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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유럽미술관여행 이후, 계속해서 미술읽기를 써왔다는 이주헌. 이제 그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시작한 것 같다. 누구나 추억을 가지고 있고, 그 추억들은 어떤 계기에 의해 다시 살아난다. 이주헌은 그림을 통해서 느끼는 그 사적인 감정을 말하고자 하였지만, 많은 부분을 그림에 대한 설명에 두고 말았다. 그가 너무 친절해서 그런건가? 아니면,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그림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부분이 아직 너무 많이 남았다는 것일까?
실은 '내 마음 속의 그림'... 이 제목만으로도 이미 내게도 갖가지 상념이 떠오른다. 하지만 잠시 접어두자. 내 추억이 아닌 이주헌의 추억을 감상키로 했으니까. 물론 여러 이야기들 중 마음 속의 그림을 보여주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지만.
<꽃장식 모자를 쓴 소녀>는 로댕이 작업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소녀적 감상이 묻어났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소녀가 끌로델이 그렇게 추하게 표현했던 마리 로즈 뷔레였다니. 로뎅이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전 그녀와 법적혼인을 했던 이유를 이제야 수긍이 간다. 이 주헌이 이 소녀로부터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렸던 것은 당시의 로뎅의 감상이 아마도 그러했을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녀가 로뎅을 떠났더라면 정말 베아트리체가 되었을까? 꽤나 낭만적이다.
모네의 그림은 언제나 화사하다. <어부의 오두막>은 이주헌이 어렸을적 맡았을 법한 한겨울의 봄냄새가 느껴지기도 한다. 실은 이주헌의 토막 추억들은 묘하게도 꼭 나의 추억의 냄새들 같다. 비록 내용은 다를지라도. 그러고 보니 모네의 그 그림은 내가 어렸을 적 곧잘 그렸던 소재다. 바다가 있고, 언덕이 있고 외딴집이 있는.
앵그르의 <마담 무아테시에>를 본 순간, 나는 '어라? 왠 달력 그림'했었다. 이주헌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내 어머니도 좋아하는 풍이다. 얼마나 정교하고 풍요로운가? 그러나 이주헌이 어머니들의 취향을 그 시대의 경제적 역사적 경험의 무의식의 표출로 설명하는 것은 좀 억지같다.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겨울풍경>은 마치 크리스마스 카드같다. 시리도록 차가운 공기, 그리고 침엽수, 멀리 보이는 고딕풍의 교회. 그런데 이것은 시화의 배경 그림 같기도 하다. 그림을 잘 모르던 어렸을 적 시절엔 대개들 그렇게 그림을 접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공통점 아닐까?
존 싱어 사전트의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이 그림에는 음악이 들려온다. 자연광 아래서 해질 무렵의 순간을 포착하여 그린 인상파의 절묘함. 그 절묘함은 따스함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그러나 이주헌이 말하는 야외 스케치의 즐거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야외스케치를 너무 좋아했으면서도, 무척 힘들어 했었으니까, 남들 앞에서 그림을 그린 다는 것이 왜 그렇게 힘이 들었을까? 그것은 혼자서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다가도 누군가를 의식하고 나면 제멋대로 손가락이 움직이는 지금과 전혀 다를바 없다.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르테르>로부터 이주헌은 원인 모를 서글픔을 느꼈다고 한다. 아마도 이별의 아쉬움?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고전의 시대가 끝나고 산업화 근대화의 새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웅장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니까. 노을지는 석양이 그러한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설명없이 실어놓은 <증기기관차>는 마치 몽롱한 꿈길 속을 달려가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새시대의 도래와 상관없이 과거에로 달려가는 현재의 감상처럼. 그러나 오노래 도미에의 <빨래 하는 사람들>, 이런 그림은 우울증을 동반하게 한다. 그림에서 보여주듯 당시는 산업화 근대화가 주요 모토였다.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독서>를 이야기하면서 이주헌은 만화책 이야기를 하고, 뜬금없이 죽음의 공포를 떠올린다. 죽음을 가르쳐준 인쇄 매체의 힘을 <독서>를 통해서 떠올린 것이다. 그 나이 또래는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을 떠올리나보다. 나는 죽음을 꿈속에서 늘 떠올렸다. 그런데 죽음을 어떻게 처음 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 딸아이는 TV 속에서 화장하는 장면을 보다가 '엄마 저게 죽는거야?'하고 물었고, 그 후 종종 죽음의 두려움을 말하곤 한다. '책읽기는 종국적으로 죽음읽기'라고 하는 이주헌. 그가 <독서>를 보며 죽음을 떠올린것과는 달리, 나는 그림을 그린다면 '책읽는 사람'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 친구가 생각난다. 그 친구는 무엇을 보고 싶었던 걸까? 이주헌의 마음속의 그림 읽기는 여기서 끝난 듯 하다.
다음 장에서 그는 그림에서 삶을 보고자 했다. 디코지모의 <님프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티로스>. 신화와 그림읽기, 이 속에 사랑의 애잔함이 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 맞닥뜨리는 비극의 극단은 아직도 무수히 많다. 그리고 그것을 피해가기란 쉽지않다. 사랑에 목숨을 건 이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그런데 삶에는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힘겨운 노동이 있다. 고흐의 <구두>그림을 보라. 가감없는 실존. 여기에도 비극이 있다. 사랑하는 여자로부터 버림받았고, 어머니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으며, 이웃과 동료화가들, 그리고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그는 자신의 운명이 그 구두 한짝보다 낫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호와 구두는 동일시된다.
박수근의 그림은 그동안의 내게 잔잔한 동화같았다. 그러나 '남정네의 부재와 함께 눈여겨 볼 박수근 회화의 특징으로 나목의 존재를 꼽을 수 있다'는 이주헌의 말에 따라 그림을 다시 들여다 보니, 그림은 다시 보인다. 아낙네와 아이, 또는 노인, 그네들은 잎이 달려 있지 않은 고목, 또는 겨울 나무 주위에서 삶을 힘겨이 살아가고 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으나 그림 전체를 싸안고 있는 고목. 그 고목은 아버지의 자화상이며, 박수근의 자화상이다. 쓸쓸하다.
언젠가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라는 책에서 보았던 베이컨의 그림들, 왜 그렇게도 이해하기 힘들었을까? 베이컨의 그림을 박수근의 그림과 크게 다르지않게 보고 있는 이주헌의 설명은 나로하여금 다시 <<감각의 논리>>를 읽고 싶게끔한다. 오늘날 아버지의 모습, 그러나 그 안에 입력된 구석기 시대의 '야성의 울부짖음'을 공포스런 현실의 전율로 부팅해내고자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자연스런 모습인가? 박수근의 그림에서 아버지는 침묵하지만, 베이컨의 그림에서는 절규한다. "베이컨의 앵글에 잡힌 현대 남성들-그 위기의 가장들의 엑스레이". 섬뜩하다. 이주헌은 김원숙의 <지팡이를 든 남자>, 에릭 피슬의 <개흉내내기>, 프랭크 브램리의 <희망 잃은 새벽>등에서 감미롭고 고통스럽고 책임져야할 삶의 모습들을 읽어내고 있다.
좀더 큰 의미를 찾아보면 어떨까? 조금은 고상하게. 강요배의 <수선-흙>을 보라. "인류만큼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도취해 스스로를 찬미해온 피조물은 없다"라는 말은 수긍이 간다. 자신을 학대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한다.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것을 알아야만 가치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르시스가 스스로를 보되 정직히 보지 못할 때 그것은 곧 폭발할 진실의 은폐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듯한 달리의 그림(<나르시시의 변형>)은 우리에게 경계심을 심어준다.
전혀 세속과는 거리가 먼듯해 보이는 중세, 그런데 그 중세의 느낌은 퀸텐마시스의 <대금업자와 그의 부인>에서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다. 근대의 합리주의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닐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그림이다. "유럽의 봉건주의를 겪지 않은 우리의 자본주의 체제가 보다 철저한 '약속의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시스의 <대금업자와 그의 부인>에 못지않은 냉철한 '저울의 미학'을 갖춰야하리라"고 한 이주헌의 말에 백분공감이 간다. 이제 그림에서는 시대정신을 읽게 된다.
렘브란트의 <암스테르담 직물조합의 감독위원들>의 표정과 분위기는 왕후장상 중심의 정통 유럽 인물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림에는 개개의 개성이 담겨 있다. "렘브란트는 '실질 숭상의 미학' '개인적 성취의 미학'을 시대의 미학으로 선명히 그려놓고"있는 것이다. 시대를 어떤 큰 사건을 기준으로 보자면, "신석기 시대의 농업경제의 출현"과 "근대 산업사회의 도래"를 들 수 있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예술은 무엇인가를 상징하는 존재라기 보다는 존재하는 그 자체가 목적인 그런 존재가 되었다." 그러한 시대정신에 대한 신석기 정신의 도전이 오윤의 <검은새>에서 보인다. 시대를 거스르는 경계인으로서의 오윤의 모습. 그리고 또다른 반항의 모습, 디에고 리베라의 <자파타>가 있고, 손장섭의 <광주향교 은행나무>가 있다. 손장섭은 80년대 이른바 민중미술 계열에 속했던 작가이다. 일리야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도미야마 다에코의 <가릉간 제사의 밤>에서의 고발과 속죄,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저장고-죽은 스위스 사람들>에서 보여주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즉 휴머니즘에 관한 것에 대한 이야기들... 이제 이주헌의 '내 마음속의 그림'은 간 곳 없다. 이 장에서 보여주듯, "시대의 외침, 역사의 메아리"이다.
"문명의 이름으로". 이제 본격적인 그림 이야기다. '내 마음속의 그림'에서의 애잔한 추억은 간 곳 없고, 우리의 교양을 위해 이주헌은 헌신하기 시작한 듯하다. 그럼에도 이 장은 무척 마음에 든다. 레제의 차가운 그림에서 따스함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희망의 시대, 근대!! 그들의 희망이 차갑게 다가온다. 앞에서 달리의 <나르시스의 변형>에서 은폐된 진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은 "문명의 심장에 꽂힌 칼"이었다. 바야흐로 이 시대에는 언어를 잃어버리고(황주리의 <가면무도회>), 소통의 무의미함을 극복하기 위한 처절함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회의도. 이제 뒤샹은 미술 작품이 제작자로서의 예술가의 손을 떠나 있다고 말한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지금, 행해져야할 것은 '선택'일 뿐이다. 그리고 뒤샹의 아이디어 뒤에는 서구문명의 모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자리한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이 충격을 주지 않으면, 작품은 그만한 가치가 없다. 이제 삶과 예술은 그 경계를 잃는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이제 질서를 넘어서서 말한다. 특히 그의 <빛의 제국>을 보라. 밤과 낮이 공존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끔 하는 작가'가 바로 마그리트이다. 예술의 새로운 충격은 20세기를 과학의 세기이자 혁명의 세기라고 불리는 것에 아주 걸맞다. 보이스는 이성과 합리성에 기반한 현대문명의 단절을 설파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전도사'다. 이주헌이 붙인 '보이스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란 제목은 그래서 아주 적절하고 재미있다.
현대문명을 대표하는 나라 미국, 그 일상을 그린 이가 호퍼이다. 이를 빼놓는다면 아쉽다는 듯, 심심하게 호퍼그림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다가 갑자기 더 이상 이것이 예술인가? 싶은 작품을 만든 앤디 워홀에게로 간다. 대중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 더 이상 천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 그 사회를 아주 잘 간파한 워홀. 그리고 그 도시의 고독함을 그린 오치균, 고독한 도식 속에서도 산만한 도시인, 그리고 엄청난 심각성으로 웃는 예술을 보여주는 보로프스키, 이제 우리는 작품 속에서 시대를 읽기 위해서 머리를 싸매야할 것 같다. 언어가 아닌 이미지는 우리에게 얼마나 더 큰 정확성을 안겨줄까? 정확할지는 몰라도 더욱 단절되는 것은 아닌가? 같은 화면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하는 아주 솔직한 인간들. 이제 머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은 다 꺼내어지고 그것을 해석하는 머리들은 더욱 아프다.
클래스 올덴버그의 <부드러운 변기>. 뒤샹의 변기와는 다른 의미다. 그는 어린아이적 공상이나 꿈으로 다가가서 그 세계를 보이고자 한다. 만화나 꿈을 현실 세계로 이끌어간다. 퇴화되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주는건가? 진 하이시타인의 <로만 아치>, 브루스 나우만과 레베카 혼의 <폭력사고>와 <죄와 벌>등은 이젠 사유하는 존재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렇게 세계 속을 헤매다가도 이주헌은 우리의 서울을 잊지 않았나보다. 우리의 근대는 어떠했을까?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을까? 아쉽게도 우리의 근대는 화폭에 담겨질 여유조차 없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강경구의 '서울' 연작은 그래서 의미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이주헌은 본격적인 그림보기에 들어간다.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림읽기의 자유를 말하기 위해서 이 장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작자 미상의 <콜몬들리 자매> 니콜라스 힐리아드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그림에서 나타난 장식성과 선에서는 정신을 표현하고 소우주를 표현하고 있다. 이야생트 리고의 <루이 14세>는 어떠한가? 여기서는 국왕의 위엄만이 가득하다. 인간의 모습이 없다. 그것은 <재상 리슐리외>도 마찬가지다. 이주헌은 이 그림에서 경제를 읽어내고 있다. 그림은 감상이 아니라 읽기로 간다. 그것은 세상읽기다. 내 마음속의 그림도 전율로서 전해지는 충격도 아니다. 자코포 틴토레토의 <은하수의 기원>은 읽기로서의 그림의 자료로 이주헌이 제시한 그림이다. 미술감상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일단은 시선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읽기로 이어진다. 이주헌이 말하려고 한 것은 결국 그것이 마음속의 그림이었건 시대정신으로서의 그림 또는 전율로 전해지는 그림이건 간에 읽어들이는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것이다. 미술작품의 감상은 워낙 찰나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스토리는 묻혀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 미술로 하여금 추상회화로 갈 수 있게 하는 이유가 되게 한다.
밀레의 그림들이 문학적임에 고려해볼 때, 미술의 영역, 읽어들이기, 그려내기들은 그 한계를 정할 수가 없다. 오딜롱 르동의 경우는 <감은 눈>을 그림으로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려낸다. 상징으로서의 세계다. "<감은 눈>의 상징주의는 한마디로 20세기를 향한 19세기말, 그 세기말의 시선"이다. 혁명가를 그린 화가가 아니라 손에 피를 묻힌 화가도 있다. 시케이로스의 <비명의 메아리>, 그는 그림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멕시코의 혁명군에 가담해서 거친 삶을 살아야했다. 이주헌을 따라 그림을 읽다보니, 벤산이라는 화가에게 마음이 이끌린다. 화가는 창조하는 사람이지, 마케팅하는 사람이 아니다. 남들이 내 그림을 어떻게 평가할까 하는 것에 스스로가 이끌리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작품에 자신을 담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 그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철이 든 사람들은 그의 철없음을 나무랄지도 모르겠다.
이주헌은 여성을 그린 이들을 따로이 묶었다. 구스타브 클림트의 여성애, 에로티시즘, 천경자의 여인들, 아니 그 자신. 그리고 조지아 오키프의 꽃그림들 그들을 통해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진지한 조형언어로 되돌아볼 수가 있다.
마지막장에 이르러 나는 내 책상위에 세워진 2000년도 달력의 그림의 주인을 만났다. 이철수, 나는 그의 작품이 어느 장르에 속할 것인가 무척 궁금했었는데, 이주헌도 그러한 생각을 했나보다. 그러나 이철수의 작품에 이러한 수고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이철수의 그것은 바로 '경계넘기'이기 때문이다. 이제 작품들은 삶 자체가 된다. 강익중은 일상의 편린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꾸려간다. 그리고 이제는 엿보기이다. 예술가의 이미지의 조합, 그리고 감상자의 엿보기. "작가가 그때그때 일상으로부터 주워온 파편 그대로 그것들은 세계의 파편일뿐이다. 그 파편이 그의 인격 안에 모여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룰 때 그것은 비로소 예술이 된다." 오브제, 그것은 현대예술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재료가 된다. 안규철, '오브제 작가' 그의 관심은 현대라는 시대적 인상, 특히 '언어와 사물 사이의 간극' '사물과 사물 사이의 간극'을 조형언어를 통해 공감각적으로 느껴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내 마음속의 그림>>, 이주헌의 행복한 그림 읽기, 학고재. 1997.
20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