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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강해(19) 2018. 12. 19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
삼상 11:6-11
<지난 시간 요약>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제비 뽑혔으나 취임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암몬 왕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침공합니다. 그런데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바로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희를 섬기리라”며 항복을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길르앗 야베스’ 주님들이 이러한 전의를 상실한 나약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스스로를 지킬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이웃에 있는 호전적인 암몬 족속은 날로 힘을 길러 가고 있는데, ‘길르앗 야베스’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수모를 당하는 것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언약을 요구하자 나하스는 더욱 포악하게 나갑니다.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2절)고 합니다. 나하스는 단순한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과거 입다로부터 당한 조상들의 수치를 앙갚음하겠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급해진 ‘길르앗 야베스’의 장로들은 ‘이레 동안’ 말미를 달라고 요청하면서, 이스라엘 전역에 구원을 요청해서 응답이 없으면 그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갈테니 기다려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나하스는 이처럼 7일을 기다려 줍니다. 나하스는 교만이 하늘에 뻗칩니다. 나하스는 야베스와의 국부적인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보복의 여지를 남기는 것보다 이스라엘 전체와의 싸움을 통해 완전한 승리를 거둔 후 이스라엘을 영구적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는 2절에서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는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장로들이 보낸 사자는 사울의 고향 기브아에도 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자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출된 ‘사울’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기브아를 찾아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 도시 중 기브아에도 온 것입니다.
사울은 아직 이스라엘의 왕으로 백성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기부아 주민들조차도 사울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라고 하지 않고, 그저 소리를 높여 울고만 있습니다. 그 때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백성들이 우는 것을 보고 ‘무슨 일로 우느냐’고 묻습니다. ‘마침’이란 단어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때 맞춰’ 사울이 그 사실을 인지한 것입니다. 사울이 농사일을 더 길게 했다든지, 더 일찍 내려왔다든지 하면 그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순간을 하나님이 섭리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찌되었든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는데, 그에게 왕의 권위를 세워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암몬 족속이 길르앗 야베스를 쳐들어 온 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지 하는 생각입니다.
<거룩한 분노 –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6절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하나님의 영’은 성령입니다. 나하스가 이스라엘을 모욕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고,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간적 분노나 혈기 따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에 의해 능욕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의분입니다.
이 분노는 훗날 다윗이 골리앗의 모욕을 듣고 느낀 분노와 같은 것입니다(삼상 17장).
블레셋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오자, 다윗의 형들이 전쟁에 참가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을 받아 형들에게 떡을 가져다주려고 전쟁터에 방문하게 됩니다.
이때 다윗은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조롱하는 소리를 듣습니다(창과 방패와 놋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거인 골리앗 –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 1규빗은 약 45cm이므로 거의 2m 90cm). 그러나 누구 한 사람 그에 맞서서 출전하지 못하고 수치를 당하고만 있는 판국이었습니다. 이때 마침 다윗이 골리앗의 소리를 듣고 분개하여 나섭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여호와의 구원하심은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삼상 17:45~46)
비록 아무런 무장도 갖추지 못한 목동 차림이었지만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고, 단지 지팡이와 매끄러운 돌 다섯 개(물매)를 들고 나섭니다.걱정하는 사울 왕에게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37절)하고 대답합니다.
골리앗이 다윗을 보고는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43-44절)하며 위협하자, 다윗은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45-47절)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가 보아도 승패가 뻔한 싸움같이 여겼을지 모르지만, 이 순간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다윗의 돌리던 물매가 골리앗 골리앗의 이마 한가운데에 명중하였습니다. 그리고 꼬꾸라진 골리앗에게서 칼을 빼앗아 그의 목을 잘랐습니다.
한 작은 소년의 ‘거룩한 분노’가 하나님을 움직였고, 나아가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도 거룩한 분노를 표하신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안식일 아침에 회당에 예배하려고 들어갔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손 마른 사람이 참석했습니다. 그 회당에 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날이 안식일인데 예수께서 안식일인데도 불구하고 저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시나 안 고쳐 주시나 보자하고 주시하였습니다. 만일 고쳐 주시면 안식일을 범한 죄로 고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막3:3-5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울의 행적을 보면 그가 격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이 아덴이란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였습니다. 보통 분한 것이 아니고 격분했다는 말입니다.
행17: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많은 사람들은 아덴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바울은 ‘격분’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바울이 보았던 아덴보다 더 많은 우상이 들끓고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 시대의 우상은 탐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대를 향해 거룩한 분노를 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보통 분을 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혹 분을 내는 기회가 있을지라도 오래 품지 말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약1:19). 또 바울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4:26)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사로운 분은 내지 말아야 합니다. 개인 간의 사사로운 문제라든지 혹은 어떤 감정 문제를 가지고 분노하는 것은 자제해야 합니다. 분을 내는 것에 조심해야 합니다. 분을 내어도 더디 하며, 혹은 내었다 할지라도 오래 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누가 잘못했을지라도 분을 품지 말고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의가 훼손되는 일에 대해서는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마지막 일주일,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셔서 다음날 성전이 매매하는 자들로 타락해 있는 것을 보시고 거룩한 분노를 표하셨습니다.
어떤 사회에서 불의와 죄악을 볼 때 의로운 마음이 있는 사람 가운데는 거기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사로운 분노, 개인감정이 아닙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죄악에 대한 증오로 일어나는 ‘거룩한 분노’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건강성을 체크할 때, 세상을 향한 ‘거룩한 분노’가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교회와 성들이 소위 ‘번영신앙’(繁榮信仰)의 영향으로 세상과 짝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보다는 세상에서의 번영의 성취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거룩한 분노’에 사로잡힌 사울은 자신의 소명을 자각하고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떨쳐 일어납니다.
7절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그래서 한 겨리(두 마리) 소를 취하여 각을 뜨고, 사자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경에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고 말하게 하였습니다. 사울이 군사를 모집하면서 이처럼 비단 자신뿐만 아니라 사무엘의 이름까지도 들먹인 데 대해서는,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이스라엘의 왕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며”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왔습니다. ‘여호와의 두려움’이란 여호와께서 주신 두려움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의분을 주시고, 백성에게는 사울의 말에 ‘두려움’을 주셔서 사울의 권위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는 곧 여호와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주관하고 계심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은 마음을 품고 사울을 따른 것입니다.
그 결과 모인 군사가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8절 “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의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 명이더라.”
‘베섹’은 잇사갈 지파에 속한 이스르엘 평원 안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아직 이스라엘이 남북 왕국으로 분리되지 않았는데도 이처럼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지파가 구분되어 언급된 것은 저자가 본서를 기록한 때가 솔로몬 사후, 분열 왕국 초기이기 때문입니다. 남북 분열 왕국 시대 이전에도 유다 지파와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은 지역적, 미묘한 힘의 역학적 관계 등으로 인해 자연스러운 구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러한 구분이 돌이킬 수 없는 분열 상황으로 굳어진 것이 바로 남북 왕국의 성립입니다. 당시 20세 이상의 남자 수는 601,730명이었습니다(민 26:51). 따라서 이번 모병에 모든 사람이 다 응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이스라엘이 여전히 블레셋의 위협에 대처하고 있던 준전시 상황이었음에 비추어 보면 납득이 갑니다. 일부 백성들은 블레셋의 침입에도 대비해야 했던 것입니다.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르앗 야베스’에서 온 사자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라며 돌려보냅니다.
9절 “무리가 와 있는 전령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 하라 전령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하매 그들이 기뻐하니라.”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전하라고 합니다. 이는 자신감의 표현입니다. 그 때까지는 전쟁을 끝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어를 잘 보세요. 주어가 ‘사울’이 아니고 ‘무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길르앗 야베스를 구원하기로 나선 것입니다.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과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사이가 원수관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과거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온 이스라엘이 베냐민 지파를 징벌하기 위해 군사를 모집할 때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 총회는 참석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에 군사 2,000명을 모내 응징합니다. 남자와 부인들을 다 죽이고 처녀 400명만 살려 베냐민의 남은 용사 600명에게 시집을 보냅니다(삿21:8-12).
그 당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만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공공의 적이 된 사람들입니다.
지나친 징벌이 있었기에... 이후 이스라엘과 길르앗 야베스의 관계는 적대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위기에 처한 ‘길르앗 야베스’를 위해 출전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무리가 한 때 원수 되었던 형제를 향해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선포하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입니다.
피차간에 용서와 화해의 손을 내밀고, 한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민족은 6.25 한국전쟁을 통해 남과 북이 원수처럼 살았습니다. 이제 7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통일을 꿈꿔야 할 때입니다. 용서와 화해가 있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원수로, 서로 등지며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민족 화해를 위한 일에 앞장 서야 합니다.
그래야 언젠가 통일이 되더라도 이질감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기뻐하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
구원해주러 오겠다는 말을 들은 야베스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작전을 펼칩니다. 나하스에게 전령을 보내 이렇게 말합니다.
10절 “야베스 사람들이 이에 이르되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생각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 하니라.”
이는 암몬 사람들을 속여 그들의 경계심을 풀게 하기 위하여 한 말입니다. 야베스 주민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사울의 군대가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승리를 위한 계략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무조건 항복 의사를 밝히므로 그들의 경계심을 늦추려 한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을 들은 암몬 족속은 전쟁을 치르지도 않고 야베스를 수중에 넣게 되었다고 안심하였을 것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원하다>
그 날 새벽에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암몬을 기습하여 칩니다.
11절 “이튿날 사울이 백성을 삼 대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이스라엘이 한 마음이 되어 새벽에 기습하였습니다. 긴장을 푼 채 곤히 자고 있던 암몬 군은 크게 패하여 도망칩니다. 약속대로 날이 더울 때에 완전한 승리를 거둡니다. 이후 암몬 족속은 계속 사울에게 패하여(삼상 14:47)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있다가 다윗 시대에야 다시금 언급되기 시작합니다(삼하 10장).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단순한 전쟁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울이 왕이 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민족이 하나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동안 산산이 흩어져 서로 반목하며 살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성령에 감동된 사울의 모이라는 외침에 이스라엘 전역에서 30만 명이 구름같이 몰려왔으며, 유다지파에서는 3만 명이 “한 사람 같이”(7절) 달려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 그 동안 고생하며 살았습니다.
약소국의 설움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리저리 갈라지고 패거리지고 나눠지고, 하나 되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지고, 지역으로 갈라지고, 심지어 교회마저도 이리저리 갈라져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교파도 갈라지고, 연합 모임도 갈라지고, 개 교회도 분쟁 중에 있는 교회가 많습니다. 이런 문제에 ‘의분’을 품을 때입니다.
이래서야 어찌 사단의 세력과 싸울 수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기도할 때마다, 성령님이 감동하셔서 우리 민족이 하나 되도록, 한국 교회가 하나 되도록, 우리 교회가 하나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의 교만한 세력, 마귀의 세력과 능히 대적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굳건히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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