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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권]
가슴 교육
언제고 공교육기관들이 내가 ‘가슴 교육’(Educating Heart)이라고 부르는 내용에 관심하는 것이 나의 꿈이고 희망이다. 기본적인 학문에 적절히 숙달될 필요를 우리 모두 인정하듯이, 아이들이 학교 커리큘럼으로 사랑, 자비, 정의, 용서 같은 내적 가치들의 필요불가피성을 배우는 그런 때가 오기를 나는 희망한다. ―달라이 라마
페널티킥 직전의 고요한 순간
하늘색 셔츠에 회색 정장을 갖추어 입고 달라이 라마 옆자리 검은 가죽 팔걸이의자에 앉은 뮤레이 겔-만은 두 주 전에 팔순잔치를 치른 사람이었다. 백발의 곱슬머리가 털모자처럼 그의 머리를 덮고 있었다.
그가 눈을 반짝이며 풍부한 바리톤 음성으로 달라이 라마에게 말했다. “대박물관 큐레이터인 커크 바네도는 본인도 굉장한 럭비 선수였지요. 그는 현대예술을 럭비 게임 발명에 비교합니다. 19세기 초 어느 날 영국 럭비학교에서 그 사건이 벌어졌어요.”
겔-만 왼쪽에 앉아있던 켄 로빈슨 경(卿)이 어깨를 추켜올렸다. 그는 20년 넘게 잉글랜드 럭비 마을 바로 옆에 붙어있는 와위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예술교육 교수였다.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 자리에서 세계적인 물리학자 겔-만이 럭비의 유래를 화제로 삼은 데 대하여 흥분한 것 같았다. 영성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저술한 에크하르트 톨레가 달라이 라마 통역사 곁에 앉아서 빙그레 웃었다.
겔-만이 말을 이었다. “축구 선수 하나가 공을 발로 차는 대신 손으로 잡았던 겁니다. 물론 규칙에서 어긋난 행위였지요. 그런데 그게 럭비라는 새로운 게임의 바탕으로 된 거예요. 바네도는 현대예술이 규칙에 의해서(by) 놀지 않고 규칙과 더불어(with) 논다고 그리고 바로 그것이 창조적인 발상(發想)의 한 국면이라고 말합니다.”
달라이 라마는 바네도니 럭비니 하는 생소한 이름들도 그렇고, 아무튼 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어쩌면 세상에 그런 공놀이가 있다는 걸 몰랐을 수도 있다. 통역사 둡텐 징파가 조용한 음성으로 그에게 설명해주었다.
겔-만은 다방면에 호기심이 대단한 노인이었다. 2009년 그곳 밴쿠버에서도 달라이 라마와 함께 하는 공개석상에서 저명한 예술사 학자 바네도를 언급하고, 내친 김에 럭비 게임이 세상에 생겨난 비화(秘話)를 창조행위에 연결시켰던 것이다. 나는 그 저명한 물리학자를 여러 번 만났는데 그때마다 과학뿐 아니라 예술, 철학, 정치, 교육, 종교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백과사전식 지식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겔-만은 이십대로 접어들던 1950년대 중반부터 소립자 물리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969년에는 소립자 연구에 끼친 공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의 동료 가운데 하나가 그를 가리켜, 물리학자로서도 대단하지만 워낙 탁월한 두되의 소유자라서 일단 무슨 일에 손을 대면 곧장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평한 바 있다. 1980년대 초에는 몇몇 미국의 영향력 있는 과학자들을 한 지붕 아래 불러 모아 산타페 연구소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이 되었다.
럭비와 창조의 상관관계를 납득한 달라이 라마가 기대에 찬 눈으로 겔-만을 바라보았다. 그 물리학자는 심사숙고하고 나서 럭비 얘기를 꺼낸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 앞에서 창조성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었음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가 달라이 라마에게 말했다. “내가 평생 몸담아 온 이론물리학에서 과학 정설(定說)에 대한 모든 도전들이 전부 옳은 건 아닙니다. 그것들 가운데는 괴짜로 판명된 것들도 많지요. 하지만 가끔 과학 정설이 틀릴 수 있고 그래서 누군가 거기에 도전해야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요. 따돌림 당할 수도 있고 직장을 잃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때로는 누군가 반드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정설에 도전해야 한단 말이오.”
겔-만의 희고 두툼한 눈썹이 깊은 주름살에 묻혀 굼틀거렸다. 자애로운 할아버지 같은 그의 얼굴이 최소한 십년은 젊어 보였고, 넘치는 지적 생명력이 거기에서 뿜어져 나왔다.
겔-만이 생각의 열차를 계속 몰았다. “무엇에 도전하겠다는 생각이 어떻게 나올까요? 음, 그건 인간의 마음속 감춰진 장소에서 거품처럼 부글거리며 올라오지요. 거기엔 몇 가지 단계들이 있어요. 문제가 있는 사람이 그걸 풀어보려고 하는 건 당연하지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별 방법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어디 보이지 않는 데서, 마음속 깊은 데서, 해결을 위한 모색은 계속되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요리를 하거나 달리기를 하거나 아니면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다가 답이 불쑥 나오는 겁니다.”
달라이 라마가 겔-만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그 물리학자가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겔-만이 말을 이었다. “바로 그 마음속 깊은 부분이 가슴-교육의 방법을 모색하는 일에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그는 이 점에 확신이 서는 것 같지 않았다. 약간 망설이며 머뭇거리는 말투였다. 그로서는 분명하지 않은 경계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비심 탐구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인간 마음의 어떤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내 말은 예술가의 창조행위와 자비와 용서행위 사이에 무슨 연관관계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달라이 라마가 잠시 통역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팔걸이의자에 책상다리로 앉아있었는데 자세가 평상시와 좀 달랐다. 등을 굽히고 몸을 앞으로 내밀어 상대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겠다는 마음이 읽혀졌다. 자연스럽게 이마의 깊은 주름살이 돋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몸에서 에너지가 발산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며칠 동안 로스안젤리스에서 분주한 일정을 소화시키고 이곳으로 곧장 날아온 몸이었다.
달라이 라마가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는 창조성이 지능(intelligence)과 더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요. 다른 포유동물들한테도 어느 정도 창조성이 있지만 인간에 견주면 훨씬, 훨씬 덜하지요. 왜 그럴까요? 지능 때문입니다!”
달라이 라마가 손가락으로 콧등을 긁었다. 마땅한 용어를 찾느라 고심하는 눈치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창조는 새로운 것, 새로운 것을 새로 만드는 거지요. 그러니까 지능하고 연관됩니다. 자비(compassion)는… 내 생각에 자비는… 음, 그러니까 티베트어로…” 그가 말을 중단하고는 통역사에게 티베트어로 몇 마디 말했다. 통역사가 말을 옮겼다. “성하님 말씀이 자비는 가슴(heart)에 연관되어 있지만 하나의 바람(wish), 하나의 의도(intent) 형태로 저를 나타낸다고 하십니다.” 징파가 영어로 옮기는 말을 달라이 라마가 유심히 들었다. 자기 말을 제대로 옮기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영어로 말을 계속했다. “자비는 하나의 바람, 하나의 의도에 연관되지요. 하지만 그것과 창조는 다르지요. 그건 직접적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때 다른 생각이 떠올랐고 그가 다르게 접근했다. “그래요, 창조성, 거기에는 사실적인(realistic) 창조성이 있고 비사실적인(unrealistic) 창조성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비사실적인 것은 파괴적이고 사실적인 것은 좀 더 긍정적이지요. 여기 긍정적이라는 말은 당신이 뭘 원하는데, 비록 누구를 해치고 싶어 한다고 해도, 그 방식이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방법으로 당신은 좀 더 효과적일 수 있을 거예요.”
달라이 라마는 평소 삶에 있어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실적인 접근을 발전시키는 데 큰 비중을 두었다. 그는 현실을 정밀하고 단호하게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안녕과 행복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왜곡된 사유(思惟)를 해독(解毒)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적인 접근을 위하여 우리는 현실을 온전히 알아야 해요.” 달라이 라마가 말했다. “현실을 온전히 아는 데는 객관적인 자세가 근본이지요. 그런 까닭에 고요한 마음이 중요합니다. 고요한 마음에서 자비가 자라는 거예요. 자비는 우리 마음을 열고 우리에게 더 넓은 안목을 줍니다. 고요한 마음으로 당신은 현실을 더 밝게 보지요. 감정이 너무 크면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어요. 창조는 주로 지능에 연관됩니다. 자비는 따뜻한 가슴에 연관되고. 그러므로 나는 둘이 별개라고 봅니다.”
그가 잠시 말을 그쳤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정말 몰라요.”
달라이 라마가 말을 멈추고 자기 앞 낮은 테이블에 놓인 바랑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엇을 조심스레 찾기 시작했는데 쉽게 찾아지지 않는지라 시간이 좀 걸렸다.
달라이 라마 왼쪽에 앉아있던 에크하르트 톨레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명상에 잠겨 있던 상태에서 막 깨어나려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팔걸이의자에 앉아서 손을 무릎 위에 얹고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잿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라이 라마에게 말했다. “우리는 럭비의 유래를 말하는 것으로 얘기를 시작했지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여성적이기까지 했지만 말투에서는 독일식 악센트가 강하게 느껴졌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생각나는 게 있었습니다. 며칠 전 BBC 방송에서 뉴스를 듣는데요, 내가 알기로는 성하님도 그 방송 자주 들으신다지요?”
달라이 라마가 바랑 속 물건 찾는 동작을 멈추고 톨레를 향해서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방금 바랑을 뒤지던 사람이 순식간에 천진스러운 미소로 톨레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독일인과 티베트인의 첫 만남이었다. 아마도 틀림없이 달라이 라마는 톨레가 전 세계의 수백만 영적 구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몰랐을 것이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지금의 힘’과 ‘새 땅’은 둘 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였고 40여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톨레가 말을 이었다. “BBC 뉴스는 축구에 대한… 럭비가 아니라 발로 차는 축구에 대한 것이었는데 어느 조사연구팀이 페널티킥을 찰 때의 현상을 조사했답니다. 지난 20년 동안 축구 경기를 관람한 적이 없어서 잘은 모릅니다만, 들은 대로 말해보지요.” 그의 음성은 최면을 거는 사람처럼 조용하고 친절하고 그리고 무척 느렸다. 말과 말 사이 여백이 너무 길어서 듣는 사람 가운데는 답답하거나 졸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었다. “축구 경기에서 페널티킥은 공을 차는 선수뿐 아니라 관중들에게도 최고로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경기의 승패가 결정되기도 하고 때로는 전 국민이 눈에 힘을 주고 지켜보는 순간이지요.”
톨레가 한참 동안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런 엄청난 순간에…”
징파가 달라이 라마에게 축구의 페널티킥이 어떤 건지 귓속말로 설명해주었다.
톨레가 말을 계속했다. “연구팀은 심판이 휘슬을 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봤지요. 그 결과 심판의 휘슬 소리가 울리자마자 곧바로 공을 차는 선수들이 그러지 않고 3, 4, 5초쯤 기다렸다가 차는 선수들보다 성공률이 낮다는 사실이 밝혀진 겁니다.”
달라이 라마가 찾던 물건을 결국 찾아냈다. 오렌지 색 두건이었다. 그가 눈부신 조명등에서 눈을 보호하려고 그것을 깊숙이 눌러 썼다.
“욕망의 대상에 눈길이 쏠릴 때,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중할 때, 바로 그 집중과 생각이 성사를 방해하는 거예요.” 톨레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는 집중의 방향을 안으로, 깊이로, 순간으로 돌릴 수 있지요. 눈길을 안으로 돌려 집중함, 여기에 창조과정의 바탕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자기 존재의 깊은 차원에서 생동하는 고요에 접속되는 거예요. 거기가 모든 능력의 거처입니다. 우리가 그 힘에 접속될 때 ‘나’에 대한 개념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에 대한 개념들이 사라지지요.”
톨레가 눈을 감았다. 자기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고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녹색 재킷이 그의 몸에 견주어 헐렁하게 커 보였다. 나이 육십을 넘겼는데도 여전히 천진한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톨레가 달라이 라마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공을 차면 멋지게 성공할 거라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고요? 나는 이미 안으로 깊이 들어갔어요. 힘의 근원에 접속되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건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아요.” 달라이 라마가 어깨를 흔들며 쿡쿡 웃었다. “준비가 필요합니다. 어떤 일에 달인이 되려면 1만 시간은 연습해야 한다고 말콤 글래드웰이 말했지요. 1만 시간 뒤면 우리도 창조의 힘을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
보라색 타이에 검은 정장 차림의 켄 로빈슨 경(卿)이 의심쩍은 표정으로 톨레 곁에 앉아 있다가 아름답고 세련된 옥스브리지 악센트로 달라이 라마에게 말했다. “에크하르트의 저 모습을 축구 경기장에 재현시켜볼까요? 심판의 휘슬이 울리고 에크하르트는 만 시간을 기다립니다. 지금도 기다리고… 예, 아직 그는 골을 넣지 못했군요.”
별스럽지 않게 툭 던진 켄 경의 한 마디가 온 방안을 들었다 놨다. 완벽한 타이밍에 터진 유머가 순식간에 존경받는 교육자를 무대 위의 코미디언으로 만들었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대여섯 차례 그의 토크쇼를 보았는데 단 한 번도 지루한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명료함과 경쾌함과 예리한 통찰의 모범이었다. 당시 13살이던 내 딸은 그의 토크쇼를 자기 아이포드에 다운받았는데 그것은 그 아이의 음악과 비디오 수집에 포함된 유일한 강연이었다.
한바탕 웃음의 물결이 지나간 뒤에 달라이 라마가 말했다. “창조성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자연스럽게 주어진 거지요. 이 뇌에, 창조의 능력이 여기에 있는 겁니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것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삶이 안이할 때, 별로 골치 아픈 일이 없을 때, 그럴 때에는 창조성이 잠들어 있지요. 하지만 어려움이 클 때, 갈등이 심할 때, 그럴 때 우리 지능이 훨씬 잘 움직이는 겁니다. 그러나 창조성에 대한 내 지식은 아주 짧아요. 아는 게 별로 없다고요.”
그가 한숨을 내쉬며 아까 한 말을 이번에는 좀 더 힘주어 되풀이했다. “정말 난 몰라요.”
처음 이 패널을 기획할 때 나는 과연 창조성을 주제로 한 토론에 달라이 라마를 참여시키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지 의심스러웠다. 내가 알기로는 창조성이란 단어가 아예 티베트에 없다. 달라이 라마는 오직 영적 성숙과 내면의 긍정적 변화를 경험하는 데 초점을 두는 사람이다. 음악, 미술, 무용 같은 창조적 행위에는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나는 창조성에 대하여 특이한 관점을 지닌 켄 경, 겔-만, 톨레 같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물들을 대화에 초대할 수 있으면 패널을 진행해보기로 했다. 그들은 창조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을 아이들 교육 커리큘럼에 넣는 것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강조했다. 켄 로빈슨 경이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오늘날 창조성이 문학만큼이나 교육에 중요한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겁니다.”
달라이 라마는 자비에 대하여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기에 나는 그들 사이에 자연스러운 대화가 오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창조성에 관한 토론을 따라가기가 어렵다는 걸 스스로 알았고 그래서 자기 지식의 결핍을 거듭 말해야 했다. 그로서는 패널에 동참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노력이었다. 패널리스트들과 긴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그들의 대화에 별로 많은 것을 보탤 수 없었다. 창조성을 자비 속에 구두주걱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이 그에게는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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