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헐천과 온천이 흐르는곳 그래서 "뜨거운 통로"라는 의미를 가진곳 "테르모필레", '300'이라는 영화가 상영되면서 다시금 찾게되는 이곳은 현재 그저 평온하고 조용한곳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전에 커다란 사건의 현장이었다면 어떨까?
테르모필레 지역을 지나는 사람은 한때 거의 다닐수 없을 정도로 좁고 기다란 땅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많이 놀랄정도로 지형이 퇴색되었지만, 2500여년전에 이곳은 적은인원으로 방어할수있는 천연의 방어요소를 가진곳이었고 한차례의 큰 전쟁을 치른 전쟁터였다.
(현재 테르모필레지역의 사진)
페르시아 전쟁 초기 마라톤에서 대패한 '다리우스 히스타피스(다리우스대왕)'은 자신의 야망을 후손에게 계승하고 숨을 거둔다. 이후 페르시아 왕위를 계승한 '크세르크세스'는 계승 초기 정권교체로 인한 반란, 내란, 그밖에 정치적인 요소로인한 문제들로 골머리를 앓게되었다.
크세르크세스는 통치 첫해 제국 내의 반란들을 진압하였고, 정적들을 제거함으로써 왕권 강화를 이룩하는데 힘을쏟았고, 르시아 변방의 침입, 반란세력 진압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군사력을 증강시겼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이러한 군사력 증강에 대한 금전적인 부담을 크세르크세스 자신의 재산으로 충당하였다는것에 있는데, 그 이유는 선대 다리우스 대왕이 무리하게 전쟁을 준비하면서, 분봉및 제후국가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에 페르시아에 대한 내란및 반란, 독립이라는 아픈경험을 얻었기 때문이라 할수있겠다.
이렇게 시작된 국가제정의 확충과 아울러 군비확충 이어서 강성한 군대를 육성한 결론으로 볼수있겠지만,크세르크세스는 군대를 강력하게 만들어내게한 확실한것은 심리적으로 분봉제후국들에게 야망을 부추겼다는데 있다.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지에 대한 권한을 자신이 같는것이 아닌 분봉제후국들에게 넘겨준다는 그의 한마디는 주변 제후국들 사이에서 묘한 경쟁심과 아울러 충성심으로 변모시켰고, 이점에 있어서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야망을 숨길수가 있었다. 선대 다리우스대왕이 이루지못한 그리스정복에 대한 꿈을 크세르크세스의 머리에서는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스, 소아시아 지도)
B.C.484년부터 B.C.481년
페르시아는 이 기간동안 관할내와 속주들에서 군대를 징집하기 시작하였다. 역사가 '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때까지 전쟁을 이루었던 군대의 규모중 가장 큰 규모"라 기록하고있으며,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크세르크세스의 육군과 해군을 합친 병력은 264만 1610명" 이라고 기록하였다. 3년간 페르시아의 군사관련 태동은 그리스, 소아시아까지 전해지는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리스에서 특히 아테네에서는 대병력에 대한 반응이 여러갈래로 나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를 주축으로 하는 강경파는 이전 '마라톤'전투의 예를 설명하면서 페르시아를 물리쳐야 함을 설득하여 아테네는 결전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결전 준비중 아테네는 신탁을 얻기위해 델포이로 향하였고, '델포이의 신탁'을 통해 "나무 성벽"으로 방어하라는 지시를 받게되자, 아테네는 해군력을 증강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로리움에 있는 국가 소유의 광산에서 많은양의 은이 발견되자, 아테네의 명장이자 정치가인 '테미스토클레스'는 민회를 소집하여, 은광의 수익금 전부를 '갤리선' 200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구축할것을 설득하였고, 이 의견이 받아짐으로써 그들은 대함대를 축조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전시상황으로 돌변한 아테네를 기반으로 한 그리스 전지역의 문제를 처음에는 다소 우유부단하게 보았던 스파르타도 그리스의 약 30개 도시 국가로 이루어진 그리스 동맹의 결성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에 대한 상회한 대립구도를 그리고있던 그리스국가들과는 반대로 페르시아는 드디어 원정의 길이 시작되었다. 크세르크세스는 대군을 이끌고 소아시아를 필두로 그리스지역에 대한
준비를 맞췄으며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대원정의 시초, 계획대로의 원정이 시작되었지만, 페르시아의 군대가 쉽사리 이동하기엔 병력이 많았고, 난관은 많았으며, 가야할 길은 멀었다.
(그리스 최정예 전투함 3단 갤리선)
그들의 첫 난관은 아시아와 유럽을 분리시키는 좁은 해협인 '헬레스폰트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야 하였는데, 그들이 2단으로 배를 붙여 만든 배다리가 폭풍우로 인해 부서져 한동안 멈추게 되는일이 있었다.
이 상황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는 격노하여 '헬레스폰트 해협'의 물을 300번 채찍질하고 낙인을 찍은 다음 족쇄를 채우라고 말하고, 다리를 만든 기술자들의 목을 베게 하였다."라고 기록한다.
B.C480년 6월 무렵, 페르시아 육군은 해군과와 함께 테살리아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리스동맹군은 테르모필레에서 전투를 치르기로 결정을 내렸는데, 테르모필레는 15미터도 채 안 되는 해변으로 본토의 산맥이 가파르게 비탈져 있는 좁고 기다란 땅이라는 소규모전투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테르모필레는 페르시아에게 악조건으로 받아들여질수있는데, 이 기다란 땅을 매우 좁은 행렬로 통과해야 하고, 좁은 관계로 공격할수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기때문에 페르시아 에게는 상당하게 불리하고 방어자에겐 방어로써의 가치가 높다고 말할수 있는 곳이었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왕은 자신의 휘하에 동맹군병사 7000명을 데리고 테르모필레 근처의 해협에 진을 쳤다.
(페르시아군의 원정로)
레오니다스의 휘하의 동맹군이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동안 아테네의 전함들은 아르테미시움 앞바다에서 기만술로 페르시아 함대에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크세르크세스는 8월 초가 되어서 테르모필레에 도착하였고, 대규모의 군대로 그리스군을 대파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일차적으로 항복을 권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동맹군은 끝까지 싸울것을 계속 말할뿐이었다.
(테르모필레 전투 초반)
화가 날데로 난 크세르크세스는 메디아군과 시시안군을 파견, 동맹군을 제압하려 했지만 막대한 손실을 입을 뿐이었다. 패배를 테르모필레를 넘어가야하는 상황에 직면한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정예병력인 근위대를 '히다르네스'에게 맡겨 보냈지만 마찬가지 결과를 초례할뿐이었다. 자신의 정예병력마저 대패한 시점 크세르크세스는 테르모필레를 넘어야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때 테살리아에 살고있던 '에피알테스'라는 농부가 그에게 다가와 언덕 너머 동맹군의 후방으로 안내해 주겠다고 제의하면서 활기를 찾게된다.
(에피알테스가 알려진 후방에 대한 지리)
다음날 아침, 페르시아군은 동맹군의 후방에서 공격하기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포위, 이제는 늦었다는것과 자신들의 최후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스파르타군은 맹렬하게 방어하기 시작하였다. 테르모필레를 점령하는 집착을 보인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전진부대에게 채찍질도 불사하면서 진군명령을 내린다.
(테르모필레전투 상황도)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채찍질에 내몰려서 전진한 페르시아군 다수는 밟혀서 죽거나 밀려서 바다로 떨어져 죽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페르시아군의 전방 공격과 '히다르네스'를 사령관으로한 후방 공격군의 도움으로, '레오니다스' 왕과 1천명의 스파르타의 병사들은 전사하였다.
(스파르타의 마지막 절규)
살라미스 해전
테르모필레 전투가 전쟁의 종지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다. 이 상황은 테르모필레 전투이후 페르시아가 완벽한 승리를 얻었다는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테르모필레의 승리를 기점으로 페르시아는 빠른속도로 그리스지역을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페르시아의 육,해군의 합동은 놀랄만하여 아테네군을 추격, 몰아붙이기 시작하였고, 이윽고, 아테네까지 점령하면서 사기는 높게 치솟았다. 크세르크세스는 아티카(아테네의 심장부)로 진군해 들어가 약탈하고 불을 질렀고, 아테네 사람들은 인근에 있는 살라미스 섬으로 피난하기 시작하였다.
크세르크세스가 자신의 승리를 자부할즈음 살라미스로 피난한 아테네와 동맹국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이 이방인에게 처참한 꼴을 당하는데 크게 분개하고있었다. 그들은 힘을 합쳐 다시금 전쟁준비를 시작하였다. 이 시점에서 그리스 함대는 아테네와 함께 살라미스 섬 사이에 주둔하였고, 아크로폴리스가 페르시아에 함락되는 2주일동안 체제 정비에 전력을 쏟았다. 그동안 아크로폴리스의 수비군은 전멸하였고, 아크로폴리스는 철저하게 파괴당하였다.
그리스동맹의 해군은 테르모필레 근처에서 여러차례 페르시아 함대와 교전을 벌였지만 결정적인 해전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육지에서 '레오니다스'휘하의 동맹군이 패주하자 함대는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함대는 살라미스 만에 다시 집결하였고 다시금 체제정비에 들어갈때 테미스토클레스는 작전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리스 동맹함대는 페르시아 해군보다 약했다. 특히 페르시아의 핵심이었던 페니키아의 전함이 그리스의 갤리선보다 크면서도 조종하기가 더 쉽다는 사실과 아울러 페르시아 함대는 약 1200척이라는것과 대조적으로 동맹군의 배는 380척이라는 내용을 보았을때 적어도 가능성에서는 난제였던것이 분명하였다. 특히 해군은 페르시아의 해군만큼 숙련되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머리가 지끈거렸을 것이다.
(페르시아해군과 그리스해군의 상황)
하지만 "살라미스 섬과 아티카의 해안 사이에 있는 해협을 통과한다면?" 이란 생각을 품게되는 테미스토클래스의 가정은 페르시아를 자연히 살라미스로 유도하게 만들었다. 폭이 좁아서 배가 50척씩밖에 나란히 전진할 수 없다는 점은, 만일 동맹군이 페르시아군을 천연적인 깔때기 모양의 이 해협으로 유인할 수 있다면, 페르시아군의 수적 우세와 뛰어난 선박 조종술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는 가정을 낳게되었고, 승기를 잡을수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테미스토클레스는 싸움을 촉발시키기 위해 크세르크세스에게 허위 전갈을 보내서, 그리스 함대에게 도망칠 기회가 생기기 전에 공격하라고 알렸다."라고 기록하였다.
그 소문의 진상을 깨닫지 못한체 크세르크세스는 바로 일에 착수한다. 페르시아 함대는 육군을 태우고 전투 대형으로 아티카의 끝부분을 돌아서 그 해협을 향해 나아갔다. 승리를 확신한 크세르크세스는 전투를 편안히 지켜 볼 수 있게 산 위에 자리를 마련하였다. 페르시아 함대가 좁은 통로로 몰려들자 큰 혼란이 일어났다. 갑자기 살라미스 섬의 언덕에서 나팔 소리가 들리면서 동맹군의 갤리선이 쏜살같이 전진하였다. 갤리선은 페르시아 함선의 측면을 들이 받았고 충격을 받은 페르시아 함선은 배가 부서지면서 균형을 잃고 서로 부딪치게 만들었다. 특히 돌발상황에 놀랄사이 동맹군은 타격을 입은 적선에 뛰어올라가 난전을 벌였다.
아티카 해안의 백사장에는 페르시아 함대의 부서진 나무 조각과 토막 난 시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살라미스에서 패전의 광경을 목격한 크세르크세스는 남은 함선을 모아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원정은 그 해에 끝이 나게 되었고, 결말을 유도하였다. 하지만 그의 야심은 아직은 계속이라 해야할듯 일부의 원정군을 트라키아와 일부 소아시아부근에 주둔시켜 '마르도니우스'의 지휘 아래 그곳에서 겨울을 나도록 하였다. 이것은 일년뒤인 B.C.479년에 발생한 '플라타이아이'전투를 위한 준비과정이 되었다.
'헤로도토스' 테르모필레와 살라미스전쟁에 대해 말한다. "이 원정에 비하면 다른 모든 원정은 하찮게 보일 뿐이다."라고 (헤로도토스의 역사, 제7권, 20절),
기록에 의하면, 해군력이 "총 517,610명, 보병의 수는 1백 7십만명이고, 기병은 8만명이었다. 이 외 낙타병과 전차병을 약 2만명으로 잡았다. 그러므로 육군과 해군의 총계는 2,317,610명에 달했다." (제7권, 184절) 3차 페르시아 전쟁을 가르키면서 학자들에게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있다. 역사가 윌 듀렌트는 페르시아의 병력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면서 1백 30만으로 말하였고 이후 여러학자들 사이에서도 과장되었다는 결해가 크다고 말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