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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문화의 메카 함양(咸陽).
함양군내의 산과 명소 위치도.
◈ 일시 : 2008. 11.8~9.
진안 마이산을 들려 진안읍 진안관에서 말로만 듣던 애저(哀猪)로 늦은 점심을 먹고 함양으로 떠난다.
익산-포항을 잇는 20번 고속도로의 일부구간인 익산-장수분기점이 개통돼서 진안에서 대전-통영 고속도로와 연결되는 장수분기점까진 30분도 안걸린다.
육십령터널로 백두 대간을 넘어 서상 IC를 빠져 나와서는 잠시 망설였다.논개묘를 다녀갈까? 정여창고택엔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데 늦으면 들어갈 수 없을텐데...
화림동계곡의 정자 몇 군데 들리고 함양의 정여창 고택에 가면 어두워서 들어갈 수 없을듯싶고 내일 아침엔 또 너무 이를 것 같아서 논개묘는 포기하고
우측 안의쪽으로 26번 도로를 따라 내려갔다.결론은 이날 정여창 고택엔 가지도 못하고
다음날 갔는데 고택엔 후손이 살고있지 않아서 좀 늦거나 일러도 되는걸 그랬다.
서상 IC를 나와서 좌측으로 조금가면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에 임진왜란때 당시 조국과 사랑을위해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진 충절의 여인 주논개(朱論介.1574~1593)의 묘지가 있다.
논개에 대해선 일반인들에게 잘못 알려지고 있어 몇자 적어본다
논개는 바로 고개넘어 장수군 장계면 주촌에서 4갑술(갑술년,갑술달,갑술일,갑술시.1574.9.3. 밤 9시)에태어나 술(개)에 놓았다해서 논개가 이름 지었단다.
5살 되던해에 아버지 주달문이 죽고 오고갈데가 없어 같은 동네에 사는 숙부 주달무에게 의탁을 하여 살았는데
숙부 주달무는 노름으로 돈을 탕진하고 이웃마을 김풍헌에게 논개를 믿며느리로 팔아먹고 도망을 하였다.
이에 논개모친은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신을 하였는데 김풍헌의 고발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 재판을 한 장수현감이 최경회였다.
재판에서 논개는 무죄로 풀려났으나 오고 갈곳이 없어 최현감은 모녀를 내아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지내도록 배려를 해줬다.
그후 논개는 장수현감 최경회(崔慶會.1532~1593)의 변약한 부인을 수발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논개가 17세 되던해인 1590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해에 최경회는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화순으로 돌아가서 시묘살이를 하고 논개를 고향 장수로 보냈다.
시묘살이를 하고 있던 2년후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나서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1592년 10월 1차 진주성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최경회는 그간의 의병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1593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영전되어 진주성으로 입성했다.
왜군의 10만 대군으로 공격해온 진주성 싸움에서11일간 민관은 힘을 합쳐 처절한 전투를 했지만 결국 성은 함락당하고 7만에 가까운 시체가 산을 이루고
성은 초토화 됐으며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등 진주성 3장사는 성이 함락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왕이 계신 북쪽을 향해 하직인사를 올린 후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국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논개는 자결보다 복수를 택했다.그리하여 논개는 승전 축하잔치를 연 왜군들 틈으로 기생으로 변장하고 들어가 용맹하기로 이름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졌다.논개나이 20세때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야음을 틈타 탈출한 의병들 중 장수 츨신들이 최견회장군과 논개의 시신이라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남강하류를 수색하여
창원의 지수목에서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발견하여 고향으로 운구해오다 이곳 방지마을에 장사지냈다.
그의 고향인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엔 논개의 생가터가 복원돼있고 장수읍 두산리엔 논개의 사당인 의암사(義巖祠)가있다.
그러나 애석한일은 논개의 신분이 기생으로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1621년(광해군 13년)에 쓰인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도 논개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주면서도 논개를 진주의 官妓로 적고 있는데
이는 진주성 함락때 살아남은 자들에의해 상황이 잘못 전달되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더욱 분통터지는일은 일본인들의 천인공로할 역사왜곡이다.
일본 히도산에는 버젓이 영정까지 모신 보수원이라는 논개사당이 있고 게야무라 가묘옆엔 논개 가묘가 연인처럼 누워있는데
1970년대 중반에 건축 설계사인 우에쓰가 히쿠유라는자가 케야무라의 원한을 풀어주기위해 만든것인데
논개는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의 연인으로 일본까지 따라와서 아이를 낳고 살았다며
일본인들에게 논개앞에 빌면 부부관계가 좋아지고 아기를 잘 낳는다는 속설까지 지어냈다.
일본인들은 논개를 sex의 대상물로 여겨 의도적으로 논개를 능멸하고 있다.
일본 히도산 보수원에 봉안해 있던 영정은 되 찾아다가 지금은 논개의 사당인 의암사(義巖祠)에 있다.
◈. 화림동계곡(花林洞溪谷).
화림동계곡은 해발 1,508m의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남강의 상류)이 서상-서하를 흘러내리면서 냇가에 기이한 바위와 담.소를 만들고
농월정에 이르러서는 반석위로 흐르는 옥류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무릉도원을 이루고 있는곳으로 장장 60리에 이른다.
가히 우리나라의 정자문화의 메카라고 불리어지는 곳답게 계곡 전체의 넓은 암반위에 수많은 정자들과 기암괴석으로 어우러진 곳이다
화림동 계곡을 탐방할려면 거창방향이나 진주, 남원 등지에서는 우선 안의까지 와야되며
전주, 무주 방향에서는 육십령에서 안의 방향으로 내려오면서 탐방하면 된다.
우선 안의면에서 육십령으로 향하는 26번 국도를 타면 숨돌릴 틈없이 각종 풍광들이 행인들의 시선을 한껏 유혹한다.
이러한 유혹에 도취돼 가는 듯 4km가량을 오르면 농월정 계곡에 도착한다.
농월정(弄月亭)은 수많은 반석들로 가득차 있다. 이들 수많은 너럭바위 위를 혹은 옆을 쉴 새 없이 흐르는 투명한 물....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조선 선조때 문과에 급제 예조참판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대첩시 분전 장렬히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지족당 박명부 선생이 머물면서 시회를 열기도 하고 세월을 낚기도 했다는 곳이다.
농월정 정자는 후세 사람들이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정자인데 이름 그대로 달을 희롱한다는 뜻으로
우리 조상들의 풍류에 대한 면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곳 이기도 하다
농월정은 그 경관이 너무나 뛰어나 지금은 국민관광단지로 지정이 되어 날로 늘어나는 탐방객들의 편리 도모를 위하여 군에서 개발하고 있는 곳이다
농월정의 윗부분에는 창인 청소년 수련원 이 있는데 년중 각 지역에서 청소년들의 화림동 계곡탐방과 정신 수련으로 붐빈다.
수련원의 옆에는 황암사 라는 사당이 있는데 이는 정유재란시 황석산 의 산성에서 왜군과 격전을 벌이다
장렬히 순직한 인근의 주민들과 관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던 사당을
함양군에서 2001년도에 복원한 것으로 저절로 우리 조상들의 순국정신에 머리가 숙여지는곳이다
농월정 에서 2km 정도를 가면 서하면 호성마을의경모정 이 나온다
경모정 은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의 후손들이 1978년도에 건립한 정자로서 소와 어우러진 주변의 넓은 암반들로서 많은 행락객들이 쉬어 가는곳이다
여기서 1km정도 올라가면 차일을 덮은 듯 냇물의 가운데 바위섬으로 넓게 펼쳐진 암반과 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동호정이 마주 서 있다.
차일암 주위에는 보기만 해도 빨려들 것 같은 짙은 담록색의 못이 있어 찾는 이를 섬찟하게 한다.
동호정은 조선 선조때의 성리학자인 동호 장만리(章萬里)의 공을 추모하여 1890년경 후손들이 중심이되어 건립한것으로서
장만리공은 임진왜란시 왕을 등에 업고 의주에서 신의주까지 피란하였으며
후일 선조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정려를 명하였으며 황산마을 입구에 정려비각이 있다.
이 곳 차일암 은 암반이 평평하고 넓어 년중 불제자들의 방생이 끊이지 않는 곳이며
차일암에 붙어있는 계곡 가운데의 솔숲은 행락철에 많은 사람들이 야영을 하는곳이다
동호정을 뒤로하고 1km가량 더 오르면 또 하나의 선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름하여 거연정(居然亭) 계곡. 이름 그대로 자연속에서 살고싶어 하는 옛 선비의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듯 하다.
거연정 주위에는 바위를 뚫고 자라는 거대한 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또 바위틈 곳곳에 피어 있는 꽃들도 행인의 바쁜 발걸음을 놓아주려 하지 않는 그야말로 자연경관 속에 정자가 들어가 있는 한폭의 그림같은 곳이다.
거연정은 1613년에 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숙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건립한것으로 정자로 가기 위하여
화림교(구름다리)를 건너는데 다리에서 내려다보는 검푸른 소와 기암괴석의 암반은 거연정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거연정의 50m 아래에 있는 군자정은 조선 성종때의 성리학자이며 조선5현의 한분이신 정여창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세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선비들이 계곡을 끼고 앉아 시문을 주고받았던 곳이다
그밖에도 서하면에서 백전으로 넘어가는 계곡의 수많은 절경과 서상면의 부전계곡, 남덕유산자락의 영각사,
덕유교육원등 수없이 관광명소가 많아 1년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거연정(居然亭) .
거연정(居然亭) .
함양땅엔 이름이 알려진 큰 계곡이 4개가 있는데 지리산의 칠선계곡과 한신계곡은 너무나도 잘 아는곳이고
다음은 기백산과 황석산 사이에 있는 용추계곡인데 이곳은 연암 박지원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물레방아를 만들은 곳이다.
지금 우리가 봐서는 물레방아가 뭐 대단한 것이냐 할지 모르지만 이때까지 사용하던 디딜방아에서 획기적인 발전이다.
다음 네 번째 계곡이 화림동계곡인데 지라산이나 거창,함양,진주,산청등 경남의 산들을 다닐때 수도없이 수도없이 보았던 계곡이다.
즉 대전-통영고속도로의 백두 대간 깃대봉밑인 육십령터널을 지나면서부터 좌측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계곡을 말한다.
화림동계곡은 해발 1,508m의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남강의 상류)이 서상-서하를 흘러내리면서
냇가에 기이한 바위와 담.소를 만들고 농월정에 이르러서는 반석위로 흐르는 옥류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무릉도원을 이루고 있는곳으로 장장 60리에 이른다.
거연정(居然亭) .
차길에서 본 소와 암반위의 거연정모습.
거연정(居然亭) .
이름 그대로 자연속에서 살고 싶은곳이다.
거연정(居然亭) .
고려말 전오륜(全五倫)의 7대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전시서(全時敍)가 시복거(始卜居)한 것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인 진사 전재학(全在學), 전민진(全愍鎭)등이 1872년에 건립하였다.
거연정(居然亭) .
거연정(居然亭) .
거연정(居然亭) .
거연정(居然亭) .
거연정(居然亭)에서 아래로 본 모습.
다리아래 나무숲이 군자정(君子亭)이다.
이 군자정은 조선 성종때의 성리학자이며 조선5현의 한분이신 정여창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세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선비들이 계곡을 끼고 앉아 시문을 주고받았던 곳이다
◇동호정(東湖亭)
동호정(東湖亭)
서하면 황산마을 앞 하천변에 있고 조선 선조때의 성리학자인 동호 장만리(章萬里)의 공을 추모하여
1890년경 10대손인 장대운, 장서부, 장서진등 세사람이 중심이되어 건립하고 공의 호를 따서 동호정이라 하였다.
동호 장만리(章萬里)公은 임진왜란시 왕을 등에 업고 의주에서 신의주까지 피란하셨는데 선조께서는 그충성을 가상히여겨 호성공신에 책록 하시었으며
고종께서 1892년 좌승지에 추증하시고 충신 정려를 내리셨다.
훗날 공께서 공께서 관직에서 물러나신 뒤 이곳에서 심신을 수련하시며 낚시를 즐기시던 곳이다.
황산마을 입구에 정려비각이 있다.
동호정(東湖亭)
계단을 통나무를 파서 만든 것이 특이하다.
동호정(東湖亭) 앞의 차일암
동호정(東湖亭).
◇농월정(弄月亭)
거연정과 동호정은 지척에 있고 동호정(東湖亭)에서 농월정은 아래로 한참을 내려온다.
전에 이곳을 지나면서 계곡 건너편에있어 몇 번 쳐다만 보고 지나쳤는데 오늘은 그 모습이 영 안보인다.
한참을 가서 아무래도 지나쳤다싶어 다시 뒤 돌아와봐도 안보여 농월정 관광단지에 차를 세우고 찾아보기로했다.
말만 관광단지이지 여름철에만 문을 여는지 상가들은 철수하여 쓸쓸하다.
물어볼곳도없어 대충 감만잡고 상가 뒤쪽에 있는 큰 다리를 건너면 길은 산으로 갈 것 같으나 강가를 따라 좌측 소나무 숲길로 이어진다.
그끝에 달랑 농월정 안내판만은 있는데 아무것도 없다. 어찌된것인가?
주변을 살펴보니 농월정 주춧돌인듯한 돌들이 한두 개 보이는게 이곳에 농월정이 있던 곳 인듯싶다.
나중에 함양가서 알아보니 농월정은 2003년에 불이나서 없어지고 복원을할려고 기금까지 마련을 한모양인데
이것이 문중 사유 재산이라서 사유재산에 군비를 투입하여 복원하기도 어려워서 복원도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면 군에선 그것을 알려야지 애굿은 관광객만 있지도 않은 농월정을 찾아 헤매게 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농월정(弄月亭)
농월정은 2003년에 불에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았는데 안내판은 그대로다.
숲속 어딘가에 있나싶어 여기저기 찾아봤다.
농월정(弄月亭) 터.
요 주춧돌을보니 여기가 농월정이있던 터인듯싶다.
함양가서 알아보니 농월정은 2003년에 불이나서 없어지고 복원을할려고 기금까지 마련을 한모양인데
이것이 문중 사유 재산이라서 사유재산에 군비를 투입하여 복원하기도 어려워서 복원도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농월정(弄月亭) 터
조선 선조때 문과에 급제 예조참판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대첩시 분전 장렬히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지족당 박명부 선생이 머물면서 시회를 열기도 하고 세월을 낚기도 했다는 곳이다.
지금은 불에 타 없어진 농월정 정자는 후세 사람들이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정자인데 이름 그대로 달을 희롱한다는 뜻이다.
농월정을 나오며 본 국민관광단지는 한 여름에만 문을 여는지 썰렁하다.
농월정 국민관광단지뒤에서 이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천변을 따라 올라가면 농월정터가 나온다.
농월정을 나오니 벌써 해가 서산에 기울고 있는데 안의를 거쳐 함양으로 갔다.
정여창고택을 찾아 볼려는데 지도를 찾아보던지 GPS에 입력을 하던지 할 것을 잔머리 굴리다가 오히려 시간만 축냈다.
오래전의 기억으로 함양에서 인월가는 방향에 있는걸로 기억하고 정병옥인가하는 그 후손이 살고 있다는 애길 들은 것 같다.
사람이 살고 있으면 시간이 늦어 밤이되면 개방을 안할것같고 아침엔 또 너무일찍은 어려울것같아 서둘러 갔다.
안의에서 함양길로 가다가 고속도로로 들어(이때 고속도로로 가지 말고 직진하면 바로 지곡면 정여창고택 인것을)함양가서
인월쪽으로 얼마를 가도 안내판이 안보인다.지리산 가는 오도치 갈림길을 지나 더 가니 오봉산밑이다.
고개를 넘으면 인월이니 차를 돌려 다시 함양으로 나온다.이미 날은 어두어졌고 여관에들긴 이른 시간이니 상림(上林)이나 가자.
함양읍내에 있는 상림은 함양군민들의 휴식처로 읍내에 있어 밤이건 낮이건 아무때나 찾아와 쉴수 있겠다.
상림안으로 물길을 끌어들여 여름에도 시원하고 나무들도 무성한데 길 양쪽으로 초파일날 연등같이 등불이 환하게 밝히고있고
등마다 이름표가 붙어있어 상림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니고 군민모두의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함양상림 천연기념물 제154.
상림은 함양읍 서쪽을 흐르고 있는 위천의 냇가에 자리잡은 호안림이며 신라 진성여왕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 태수로 있을때에 조성한 숲이다.
당시에는 지금의 위천수가 함양읍의 중앙을 흐르고 있어 홍수의 피해가 심하였다고 한다.
최치원 선생이 뚝을 쌓아 강물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그 뚝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지금까지 이어오는 숲을 조성하였다.
당시에는 이 숲을 대관림(大館林)이라고 이름 지어 잘 보호하였으므로 홍수의 피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 후 중간 부분은 파괴되고 지금까지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으며, 하림구간은 취락의 형성으로 훼손되어 몇 그루의 나무가 서 있어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총 면적이 약 21Ha로써 숲의 길이는 1.6Km에 달하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인공림이라 하겠다.
울창한 이 숲에는 120여종 20,000그루의 낙엽, 활엽수로 어우러져 봄의 신록, 여름의 녹음, 가을 단풍과 겨울의 설경들 사철을 통하여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숲 속에는 가은데로 수로가 있어 날씨가 가물 때에도 충분한 수분을 공급할 수 있어
항상 녹음이 짙으며 이은리 석불(유형문화재 제 32호)와 함화루(유형문화재 제 258호) 및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문화재 자료 제 75호),
척화비(문화재자료 제 264호) 그리고 사운정, 초선정등 정자와 만세기념비, 독립투사들의 기념비와 동상이 있어 이 숲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또한 숲 속에는 3,000여평의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고, 야외 공연장인 다별당도 마련되어 있어 이 고장 사람들의 문화 체험과 휴식 공간이 되고 있으며,
또한 함양의 대표적 관광자원으로도 크게 각광 받고 있는 숲이다.
함양상림(上林).
함양은 조그만 소도시이지만 아주 잘 꾸며져있어 시민들이 쉬기 편하게 가꿔져 있다.
담당자가 안목이 넓고 시민들이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파악해서 꾸몃다는 생각을 한다.
옛날 1100년전에 최치원이 국민을 생각했듯이 ...
상림은 함양읍 서쪽을 흐르고 있는 위천의 냇가에 자리잡은 호안림이며 신라 진성여왕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 태수로 있을때에 조성한 숲이다.
당시에는 지금의 위천수가 함양읍의 중앙을 흐르고 있어 홍수의 피해가 심하였다고 한다.
최치원 선생이 뚝을 쌓아 강물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그 뚝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지금까지 이어오는 숲을 조성하였다.
총 면적이 약 21Ha로써 숲의 길이는 1.6Km에 달하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인공림이라 하겠다.
상림(上林).
위천의 물을 끌어들여 갖가지 꽃을 심고 연못엔 연꽃들을 심었다.
상림에는 120여종 20,000그루의 낙엽, 활엽수로 어우러져 봄의 신록, 여름의 녹음, 가을 단풍과 겨울의 설경들 사철을 통하여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숲 속에는 가은데로 수로가 있어 날씨가 가물 때에도 충분한 수분을 공급할 수 있어 항상 녹음이 짙다.
밤에 본 상림(上林).
수많은 등엔 각자의 주소성명등을 적은 이름표가 붙여 소원을 빌고 있다.
애착도 가고 자기것은 자기가 살피고 전부가 주인인 것이 참 좋은 아이디어같다.
연리목(連理木),연리지(連理枝).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는 나무다.수종이 다른 나무도 한몸이 되어 살아가는데 같은 인간들끼리 왜 이리 다툼이 많을까?
함화루(咸化樓).
원래는 함양읍성의 남문으로 망악루(望嶽樓)라는 현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명칭은 남문에서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까닭에 이름하였다고 한다.
1932년 고적보존회의 대표였던 함양읍 죽곡리 거주 송계 노덕영(盧悳泳)이 사재를 들여현재의 위치에 이건하여 함화루(咸化樓)라고 개칭 하였다.
상림안에는 이은리 석불(유형문화재 제 32호)와 함화루(유형문화재 제 258호) 및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문화재 자료 제 75호),
척화비(문화재자료 제 264호) 그리고 사운정, 초선정등 정자와 만세기념비, 독립투사들의 기념비와 동상등이 있다.
상림(上林)안의 체육시설물들.
함양은 조그만 소도시이지만 아주 잘 꾸며져있어 시민들이 쉬기 편하게 가꿔져 있다.
담당자가 안목이 넓고 시민들이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파악해서 꾸몃다는 생각을 한다.
옛날 1100년전에 최치원이 국민을 생각했듯이 ...
보통 체육공원에 가보면 철봉대,평행봉,수평대등 일반인들은 거의 쓰지도 않는 기구들만 한 두 개 있고
정작 필요한 운동기구는 보이지 않는데 이곳엔 실용적인 운동기구들이 구비돼있다.
이런면에서 중국이 우리보다 훨씬 잘돼있어 벌써 수년전부터 일반 공원에 설치돼있다.
상림(上林)안의 구조물들.
화장실의 어린이용 세면기다.3~4살짜리도 쓸 수 있게 작은 세면기다.
왠 디딜방아(발로 밟아 곡식을 찧는것)며 연자방아(소나 말이 돌을굴려 곡식을 찧는것)냐고 하겠지만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연암 박지원이 1780년 청나라에 4년간 머물면서 견문한 지식이나 터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여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농업생산증대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다.
상림을 얘기하면서 최치원을 빼 놓을 수가 없다.
최치원 (崔致遠) 857~925).
호는 고운이며 시호는 문창후이다.
신라 최고의 문장가요 우리나라 한문학의 원조이고 동방 18현인중의 한사람이다.
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나 12세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관리로 종사하면서 황제의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고 황소의 난때 「토 황소격문」의 글을 써서 내란을 수습하여 공의 문장은 중국에서도 명성이 드높았다.
28세에 귀국하였으나 문란한 국정에 통탄하며 외직을 자청하여 태인, 정읍, 서산을 거쳐 천령(함양)태수로 부임하여 대관림(상림)을 조성하고
풍수해를 막아 이 고장 발전에 기여했고 덕으로써 풍속을 교화하여 후세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저서로는 계원필경, 사육집, 사산비명, 법장화상전등이 있다.
상림 숲에서 뱀, 개구리, 개미를 몰아 냈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최치원은 신라 헌강왕 원년(857년)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설화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문창이라는 곳의 영으로 부임하면서 치원을 잉태한 지 넉달만에 금돼지로부터 변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 육개월만에 치원을 낳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차마 이 아기를 기를 수가 없어서 치원을 내다 버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아이를 보자기에 싸서 무인도에다 갖다 버렸다.
그런데 밤만 되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서 젖을 먹여 키웠고 낮이 되면 오색 무지개가 찬연한 하늘에서 큰 학 한 마리가 날아와서
치원을 품고 있었으므로 짐승들의 침입을 막을 수가 있어 아무 탈없이 자라나게 되었다.
치원이 무인도에서 책을 읽을 때 소리가 어찌나 낭랑했던지 중국의 황제 귀에까지 들려서 황제는 신라국에 학사를 보내어 시로써 대화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동이라는 칭호를 받은 최치원은 12세 되는 해 당나라에 유학을 하여 명성을 떨쳤고 6년만인 18세 되던 해에는 중국에서 당당하게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였다.
중국에서 관리로 일하다가 황소가 난을 일으켰을 때는 황소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관군 총지휘관 고변의 비서관이 되어 종사관의 자격으로 황소격문을 써서 유명하다.
스스로 황제라 칭했던 황소가 그 격문을 읽다가 충격적이고도 감동적이라서 놀란 나머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의자에 앉은 채로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는
얘기가 전한다. 결국 황소가 반란의 명분을 찾지 못하고 궁지에 몰리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이른 격문이다.
그는 28세 되던 해(885년) 당나라 헌종황제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하고 말았다.
그는 기울어져가는 신라를 어찌할 수 없음을 느끼고 시골로 내려가 조용히 조그마한 고을에서 여생을 마치기로 작정하고
지원하여 전북 태인과 정읍, 충남의 서산을 거쳐 천령군(지금의 함양군)태수로 부임하였다.
그의 치적 중에서 상림은 함양을 대표하여 내세울 수 있는 곳이다. 풍치가 아름답고 지방민의 휴식처로 알맞은 곳이며 많은 수종이 있다.
치원 자신이 손수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활엽수를 캐어다가 풍수해를 막기 위한 방제화 방풍림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상림공원의 신도비를 읽어 보면 신라말 함양의 태수로서 그 공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우거진 숲속이나 시냇가에는 뱀이나 개구리, 개미같은 해충들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우리가 숲을 좋아하지만
숲을 찾을 때에는 이러한 해충을 조심해야 함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특히 숲에서 잠깐만 앉았어도 개미떼가 어디서 나왔는지 금방 모여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상림 숲에는 뱀이나 개미같은 해충이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림은 숲속의 어디를 가나 마음놓고 앉아서 쉴 수가 있다.
뱀에게 물릴 염려나 벌레들 때문에 귀찮은 일은 없다. 상림의 땅이나 숲을 형성한 나무들이 다른 곳에 있는 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같은 지질일 것이고 같은 수목일 것이다. 그런데도 상림만이 이러한 해충이 없는 까닭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지극한 효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숲을 형성한 것은 신라 진성여왕 때이고 그 목적은 수해가 자주나고 지방민의 괴로움이 심해 치수의 일환으로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은 것으로 되어 있다.
농경 사회에 서 농경지의 안전과 농민을 위하고 백성들이 편안한 생활을 도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지만
숲이 우거져 휴양지, 휴식처로도 적합하여 많이 이용하게 되었다.
최치원은 홀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다. 어찌나 효성이 지극한지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리고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아 나갔으며 돌아와서는 반드시 알려 근심하시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어머님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으로 여기고 어머님의 근심을 자기의 근심으로 삼아 어머니의 뜻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하늘이 낸 효자로 알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님에 대한 불편은 조금도 없게 해 드릴려고 정성을 기울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님은 혼자서 바람을 쏘일겸 상림 숲에 산책을 나가서 풀숲에 않아 놀다가 뱀을 보고 깜작 놀랐다.
집으로 돌아와 아들에게 숲에서 뱀을 보고 놀란 이야기를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치원은 어머니에게 송구함을 금치 못하여 상
림 숲으로 달려가서 숲을 향해 이후로는 상림 숲에는 뱀이나 개미같은 모든 해충은 일체 없어져라. 그리고 다시는 이숲에 들지 말라. 고 주문을 외었다고 한다.
그 후로는 최치원의 지극한 효성으로 인한 주문 때문에 모든 해충이 사라지고 모여들지를 못한다고 한다.
치원의 지극한효성은 하늘도 감동하고 땅도 감동하고 심지어 하찮은 미물도 감동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으니 그를 하늘이 낸 효자라 아니할 수 없다.
그 외에도 최치원이 상림숲의 조림을 마치고 숲속 어디엔가 나무 가지에 조림하던 금호미를 걸어두었다고 하는 전설도 있다.
그리고 숲을 만들고 떠나면서 상림 숲에 뱀이나 개미가 나타나고 숲속에 설죽이 침범하면 내가 죽을 줄 알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 뱀은 아직 나타나지 않지만 가끔 개미가 보이고 숲속에는 설죽이 많이 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는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을 것이라고들 한다.
그 외에도 함양의 학사루를 최치원이 지었다는 설도 있고
그 이전부터 있었는데 최치원이 자주 등루하여 시부를 읊었다하여 학사루라 명명했다고도 전한다. <함양군 홈피에서>
◇ 학사루(學士樓) : 도유형문화재 제 90호
학사루(學士樓).
학사루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 문창후 최치원 선생이 이 지방에 태수로 재직시
자주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읊은 곳으로 후세 사람들이 학사루라 불렀다고 전하므로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본다.
학사루 서쪽에 객사가 있었고, 지방관리가 정무를 보면서 피로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학사루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심신을 달랬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성리학자로서 영남학파의 종조였던 점필재 김종직이 이 곳의 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판을 철거토록 하여
두 사람의 개인적인 감정이 고조되어 조선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한 곳이다.
왜구의 침입으로 사근산성이 함락될 때 학사루가 소실되었으며 조선 숙종 18년 (1692)에 군수 정무(鄭務)가 중수한 기록이 있다.
서기 1910년 이 곳에 함양초등학교가 세워질 때도 학사루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으며
, 함양초등학교의 교실, 군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던 것을 서기 1979년에 현 위치로 이건 하였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2칸의 2층 누각으로 팔작지붕 목조와가이다.
김종직 (金宗直.1431~1492)은 누구인가?
산꾼들이 김종직의 이름을 처음 알게되는 것은 무오사화나 조의제문이 아니고 지리산을 오르고 그 기록을 남긴 "유 두류록"에서 알게되고
그의 제자인 김일손도 "속 두류록"에 지리산 천왕봉에 성모사와 성모석상이 있었음을 기록으로 남겨준 바로 그분들이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이며 문신으로 공의 자는 계온(季溫), 호는 점필재(占畢齋)이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으로 밀양 출생이며 본관은 선산이다.
부친인 김숙자(金叔滋)와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공의 부친은 원래 경북 선산 사람이었으나
모친 밀양 박씨와 혼인하면서 장인이 왜국 대마도 싸움에서 전사하자 밀양으로 이사하여 공을 낳았다.
16세에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으며 21세에 결혼을 하고 이듬해 1453년(단종1)에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공부를 계속하여 증강시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장례를 치르고 3년간 여막생활을 하였다.
1459년(세조5)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를 하였으며 성종대왕이 경연을 열어 우수한 인재를 선출할 때 첫번째로 선출되었다
이로서 정자, 교리, 감찰, 경상도 병마평사등을 역임하고 성종 초기에 경연관이 되었다.
1473년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성리학적 실천윤리로 백성을 다스려 봄가을로 향음례와 경노행사를 실시하고
효제와 주자가례대로 상제봉행을 권장하였으며 교육에 있어서는 길재 선생과 아버지 김숙자의 교육 방법대로 소학을 가르쳤다
이러한 성리학의 윤리 실천으로 학행일치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함양을 찾는 수많은 문하생들이 모여들었다.
함양에 부임하였을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유자광이 학사루에 시를 지어 시판을 걸어 놓은 것을 보고 평소 그의 인품을 좋게 보지 않았던 공이
시판을 떼어 가마솥에 불을 때어 버렸는데 이로 인하여 유자광과의 감정이 악화되어 훗날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으며
두류산(지리산)을 유람 유두류록을 남겼다.
또한 차가 생산되지 않는 함양 백성들이 특산물세인 차세를 납부하기 위하여 전라도로 가서 쌀 1말에 차 1홉을 맞바꾸어 납부하는 것을 보고
이를 감면해 주기 위하여 휴천면 엄천에 토지대금을 백성들에게 보상해주고 관영 차밭을 조성하여 대신 납부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함양읍성의 담장이 240간이나 되는데 그 지붕이 초가로 되어 있어 해마다 군민들이 부역으로써 많은 고초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으므로
이것을 기와로 바꾸어 민폐를 덜어 주는등 선정을 베풀어 1476년에는 선산부사로 승진 역임하던 중
모친상을 당하여 낙향하여 3년을 묘옆에 띠집을 지어 지냈다.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고 집안의 연못가에 서당인 경렴당을 짓고 후진양성을 하고 있을시 성종이 홍문관 응교로 불렀으나
사양하여 특별히 도승지를 제수하였으나 감당하기 어렵다며 다시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곧 이조참판겸 동지경연사로 제수하시면서 금대 한 벌을 하사하셨다.
이후 전라감사, 한성부윤, 공조참판, 형조참판, 지중추부사,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공의 학문은 고려말 정몽주 및 길재선생의 학풍을 그대로 이어받은 아버지로부터 배워 문장과 경술에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가 되었으며 문하생으로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유호인, 남효온, 표연말등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공의 학문적 계통을 보면 고려말 성리학의 대가인 정몽주로부터→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황,이이로 이어져 내려가는데
길재 및 아버지 김숙자의 영향을 받아 효제충신을 주안으로 하는 실천적 방면에 치중한것이다.
성종의 총애를 받아 당시 훈구공신파 일색이던 조정에 문하생들을 많이 진출시켜 신진 사림세력을 형성함에 따라 훈구파와 심한 반목과 대립을 일으켰다.
공은 1489년(성종20)에 병으로 모든 관직을 사양하여 지중추로 벼슬을 옮기고 김천으로 돌아와 경렴당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때 성종이 특별히 벼슬을 바꾸지 말라 하시고 녹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나라에서 주는 녹을 받으라 권하여도 불응하고 세 번이나 상소를 하여 사양하니 성종이 친히 비답문을 지어서 어사품을 내리셨으며
가세가 빈한함을 듣고 경상도에 하명하여 쌀70석을 하사하고 의원을 보내어 약을 하사하셨다
1492년(성종23)에 밀양 외가에 갔다가 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8월에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소식을 듣고 조정에서는 2일간 정사를 보지 않고 애도하였으며 '문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일찍이 조의제문(弔義帝文=중국의 고사를 이용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제문)을 지은바 있는데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것이 화근이 되어
유자광이 주도하여 자신들의 방호를 위한 무오사화를 일으켰을때 사화때에는 부관참시를 당하고
문하생 33명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나 생질 강중진이 화를 당하면서 10여권의 책을 숨겨두어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다.
중종이 즉위하자 신원이 회복되고 영의정에 추증되면서 '문충'으로 시호가 다시 내려졌다.
밀양의 예림서원, 구미의 금오서원, 함양의 백연서원(고종때 철폐), 금산의 경림서원, 개령의 덕림서원에 제향되었다.
또한 고령군 쌍림면에 선생을 모시는 부조묘가 있다.
함양의 상림숲의『함양을 빛낸 사람들』역사인물공원에 흉상이 2001년 건립되어 있다
문집은 점필재집, 저서에는 유두류록, 청구풍아, 당후일기 등이 있고
편서로는 동국여지승람, 일선지, 이존록 등이 있다 <함양홈피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은?
김종직은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것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다.
이 글을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사초(史草)에 적어 넣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편찬책임자는 이극돈(李克墩)으로 이른바 훈구파(勳舊派)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일손의 사초 중에 이극돈의 비행(非行)이 기록되어 있어 김일손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던 중,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 중에서 발견한 이극돈은 김일손이 김종직의 제자임을 기화(奇貨)로 하여
김종직과 그 제자들이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는 사림파(士林派)를 숙청할 목적으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 일파를 세조에 대한 불충(不忠)의 무리로 몰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움직여,
큰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史禍)인데, 그 결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盤) 등이 참수(斬首)되었다. <두산 백과사전에서>
함양읍내 여관에서 자고 새벽에 눈을떠 내려다보니 읍내풍경이 한가롭고 조용한게 말이 군청소재지이지 자그마한 소읍이다.
어제 저녁에 상림을 제대로 못봐서 나오는길에 다시들려 겉모습만 보고 시내 한복판인 군청앞에있는 학사루로 갔다.
군청앞의 고목들이 노랗게 단풍이 들어 고풍스럽다.
학사루를 보고 남계마을에 잇는 남게서원과 청계서원을 들러보고 어제 내려온 안의로 다시 올라가서
안의 입구에 있는 광풍루를 보고 허삼돌 가옥을 찾는데 안의 초교앞에서 두바퀴를 돌았다.
지나가면서도 "안의 금천리 윤씨 고가"인줄 모르고 허삼둘 가옥만 찾은것이다.
바로 앞집사람도 그런집은 모른단다.
허삼둘 가옥을 보고 지곡면사무소앞쪽 안쪽에 있는 정여창고택도 도로변에 이정표가 없어서 지나치기 쉽다.
정여창 고택은 남계서원의 주인공인 정여창의 고택인데 표시는 그의 호를 따 일두고택으로 돼있다.
이집은 전형적인 양반집의 구조를 알 수 있고 보존상태가 좋아서 그시대에 돌아가 있는 느낌이다.
남계서원
조선 명종7년(1552)에 개암 강익이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하고 남계서원이라 칭하였으며 명종21년(1566)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중종때의 학자로서 서원 창시자인 주세붕이 중종38년(1543)에 문성공 안향을 위해 창건한
백운동서원(일명 소수서원)이 최초의 서원이고, 그후 9년후에 세운 이 남계서원이 두번째 서원이다.
정유재란때 소실되어 그 후 나촌(九羅)에 세워져 광해군4년(1612)에 옛터인 현재의 자리에 중건하였다.
그 후 숙종3년(1677)에 문간공 동계 정온 선생을 서편에 배향하고 숙종15년(1689)에 개암 강익 선생을 동편에 배향하였다.
또 별사에는 뇌계 유호인과 송탄 정홍서을 배향하였다가 고종5년(1868)에 별사를 훼철하였다.
이 서원에는 유생들을 수도케 한 어정오경등 서적이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다. 건물 구성은 제향공간으로 사당, 동무, 내삼문이 있고
강학공간으로 강당, 동재, 서재, 장판각, 풍영루 등이 있으며, 배치형식은 급한 경사지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일축선 배치를 하고 있다.
양재는 경사지에 배치되어 1칸은 방, 1칸은 누마루형식의 대청으로 하였으며 동재를 양정재, 애연헌, 서재를 보인재, 영매헌이라 하며 전면에 현판이 걸려있다.
동재앞에는 연못이 있고 서재앞에는 신도비와 맞배지붕의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강당의 측면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판장벽과 판장문으로 된 우진각 지붕의 장판각이 배치되어 있다.
이 서원의 출입구인 풍영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5량구조 팔작지붕 겹처마이고 하부기둥은 8각형의 장대석 석주로 하였고
2층 누마루에 계자난간을 설치 하였다. 이 서원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그 옆에 하마비 1기가 있다.
남계서원
조선 명종7년(1552)에 개암 강익이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하고 남계서원이라 칭하였으며 명종21년(1566)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중종때의 학자로서 서원 창시자인 주세붕이 중종38년(1543)에 문성공 안향을 위해 창건한 백운동서원(일명 소수서원)이 최초의 서원이고,
그 다음이 남계서원이다.소수서원보다 9년늦다.
남계서원 풍영루.
남계서원
남계서원.
남계서원. 위에서 본 풍영루.
남계서원.
남계서원.
남계서원.
남계서원에서 본 괘관산과 정여창이 살던집이있는 지곡면 고택쪽.
청계서원(靑溪書院)
수동면 원평리에 있으며 문민공 김일손(金馹孫)의 사당이다. 1921년에 옛 청계정사의 터에 세웠다.
조선 연산군때의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金馹孫) 선생은 경북 청도 사람이나 우리 고장의 학자 일두 정여창 선생을 흠모하여
1495년 남계마을에청계정사를 짓고 학문을 익혔는데 선생의 사후 황폐화 된 것을 조선 고종 광무10년(1905년)에
함양의 선비들이 선생의 인격을 추모하여 정사를 복원하고 유허비를 세우면서 청계서원이라 하고 봄가을로 제향을 하고 있다.
일두 정여창 선생은 김일손보다는 14살이나 많으나 관포지교로 사귀었는데 김일손은 정여창 선생 대하기를 스승과 같이 섬겼다라고 되어있으며
평소 정여창을 흠모하여 선생의 집이 훤히 보이는 이곳 수동면 남계마을에 청계정사를 짓고 학문을 배우면서 교류하였는데
이곳이 곧 청계서원의 전신인 것이다. 정면은 단층 팔작지붕으로 구경재와 동서재, 호남문과 솟을삼문등 부속건물이 있으며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다.
김일손은 누구인가?
경북 청도군 사람으로 세조10년(1464년)에 태어 났으며 부친은 사헌부 집의를 지낸 맹(孟)이며 할아버지는 효자 김극일이다.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계운(季雲)이고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小微山人)이며 시호는 문민공(文愍公)이다.
어려서는 할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는데 1486년 생원시에 장원을 했으며 그 해 진사시에서 2등을 하였고
또 다시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에 등용된후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진주 교수(敎授)에 제수되자 곧 사직하고
고향인 청도군 이서면으로 돌아가 운계정사를 짓고 후학을 열면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 김굉필, 강혼등과 깊이 교류하였으며
정여창 선생을 함양까지 찾아와 16일간 지리산 등람을 하기도 하였다.
1489년에 쓴 " 속 두류록" 엔 지리산 천왕봉 정상엔 성모사가 있는데 한칸정도의 돌담벽이 있고 담안의 너와집에 성모상이 안치돼있다."라고 적고있다.
다시 벼슬에 나아가 홍문관 및 사간원등 주로 언관을 많이 지냈으며 이조정랑까지 올랐다.
춘추관에 있을때에는 전라도 관찰사 이극돈(李克敦)의 비행을 사초에 직필하고
뒤에 다시 이극돈등이 붕당을 만들어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원한을 사기도 하였으며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의 소릉(昭陵) 복위 상소를 하는 한편 기득권층인 훈구파의 부정 불의를 논하여 이들의 미움을 많이받았다.
성종실록을 편찬할시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것이 이극돈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진 것이 화근이 되어
집권층인훈구파의 유자광(柳子光)등에 의하여 무오사화가 발생되었는데 미움을 많이 받은 선생은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다.
중종 반정으로 신원이 복원되었으며 중종때 홍문관 직제학에 추증되었고현종때 도승지, 순조때 이조판서로 각각 추증되었고 문민(文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탁영집, 회로당기, 속두류록이 있으며 이 곳 함양의 청계서원과 목천의 도동서원 그리고 고향인 청도의 자계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또한 선생이 즐겨 타던 거문고(일명 탁영금)는 1988년 보물 제957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청계서원(靑溪書院)
수동면 원평리에 있으며 문민공 김일손(金馹孫)의 사당이다.
청계서원(靑溪書院)
청계서원(靑溪書院)
청계서원(靑溪書院) .
김일손(金馹孫) 선생이 1489년에 쓴 " 속 두류록" 에
지리산 천왕봉 정상엔 성모사가 있는데 한칸정도의 돌담벽이 있고 담안의 너와집에 성모상이 안치돼있다."라고 적고 있어
천왕봉 정상에 성모상이 옛날부터 있엇던겉이 확인 됐는데
이 성모상은 1970년대초에 일부 종교의 광신도들이 파괴하여 버린것을 수습하여 지금은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있다.
청계서원(靑溪書院) .
청계서원(靑溪書院) .
안의 광풍루 : 도유형문화재 제 92호
이 누각은 안의면 소재지 진입로 입구인 금호강변에 우뚝 서 있으며 조선 태종12년(1412)에 당시 이안(현재의 안의면)의 현감인
전우(全遇)가 창건하여 선화루(宣化樓)라 하였다. 그 후 조선 세종7년(1425) 김홍의(金洪毅)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고,
조선 성종25년(1494)에 안의 현감 일두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중건하고 광풍루(光風樓)로 개칭 하였다.
정유재란때 소실된 것을 조선 선조34년(1601)에 안의 현감 심종침이 복원하였고, 조선 숙종9년(1683)에 현감 장세남(張世男)이 중건하였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5량 구조 팔작지붕 겹처마 목조와가로 되어 있다. 우람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으로 보존해야 할 가치가 높다.
안의 광풍루(光風樓).
이 누각은 안의면 소재지 진입로 입구인 금호강변에 우뚝 서 있으며 조선 태종12년(1412)에 당시 이안(현재의 안의면)의 현감인 전우(全遇)가 창건하여
선화루(宣化樓)라 하였다. 그 후 조선 세종7년(1425) 김홍의(金洪毅)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고,
조선 성종25년(1494)에 안의 현감 일두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중건하고 광풍루(光風樓)로 개칭 하였다.
정유재란때 소실된 것을 조선 선조34년(1601)에 안의 현감 심종침이 복원하였고, 조선 숙종9년(1683)에 현감 장세남(張世男)이 중건하였다.
함양읍내의 학사루와 비슷한 건축 양식이고
금호강을 앞으로 하고 안의 읍내를 뒤로 하면서 풍광을 즐길 수 있게 지었는데 지금은 강은 하천개발로 그모습을 잃어버렸고
후면은 상가와 민가로 변하여 옛날에 선비들이 즐겼을 풍류를 찾을 수는없다.
광풍루(光風樓) 뒷모습.
안의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면 네거리에 있고 좌측이 버스 터미널이다.
광풍루(光風樓) 뒤에있는
상무좌우접장 하경순포선불망비.
상무좌우접장 하경순포선불망비안내판.
안의금천리윤씨고가(함양 허삼둘 가옥) : 중요민속자료 제 207호
이 가옥 은 당시 진양갑부 허씨 문중의 허삼둘이 토호 윤대홍에게 시집와 지은 집으로 특히 안채의 구성에서는 특출함을 보인다.
당시의 시대상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여성중심의 공간배치와 부엌으로 출입하는 통로가 전퇴를 열고 토상화(土床化)한 것이 특이하며 학술적인 자료로도 중요하다.
안채는 'ㄱ'자 형이다. 보통의 'ㄱ'자 형이 아니라 꺽인 부분을 귀접이한 형식으로 하였고 구성은 남측엔 정면 3칸, 동측은 정면 4칸으로 되어있다.
부엌에 들어서면 거의 오방형의 넓이인데 꺽인 부분이 모서리가 죽어 일그러져 있고, 중간에 기둥 둘 만이 서 있어 넓어 보인다.
사랑채는 평면이 'ㄱ자형'인데 정면 7칸으로 구성되었으며, 동향 하였는데 그 남단 칸은 방이다.
전퇴가 있는데 루각을 세우듯 높이 설치 하였고 난간을 만들었다.
그 외에 안채(207-1), 사랑채(207-2), 바깥 행랑채, 안행랑채, 대문간채, 곡간채가 더 있어 일곽을 이루고 있다.
안의금천리윤씨고가(함양 허삼둘 가옥) .
안의초교 우측의 경로당골목으로 들어가면 안의 금천리 윤씨고가라고 써 있고 밑에 함양 허삼둘 가옥라고 쓴 안내판이 있다.
이웃집 사람들에 물어봐도 그런사람은 이동네 안산다고 딴 소리만 한다.
지은지 얼마 안되는 듯 새집인데 불이 나서 그을려있다.사랑채다.
안채다.
요 안채의 모양이 편리성을 살린집 구조다.
당시 진양갑부 허씨 문중의 허삼둘이 토호 윤대홍에게 시집와 지은 집으로 특히 안채의 구성에서는 특출함을 보인다.
당시의 시대상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여성중심의 공간배치와 부엌으로 출입하는 통로가 전퇴를 열고 토상화(土床化)한 것이 특이하며 학술적인 자료로도 중요하다.
안채는 'ㄱ'자 형이다. 보통의 'ㄱ'자 형이 아니라 꺽인 부분을 귀접이한 형식으로 하였고 구성은 남측엔 정면 3칸, 동측은 정면 4칸으로 되어있다.
부엌에 들어서면 거의 오방형의 넓이인데 꺽인 부분이 모서리가 죽어 일그러져 있고, 중간에 기둥 둘 만이 서 있어 넓어 보인다.
사랑채는 평면이 'ㄱ자형'인데 정면 7칸으로 구성되었으며, 동향 하였는데 그 남단 칸은 방이다.
전퇴가 있는데 루각을 세우듯 높이 설치 하였고 난간을 만들었다.
요 오방형의 부엌인데 드나들기 쉽게 마루에 통로를 내고 부엌도 양쪽으로 쓰게 편리성을 강조했다.
일두정여창고택(함양 정병호 가옥) : 중요민속자료 제 186호
조선조 5현의 한 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으로 이 집은 선생이 타계한지 1세기 후에 후손들에 의하여 중건되었고
3,000여평의 대지가 잘 구획된 12동(당초 17동)의 건물이 배치된 남도 지방의 대표적 양반 고택으로 솟을 대문에 충. 효 정려 편액 5점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대문간을 들어서서 직행하게 되면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동북으로 비스듬히 가면 사랑채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에 내루가 앞 쪽으로 달린 전출 구조이며, 내루는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단아하고
소박한 난간과 추녀를 받치는 활주를 세우고 가늘고 긴 석주(石柱)를 초석으로 삼았다.
문헌세가(文獻世家), 충효절의(忠孝節義), 백세청풍(白世淸風)등을 써붙인 사랑채는 전퇴가 있으며 높직한 댓돌 위에 세워져 있다.
사랑채 옆의 일각문을 거쳐 안채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일각문을 들어서면 또 한번 중문을 통과해야 한다.
남향한 一字형의 큼직한 안채는 경북지방의 폐쇄적인 공간과는 달리 개방적으로 분할되어 집이 밝고 화사하다.
안채 좌측으로는 아래채가 있고, 뒤편으로는 가묘(家廟)와 별당, 그리고 안사랑채가 따로 있다.
옛 손길이 고스란히 베어 있는 세간들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정여창 고택은 양반가의 정갈한 기품이 가득하며,
정여창 고택의 유적 명칭은 지정 당시의 건물주 이름을 따서 '정병호 가옥'이라 한다.
특히 본 가옥은 TV드라마 '토지'의 촬영 장소로 이용되면서부터 널리 알려져 많은 문화유적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입구에서 본 정여창고택(함양 정병호 가옥)
정여창고택(함양 정병호 가옥)은 공식이름이 그의 호를 딴 함양 일두고택이고 지정당시의 소유주인 정병호 가옥으로 등록이 돼 있는 모양이다.
정여창고택(함양 정병호 가옥)안내판.
일두의 두蠹(좀두,나무좀 두) 자는 좀 두,나무좀 두 자다.
솟을 대문.
대문간에 충효의 가문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있으며 윗편으로 5개의 총효정려가 있다.
맨위의 정려는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할아버지이며 나머지는 후대손들이다.
사랑채에 앉아 있으면서도 대문밖에 사람들이 오고 가는 사항을 알수 있도록 골목을 박석으로 깔았으며
대문간 오른쪽 담장 밑의 정방형의 박힌돌은 말을 타고 내릴 때 이용하는 노둣돌이다.
골목은 좌우로 다 통하게 하면서도 입구에서는 막다른 골목으로 보이게 만든 것은
낮 선 길손이 집을 쉽게 찾을 수 잇도록 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문간의 방들은 사랑채에 딸린 하인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충효의 가문임을 알리는 홍살문에 걸린 5개의 총효정려.
사랑채 전모.
조선조 5대성현(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정여창)의 한분이며 동국 18현중의 한분으로
성리학의 대가이신 정여창 선생의 자는 백욱, 호는 일두로서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사랑채
사랑채
사랑채앞의 소정원.
사랑채
안채로 들어가는문.
곳간들.
안채.
안채의 우물가 도구들.
화장실.
후원.
안채에서 후원으로 통하는 통로.
안 마당.
장독대와 사당.
안방 대청마루.
굴뚝.
사랑채 툇마루옆의 어성초.
샛문으로 나와서 본 일두고택 옆모습.
정여창 (鄭汝昌 1450~1504)은 누구인가?
조선조 5현(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정여창)의 한분이며 동국 18현중의 한분으로 성리학의 대가이신 선생의 자는 백욱, 호는 일두로서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판전농시사를 지낸 정복주의 손자이며 한성부좌윤 정육을의 아들로서 함양군 지곡면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하동이다.
성종 2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지리산에서 4서5경과 성리학을 연구했으며 실천 철학자로서 독서를 주로하였고 도학으로는 당시 동방의 최고였다.
김굉필과 더불어 우리나라 유학의 핵심적 부분인 이기론의 꽃봉오리를 맺게 하였다.
안음(안의) 현감 재직시 도학사상을 왕도정치로 실천하여 주민들의 복지향상에 주력하였다.
1498년(연산4) 무오사화에 연좌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영면하였고 갑자사화에 다시 연루되어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1517년(중종12)에 문인으로서는 최고의 직함인 대광보국숭록대부 겸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575년(선조8)에 문헌공으로 시호를 내렸다.
1610년(광해2년)에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저서로는 무오사화때 모두 소각되었으나 후손들이 편찬한 문헌공실기등에 몇편의 글과 시만 전하여지고 있다.
대전-통영 고속도로 함양휴게소의 메뉴판.
함양휴게소의 옥연잎밥 큰밥상(9000원)인데
음식은 깔끔하고 먹을만한데 메뉴판 그림보다는 몇가지가 빠진다.
연잎으로 싼 것은 하나는 수육이고 하나는 몇가지 견과류를 넣은 밥이다.
다음은 대나무와 가사문화의 산실인 담양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