀어낸 자리에 들어온 파운드식의 파편화된 이미지나 극도로 사적인 고백들은, 때로 독자와 연결될 '고리'마저 끊어버렸습니다. 손택이 원했던 '감각의 회복'이 아니라, 시인 혼자만의 '닫힌 감각'에 매몰되면서 시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동의 힘을 잃었습니다.
결국 "해석하려는 비평가"와 "해석을 거부하며 숨어버린 시인" 사이의 전쟁 속에서, 정작 아무런 무기 없이 시를 사랑하려 했던 보통의 독자들만 낙오된 셈입니다.
손택은 예술이 우리를 "더 깨어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지만, 지금의 시는 오히려 우리를 "잠들게" 하거나 아예 "고개를 돌리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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