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의 복수 (2)
곰으로 변한 칼리스토 모자, 별자리가 되다
칼리스토 역시 헤라의 저주로 곰으로 변신했다가 얄궂은 운명의 장난으로 자신이 낳은 제우스의 아들인 아르카스의 창에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사실 칼리스토에 관한 전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상반된 내용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녀의 출신 자체에 대해서도 우선 아르카디아 왕 리카온의 딸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님프라는 주장도 있다. 그녀의 이름 자체가 '가장 아름다운'이라는 뜻을 가진 '칼리스테'에서 파생된 말이니 만큼, 엄청난 미인임에 틀림없었으며 제우스의 표적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런데 헤라가 누구인가? 아름다움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의 입장에서는 강력한 연적이 등장하게 된 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칼리스토가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는데다가 이름까지도 '이쁜공주'이니 얼마나 속이 부글부글 끓었겠는가!
왕년에 제우스를 매혹시킨 헤라에게 '칼리스토'라는 존재는 신경이 무척 쓰이는 그녀의 적이었다. 헤라는 그녀를 타도할 명분을 찾기 시작하다가 '바로 이것'이라고 손뼉을 쳤다. 칼리스토가 평생을 혼자 살면서 독신으로서 정결을 지키겠다고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서약하였다.
아르테미스는 또 누구인가! 헤라의 연적인 레토의 소생이 바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가 아니었던가! 제우스는 이러한 정결서약을 한 칼리스토를 품에 안기 위해서 자신의 딸인 아르테미스의 모습으로 변신을 하고 그녀와 관계를 가지고 말았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딸을 빙자하면서까지 파렴치한 행동을 일삼는 제우스가 정말 미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에게 한 맹세를 저버리고 제우스에게 몸을 허락한 칼리스토가 더욱 가증스러웠다. 아무리 제우스가 아르테미스의 모습으로 접근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것이 탄로나는 법인데, 그만 힘없이 무너진 칼리스토에 대한 증오심은 이내 복수심으로 변하였다.
"네 이년! 너는 정결 서약을 한 몸으로 누구에게 감히 꼬리를 쳤단 말이냐? 음행을 일삼는 주제에 어찌 그리 가증스러운 서약을 했더냐!"
" ....................................... "
"주신(主神)으로서의 체면도 버리고 너에게 접근한 것은 네년이 요망스러운 꼬리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네가 그렇게 내세우는 아름다움을 그 벌로 빼앗겠다."
고양이 앞의 쥐가 된 칼리스토는 땅에 엎드려 손발이 다 닳도록 애원하였지만 이미 정해진 절차대로 헤라의 복수는 진행되고 있었다. 제우스가 아름답다고 칭찬하면서 자신의 입술로 살포시 덮었던 칼리스토의 입은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낸 사나운 곰의 냄새나는 아가리로 변해버리고 말았으며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목소리는 야수의 울부짖음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한가지! 칼리스토를 곰으로 변신시킨 장본인에 대해서는 헤라 이외에도 제우스와 아르테미스가 거론되고 있다. 만약 제우스가 한 일이라면 그것은 헤라의 분노로부터 칼리스토를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요, 아르테미스가 개입한 일이라면 칼리스토가 제우스에게 몸을 허락함으로써 약속을 파기한 죄에 대한 징벌이었다. 그러나 헤라가 제우스의 정실부인으로서 자신을 침해한 데에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제우스의 정부(情婦)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가혹한 복수를 하는 관례를 비추어 볼 때, 칼리스토를 예외로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우스가 칼리스토를 변신시켰다는 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헤라는 곰으로 변한 칼리스토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곰을 활로 쏘아 죽이도록 아르테미스에게 부탁하였는데 그 사실을 미리 알아챈 제우스가 헤르메스를 보내어 칼리스토의 자궁으로부터 태아상태로 있는 자신의 아들 아르카스를 꺼내오게 함으로써 태내 사망으로 구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칼리스토가 정상적으로 아르카스를 낳았고 나중에 장성한 아르카스가 아르카디아 산중에서 사냥을 하고 있을 때 어머니인 칼리스토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이외에도 여러 전설이 내려오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칼리스토가 곰으로 변하기 전에 아르카스를 정상분만 하였거나, 아니면 곰으로 변한 칼리스토로부터 아르카스를 구출하였고 성장한 그가 사냥터에서 어머니와 마주치게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운명의 그 어느 날, 사냥터에서 곰으로 변해버린 칼리스토를 발견한 아르카스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문 사냥꾼에게 있어서 온순한 동물보다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담보로 광폭한 야수를 사냥한다는 것은 자신의 성취욕을 만족시키는 대(大) 이벤트임에 틀림없는 일이기 때문이며 젊은 사냥꾼이 된 아르카스와 사냥감이 된 어머니 칼리스토가 서로 다른 입장이 되어 만나게 된 것이다. 본능적인 모성애가 발동한 칼리스토는 자기 앞에 나타난 사냥꾼이 자기 아들임을 알아차리고 가까이 가려 하자, 아르카스는 놀라서 창으로 칼리스토를 찌르려 하였다.
여기서 일단 화면을 정지시키고 정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아니 그것보다는 화면을 앞으로 리와인드 시켜 보겠다. 헤라가 복수를 하려고 곰으로 변신시켰을 당시에(혹은 제우스가 그녀를 변신시켰을 때), 일단 곰으로 변해버린 칼리스토는 정상적인 분만을 할 틈이 없었다. 앞에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칼리스토의 정상분만은 하나의 가설이지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약에 곰의 태내로부터 아르카스의 구출설을 인정하고 모자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오래 떨어져 있다가 이제 사냥터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다시 화면재생 버튼을 누르겠다.
창을 든 손을 한껏 뒤로 젖히고 어머니 칼리스토을 찌르려는 순간, 제우스가 아르카스 행동을 그대로 중지시킨 뒤 모자를 하늘로 끌어올려 대웅성(大熊星, 큰곰자리)과 소웅성(小熊星, 작은곰자리)의 두 별자리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오비디우스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한편 헤라는 자신이 복수하려고 한 칼리스토 모자가 명예로운 자리에 앉은 것을 보고 심기가 뒤틀렸다. 그래서 그녀는 예전에 자신을 돌보아 주었던 테티스와 오케아노스에게 두 별자리가 바다 저편에서 휴식을 취하지 못하도록 부탁함으로써 한 순간도 쉬지 못하고 영원히 북극성의 주변을 맴돌게 되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제우스를 의심한 세멜레
세멜레는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의 딸이었는데(즉 제우스의 손녀임) 그녀 역시 헤라의 분노를 피할 수 없었다. 제우스가 세멜레를 품기 위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테바이에 살고 있었던 그녀에게 나타났고, 그 결과 포도주(술)의 신 디오니소스(로마명: 바쿠스)를 잉태하게 된 것이다.
헤라의 질투심은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종전 버전대로 본인이 직간접으로 개입하는 것은 구 버전이라 생각했는지 이제는 계략을 대폭적으로 업그레이드하여 본인은 쏙 빠지고 상대편끼리 지지고 볶도록 하는 소위 이이제이전략(以夷制夷戰略)을 구사하기로 하였다. '이이제이(以夷制夷)'란 무엇인가?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뜻이 아니던가!
물론 제우스와 세멜레가 오랑캐라는 뜻은 아니지만 제우스로 하여금 그녀를 죽이게 한다면 그야말로 원망도 듣지 않고 남편의 정부를 제거하는 일석이조가 아닌가? 부창부수(夫唱婦隨)라 변신술이라면 헤라도 일가견이 있었다. 헤라는 우선 '베로에'라는 세멜레의 유모로 변신하고 그녀에게 정말 제우스가 신인지 의심을 품도록 하였다.
세멜레는 의심이 들컥 났다. 혹시 제우스가 신을 사칭하여 자신을 범한 파렴치한 작자가 아닌가하고 말이다. 그 날 밤에 자신의 침실을 찾아온 제우스에게 소원이 하나있으니 들어달라고 졸라댔다. 한참 세멜레에게 빠져버린 제우스는 스틱스 강을 증인으로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세멜레는 유모로 변신한 헤라의 말대로 '당신이 정말 신이라면 그 증거를 보여달라'고 청하였다. 이 말을 들은 제우스는 너무나 황당하였으나 이미 스틱스 강을 증인으로 내세우면서까지 약속한 이상 취소할 수도 없었다. 만약에 그 증거를 끝까지 거부해보았자 세멜레의 의심이 커져서 동침거부 내지는 요즘 개념으로 혼인빙자 간음죄로 고발당하는 사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는지, 제우스는 깊은 고뇌에 빠져 있다가 하늘로 올라가 미복(微服)을 벗어버리고 하늘의 제왕으로서 정장차림을 하고 세멜레에게 내려왔다.
이러한 광경을 아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헤라는,
"호호호 ! 나도 여자이지만 여자는 정말 의심이 많아. 호기심도 많고 호호호 !! 네년의 의심이 너를 죽일 것이다."
광채로 빛나는 옷차림을 하고 나타난 제우스를 보자, 인간인 세멜레는 신의 빛을 견디지 못하고 바라보는 순간 제우스의 옷에서 발산하는 번개에 맞아 죽고 말았다. 제우스는 제우스대로
원망하지도 못하고 세멜레도 '내 탓이오'하면서 죽고 말았다(전설에서는 테바이의 세멜레의 묘에서 오랫동안 연기를 품어져 나왔다고 함).
그때 헤르메스가 얼른 세멜레의 태내로부터 아기를 구출하였는데, 아마 헤르메스가 미복차림으로 나갔던 제우스가 갑자기 올라오더니 천상의 옷을 입고 다시 부랴부랴 뛰어나가는 제우스의 모습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우스는 어머니를 잃은 태아상태인 디오니소스를 자신의 대퇴부를 자르고 그 안에 집어넣고 보호함으로써 그를 불사의 몸으로 만들었다.
헤라의 복수는 세멜레가 죽었다고 해서 멈춰지지 않았다. 당초의 계획은 태아와 산모 모두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어미만 죽고 아이는 살아있는데다가 더욱이 불사의 몸이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 제우스의 넓적다리에서 디오니소스가 태어났고 제우스는 어린 디오니소스를 세멜레의 언니 즉 이모인 '이노'에게 보내어 그곳에서 양육되도록 하였다.
처음 이노는 어린 디오니소스가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헤르메스의 설득으로 디오니소스의 양육을 맡기로 하고 계집아이의 옷을 입혀 헤라의 눈을 피하였다.
그러나 결국 디오니소스가 이노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다는 사실이 발각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헤라는 이노와 그의 남편 아타마스를 미치게 하였는데, 이노의 자매인 아가우에와 아우토노에는 디오니소스의 광신도가 되어 그녀들을 찾으러 온 아가우에의 아들이며 테바이의 왕 펜테우스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말았다.
헤라의 복수는 미쳐버린 이노로 하여금 그의 남편 아타마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친자식들을 죽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디오니소스 자신도 헤라의 저주를 받아서 여기저기 온 세상을 방랑하게 되었다. 디오니소스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디오니소스 편'에서 자세히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