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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海金氏族譜序
김해김씨족보서(판도판서 첨검파)
原本; 1822년간 版圖判書公添劍派譜
解釋 : 2005. 10. 13. 金順大
寅會以降生齒日繁於是聖人作立宗以攝之錫姓以別之若堯之親九族周之叙入統者莫不以親親尊尊爲先
마음을 같이하는 동료들이 모여 내려와 그 백성(生齒)들이 나날이 번성하여, 이에 이 성인이 종족을 만들어 세우고 성씨를 주어서 먼 사람들과 구별되게 하고, 친척과 9족[1]간에 두루 순서를 매기고 통합하게 하여 친척들이 가깝게 되고 조상을 존중하게 되지 않은 것이 없다.
[1]9족; 고조부터 현손까지
噫故家世族必有文獻而纂次世系著爲姓譜者何歟
아! 그래서 가정과 벼슬아치의 집안(世族)에는 반드시 문헌이 있어야 하고 이를 모아 세계(世系)를 이어서 기록하게 되면 성보(姓譜, 보첩)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夫子之子爲孫之孫爲玄孫其始則爲一人之身而分而至於塗人則有族者不可以無譜而譜之作追本源辨昭穆有以長孝悌之風廣惇愛之情而收族厚風俗須是明譜牒而
무릇 아들의 아들은 손자가 되고 그 손자는 현손이 되니 그 시작은 한 사람의 몸에서 나뉘어졌으나 길가는 사람들처럼 서로 모르는 사이로 되어 버리니 종족이 있는 사람은 보첩이 없으면 안된다. 보첩을 만드는 것은 본래의 근원을 돌이켜 보고 소목(昭穆)을 분명히 하여 효도와 우애의 풍습을 오래 보존하고 돈독한 사랑의 감정을 넓히니, 종족을 모으고 풍속을 도탑게 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보첩을 분명히 해야 한다.
已我東之有金氏始自新羅駕洛國王漢光武十八年建國於駕洛卽今之嶺南金海府也 生民厥初蓋有紫繩金榼之說石塔綾袴之稱而事近靈異時造草昧則天降首出之聖旣作之君又立厥配而東方之金氏本原於此矣
오래전부터 우리 동방에 김씨가 있었으니, 신라시기의 가락국왕으로부터 시작하여 한나라 광무 18년에 가락에 나라를 세우니, 가락은 지금 영남의 김해부이다. 백성들에게 처음에 자승금합(紫繩金榼)의 유래와 <파사>석탑과 비단바지(綾袴)에 대한 말들이 있었으나, 이 일들은 신령스럽고 기이한 말에 가깝고 천지가 처음 생길 때 만들어졌으니, 즉 하늘로부터 내려와 먼저 나온 이가 성스러움으로 인하여 임금으로 되고 또 부인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며, 동방의 김씨의 본래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金庾信碑有曰軒轅之裔少昊之胤其始祖首露新羅同姓三國史曰新羅之祖少昊金天氏之侯故姓金氏首露之姓金氏於此可攷而金榼剖殼之說無柰齋諧尙誕之風歟
김유신의 비문에 써 있기를 헌원의 후손이며 소호의 핏줄이라고 하며, 그의 시조인 수로는 신라와 같은 성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서 말하기를 신라의 조상은 소호김천씨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씨로 하였다 하니 수로의 성씨인 김씨는 이것과 비교하여 고증할 만하다. 금합이 쪼개져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믿을 수 없으며 그의 탄생을 숭고하게 하기위한 풍속에 어울리는 말이다.
其後有諱添劍官版圖判書有諱澤爲本朝禮賓少尹遂爲吾東大姓
그 후 휘첨검(添劍)이 있었으니 벼슬은 판도판서를 지내었고 휘택(澤)은 우리 조선에서 예빈소윤이 되어 마침내 우리 동방의 대성이 되었다.
噫積善厚仁降至雲仍心適堂司藝公諱履祥孝友之出于天性文章之著在當世備悉於故進善尹東源所撰墓碣一門三綱揭於棹楔至今赫赫照人耳目
아! 선을 쌓고 두터운 인정이 후손들에 전해졌으니 심적당 사예공 휘이상(履祥,1498~1576)은 효도와 우애가 뛰어났고 천성과 문장이 두드러져 당시의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구비하여, 이에 진선[1]을 지낸 윤동원[2]이 찬한 묘갈에 한 가문의 삼강(三綱)의 모범(棹楔)으로서 기재되어 있으니 지금에도 밝게 빛나 여러 사람의 이목을 비추고 있다.
[1]진선(進善); 조선 시대에, 세자 시강원에 속하여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정사품 벼슬.
[2]윤동원(尹東源, 1685~174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사정(士正), 호는 일암(一庵). 1722년(경종 2)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사헌부지평·한산군수·홍주목사·사복시정 등을 역임하였다.
司藝公有子諱鍊光世所傳松巖先生是也 公年二十六生進俱中後六年成文科十典州郡而當島夷猖獗之秋公以准陽府使與萊伯宋象賢及副元帥劉克良效命于松京名聞天下聲施後世
사예공(휘이상)에게 아들인 휘연광(鍊光,1524~1592)이 있었으니 세상에 전하는 송암선생이 이 분이다. 공의 나이 26(1549년)세에 생원과 진사가 되고 그 6년 후(155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에 섬나라(일본)의 오랑캐가 창궐하여 공은 회양부사(1592년)로서 동래부사 송상현과 부원수 류극양과 함께 목숨을 바치고 개성(松京)으로 옮겨지니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고 명성이 후세에 까지 퍼졌다.
鳴呼偉哉杲卿之舌猶存原軫之面知生而牛溪成先生渾請褒贈義死者其後轉聞于 天朝而竟贈公小宗伯一都之章甫立祠於圃隱鄭文忠公廟傍謂之崇節祠
아! 위대하도다. 고관대작의 말조차도 슬퍼하는 얼굴로 가엾게 여겼으니, 우계 성혼이 의롭게 죽은 연광에게 상줄 것을 청하였고, 그 후 중국에 까지 이 일이 알려지게 되었다. 마침내 공을 예조참판(小宗伯)에 봉하고, 포은 정문충공(정몽주)의 사당 옆에 사당을 세웠으니 숭절사라 한다.
肅廟甲戌賜額諭祭 英廟庚申 正廟癸卯一體致祭而春秋蘋藻之薦歲時牲幣之禮至今不替觀於玄石朴相國世采所撰碣銘則公之義膽忠肝直節危忠炳靑簡而益耀與白日而爭輝矣
숙종 갑술년(1694)에 액호(숭절사란 명칭)을 내리고 제사를 지냈으며, 영조 경신년(1740)과 정조 계묘년(1783)에 임금이 신하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봄과 가을에 빈조[1]의 제물을 드리고 설에는 생폐[2]의 예를 올렸으며 지금도 변함이 없다. 현석 박세채가 찬한 묘갈명을 보면 공(휘연광)의 의로운 마음(義膽)과 충성스런 마음(忠肝)과 곧은 절개(直節)는 아주 엄하였으며, 충성은 대쪽같이 더욱 빛나서 맑은 날과 그 빛남을 다툰다.
[1]빈조(蘋藻); 물 위에 떠 있는 풀과 물속에 잠겨 있는 풀.
[2]생폐(牲幣); 희생(犧牲)과 폐백(幣帛)
噫金海之金氏派源旣久而逮至我 朝名公魁人磊落相望貞忠卓節前後相承儼然爲一大名家則亶由其祖先積德種善培壅蓄厚鴻祥濬慶靈長不竭廣派穹宗蕃衍且熾而譜系之不可不作若是矣
아! 김해김씨는 파의 근원이 이미 오래되어 지금에 이르러 우리 조선에서 이름난 벼슬아치와 뛰어난 사람들이 많아져서 서로 우러러 보고, 절개가 곧고 충성스러우며 높은 지조와 절개가 앞뒤로 서로 이어져 엄연한 일대 명가가 되었다. 진실로 그 선조로부터 유래하여 덕을 쌓고 선을 행하며 이를 배양하고 길러서 도탑고 번성하게 되어 복록이 깊어지고 경사와 신령스러움이 오래도록 마르지 않았다. 큰 파(派)가 널리 퍼지고 종족이 번창하였으며 또한 성하게 되었으니 보계를 이와 같이 만들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子程子曰譜牒明然後尊祖之義親族之道由此而出此譜牒之所以重且大也
정자가 말하기를 보첩을 분명히 한 후에 조상을 존경하는 도리와 종친간에 화목하게 되는 길은 이것에 연유한다고 하였으니 이 보첩을 펴내는 이유는 아주 중요하다.
若使後世子孫欲知同出於一人而考其代數講其族派篤其親宗之義申其敬祖之道無以世汲之漸下親屬之稍遠愛弛敎衰則修譜之誼可以見矣
만일 후세의 자손들이 한 사람에게서 나와서 서로가 동족임을 알고자 한다면, 그 대수를 고려하고 그 종족의 파를 알아야 한다. 종친간에 친함의 도리를 돈독하게 하고 조상을 공경하는 도리를 펴면, 세상일이 분주하여 점점 아래로 내려갈수록 친족이 점점 멀어져 사랑이 느슨해지고 가르침이 쇠퇴되는 일은 없다. 즉 수보의 타당성은 이로서 볼 수 있다.
宗法之講明莫如譜派之修纂也宗族之敦睦亦莫如譜事之釐輯也有族之不可而無譜也其以是夫
종친의 법도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파보를 만드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 종족의 돈목도 역시 보첩을 고쳐서 합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종족이 있으면 보첩이 없어서는 안되니 그것이 바로 이것이다.
崇禎後四壬午中秋上浣 開城府留守吳翰源序
숭정후 4임오(1822년) 중추(8월) 상순 개성부 유수 오한원(1750~?) 서
凡例
범례
一 惟我金氏肇自駕洛國王迄今累千百載世代久遠文獻莫徵世系中逸未知其係於何葉故謹取東史所載駕洛王遠孫高麗版圖判書諱添劍寔爲我中祖自此始爲載錄以爲派譜焉
생각해 보면 우리 김씨는 가락국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수천 백년 을 이어와 세대가 오래되고 문헌이 부족하여 세계(世系)의 중간이 없어져서 후손(葉)들의 관계를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삼가 우리 역사책에 실려 있는 내용을 취하여 가락왕의 먼 후손이며 고려 때 판도판서를 지낸 휘첨검을 우리 중조로 삼아 이로부터 시작하여 기록하고 파보로 삼는다.
一 始祖駕洛國王靈異事蹟十代王世孫依勝覽及舊譜所載備錄以冠編首焉
시조이신 가락국왕의 영험하고 기이한 사적과 10대 왕세손은 여지승람과 구보에 실린 자료에 의거하여 첫머리의 수편에 기록한다.
一 少尹公以下代數中缺雖未詳知然世傳之語少尹公之守溫陽也 作詩揭板知松巖公又守溫陽追續其詩而七代孫某謹次云以此推之則自少尹公至校尉公諱守連 似逸四世故姑書代數以俟後考
소윤공(휘택)이하의 대수는 중간이 빠져있어[1] 비록 상세히 알지 못하나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는 소윤공은 온양군수를 지냈다고 한다. 시문을 적은 현판에서 송암공(휘연광)을 알 수 있으며 또 온양군수를 추모하고 있다. 그 시를 7대손인 누군가가 삼가 계속해서 이를 받들어 말하되 즉 소윤공으로부터 교위공 휘 수련까지는 거의 4세정도로 잠깐(姑?)이니 책에서의 대수는 이후에 고증하라.
[1]1916년 병진보에서 3세 성집(聲集) 4세 령(鈴) 5세 사필(士珌) 6세 응려(應呂)로 고증되었음이 확인됨.
一 駕洛王後裔十四派雖未知分於何葉均是同源之親故各派諱某子孫居地詳載以爲後考之資
가락왕의 후예인 14개파는 비록 어떤 후손에서 나누어 졌는지 알지 못하나 근원이 같은 친족이니 각 파의 휘와 그 자손이 살고 있는 세거지를 상세히 기록하였으니 이후에 고증할 자료로 삼으라.
一 心適堂孝行學業爲一鄕之所景仰松巖公精忠大節照人耳目至於奏聞天朝 列聖祖崇褒之典靡不用極爲子孫者豈不感激罔極哉前後顚末詳細備載俾後裔感祝天恩焉
심적당(휘이상)의 효행과 학업은 한 고을에서 우러러 보고 있고, 송암공(휘연광)의 정성스런 충성과 큰 절개는 세인의 이목을 비추고 있으며 중국의 조정에 까지 아뢰어 졌다. 여러 임금(列聖朝)들이 숭모하여 지낸 제사는 쓰러지고 소용이 없어진다면 자손된 자로서 어찌 망극한 느낌을 갖지 않겠는가. 전후의 전말을 상세히 기록하고 이에 더하여 후손들이 하늘의 은혜에 감사하고 느끼도록 하였다.
一 一室三綱古今罕有心適堂兄弟孝子旌閭松巖公忠臣旌閭及松巖公夫人崔氏妾宋氏旌閭之門所在地名亦爲祥錄焉
한 집에서의 3강이 나온 것은 예나 지금이나 드물다. 심적당의 형제들은 효자로서 정려가 세워졌고, 송암공은 충신으로서 정려가 있고, 또 송암공 부인인 최씨와 첩인 송씨의 정려문도 그것이 있는 위치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一 金海金氏子孫蕃衍勢難同譜自我中祖版圖判書公以下敢爲系派而子孫散居各邑者不能一一修單昭穆嫡支依舊譜備錄以俟合譜之計焉
김해김씨의 자손은 아주 번성하여 같은 보첩에 기록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의 중조이신 판도판서공 으로부터 그 이하도 감히 계파로 나누어져 자손들이 전국각처에 살고 있으므로 일일이 단자를 <전부>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목에서 종손과 지손으로 나눈 것은 구보에 의거하여 기록하였으니 이는 이후에 보첩을 합치려는 계획에서 이다.
一 每代名諱左傍備錄字號科職贈褒生卒墓地坐向次書配位姓貫父諱生卒合葬異葬前後配各擧幾男女若有誌碣則亦書之以備後考
각 대수의 이름과 휘의 왼편에는 자(字)와 호, 과거종류, 관직, 증직, 포장, 생졸, 묘지, 좌향을 쓰고, 다음에 배위(부인)의 성씨와 관향, 부친의 휘, 생졸, 합장, 이장(묘지를 따로 씀)내용을 쓰고 전후배는 각각 몇남 몇녀를 낳았는지를 썼다. 만일 묘지(墓誌)와 묘갈(墓碣)이 있으면 이것도 기록하여 후에 참고가 되도록 하였다.
一 本宗則鼻祖之外皆不書姓以明一本之意外姓則雖女婿之子亦復書姓所以別異姓而不使混於本宗焉
본종, 즉 조상이외에는 모두 성씨를 쓰지 않았다. 이는 근본은 하나라는 것을 분명히 하려는 뜻이다. 다른 성씨 즉 사위의 아들들은 중복해서 성씨를 써서 서로 다른 성씨임을 구별하고 본종과 혼동되지 않도록 하였다.
一 出繼爲人後者於所后下書以系子某仍錄傍註於生派行只書名名下書以出系以明繼統之義
출계하여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사람은 양자로 들어간 곳에 이름을 써서 누구의 계자가 되었다는 것을 쓰고 거듭하여 방주를 달았고, 태어난 곳에는 다만 이름만 쓰고 이름 밑에는 출계라 써서 계통을 잇는 도리를 분명히 하였다.
一 庶出男女雖年長必書嫡男女之下以別嫡庶之分庶子承嫡則書於嫡女之上者重嫡統也
첩의 자식인 남여는 비록 나이가 많더라도 반드시 본 부인의 남여 다음에 기록하여 적서를 구별하였다. 서자가 적자를 계승하면 적녀의 앞에 써서 적통을 중시하였다.
一 男女不分長幼以先男後女書之者重本宗也
남여는 나이를 구분하지 않고 남자를 먼저 쓰고 여자를 뒤에 쓴 것은 본종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一 女婿則書姓名科職某貫父名而只書外孫而己
사위는 성명과 과거종류와 관직과 관향과 부모의 이름을 쓰고 자손은 단지 외손만 썼다.
一 每張上頭前隅一從千字文次第塡字以便考閱
각 장의 상단의 귀퉁이에는 천자문에 따라서 순서대로 글자를 달아 열람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一 同宗之散居他邑者居址墓所地名詳細備載使疏遠後屬各知相訪之道也
동종으로서 전국각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세거지와 묘소의 지명을 상세히 기록하여 사이가 먼 후손들이 서로를 알고 방문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