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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게시판 스크랩 현대 미술의 철학적 조명
조각새 추천 0 조회 8 08.10.22 17: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오병남 | 서울대학교 미학과 교수|

 

현대미술은 한때 인간에게 적절한 위치를 부여해 주었던 가치 질서가 붕괴함으로써 비롯된 것이다.

 

자신의 위치를 앎으로써 인간은 무엇을 해야할지 알았다. 그러나 신의 죽음과 더불어 그러한 질서는 그 설립자인 신과 더불어 그 토대를 모두 잃게 되었다. 물론 그러한 질서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럴듯한 은신처와 안전함을 제공해 주고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러한 질서가 공허한 것이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만 그러한 것이 되고 있다. 이처럼 현대에 있어서 신의 죽음은 인간의 위치를 바꾸어 놓았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아무런 방향감각을 갖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런 속에서 수 없이 많은 이즘과 운동들로 점철되어 온 것이 현대미술의 전개이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하게 자기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현대미술 지류를 소급해 올라가면 거기에는 커다란 두개의 본류가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두 본류의 수원지는 현대인의 상황에 기초하고 있는 부조리(absurdity)라는 샘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 부조리의 기초 혹은 근거는 무엇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신의 죽음, 기독교적 인간과의 와해에도 소급될 수 있다. 기독교적 인간관에 있어서 인간은 신의 형상(imigo Dei)으로써 이해되었다. 고로 아무런 주저없이 인간은 이 세계 속에서 그가 따르고 추구할 이상적 존재로서 신을 가지고 있었다. 신은 그 자신의 형상대로 태어난 인간에게 율법을 줌으로써 이 세계 속에서 인간이 살아갈 방도와 의미에 대한 요구를 해결해 주었다. 이처럼 인간에게 이상과 만족을 주던 신이 죽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의 주체로서 세계에 맞서 버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이상에 대한 추구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신은 몰락해 버렸다지만 그 자리를 메울 새로운 이상에 대한 요구는 보다 완전함을 회구하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상에로의 지향을 위해 이 세계에 대해 의미를 물었다. 한때 세계는 이 물음에 대해 답을 주는듯 했으나 끝내는 한계를 드러내거나 침묵을하는 결과로 인도 되었다. 아카데미즘의 이성과 낭만주의의 무한 자가 그런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현대인의 상황에 기초하고 있는 부조리는 바로 여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세계에 대하여 의미를 요구하여, 이상을 설정하려 하였지만 세계는 이러한 인간의 요구에 대해 무심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자신의 상황의 부조리성을 받아드려, 그것과 더불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완전함에 이를 수 없는 불만을 감수하고 살아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것에 맞서 싸워 그것을 극복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자유(freedom)와 자발성(spontaneity)이라는 새로운 이상이 제시되게 되었다.

 

현대미술은 부조리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이같은 두 기획들의 일환인 셈이다. 그래서 현대미술은 한쪽에서는 절대적 자유를 이상화하는 중에 추상적 형식주의(abstrack forma-lism) 를 낳게 되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직접적 자발성을 이상화하는 중에 추상적 표현주의(abstrck expression‎!ism)를 낳기에 이르렀다. 필자는 이 두 예술의 철학적 기초를 조명해보고, 그러한 기초 위에서 그들 예술이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두 예술이 삼고 있는 부조리의 극복 혹은 해결을 위해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해 제시된 것이라는 입장에서 진정한 이상이 아닌 사이비 이상임을  밝히고자 할 것이다. 그렇다 할때, 현대미술은 이상의 추구가 아니라 환상의 창조가 된다. 그러므로 이제쯤 현대미술은 그 같은 환상의 미봉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고, 그 같은 반성적 움직임이 일고 있음을 시사하고자 하겠다. 그렇다고 어떤 새로운 이상이 즉시 제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미술이라는 거대한 신화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새롭게 등장될 사실주의 정신에 주목해 보는 일이 필요할 듯 싶다. 사실 본 고의 의도는 이것을 기점으로해서 새로운 미학이 제시될 수 있는 한 가능성을 검토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같은 모든 논의의 출발은 현대인의 상황에 기초하고 부조리로부터 기인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에 대한 논의부터 출발해보는 순서를 취할 것이다.

 

현대미술의 배경으로서의 부조리

 

키에르 케고르(Kier Kegaard)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제 1권에서 신의 존재를 믿지도 않고, 그렇다고 세계속에서도 만족을 찾지도 못하는 그가 낭만적 허무주의라고 부르는 유미주의자(aesthete)에 대해 언급을 하고있다. 그래서 유미주의자는 이 세계에 대하여 권태를 느끼고, 고독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즉 이세계에 대해 어떤 요구를 했지만,세계는 이 요구에 무심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의미를 발견하지 않고 불만을 지닌채 이 세계속에서 부조리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카뮈(Albert Camus)가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지적했듯, 구원의 신은 없고, 세계속에서 만족을 찾을수도 없는 인간의 상황에 기초하고 있는 이 부조리의 근거는 따라서  세계의 의미에 대한 인간의 요구와 그러한 요구에 대한 세계의 침묵이 대립해 있는데 있다. 만약 이같은 카뮈의 말이 옳다고 한다면 인간과 세계의 대극성, 즉 물음을 제기한 인간과 이러한 물음에 침묵하는 세계를 대립시켜 놓고있는 대극성으로부터 탈출함으로써 인간은 부조리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탈출은 세계와 인간이라는 양극 중 어느 하나를 부정하거나, 혹은 양자 모두를 부정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이와 같은 탈출 경로 중에서 유미주의자는 주관을 긍정하고 세계를 부정하는 길을 택했다고 키에르케고르는 해석하고 있다. 즉 세계의 침묵에 대항하여 새로운 정신의 자율성을 강조함으로써 주관과 세계의 양극성으로부터 주관에로 도피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할때 유미주의자는 있는대로의 현상적인 세계를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또한 신을 대체한 낭만주의자들의 무한자(the infinite)에 굴복할 필요도 없다. 대신 그는 세계를 그 자신이 구축할 가상적 세계로 대체시킴으로써 자족적이고자 기획하고 있다. 그러므로써 자유를 획득하고자 했다.

 

이처럼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자유의 획득을 위하여 유미주의자는 무엇보다도 세계가 하는 일체의 요구들을 거절해야만 했다. 바로 이점에서 유미주의자들은 기획의 무한자를 위해 세계를 희생시킨 낭만주의자들의 그것과 평행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미주의자가 이세계로부터 그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은 보다 고차적인 실재에로의 회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내에서 자신의 상황이 그를 불행하게 운명지워 놓고 있는 부조리로부터 도피하기 위할 따름이라는데 그 차이점이 있다.

 

이렇게 볼때 유미주의자들의 근본 원리는 부정의 찬미인 셈이다. 유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세계란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상상적 삶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소재를 제공하는장소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삶은 시적인 구성물로 대체되었다. 이처럼 세계를 단순히 상상적인 삶을 위한 시적 구성물의 소재로 다루기 위해서는 세계와의 거리가 필요한데, 유미주의자들은 이러한 반성적 거리를 취하기 위해 아이로니(irony)라는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반성을 통해 세계에 그가 연루되어 있음을 아이러닉하게 파괴하는 방법이다. 즉 유미주의자는 자신의 주변을 둘러 보고 일체의 것을 진지하게 파악한다. 그리고 거리를 두고 "나는 두 눈을 뜨고 세계를 바라 보았다. 그때 나는 그에 대해 냉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으며, 그 후로도 계속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식이다. '아이 시시해'하고 냉소를 머금는다는 것이다. 세계에 관한 이같은 평가절하의 태도는 사실 전통적인 세계관의 와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닉하게 세계를 부정하는 유미주의자들의 웃음에는 우울한 측면이 있다. 그의 웃음은 단지 그가 세계를 초월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 뿐인만큼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의 웃음은 그의 고독을 드러낼 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의 고독은 그의 자유를 위해 치루어진 댓가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유미주의자가 세계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은 그 스스로 신과 같은 존재가  됨으로써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힘이 자신 속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미주의자에게 있어서 자유는 신의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어떠한 형태로 변형, 부활되고 있건 이제 중세의 신은 몰락해 버리고 말게 되었으며, 따라서 인간과 무관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유미주의자들은 이같은 자유를 가지고 세계의 모든 것을 소재로 해서 그렇지 않았다면 지루하고 부조리한 삶이었을 것을 흥미로운 것(the interesting) 혹은 즐거운 것으로 만들어 놓고자 했다. 이같은 흥미야말로 권태의 부정이다. 인간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 반성하게 될 때, 즉 자신의 삶으로부터 자신을 해방 시킬 때, 다음과 같이 자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전부란 말인가? 매일 똑같은 집, 똑같은 아내이다. 이러한 삶이 흥미있는  것이란 말인가? 왜 단조로움에 갖혀서 마치 모든 것이 그래야만 하는 양 성실한 행동을 해야만 하는가? 왜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말인가? 이러한 반성들은 유미주의자들에게 끝없는 현기증을 가져다 줄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권태란 이전에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인식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가지고 놀 수 있을 만큼 자유롭게 해준다. 그래서 흥미가 권태에 대한 부정으로서, 그리고 권태에 대한 부정으로서, 그래서 흥미를 목적으로하는 예술이 권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즉, 예술이란 권태로 지겨워진 인간이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기획일 수 있다. 외부세계에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 인간은 그 의미를 자신에게서 찾고자 하며, 마치 하나의 예술품과도 같은 삶을 살고자 할 수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의미가 오로지 예술가의 자유에만 달려있는 구성물로 삶을 변형시키고자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변형은 사실상 성공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독립될 수 있을 만큼 세계속에서의 인간의 상황, 곧 세계가 인간에게 가하고 있는 요구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완전히 해방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미적 태도가 이 세계속에서 공허함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하나의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유미주의자들은 그러한 이상을 삶에서가 아니라 예술 자체에서 실현하는 쪽으로 인도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예술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의존성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망각하려 했다. 이와 같은 시도를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통해 신의 역할을 연기함으로써 약간의 의미를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우리는 유미주의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이같은 분석을 현대미술에 대한 비평으로 읽을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읽혀져 왔다. 실제로 현대미술은 흥미로운 것이 갖는 이러한 잠재력의 구체적 실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데 뒤샹이 변기를 전시했을 때 이 기성품(ready-made)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팅글리(J. Tinguely)의 작품도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흥미로운 것이었다. 이처럼 흥미로운 것은 무한한 자유의 이상화를 증언하고 있는 현대미술의 한 요소를 이루고 있다.

 

흥미로운 것에 대한 관심은 예술가로 하여금 임의성(arbitrariness)을 미적 원리로서 채택하게끔 유도한다. 어떤 것에 대한 관심을  괄호로 묶을때 그것은 임의적인 것으로 변형되며, 미적 유회의 소재로 이용될 수 있다. 따라서 예술가는 우연과 우연적인 사태에 몰두하게 된다. 이처럼 우연을 창조의 마술로 발전시킨 장본인이 바로 아르프(H. Arp)이다. 어느날 그는 오랜 시간동안  드로잉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넌더리가 나서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서 바닥에 뿌렸다. 그런데 바닥에 떨어진 조각들의 무늬에서 그가 이제껏 찾던 표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아르프는 조심스럽게 그 조각들을 주워 올려, 자신이 본 그대로 그것을 다시 붙였다. 아르프의 이러한 발견은 중요한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것은 조형 예술 뿐이 아니라, 문학과 음악에서도 똑같이 이러한 임의성이 지닌 창조적인 측면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에 따라 창조된 예술작품에 있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우리는 작품속에서 심오성을 발견하기 위해 애쓰는데, 그 심오성은 결코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니 이러한 미술을 대할 때는 그 심오성이라는 관객 바로 우리들에 의하여 부여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된다는 점이다. 이제 미술가는 더 이상 관객들을 대화속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는 다만 기회를 제공할 뿐인 것이다. 이러한 기회를 통해 어떤 것을 흥미로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이제 전적으로 관객에게 달려 있다. 참으로 예술작품은 관객의 창조가 되어 버린 셈이다.

 

그러나 이처럼 임의성을 예술의 원리로 하는 데에는 커다란 문제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르프가 우연성을 이용하는 경우처럼 리드가 지적했듯, "예술가란 어떤 비 개인적인 힘의 채널 혹은 매개체" 이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말하자면 예술가의 창조가 문자 그대로 우연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다른 하나는, 뒤샹이 변기나 병 건조기를  예술작품으로 전시했을 때, 그와 같은 작품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다만 흥미롭다는 사실 뿐인가 하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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