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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璿源世系(선원세계)및 上系(상계),正德舊譜(정덕구보)
원문 ; 1960년 경자보
해석 ; 2005. 11. 25. 金順大
◎璿源世系(왕의 집안에 대한 세대의 계통)
始祖皇太王(시조황태왕)
姓金諱首露東漢光武皇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三日誕降于龜旨峰是月十五日卽位于金官城
성은 김이고 휘는 수로이다. 동한의 광무황제 때의 건무 18년 임인(42)년 3월3일 하늘로부터 구지봉으로 내려와 이달 15일에 금관성에서 즉위하여,
國號大駕洛治臻淳厖四方來則之馬韓五十四國皆來朝賀尊王爲太王
국호를 대가락이라하고 온화하고 도탑게 다스리니, 사방에서 찾아오게 되고 마한의 54개국이 전부 찾아와, 왕이 태왕으로 된 것을 축하하였다.
元君漢獻帝建安四年新羅奈解王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薨在位百二十年太王位三十八年春秋百五十八歲
그전 임금(수로왕)이 한나라 헌제 건안 4년이며 신라 내해왕(10대 내해이사금) 4년 기묘(199)년 3월 23일 돌아가시니 왕위로는 120년, 태왕으로는 38년을 재위하였으며 나이는 158세였다.
葬于納陵在金海府西三百步許龜旨峯南子坐
납릉에 장사지냈는데 지금의 김해부 서쪽 300보 쯤에 있는 구지봉의 남쪽 자좌이다.
新羅文武王辛酉 命修二陵致祭納位田三十頃以續祀事
신라 문무왕이 신유년(661)에 두 릉(수로왕릉과 왕후릉)의 보수와 치제를 명하고 밭 30경을 주어 제사지내는 일을 계속하게 하였다.
○高麗文宗壬寅 命知金州使金良鎰撰碑銘今無
○고려 문종(1046~1083) 임인(1062)년에 지금주사 김양일에게 명하여 능의 비명을 찬술하게 하였으나 지금은 없다.
李朝 成宗庚子府儒建會老堂于陵東南奠香火後孫馹孫有記
이조[1] 성종 경자년(1480) 김해부의 유림에서 능의 동남쪽에 회로당을 짓고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후손인 일손의 기록에 나와있다.
[1]이조라는 명칭은 조선이 일본에 강점되었을 때, 일본이 붙인 명칭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일개 이씨들의 한 개인의 왕국으로 비하시켜 부른 명칭입니다.
○仁祖丙戌道伯許積 竪碑撰銘 ○英宗甲午致祭 ○正宗壬子致祭置陵監春秋降香祝 ○高宗戊寅命建殿宇設齋舍置寢郞賜殿號崇善殿竪神道碑後孫吏曹判書許傳撰外裔吏曹參判趙濟華書後裔崇善參奉金顯㴤篆
○인조 병술(1646)년 도백(관찰사)인 허적이 비를 세우고 비명을 찬하였다. ○영조 갑오(1774)년 치제하였다. ○정조 임자(1792)년 치제하고 능감을 두었으며, 봄과 가을에 항축을 내려주었다. ○고종 무인(1878)년에 전(숭선전)과 재실을 건축하게 명하고 침랑을 두었으며 숭선전이라는 액호를 내렸다. 또한 신도비를 세우고 후손인 이조판서 허전이 비문을 찬하고, 외손의 후예인 이조참판 조제화가 글을 쓰고 후손인 숭선전 참봉 김현주가 제목을 썼다.
普州太后諱皇玉姓許氏阿隃陀國公主漢光武九年癸巳誕降駕洛開國七年戊申秋七月七日乘石舟載石塔而至駕洛王親迎爲爲后漢延熹壬寅封普州皇太后
보주 태후의 휘는 황옥이고 성은 허씨로서 아유타국의 공주이다. 한나라 광무황제 9년 계사(33)년에 탄생하시어, 가락국이 개국한 지 7년째인 무신(48)년 가을 7월7일 돌로 만든 배를 타고, 석탑을 싣고 가락에 당도하였다. <수로>왕이 친히 영접하여 왕후로 삼고 연희 임인(162)년 보주황태후로 봉하였다.
誕生十男長太子二子從后姓賜許氏七子厭世上昇在后位百十五年在太后位二十八年東漢靈帝中平六年己巳三月朔日薨春秋一百五十七歲 葬龜旨峯東子坐
태후는 10남을 낳았다. 장남은 태자가 되고 두 아들은 왕후의 성을 따라 허씨를 내렸으며, 7명의 아들은 세상을 싫어하여 하늘로 올라갔다. 왕후로 있은 지 115년이고 태후로 있은 지 28년인 동한의 영제 중평 6년 기사(189)년 3월 1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157세였고 구지봉의 동쪽 자좌에 장사지냈다.
○高宗戊寅合享于崇善殿如舊禮大祭每年三月十五日九月十五日奉行
고종 무인(1878)년 숭선전에서 <수로왕과>같이 제사를 지내며, 옛날의 예법에 따라 성대한 제사를 매년 3월15일과 9월15일에 받들어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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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世
道王(도왕)
太王長子諱居登東漢建安四年己卯卽位蜀漢延熹十六年癸酉秋九月薨在位五十四年 ○陵在都西野麓
后諱慕貞父泉府卿申輔東史云申輔妻太后東來時媵臣
태왕의 장남으로서 휘는 거등이고 동한의 헌제 건안 4년 기묘(199)년에 즉위하여, 촉한의 연희 16년 계유(253)년 가을 9월에 돌아가시니 왕위는 54년이었다.
○능은 도(김해)의 서쪽 들 기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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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女永安公主(영안공주)
諱玉環下嫁于太師裵烈文文昭公花原君之子
휘는 옥환이고 태사인 배열문에게 시집갔다. 문소공은 화원군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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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女新羅昔太子妃(신라석태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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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世
成王(성왕)
道王子諱麻品延熹癸酉卽位晉元康元年辛亥二月薨在位三十八年陵無傳
后諱好仇宗正監趙匡孫 ○趙匡妻名慕良亦太后來時侍從臣
도왕의 아들로서 휘는 마품이다. 연희 계유(253)년에 즉위하여 진나라 원경 원년 신해(291)년 2월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38년간이었으며 능은 전해지지 않는다.
왕후의 휘는 호구로서 종정감 조광의 손녀이다. ○조광의 부인의 이름은 모량으로 역시 <허>태후의 몸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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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世
德王(덕왕)
成王子諱居叱彌元康辛亥卽位晉永和二年丙午秋七月薨 在位五十六年
后諱阿志阿干我躬孫
성왕의 아들이며 휘는 거질미이다. 원강 신해(291)년에 즉위하여, 동진의 영화 2년 병오(346)년 가을 7월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56년간이었다.
왕후의 휘는 아지이며 아간을 지낸 아궁의 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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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世
明王(명왕)
德王子諱伊尸品一云伊麻永和二年丙午卽位晉義熙三年丁未薨在位六十二年
后諱眞信父司農卿克忠 ○二陵在金海陵洞云
덕왕의 아들로 휘는 이시품이나 또는 이마라고도 한다. 영화 2년 병오(346)년에 즉위하여 동진의 의희 3년 정미(407)년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62년간이었다.
왕후의 휘는 진신으로 사농경 극충의 따님이다. ○두 능은 김해의 능동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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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世
神王(신왕)
明王子諱坐知王一云金叱義熙丁未卽位宋永初二年辛酉夏五月薨 在位十五年
后諱福壽父大阿干道寧
명왕의 아들로 휘는 좌지왕이나 또는 김질이라고 한다. 의희 정미(407)년에 즉위하여 송나라 영초 2년 신유(421)년 여름 5월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15년간이었다.
왕후의 휘는 복수이며 대아간을 지낸 도녕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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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世
惠王(혜왕)
神王子諱吹希永初辛酉卽位元嘉二十八年辛卯春二月薨在位三十一年
后諱仁德父角干進思
신왕의 아들이며 휘는 취희이다. 영초 신유(421)년에 즉위하여 원가 28년 신묘(451)년 봄 2월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31년간이었다.
왕후의 휘는 인덕이며 각간을 지낸 진사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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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世
莊王(장왕)
惠王子諱銍知元嘉辛卯卽位齋永明十年壬申薨在位四十二年
后諱邦媛父沙干金相
혜왕의 아들이며 휘는 질지이다. 원가 신묘(451)년에 즉위하여 재나라 영명10년 임신(492)년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42년이었다.
왕후의 휘는 방원이며 사간을 지낸 김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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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世
肅王(숙왕)
莊王子諱鉗知永明壬申卽位梁普通二年辛丑薨在位三十年
后諱淑父角干出忠
장왕의 아들이며 휘는 겸지이다. 영명 임신(492)년에 즉위하여 양나라 보통 2년 신축(521)년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30년간이었다.
왕후의 휘는 숙으로 각간을 지낸 출충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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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世
讓王(양왕) <子 世宗, 武力, 武得>
肅王子諱仇衡普通四年辛丑卽位梁中大通四年新羅法興王十九年壬子讓位于新羅移御于方丈山太王宮駕洛歷年凡四百九十一年新羅眞興王十八年丁丑薨春秋六十九歲 陵在知品川王山東庚坐今山淸郡今西面花溪里累石爲邱四面皆七級階世久失傳 本朝正宗戊午久旱鄕儒閔景元等禱雨雨遂至寺僧益神之發其秘函王與后之影幀及弓劍示之於是陵始顯自營邑轉報京司
숙왕의 아들로 휘는 구형이다. 보통 4년 신축(521)년에[1] 즉위하여 양나라 중대통 4년 신라 법흥왕 19년 임자(532)년에 신라에 나라를 주고 방장산의 태왕궁으로 갔다. 가락은 491년을 지내왔다. 신라 진흥왕 18년 정축(557)년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69세였다. 능은 지품천의 왕산 동쪽 경좌에 있으니 지금의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이다. 돌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4면은 7층 계단으로 되어 있다. 세대가 오래되어 잃어버리고 있다가 본 조선 정종 무오(1798)년에 오랫동안의 가뭄에 고을의 유학자 민경원 등이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자 비가 마침내 내리게 되었다. 그 절의 중이 비밀로 간직한 상자를 꺼내어 보여 주었는데, 왕과 왕후의 영정과 활과 칼이 있어서 이로서 능이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고, 감영에서 서울에 보고하였다.
純祖癸亥刱建陵寢後以水患移建于花溪之上判書趙鎭寬撰三王祠碑銘判書李秉鼎撰畵像贊 ○大祭每年三月上丁日八月上丁日奉行
后諱桂花父分叱水伊叱合享于讓王廟丁
순조 계해(1803)년에 능침을 창건하였으나 물난리로 인하여 화계의 위쪽으로 이전하였다. 판서 조진관이 삼왕사의 비명을 찬하고, 판서 이병정이 화상에 대해서 찬술하였다. ○대제는 매년 3월의 네 번째 날과 8월의 네 번째 날에 받들어 지내고 있다.
왕후의 휘는 계화이고 분질수이질의 따님이며 양왕의 사당에서 같이 제사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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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肅王> 子 脫知(탈지)
一云爾叱今一云仇亥讓王讓位于弟仇亥仇亥遜于新羅云
또는 이질금, 또는 구해라고도 한다. 양왕이 동생인 구해에게 왕위를 물러주었고, 구해가 신라에 나라를 양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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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系(상계)
十一世
<讓王> 子 世宗(세종) <子率友>
一云武宗新羅智證王辛卯生 眞興王十五年甲戌築月峰眞智王丁酉百濟來侵西鄙公以伊湌擊破於一善郡斬獲三千七百餘級封金官君官角干 墓在太和城下 今蔚山有碑失傳 ○配位未詳
또는 무종이라고도 하고 신라 지증왕 신묘(511)년에 태어났다. 진흥왕 15년 갑술(554)년에 월봉(月峰)을 쌓고 진지왕 정유(577)년에 백제가 서쪽변방에 침입해 들어오자 공이 이찬으로서 일선군(一善郡)에서 격파하여 3천7백여명의 목을 베고 금관군에 봉해졌다. 관직은 각간이었다. 묘소는 태화성 아래에 있으니 지금의 울산이다. 묘비가 있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부인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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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讓王> 子 武力(무력) <子舒玄>
讓王第二男新羅法興王戊戌生眞興王十四年癸酉新羅取百濟東北備置新州道公以阿湌爲君主
양왕의 제 2남으로 신라 법흥왕 무술(518)년에 태어났다. 진흥왕 14년 계유(553)년 신라가 백제의 동북방을 빼앗아 신주도를 설치하자 공이 아찬으로서 군주가 되었다.
○十五年甲戌百濟聖王親率步騎來攻管山城今沃川君主角干于德匝判耽知等逆戰失利公領新州兵赴之俘其王斬佐平四人及士卒二萬九千六百人匹馬無反者
○15년 갑술(554)년에 백제 성왕이 친히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지금의 옥천인 관산성을 공격해 오자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잡판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공(휘무력)이 신주(新州)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싸워 그 왕을 죽이고, 좌평(佐平) 네 명과 군사 2만 9천6백 명을 목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又聞百濟王子亦率濟倭兵深入新羅界公以南攻大元帥進至梁州東界月峰今蔚山隱月祠後山築輪山轎山城及波斯城骨浦漆浦甘文草八等諸軍皆來降二十二年辛巳以匝干扈駕至火旺山竪碑勒銘在今昌寧萬玉亭 ○眞平王元年己亥十月十六日薨春秋六十二 官止角干享蔚山隱月祠每年九月十五日設壇奉祀
또 듣기로는 백제왕자가 역시 백제와 왜병을 이끌고 신라의 국경 깊이 쳐들어 왔으나 공(휘무력)이 대원사(大元帥)의 남쪽을 공격하여 양주의 동쪽 경계인 월봉까지 진격하여 이르렀다. 지금 울산의 은월사 뒷산에 륜산과 교산성 및 파사성을 구축하니, 골포/칠포/감문/초팔 등 여러 군사가 모두 항복하여 왔다. 22년 신사(561)년에 잡간으로서 임금의 가마를 호위하여 화왕산에 이르러 비를 세우고 글을 새기니 지금 창녕의 만옥정에 남아 있다. ○진평왕 원년 기해(579)년 10월 16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62세였고 관직은 각간까지 지냈다. 울산 은월사에서 매년 9월15일에 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린다.
配夫人朴氏 法興王妃巴刀夫人弟 ○墓鷲山下癸坐合封俱石物賜牌地建鷲山寺守護今梁山通度寺後山時享每年十月十五日
부인은 박씨로서 법흥왕비 파도부인의 동생이다. ○묘소는 취산아래 계좌로서 합장하고 석물을 갖추고 패지를 내렸으며 취산사를 세워 수호하고 있다. 지금의 양산 통도사 뒷산이며 매년 10월15일에 제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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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讓王> 子 武得(무득)
官角干號義卿封金寧君伐首若西州漢山州享觀晶洞伯仲祠故云三忠公
配金氏父伊湌改物
관직은 각간을 지냈고 호는 의경이며 금녕군에 봉해졌다. 서주와 한산주를 정벌하였고 관정동에 제사를 모시니 백형(세종=무종), 중형(무력)과 같이 제사를 지낸다는 이유로 삼충공이라고 한다.
부인은 김씨로서 이찬 개물의 따님이다.
十二世
<世宗> 子 率友(솔우)
一云率支
配鷄林金氏
솔지라고도 한다. 부인은 계림(경주) 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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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力> 子 舒玄(서현)<子 庾信, 欽純, 寶姬, 女新羅文明王后>
一云庶云或曰道衍新羅眞興王甲申生新羅角干大梁州都督按撫諸軍事 ○伐任羅伽倻萬弩國封萬弩郡太守 ○眞平王五十一年己丑以蘇判與角干金龍春波珍湌白龍等攻高句麗娘臂城今淸州娘子城公之子庾信奮擊遂拔之忌九月九日配享于蔚山隱月祠
配月城金氏萬明夫人新羅宗室肅訖宗女眞興王姪女忌十一月十一日 墓鷲山下癸坐合封今梁山北亭山 ○影閣在梁山新基里兩位影幀同奉安卽羅代都督府址每年三月三日及九月九日奉享焉
또는 서운이라고도 하고 도연이라고도 한다. 신라 진흥왕 갑신(564)년에 태어나, 신라각간/대양주도독/안무제군사를 지냈다. ○임라가야를 정벌하니 만로국에서 만로군의 태수로 봉했다, ○진평왕 51년 기축(629)년에 소판이 되어 각간 김용춘(태종 무열왕의 부친), 파진찬 백룡 등과 같이 지금의 청주 낭자성인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하니[1] 공의 아들인 유신이 적의 장수를 베고 공격하는데 앞장섰다고 한다. 기일은 9월9일이고 부인과 같이 울산의 은월동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다. 부인은 월성김씨로서 만명공주이고 신라종실인 숙흘종의 따님으로 진흥왕의 질녀(조카)이며 기일은 11월11일이다. 묘소는 취산 아래의 계좌에 합봉하였으니 지금의 양산 북정산이다. ○영정을 모신 각이 양산 신기리에 있으며, 부부 두 사람의 영정이 같이 봉안되어 있는데, 양산 신기리는 신라시대에 도독부 터이다. 매년 3월3일과 9월9일에 제사를 드리고 있다.
[2]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편
五十一年秋八月王遣大將軍龍春舒玄副將軍庾信侵高句麗娘臂城
51년(629)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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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世
<舒玄> 子 庾信(유신) <子 三光,元述,元貞,長珥,元望, 軍勝>
都督公爲萬弩郡太守甲寅歲庚辰夜夢焱惑鎭二星下降己夫人亦夢見童子衣金甲乘雲入室尋有娠二十月而生卽眞平王十七年乙卯也 背有七星文郡有胎靈山卽藏胎處後號吉詳山
도독공(휘서현)이 만로군[1] 태수로 있을 때인 갑인(594)년 경진일 밤에 꿈을 꾸니 염혹성과 진성 두 별이 내려왔다. 모친도 역시 꿈에서 어린아이가 쇠로 만든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임신한지 20개월만에 아이를 낳으니 진평왕 17년 을묘(595)년이었다. 등에는 7개의 별 그림이 있었다. 군(만로군)에 태령산이 있으니 즉 태를 묻은 곳으로서 후에 길상산이라 이름 붙였다.
[1]萬弩郡; 지금의 충북 진천
父公曰吾以庚辰日有吉夢得此兒 宜爲名 然禮不以日月爲名 庚與庾字相似 辰與信 聲相近 遂命名庾信
도독공(휘서현)이 말하기를 ‘내가 경진일에 길한 꿈을 꾸어서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마땅히 이를 이름으로 해야 하나, 예기에 따르면 날짜를 이름으로 할 수 없으니, 경(庚)은 유(庾)자와 비슷하고 신(辰)은 신(信)과 음이 거의 같다’ 고 하니 결국 이름이 유신(庾信)이 되었다.
公幼有大志年十五爲花郞號龍華香徒及壯佐新羅太宗武列王七年庚申滅百濟陞大角干 文武王五年乙丑唐高宗賜奉常正卿三十六道將大司馬大元帥金銀紫光祿大夫兵部尙書 平壤郡開國公之號
공은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어서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라 불리었으며, 커서는 신라 태종무열왕을 보좌하여 7년 경신(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대각간에 올랐다. 문무왕 5년 을축(665)년에 당나라의 고종이 봉상정경/삼십육도장/대사마/대원수/금은자광록대부/병부상서/평양군개국공의 호를 내렸다.
八年戊辰滅高句麗時公承命留陣都城授方略於公弟欽純及金仁問等而滅之統合三韓超陞太角干文武王十三年癸酉七月一日薨春秋七十九葬慶州西松花山金山原亥坐
8년 무진(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공은 명령을 받들어 도성의 진중에 남아 <적을 쳐부수는> 방책을 공의 동생인 흠순과 김인문 등에게 알려주어,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한의 통합을 이루어내어 태각간으로 승진하였다. 문무왕 13년 계유(673)년 7월1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79세였다. 장례는 경주 서쪽의 송화산 금산원의 해좌에 지냈다.
王聞赴震慟賻贈采帛一千匹租二千石給軍樂鼓吹百人以導引命國子博士薛仁宣撰碑文立之紀功興德王十年乙卯二月追諡 純忠壯烈興武大王
왕이 부고를 듣고 애통해 하며 비단(采帛) 1천필과 식량 2천석을 내리고, 군악대의 취주대를 보내어 장례에 따르게 하였다. 또 국자감의 박사 설인선에게 명하여 비문을 찬술하게 하고 공덕을 기리게 하였다. 흥덕왕 10년 을묘(835)년 2월 순충장렬흥무대왕이란 시호를 추증하였다.
神道碑文大提學黃景源撰今無府尹南至薰撰誌 正宗壬子因納陵致祭降香祝致享 隆熙己酉命官降祝例與崇善殿一體致祭公之偉勳巍蹟載在竹帛不可盡錄慶州蚊川傍有故宅遺墟地曰財買井宅竪碑府尹李晩運 撰
신도비문은 대제학 황경원이 찬하였으나 지금은 없고 부윤 남지훈이 묘지를 찬하였다. 정조 임자(1792)년 납릉에 치제하고 제사에 쓸 향축을 내려 주었다. 융희 기유(1909)년 관원에게 명하여 축(축문?)을 내리라고 명하고 숭선전에서 함께 치제하였다. 공의 위대한 공훈과 높은 치적은 역사책(竹帛)에 실려 있으니 <여기에> 전부 다 기록할 수 없다. 경주 문천의 근방에 옛 집인 유허지가 있는데 재매정택이라 하며 비석을 세워 부윤 이만운이 찬술하였다.
○慶州陵享寒食日及寒露日西岳書院及鎭川吉祥祠晋州南岳祠水原金山祠光州彰烈祠並八月仲丁日軍威孝靈祠五月五日江陵花浮祠五月五日及十月十五日扶安開巖祠 三九月十五日高敞白羊祠冬至日奉享豊基竹嶺上有位牌寧邊妙香山有影閣夫餘有平濟碑中國洛陽大路有頌功碑
경주에 있는 능에는 한식일과 한로일에 제사를 드리고 있고, 서악서원과 진천의 길상사/진주의 남악사/수원의 금산사/광주의 창열사에서는 8월 15일에, 군위의 효령사는 5월5일에, 강릉의 화부사에서는 5월5일과 10월15일에, 부안의 개암사에서는 3.9월15일에, 고창의 백양사에서는 동짓날에 제사를 드린다. 풍기의 죽령위에 위패가 있고, 영변의 묘향산에는 영정각이 있으며, 부여에는 평제비(백제를 평정한 비)가 있고, 중국의 낙양의 큰 길에는 공덕을 칭송하는 비가 있다.
配平壤郡夫人月城金氏一云智炤夫人亦云財買夫人追贈興武大王妣新羅太宗武烈王第三公主聖德王十一年壬子王謂夫人曰今中外平安君臣高枕而無事者乃太角干之所賜也 夫人宜其室家敬戒相成茂焉 寡人欲報其德未嘗忘于心命歲賜南城租一千石墓失傳
부인은 평양군 부인으로 월성김씨로서 또는 지소부인이라 하고 또는 재매부인이라고도 하는데, 흥무대왕비의 존호가 주어졌다. 이 분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세 번째 공주로서 성덕왕 11년 임자(712)년 왕이 부인에게 이르기를 ‘지금 나라 안과 바깥이 평안하고 임금과 신하가 베개를 높이베고 아무 일이 없는 것은 태각간의 덕택이다. 부인은 마땅히 그 집안이 공경을 받아야 하고 풍족해져야 할 것이다. 과인은 그 공덕에 보답하고자 하여 마음으로 잊어버리지 않고, 남쪽의 성(南城)과 곡식 1천석을 내린다.’라고 하였다. 묘소는 잃어버렸다.
按三國遺事金氏財買夫人死葬于靑淵上谷每年春月同宗士女會宴於其谷之南潤時則百花敷榮松花滿洞府林谷口架築爲庵因名松花坊云則似是慶州現谷面松峴及川北面靑淵等地而姑無確證以俟博考
삼국유사를 보면 김씨인 재매부인이 죽자 청연의 상곡에 장사지내고, 매년 봄에 종씨의 여자들이 그 고을의 남쪽에 모여 연회를 베풀었다. 보기 좋을 때에는 수많은 꽃을 흩뿌리고, 소나무 꽃가루가 동네에 가득 찼으며, 부림곡의 입구에는 다리를 놓아 그 암자의 이름을 송화방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경주 현곡면의 송현과 천북면의 청연 등과 비슷하나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넓게 살펴서 검토해 보아야 한다.
<舒玄> 子 欽純(흠순) <子 盤屈>
一云欽春官角干眞平王時爲花郞太宗七年庚申七月隨兄角干公率精兵五萬遂滅百濟十二月還軍文武王三年癸亥與將軍天存攻百濟殘賊取居烈居勿諸城克之九月又伐頭良尹城周留城平之八年戊辰公以副總管與金仁問及諸將領兵進攻滅高句麗十一月還軍九年己巳公以伊湌與波珍湌金良圖奉使如唐劃定國境而未果留唐京十年庚午聞唐軍鍊兵五十万以薛邦爲帥欲伐新羅之說時新羅義湘和尙西學入唐故以事諭之義湘還本國事聞于朝九月公乃還
또는 흠춘이라고도 한다. 관직은 각간을 지냈고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다. 태종7년 경신(660)년 7월 형님인 각간공(휘유신)을 따라 정예병사 5만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멸망시키고 12월에 돌아왔다. 문무왕 3년 계해(663)년 천존장군과 같이 백제의 잔당을 공격하여 거열성과 거물성 등 여러 성을 빼앗고, 9월에 또 두량윤성, 주류성을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8년 무진(668)년 공이 부총관으로서 김인문과 여러 장수와 병사와 같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11월에 돌아왔다. 9년 기사(669)년 공이 이찬으로서 파진찬 김양도와 같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국경을 획정하였으나 끝을 맺지 못하고 당나라의 서울에 남아 있었다. 10년 경오(670)년 당나라가 병사 50만을 훈련시켜 설방이 총사령관이 되어 신라를 정벌하고자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신라의 의상 화상이 마침 서학을 배우려 당나라에 들어와 있어서 이 사실을 의상에게 전하여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서 조정에 보고하였다. 9월에 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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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舒玄> 女 寶姬(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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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舒玄> 女 新羅文明王后(문명왕후)
諱文熙太宗武烈王妃子長法敏文武王次仁問角干次文注角干次老旦角干次智鏡角干次愷元角干
휘는 문희로서 태종무열왕비이다. 장남은 법민으로 문무왕이고, 다음은 각간 인문이고, 다음은 각간 문왕이고, 다음은 각간 로단이고, 다음은 각간 지경이고, 다음은 각간 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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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世
<庾信> 子 三光(삼광) <子 允中, 允文>
官伊湌文武王六年丙寅二月以大阿湌餘奈麻漢林奉使如唐高宗召爲左武衛翊府中郎將仍令宿衛九年戊辰六月還國及還高宗贈詩曰燦燦文星海東天飄揚才德子能全一振高名滿帝都三千躍馬向華邊與遼東行軍劉仁軌到唐項津王使金仁問備禮迎之
配位與墓所失傳
관직은 이찬으로 문무왕 6년 병인(666)년 2월 대아찬이 되어 나마(벼슬명) 한림과 사신이 되어 <당나라에> 갔다. 당나라 고종이 그를 불러 좌무위익부 중랑장이 되었고, 또 9년간 숙위하였다. 무진(668)년 6월 신라로 돌아올 때 고종이 시를 써 주었는데 그 내용은 ‘빛나고 빛나는 글이 별과 같이 바다의 동쪽(신라)에 태풍과 같이 떠오르는구나. 재능과 덕망은 능히 모든 나라안을 진동시켜, 고귀한 이름이 황제의 서울에 널리 알려졌구나. 3천마리의 뛰어노는 말이 영화로운 변경을 향해갔다.’고 하였다. 요동행군 유인궤와 같이 당항진에 도착하니 왕(문무왕)이 김인문으로 하여금 예를 갖추어 환영하라 하였다.
부인과 묘소는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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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庾信> 子 元述(원술)
官蘇判文武王十二年壬申唐將高侃等攻平壤羅軍大敗是役也
公與裨將欲戰死其佐淡凌固止之隨大將微行入京父公曰元述不惟辱王命亦負家訓可斬也
관직은 소판을 지냈다. 문무왕 12년 임신(672)년 당나라 장수 고간 등이 평양을 공격하여 신라군이 대패한 것이 이 싸움이다. 공은 비장과 같이 싸움에서 죽음을 각오하였으나 그를 보좌하던 담릉이 끝까지 대장(휘원술)을 따라다니며 말리므로 <죽지 못하고> 서울로 숨어서 들어왔다. 그의 부친(휘유신)이 말하기를 ‘원술은 왕의 명령을 욕되게 하고 가훈도 어겼으니 목을 베어야 한다.’고 하였다.
王曰元述裨將不可獨施刑乃赦之元述慚懼不敢見父遁於田里及父公卒求見母夫人夫人曰婦人有三從之義 今宜從子然汝旣不得爲子於先君 吾焉得爲爾母乎
왕이 말하기를 ‘원술비장에게만 벌하여서는 안된다.’며 사면하여 주었으나, 원술이 매우 부끄럽고 두려워 감히 부친(휘유신)을 보지 못하고 시골에 숨어 지냈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모친을 뵙고자 하였으나 모친이 말하길 ‘여자는 3가지 따라야 할 도리가 있으니 지금은 마땅히 아들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너는 이미 너희 부친에게 아들이 아니니 나도 너의 어미가 아니다.’ 하였다.
遂不見元述痛哭曰爲淡凌所誤乃至於此遂入太白山十五年乙亥唐兵來攻買蘇川城公欲雪前恥力戰有功以不容於父母不仕終其身
마침내 모친을 뵙지 못한 원술이 통곡하며 말하기를 ‘담릉이 잘못한 것이 이렇게 까지 되었다.’하고 마침내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15년 을해(675)년 당나라 병사가 매소천성을 공격해오니 공이 이전의 부끄러움을 씻으려고 힘을 다해 싸워 공을 세웠다. 그러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하여 벼슬을 하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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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庾信> 子 元貞(원정)<子 王巽>
官海干
配與墓無傳
관직은 해간을 지냈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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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庾信> 子 長耳(장이)
官大阿湌
配與墓無傳
관직은 대아찬을 지냈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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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庾信> 子 元望(원망)
官大阿湌
配與墓未詳
관직은 대아찬을 지냈다.
부인과 묘소는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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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庾信> 庶子 軍勝(군승)
一云施得天官夫人所出也 文武王二年壬戌唐將蘇定方伐高句麗請兵於新羅 又傳告糧盡父大角干公載糧入高句麗界翌年癸亥正月渡七重河至樟塞天寒道隘公與裂起仇近等亦陪從之致糧唐營而還
또는 시득이라고 하며 천관부인에게서 났다. 문무왕 2년 임술(662)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신라에 병사를 요청하고 또 식량이 다 떨어졌다고 알려오자 부친인 대각간공(휘유신)이 양식을 싣고 고구려의 국경으로 들어갔다. 다음해 계해(663)년 1월 칠중하를 넘어 장새에 이르렀으나, 날씨는 춥고 길은 험하여 공(휘시득)은 열기와 구근 등과 같이 유신을 모시고 따라가 당의 병영에 식량을 넘겨주고 돌아왔다.
十五年乙亥唐兵來侵買蘇川城兄元述公大破之自是羅與唐兩國境成仇隙公奉使如唐和親唐高宗封臨海郡公翌年丙子唐將薛仁貴自平壤乘舟至夫餘公以沙湌爲上將軍前後二十餘戰大破於技伐浦斬四千餘級唐兵遂不至陞阿湌
15년 을해(675)년 당나라 군사가 매소천성을 침략해 오자 형인 원술공이 크게 이겼다. 이로부터 신라와 당나라 양국의 국경이 성립되었다. 공이 사신으로서 당나라에 가서 화친을 청하자 당나라 고종은 그를 임해군에 봉하였다. 다음해 병자(676)년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평양으로부터 배를 타고 부여에 이르자 공이 사찬으로서 상장군이 되어 20여번을 싸워 크게 이기고 기벌포에서 4천여명의 목을 베자 당나라 병사가 마침내 오지 못하였다. 벼슬이 아찬으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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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欽純> 子 盤屈(반굴)<子 令胤>
官級湌太宗武烈王七年庚申七月隨父公赴黃山之役値百濟將軍偕伯新羅軍四戰不利父公召以喩之曰爲臣莫如忠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盤屈曰 唯乃餘副將黃官昌突入百濟陣力戰死以此大振軍勢遂滅百濟享忠烈祠祠在匏石亭下今無
配無傳
관직은 급찬을 지냈다. 태종 무열왕 7년 경신(660)년 7월 부친(휘흠순)을 따라 황산의 싸움에 가서 백제장군 계백을 쳤으나, 신라군이 4번싸워 불리하자 부친이 공을 불러 타이르며 말하기를 ‘신하로서 충신보다 더한 게 없고, 자식으로서 효도보다 더한 게 없다. 위험이 닥쳤으니 목숨을 바쳐 충성과 효도를 이루라.’고 하자 반굴이 알겠다고 하고 부장 황관창과 같이 백제의 진중으로 돌입하여 힘을 다해 싸우다 죽으니 이에 군사의 사기를 크게 흔들어 이윽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충렬사에서 제사를 모셨는데 충렬사는 포석정 아래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부인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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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世
<三光> 子 允中(윤중) <子 長淸>
官大阿湌 仕聖德王 屢承恩寵王之親屬 嫉之王登月城岑頭乃與從臣置酒爲樂 命召之或曰今宗戚豈無可人 而獨召疎遠之臣乎王曰今寡人 與卿等共享泰平皆庾信之功德也 如遐棄之非善善及子孫之義也遂賜絶影山馬一匹聖德王三十二年唐玄宗遣使請兵曰聞金庾信孫允中賢而可爲將須遣之仍賜金帛七月王命公弟允文赴唐營伐渤海因天大雪八月十五日還國新羅俗以其日稱嘉俳名節至今尙傳
配李氏墓失傳
관직은 대아찬을 지냈다. 성덕왕 때 벼슬하여 왕의 은총을 여러 번 입어 왕의 친속들이 시기하였다. 왕이 그를 따르는 신하와 같이 월성의 잠두에 올라가 술을 마시고 즐거워하며 윤중을 부르자 누군가 말하기를 ‘지금 종실의 친척(戚里)중에 어찌 좋은 사람이 없어 홀로 관계가 먼 신하를 부르십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지금 내가 공 들과 같이 제사를 드리고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은 모두 유신의 공덕이다. 만일 이를 멀리하고 버리면 선이 아니며 또 자손에게 해야 하는 도리가 아니다.’하니 이에 따랐다. 절영산에서 가져온 말 한 마리를 주었다. 성덕왕 32년 당나라 현종이 사신을 보내어 병사를 요청하며 말하기를 ‘듣기로는 김유신의 손자인 윤중이 현명하여 가히 장수라 할 만하니 그를 보내라.’하고 또 <윤중에게> 금과 비단을 내렸다. 7월에 왕이 공의 동생 윤문에게 명하여 당의 진영으로 가서 발해를 정벌하라고 하였으나 하늘에서 눈이 많이 내려 8월 15일에 돌아왔다. 신라의 풍속에 그 날을 칭하기를 가배명절이라 하고 지금에도 숭상하여 전하고 있다.
부인은 이씨로서 묘소는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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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光> 子 允文(윤문)
官上將軍 屢立戰功
관직은 상장군이다.
여러 번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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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貞> 子 王巽(선)
官判吏部事
配與墓無傳
관직은 판리부사를 지냈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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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盤屈> 子 令胤(영윤)
一云令尹世居沙梁部生長世家以名節自許神文王四年甲申十一月 高句麗殘賊悉伏者以報德城叛 王命討之 公以黃衿誓幢步騎監赴之及見悉伏出椵岑城南七里 結陣以待之 或告曰 今此凶黨 譬如燕巢幕上 魚戱鼎中 出萬死以爭一日之命耳 語曰 窮寇莫追 宜左次以待其疲極而擊之 可不血刃而擒也
또는 령윤(令尹)이라고도 한다. 사량부에 살았으며 대대로 고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므로 명예와 절개를 자부하였다. 신문왕 4년 갑신(684)11월에 고구려의 남은 세력 실복(悉伏)이 보덕성(報德城)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토벌을 명할 때에 공(휘령윤)을 황금서당(黃衿誓幢)의 보기감(步騎監)으로 삼았다. 가려 할 때 실복이 가잠성(岑城) 남쪽 7리에 나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어느 사람이 말하였다. “지금 이 흉악한 무리는 비유컨대 제비 천막 위에 집을 지은 것이고 솥 안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와 같으니 만번이라도 죽겠다는 각오로 나와서 싸우나 하루살이의 목숨과 같다. ‘막다른 곳에 다다른 도둑을 급박하게 쫓지 말라.’하였듯이, 마땅히 좀 물러서서 피로가 극에 달함을 기다려 치면,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사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諸將然之公獨不肯之而欲戰 從者告曰 向者之言爲然者 將俟其隙取其便者也 子獨直前 其不可乎 公曰 臨戰無勇 禮經所戒也 有進無退 士卒之常分也 丈夫臨事自決 何必從衆 遂赴賊陣 格鬪而死 王聞之 流涕曰 無是父 無是子 其義可嘉者也 追贈爵賞
여러 장수들이 그 말을 그를듯하다 여겼으나, 공(령윤)이 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싸우려하니 그 따르는 자가 말하였다. “지난번의 말을 수긍한 것은 장차 그 틈을 기다려 그 편함을 얻고자 함인데 그대가 홀로 곧바로 진격하겠다고 하니 그것은 올바르지 못합니다.”공이 말하기를 “전쟁에 임하여 용기가 없는 것은 예기에서 경계시킨 바요, 전진이 있을 뿐 후퇴가 없는 것은 병졸의 떳떳한 분수이다. 장부는 일에 임하여 스스로 결정할 것이지 어찌 반드시 무리를 좇을 필요가 있겠는가?”드디어 적진에 나가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이를 듣고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그런 아버지가 없었으면 이런 자식이 있을 수 없다. 그 의로운 공이 가상하다.”하고는 벼슬과 상을 후하게 추증하였다.
十六世
<允中> 子 長淸(장청)
官執事侍郞孝成王時有勳封伽倻君作開國公行狀錄十卷行于世今無傳
配朴氏父中郞將檜
관직은 집사시랑을 지냈다. 효성왕 때 공훈이 있어서 가야군에 봉해졌다. <그가> 작성한 개국공(휘유신)의 행장록 10권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부인은 밀양박씨로서 중랑장을 지낸 박회의 따님이다.
<王巽> 子 巖(암)
官大阿湌公性聰敏 好方術少入唐宿衛 間就師 學陰陽家法及還爲司天大博士 歷守良州康州漢州所至 盡心撫字 敎以兵法嘗有蝗蟲蔽野 公登山頂 焚香祭天 忽風雨大作 蝗盡死 後聘日本 其王欲留之會 唐使高鶴林來 相見甚歡以巖爲大國所知遣還
配 與墓未詳
관직은 대아찬을 지냈다. 공의 성품은 총명하고 민첩하여 방술(술법)을 좋아하여 어려서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면서 선생에게서 음양가법을 배우고 돌아와 사천대 박사가 되었다. 량주/강주/한주의 수령을 지내면서 이르는 곳마다 마음을 다하여 백성을 돌보면서 병법을 가르쳤다. 일찍이 황충(메뚜기)이 들을 뒤덮자 공이 산꼭대기에 올라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황충을 죽게 하였다. 후에 일본에 갔을 때 그 왕이 그를 붙잡아 두고자 하였으나 그때 마침 당나라 사신인 고학림이 와서 서로 만나보고 아주 기뻐하는 지라 대국에서도 그를 알고 있으니 그를 돌려보내 주었다.
부인과 묘소는 알수 없다.
<別章>
◎正德舊譜(정덕구보)
一世 (17)
雄元(웅원)
字俊汝新羅憲德王辛卯爲完山州都督十一年己亥唐討金國將 李師道請援公領甲士三萬赴之四年壬寅熊州都督金憲昌叛公以蘇判與伊湌均貞阿湌祐徵領三軍出擊平興德王丙午築浿江長城至老謝還號金州逸民
配上黨郡夫人韓氏父江西守峻 ○墓三陟平原洞
자(字)는 준여이다. 신라 헌덕왕(809~826) 신묘(811)년에 완산주의 도독이 되었고 11년 기해(819)년에 당나라가 금국의 장수인 이사도를 토벌하고자 지원을 요청하자, 공이 갑병 3만명을 거느리고 갔다. 4년 임인(822)년에 웅주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이 소판으로서 이찬균정과 아찬 우징과 같이 3군을 거느리고 출격하여 평정하였다. 흥덕왕 병오(826)년 패강장성을 축조하고 늙어서는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호는 금주일민이다.
부인은 상당군 부인 한씨로서 강서의 수령인 한준의 따님이다. ○묘소는 삼척 평원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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雄允(웅윤)
宣德朝人
선덕왕 때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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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世(18)
<雄元> 子 擎柱(경주) <子 成海, 成岱>
字天輔號擎天齋文聖辛未與阿湌元弘使于唐奏對稱旨宣宗嘉其才器人謂之本朝柱石之臣
配月城金氏新羅神聖王祐徵公主 ○墓長山原
자는 천보이고 호는 경천재이다. 문성왕(839~856) 신미(851)년에 아찬 원홍과 같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서 아뢰니 선종이 재주와 기량을 보고 기뻐하면서 ‘이 사람은 본조(당나라?)의 기둥이 되는 신하이다.’라고 하였다.
부인은 월성김씨로서 신라 신성왕 우징[1]의 따님이다. ○묘는 장산언덕에 있다.
[1]金祐徵; 신라 45대 신무왕(839년 윤1월~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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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世(19)
<擎柱> 子 成海(성해) <子 挺喆>
字君楫號海陵先生仕都觀郞歷事憲安景文憲康三朝與孤雲崔致遠較才入唐奉勅還朝所撰漁樵子詩集文詞模入唐行于世
配張氏父靑海鎭大使保皐○墓江西
자는 군즙이고 호는 해릉선생이다. 벼슬은 도관랑[1]에 이르렀고, 헌안(856~860), 경문(861~875), 헌강(875~886)왕의 3왕을 거쳤다. 고운 최치원(857~?)과 재능을 겨루었다. 당나라에 들어가 당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가 지은 어초자의 시집에 있는 글이 당나라에 들어갔을 때 쓴 것이라고 후세에 전한다.
부인은 장씨로서 청해진대사 장보고(?∼846)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서에 있다.
[1]都官; 신라시대에 감전(監典)에 소속된 관직. 고려시대에 노비의 문서와 호적 및 그 소송 사무를 담당하는 관아.
[비고]都觀郞이라는 관직은 찾을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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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擎柱> 子 成岱(성대)
면주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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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世(20)
<成海> 子 挺喆(정철) <子 琇胤, 玉胤>
字重擧眞聖王辛亥値弓裔萱之亂公以大都督拒之而卒王親臨禮葬于豊山
配魏氏
자는 중거이다. 진성왕(887~896) 신해(891)년에 궁예와 견훤(892~ 936)의 반란을 맞아 공이 대도독으로서 저항하다가 죽었다. 왕이 친히 예로서 장례를 치르고 풍산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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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世(21)
<挺喆> 子 琇胤(수윤) <子 天授, 天與>
字汝慶號逸休齋官御侍郞眞聖王朝甄萱之作亂公明亮知機退居田里有詩曰今日江湖客當時勇退人壺中一片土閒臥守吾天
配完山郡夫人李氏父守慈○墓陽城
자는 여경이고 호는 일휴재이다. 관직은 어시랑을 지냈다. 진성왕 때 견훤이 난을 일으키자 공이 사리에 밝아 그 낌새를 알아채고 물러나 시골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해오는 시가 있으니 ‘오늘 강호의 손님이 당시 과감히 물러나 투호병 속의 한 조각 흙 틈에 누워 우리의 하늘을 지킨다.’고 하였다.
부인은 완산군 부인인 이씨로서 이수자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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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挺喆> 子 玉胤(옥윤)
면주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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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世(22)
<琇胤> 子 天授(천수) <子 商佐>
字思留號西峰定康朝以禮召之不次孝恭王丁卯以侍中奉使如値梁革世之亂而卒返葬于陽城
配李氏父隱士巨仁 ○墓箕山原
자는 사유이고 호는 서봉선생이다. 정강왕(886~887) 때 왕이 예를 갖추어 불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효공왕 정묘(907)년에 시중으로서 사신으로 갔다가 양나라가 세상을 뒤집은 난리가 일어나[1] 죽어서 돌아와 양성에 장사지내었다.
부인은 이씨로서 숨어사는 선비인 이거인의 따님이다. ○묘는 기산언덕에 있다.
[1]907년 당이 후양에 의해 멸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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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琇胤> 子 天與(천여) <子 商補>
字理彦仕太保 配李氏父侍中芳喆 墓先兆祔
자는 리언이고 벼슬은 태보[1]를 지냈다. 부인은 이씨이고 시중을 지낸 이방철의 따님이다. 묘는 선영 옆에 있다.
[1]太保; 1068년(문종 22년)에 제정된 동궁(東宮)의 종1품 벼슬, 곧 태자태보(太子太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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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世(23)
<天授> 子 商佐(상좌)<子 浩>
字玄旭佐高麗太祖與卜智謙申崇謙裴玄慶等定鼎松岳公以元勳贈三重大匡號爲國土
配卜氏父智謙 ○墓安國土洞
자는 현욱이고 고려 태조를 도와 복지겸/신숭겸/배현경 등이 송악에 나라를 세우니 공은 원훈으로 삼중대광에 증직되었고 호를 국토라 하였다. 부인은 복지겸(?~?)의 따님이다. ○묘는 안국사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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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與> 子 商補(상보)<子 潤>
仕止小保
配金氏父司從益善 墓上仝
벼슬은 소보[1]에서 끝났다.
부인은 김씨이고 사종을 지낸 김익선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先兆祔).
[1]小保; 1031년에 제정된 고려 때의 태자부(太子府)의 종2품 벼슬. 곧 태자소부(太子少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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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世(24)
<商佐> 子 浩(호)<子 華齋>
字光鱗號靑巖先生登第知制誥翰林學士朝靖大夫僉議府左司議大夫寶文閣大提學享年一百一歲 配平山郡夫人申氏父壯節公崇謙 ○墓先兆下
자는 광린이고 호는 청암선생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지제고[1]/한림학사[2]/조정대부/첨의부[3]/좌사의대부[4]/보문각대제학[5]을 지냈다. 나이 101세에 돌아가셨다. 부인은 평산군 부인 신씨로서 장절공 신숭겸(?~927)의 따님이다. ○묘는 선영 아래이다.
[1]知制誥; 국왕이 하달하는 지시문인 조서 또는 교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은 벼슬아치. 한림원(翰林院), 보문각(寶文閣)의 벼슬아치들이 겸임함. <동의어> 지제교 (知製敎)
[2]翰林院; 고려시대에 국왕이 하달하는 지시문을 작성하는 일을 맡은 관청.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없었음.
본래 원봉성(元鳳省)이라 하던 것이 뒤에 학사원(學士院)으로 바뀌었다가 현종(1010~1031년) 때 다시 한림원으로 바뀜. 1275년(충렬왕 1년)에 문한서(文翰署)라 하였고 뒤에 다시 사림원(詞林院)이라 하였으며 1308년(충렬왕 34년)에 사관(史館)과 합쳐져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이라고 불림.
재상(宰相)이 겸하는 판원사(判院事)와 학사승지(學士承旨-정3품), 학사(學士-정4품), 시독학사(侍讀學士-정4품), 시강학사(侍講學士-정4품) 등의 벼슬아치가 있음.
[3]僉議府; 1275년(충렬왕 1년)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도성(尙書都省)이 합쳐 만들어진 관청.
1356년(공민왕 5년)에 삼사(三司)가 개정되면서 다시 상서성(尙書省)이 분리되어 나옴. 복야(僕射), 사랑중(司郎中), 원외랑(員外郎), 도사(都事) 등의 벼슬아치 가 있음. 이 때는 없었음.
[4]左司議大夫; 1116년(예종 11년)에 간의대부(諫議大夫)를 고쳐 부른 이름.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가 있는데 1298년(충렬왕 24년)에 종4품이 되면서 다시 간의대부로 바뀌었다가 뒤에 다시 사의대부라 하였고 1356년(공민왕 5년)에 또 간의대부라 하고 종3품으로 올랐으며 뒤에도 여러 번 반복하여 바뀜.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없었음.
[5]寶文閣; 1116년(예종 11년)에 궁궐 안에 청연각(淸燕閣)이라는 건물을 짓고 이름 있는 문신들을 불러들여 유교 경전을 강의하고 토론하게 하다가 이후 궁궐 밖 건물로 옮겨가면서 이름을 보문각이 라고 고침. 이 때는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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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寶> 子 潤(윤)<子 泰齋>
字世光有德行不就仕官 配洪氏父大海 ○墓佳亭山
자는 세광이고 덕행이 있었으며 벼슬이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부인은 홍대해의 따님이다. 묘소는 가정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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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世(25)
<浩> 子 華齊(화제)<子 振酉>
字桓彦號月簑翁登第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判典理司事年老歸臥江上自稱散人有詩曰浮世功名奚足取莫如江上擲漁竽月笛煙簑靜裏趣物表於今得安閒
자는 황언이고 호는 월장옹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삼중대광/도첨의/우정승/판전리사사를 지내고 나이가 들어 고향의 강산으로 돌아와 자칭 산인[1]이라 하였다. 전해오는 시에서 말하기를 ‘어지러운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것이 어찌 즐겁겠느냐. 이를 취하는 것은 강물위에 잡은 고기를 던져버리는 것만 못하니 피리를 불며 풀을 덮고 적막한 것을 즐기는 사람이 오늘 한가함을 얻었도다.’ 하였다.
[1]散人; 벼슬을 버리고 자연을 즐기며 한가로이 지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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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潤> 子 泰齊(태제) <子 德裕>
字士卓官監務 配具氏父師孟 墓先兆下
자는 사탁이고 관직은 감무[1]를 지냈다. 부인은 구사맹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 아래에 있다.
[1]監務; 고려의 예종(1105~1122) 때 제정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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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世(26)
<華齊> 子 振酉(진유)<子 承意, 繼意, 進意>
字鳳俊號知止老又曰退休齋登第匡靖大夫都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 判典理司事世子師 光宗設科僧惠居掌試公極諫不聽退居金馬渚 配康氏父巡檢使兆 ○墓先塋左岡
자는 봉준이고 호는 지지로 또는 퇴휴재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광정대부[1]/도첨의중찬[2]/수문전[3]대학사/판전리사사[4]/세자사[5]를 지냈다. 광종이 과거제를 설치하여 중 혜거[6]를 시험담당관으로 임명하자 공이 극력 간언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와 금마저에 살았다. 부인은 강씨이고 순검사를 지낸 강조[7]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의 왼쪽 언덕에 있다.
[1]匡靖大夫; 1275년(충렬왕 1년)에 제정한 문관 벼슬아치들의 종2품 품계. 이전의 금자관록대부(金紫光祿大夫). 1310년(충선왕 2년)에 종2품의 첫째 등급이 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없어지고 1362년(공민왕 11년)에 다시 설치되면서 정2품으로 올랐다가 1369년(공민왕 18년)에 폐지됨.
[2]都僉議中贊; 1275년(충렬왕 1년)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도성(尙書都省)이 합쳐져 첨의부(僉議府)가 되고 그 전의 시중(侍中)이 바뀌어진 이름. 좌 ·우 두 사람이 있었음.
1298(충렬왕 24년)에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바뀌었다가 뒤에 다시 이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1308(충렬왕 34년)에 정승(政丞)으로 바뀌고 한 사람만 두었음.
[3]修文殿; 문덕전(文德殿)이 1136년(인종 14년)에 수문전(修文殿)으로 바뀜
[4]전리사(典理司); 1275년(충렬왕 1년)에 이부(吏部)와 예부(禮部)가 합쳐 만들어진 관청. 1298년(충렬왕 24년)에 다시 의조(儀曹)와 전조(銓曹)로 분리되면서 없어짐.
[5]世子師; 1277년(충렬왕 3년)에 제정한 왕세자를 가르치는 일을 맡은 벼슬아치.
[6]혜거(惠居); ?∼974(광종 25). 고려 초기의 고승. 성은 박씨(朴氏). 초명은 지회(智回). 자세한 생애는 미상이며, 16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의 도가 높아지자 왕이 여러 번 청하여 법문을 듣기를 원하였으나 응하지 않다가, 947년(정종 2) 왕사가 되었고, 968년에 국사가 되었다.
[7]강조(康兆, ?∼1010(현종 1); 고려의 무신. 황해도지방의 토성(土姓)이나 본관은 분명하지 않다.
목종 때 중추사 우상시(中樞使右常侍)로서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가 되었다.
[비고]이 시기에는 광정대부라는 품계가 없었고 도첨의중찬, 수문전, 전리사, 세자사도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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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齊> 子 德裕(덕유)<子 敬意>
以行義筮仕摠郞 配金氏父洛賢 墓江界
의로움을 행하여 과거를 보지 않고 총랑의 벼슬에 올랐다. 부인은 김락현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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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世(27)
<振酉> 子 承意(승의)<子 天精>
字士則撿校神虎衛上將軍以斥僧爲已任光宗忤旨見黜 配王氏父匡廉 墓上書庄{今慶州金鰲山下}
자는 사칙이고 검교[1]신호위상장군을 지냈다. 중(혜거)을 물리치고자 하였으나 이미 임명한 광종의 뜻을 거슬러 벼슬에서 물러났다. 부인은 왕광렴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에 쓴 장(先塋左岡)에 있다. {지금의 경주 금오산 아래}
[1]檢校; 고려 말~조선 초기, 어떤 관청에 정원외에 임시로 벼슬아치의 수를 늘렸을 때나 실지 사무는 보지 않고 이름만 가지고 있는 벼슬아치의 관직 이름 앞에 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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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振酉> 子 繼意(계의)<子 淵精>
配閔氏父判典校淪 墓萬轉郊
부인은 민씨이고 판전교를 지낸 민륜의 따님이다. 묘소는 만전의 교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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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振酉> 子 進意(진의)<子 澤精>
官中書令 配閔氏父侍郞漬 墓江西少鹿山
관직은 중서령[1]을 지냈고 부인은 시랑을 지낸 민지[2]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서의 소록산에 있다.
[1]中書令; 1061년(문종 15년)에 내사령(內史令)을 고쳐 부른 이름.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1품 벼슬. 1295년(충렬왕 21년)에 도첨의령(都僉議令)으로 바뀌었고 뒤에 판도첨의사사사(判部僉議使司事)라 불렀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다시 중서령이라 하였고 뒤에 판문하(判門下)로 바뀜
[2]민지(閔漬); 1248(고종 35)∼1326(충숙왕 13).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黙軒). 평장사 영모(令謨)의 5대손이며, 상정(祥正)의 아버지이다.
1266년(원종 7)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후(祗候)가 되고, 1279년(충렬왕 5) 전중시사(殿中侍史)를 거쳐 예빈윤(禮賓尹)이 되었다. 충선왕이 세자 때인 1290년 정가신(鄭可臣)과 함께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한림직학사 조열대부(翰林直學士朝列大夫)의 벼슬을 받았다.
1258년 원나라가 두번이나 실패한 일본정벌을 결행하려 하자 좌부승지로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동정(東征)의 불필요함을 역설하여 전함(戰艦)건조를 중지하도록 하였다.
그뒤 집현전대학사 첨광정원사(集賢殿大學士僉光政院事)가 되고 충선왕초 첨의정승(僉議政丞)에 이르러 사직하였다.
1321년(충숙왕 8) 다시 수정승(守政丞)이 되고 여흥군(驪興君)에 봉하여졌다.
1323년 가락군(駕洛君) 허유전(許有全), 흥녕군(興寧君) 김거(金$거02)와 함께 원나라에 가서 충선왕의 환국을 청할 표문(表文)을 지었다. 이 문장은 명문으로 그 뜻이 간절하고 때로는 애통한 듯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에 머무른 지 6개월이 되어도 심왕(瀋王)무리의 간계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정가신이 지은 《천추금경록 千秋今鏡錄》 7권을 권보(權溥)와 교열, 증수하여 《세대편년절요 世代編年節要》라 이름하였고, 또 《본국편년강목 本國編年綱目》 42권을 편찬하였으나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사관은 민지를 평하기를, “그는 문예는 있으나 습속이 많고 심술이 바르지 않아 나인(內人)을 아첨하여 섬기고, 또한 성리(性理)의 학을 알지 못하여 주자(朱子)의 소목론(昭穆論:종묘 신위의 차례를 말함.)을 그르다고 하였으니 편벽함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아마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성리학자들의 견해로 보인다.
저서로는 《묵헌집》이 있다. 시호는 문인(文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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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酉> 子 敬義(경의)<子 益城>
字子益密直使 配水原崔氏
자는 자익이고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수원최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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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世(28)
<承意> 子 天精(천정)<子 恒齡>
字理賢老年登第重大匡兵部尙書諡文忠{公使契丹請和} 配金氏父大良君詢 墓先兆下
자는 리현이다. 늙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여 중대광/병부상서를 지냈다. 시호는 문충이다. {공이 사신으로 거란에 가서 화친을 청하였다.} 부인은 김씨로서 대량군 김순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아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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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繼意> 子 淵精(연정)
字可宜 配安氏父禹
자는 가의이고 부인은 안우의 따님이다.
<繼意> 子 漢精(한정)
退絶宦情有詩
벼슬에서 물러나 벼슬을 하고 싶은 마음을 끊었다. 남아있는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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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進意> 子 澤精(택정)<子 德齡>
侍中 配洪氏父典校倫 墓先兆下
시중을 지냈고 부인은 전교를 지낸 홍륜[1]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아래에 있다.
[1]홍륜(洪倫); ?∼1374(우왕 즉위년). 고려 공민왕의 총신(寵臣). 본관은 남양(南陽). 공민왕 때의 문하시중 언박(彦博)의 손자이며, 경상전라도순문사를 지낸 사우(師禹)의 아들이다.
1372년(공민왕 21)에 설치된 자제위(子弟衛)에 소속되어 왕의 좌우에서 보필하다가 1374년 왕 시해사건에 연루되어 주살(誅殺)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왕은 늦게까지 아들이 없자 후사를 얻기 위하여 자제위 소속 청년들로 하여금 여러 비빈(妃嬪)들과 사통(私通)시켜 아들을 낳게 하여 후사로 삼기를 원하였는데, 륜이 익비(益妃:공민왕의 셋째부인)와 관계하여 임신하게 되자 왕은 기뼈하며,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모두 죽이겠다고 하자, 이를 두려워한 륜이 환관 최만생(崔萬生)과 모의하여 왕을 시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조선왕조 사가(史家)들이 의도적으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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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意> 子 益城(익성)<子 華岳>
監務 配水原崔氏 墓上同
감무[1]를 지냈고 부인은 수원최씨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界).
[1]監務; 고려의 예종(1105~1122) 때 제정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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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世(29)
<天精> 子 恒齡(항령)<子 洙聖>
字德章號泰平齋登第撿校神虎衛將軍女眞之亂連歲{世}不息歸臥秦平山以卒 配晉陽郡夫人姜氏父平章事燦 ○墓先兆下
자는 덕장이고 호는 태평재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검교[1]신호위장군을 지냈다. 여진족이 해마다 침범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진평산에서 돌아가셨다. 부인은 진양군 부인 강씨이고 평장사를 지낸 강찬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아래에 있다.
[1]檢校; 고려 말~조선 초기, 어떤 관청에 정원외에 임시로 벼슬아치의 수를 늘렸을 때나 실지 사무는 보지 않고 이름만 가지고 있는 벼슬아치의 관직 이름 앞에 붙이는 말.
[비고]姜燦; 선조시기에 동명이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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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澤精> 子 德齡(덕령)<子 潙聖>
避女眞之兵{亂}入金華山以卒 配李氏父判典校濟 墓上同
여진족의 병사를 피해서 금화산으로 들어가 별세하셨다. 부인은 이씨로서 판전교를 지낸 이제[1]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선영 아래).
[1]이제(李濟); ?∼1398(태조 7). 고려말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성주호장 장경(長庚)의 고손(高孫)이자 조년(兆年)의 증손이며, 권신 인임(仁任)의 아우인 인립(仁立)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1352년(공민왕 1) 좌대언(左代言)이 되고, 이해 밀직제학으로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1등에 봉해졌다.
이성계(李成桂)의 셋째딸 경순공주(慶順公主)와 결혼하였으며, 1392년(공양왕 4) 전법판서(典法判書)로 있으면서 정몽주(鄭夢周)의 살해에 가담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다.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를 거쳐, 1393년(태조 2)우군절제에 올랐다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일파로 몰려 이방원(李芳遠)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세종 때에 신원되어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후사가 없어서 조카 윤(潤)으로 뒤를 이었다. 시호는 경무(景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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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城> 子 華岳(화악)<子 光澤>
字山甫典廐暑承 配姜氏父諴 墓上同
자는 산보이고 전구서승을 지냈다 부인은 강함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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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世(30)
<恒齡> 子 洙聖(수성)<子 商欽, 商賢, 商寅>
字澄源重大匡戶部尙書女眞之亂與上元帥姜邯贊力拒以卒 配南陽郡夫人洪氏父龍虎軍校尉潁
자는 징원이고 중대광/호부상서를 지냈다. 여진의 난 때 상원수 강감찬(948∼1031)과 같이 힘을 다해 막다가 별세하였다. 부인은 남양군부인 홍씨로서 용호군교위를 지낸 홍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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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齡>의 子 潙聖(위성)<子 商眞>
時歲飢公承命東丘以活生靈有功封爵奉先庫判官令同正
이 시기에 기근이 들어 공이 명령을 받고 백성을 생활을 보살폈으며 이 공로로 관작을 받아 선고판관령의 동정[1]이 되었다.
[1]同正; 임시직책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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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岳> 子 光澤(광택)<子 東燁>
字士淸 配李氏父元植
자는 사청이고 부인은 이원식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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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世(31)
<洙聖> 子 商欽(상흠)<子 成雨>
字資興登第朝靖大夫僉議府左司議寶文閣大提學亞中大夫輕車都尉金州伯顯宗元年庚戌契丹來寇公與上將軍金訓有功而還遇西城大食國使來獻方物事稱旨封邑歷事顯宗以忠直有功益邑 配貞烈夫人禹氏父左思補儞 ○墓福州山西山原今安東
자는 자흥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대부/첨의부[1]/좌사의[2]/보문각[3]대제학/아중대부/경차도위/금주백을 지냈다. 현종원년 경술(1010)년 거란이 침입하자 공이 상장군 김훈[2]과 같이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우서성에 대식국[3]의 사신이 와서 공물을 바치면서 왕이 준 것이라 하여 식읍을 주었다. 현종(1009~1031)을 거치면서 충성과 정직의 공적이 있어 식읍을 더 주었다. 부인은 정렬부인 우씨로서 좌사보를 지낸 우칭의 따님이다. 묘소는 복주의 산서산 언덕에 있으니 지금의 안동이다.
[1]僉議府; 1275년(충렬왕 1년)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도성(尙書都省)이 합쳐 만들어진 관청. 따라서 이 때는 없었음
[2]司議大夫; 1116년(예종 11년)에 간의대부(諫議大夫)를 고쳐 부른 이름. 좌와 우가 있었음
[3]寶文閣; 1116년(예종 11년)에 궁궐 안에 청연각(淸燕閣)이라는 건물을 짓고 이름 있는 문신들을 불러들여 유교 경전을 강의하고 토론하게 하다가 이후 궁궐 밖 건물로 옮겨가면서 이름을 보문각이 라고 고침. 따라서 이 때는 없었음
[2]김훈(金訓, ?∼1015); 고려의 장군.
1010년(현종 1)에 거란병이 대거 침입하여 통주(通州:지금의 평안북도 宣川)에서 강조(康兆)의 군대를 크게 이기고 계속 전진하자, 장군으로서 김계천(金繼天)·이원(李元)·신영한(申寧漢) 등과 좌우기군(左右奇軍)을 거느리고 완항령(緩項嶺)에 복병하였다가 그 선봉을 무찔렀으며, 뒤에 상장군이 되었다.
1014년에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중추원 일직(日直)황보 유의(皇甫兪義)가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백관(百官)의 녹봉(祿俸)에 충당하게 함으로써 무신들의 불평이 높아지자, 상장군 최질(崔質)과 함께 병사들을 충동하여 반란을 일으켜 장연우·황보 유의를 귀양보내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무관으로 상참(常參) 이상은 모두 문관을 겸하게 하는 동시에 어사대(御史臺)를 금오대(金吾臺)로, 삼사(三司)를 도정서(都正署)로 고치는 등 무관들을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듬해 왕과 내통한 서경유수판관(西京留守判官) 이자림(李子琳, 王可道)의 계략으로 왕이 서경 장락궁(長樂宮)에서 베푼 잔치에 참석하였다가 최질·이협(李協)·최가정(崔可貞)·석방현(石邦賢) 등 19인의 무신들과 함께 피살당하였다.
[3]大食國; 아라비아에 있던 사라센 제국을 당, 송나라에서 부르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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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洙聖> 子 商賢(상현)<子 成洙>
官右軍兵馬 配金氏
관직은 우군병마사를 지냈고 부인은 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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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洙聖> 子 商寅(상인)<子 成泗>
官按察使 配上黨韓氏父諫義大夫奎 墓上同
관직은 안찰사를 지냈고 부인은 상당한씨로서 간의대부를 지낸 한규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墓先兆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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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潙聖>子 商眞(상진)<子 佑鐸>
學聞有餘退居別區號廣山先生 配權氏父漢功 ○墓黃州馬峙洞
학문이 알려졌으나 남은 여생을 물러나와 외딴 곳에 살았다. 부인은 권한공의 따님이다. 묘소는 황주의 마치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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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澤>子 東燁(동엽)<子 兌一>
字爾輝官代言
자는 이휘이고 관직은 대언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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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世(32)
<商欽>子 成雨(성우)<子 日曙>
字雲澤登第臣匡靖大夫右文館大提學號甘霖先生德宗癸酉與平章事柳韶完築北界千里石城以禦女眞之亂 ○配文化郡夫人柳氏父大將軍淸臣
자는 운택이고 과거에 합격하여 광정대부[1]/우문관대제학[2]을 지냈다. 호는 감림선생이다. 덕종 계유(1033)년에 평장사 류소[3]와 같이 북쪽 경계 천리석성을 쌓아 여진의 침입을 막았다. ○부인은 문화군부인 류씨로서 대장군 류청신[4]의 따님이다.
[1]匡靖大夫; 1275년(충렬왕 1년)에 제정한 문관 벼슬아치들의 종2품 품계. 따라서 이 때는 없었음.
[2]右文館大提學; 1308년(충렬왕 34년)에 설치된 우문관(右文館)의 정2품 벼슬. 따라서 이 때는 없었음.
[3]유소(柳韶, ?∼1038); 고려의 명신(名臣). 정주유씨(貞州柳氏)의 시조라고도 전한다.
1011년(현종 2)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1016년에 어사잡단(御史雜端), 1019년 사헌중승(司憲中丞), 1022년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고, 이어 태자빈객(太子賓客)이 되었다.
1029년 왕명으로 흥화진(興化鎭) 서북쪽 40리에 있던 석성(石城)을 수리하여 위원진(威遠鎭)을 두고, 흥화진 북쪽에 있던 석보(石堡)를 수축하여 정융진(定戎鎭)을 두어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다.
이때 거란의 동경장군(東京將軍) 대연림(大延琳)이 난을 일으켜 흥료국(興遼國)을 세우고 고려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현종이 응하지 않았다. 이때 서북면판병마사(西北面判兵馬事)로 상중(喪中)에 있었으나 한(漢)의 승상 책방진(翟方進)의 고사를 들어 흥료의 방어에 임하도록 하였다.
1030년 중추사(中樞使), 1031년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가 되었고, 그해 덕종이 즉위하자 중군병마사를 거쳐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가 되었다.
1033년(덕종 2) 왕명으로 북경관성(北境關城:千里長城)을 쌓았는데, 그것은 서해안의 압록강 하구에서 동으로 위원등 13성을 거쳐 화주(和州)에 이르는 1, 000여리에 걸치는 것이었다.
1034년 장성축조의 공으로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에 봉하여졌으며, 은청광록대부 상주국 대위 문하시랑평장사(銀靑光祿大夫上柱國大尉門下侍郎平章事)가 되었다.
덕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양의(襄懿)이다.
[4]유청신(柳淸臣); ?∼1329(충숙왕 16). 고려 충렬왕 때의 역관(譯官)·재상. 본관은 고흥(高興). 본래 이름은 비(庇).
공민왕 때 좌정승을 지낸 탁(濯)의 할아버지이다. 장흥부(長興府) 고이부곡(高伊部曲)에서 출생하였으며, 선대는 대대로 그곳의 부곡리(部曲吏)였다. 몽고어를 잘 하여 여러 차례 원나라에 사신으로서 내왕하였고, 그 공으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낭장에 임명되었다. 고려시대에 부곡리가 5품을 넘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허통(許通)되어 장군에 올랐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1294년(충렬왕 20)에 우승지가 되었고, 1296년에는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임명되어 재추의 반열에 올랐다. 다음해에 세자(뒤의 忠宣王)의 요청에 의하여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감찰대부(監察大夫)에 임명되었으며, 조인규(趙仁規)·인후(印侯)와 함께 원나라에 파견되어 충렬왕의 전위표(傳位表)를 전달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광정원부사(光政院副使)로서 참지기무(參知機務)를 겸하였고, 곧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충렬왕이 복위하고 인후 등에 의하여 한희유무고사건(韓希愈誣告事件)이 일어나자 여기에 연루되어 원나라에 압송되었으며, 1299년에 차신(車信)·최유엄(崔有?)·오인영(吳仁永)·유복화(劉福和)·홍선(洪詵) 등 충선왕 지지자들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복직되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랐으며, 당시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충선왕의 환국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307년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武宗)옹립의 공으로 실권을 장악하자 도첨의찬성사·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로 중용되었다.
이때 원나라 황제로부터 청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개명하였다.
1310년(충선왕 2) 정승에 임명되고 고흥부원군에 봉하여졌으며, 곧 도첨의찬성사 고흥군으로 강등되었지만 1313년에 다시 정승에 올라 1321년(충숙왕 8)까지 재임하였다.
1320년에 원나라에서 충선왕이 고려인 환관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의 참소를 받아 토번(吐蕃)으로 유배되고, 다음해에 충숙왕 역시 참소를 받아 원나라로 소환되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으며, 그곳에서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 등과 함께 심왕 고(瀋王暠)에게 붙어 심왕옹립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원나라에 계속 머물면서 오잠(吳潛)과 함께 고려에 원나라의 내지(內地)에 설치된 행성(行省)을 두자는, 이른바 입성책동(立省策動)을 벌였으며, 충숙왕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무고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심왕옹립운동과 입성책동이 모두 실패하고 1325년에 충숙왕이 환국하자, 처벌될 것이 두려워 고려에 돌아오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죽었다.
말년의 심왕옹립운동과 입성책동 때문에 《고려사》의 간신전(姦臣傳)에 수록되었다. 시호는 영밀(英密)이다.
[비고]류소와 류청신은 같은 시대의 사람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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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賢>子 成洙(성수)<子 萬濟>
字德阿德宗朝光祿大夫以功贈左贊 配崔氏父侍中沖
자는 덕하이고 덕종(1031~1034) 때 광록대부를 지내고 공적이 있어 좌찬[1]에 증직되었다. 부인은 최씨로서 시중을 지낸 최충[2]의 따님이다.
[1]左贊; 1277년 제정된 좌찬덕(左贊德), 우찬덕(右贊德), 좌찬성(左贊成)은 조선시대 관직명 임
[2]최충(崔沖, 984(성종 3)∼1068(문종22); 고려의 문신.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의 하나인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창시자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온(溫)의 아들이다.
1005년(목종 8)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우습유(右拾遺)에 올랐고, 1013년(현종 4)에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의 문적을 재편수하는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을 겸하여 《칠대실록 七代實錄》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뒤 우보궐(右輔闕)·기거사인(起居舍人)·중추직학사(中樞直學事)를 역임하고, 1025년에 한림학사 내사사인 지제고(翰林學士內史舍人知制誥)를 거쳐 예부시랑 간의대부(禮部侍郎諫議大夫)에 올랐다.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설원 說苑》 육정육사(六正六邪)의 글과 한(漢)의 자사6조(刺史六條)의 글을 각 관청에 붙이게 하여 좋은 정치를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뒤 형부상서 중추사(刑部尙書中樞使)로 전임되었으며, 정종초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1037년(정종 3) 참지정사수국사(參知政事修國史)로 《현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또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西北路兵馬使)로 변경에 나가 영원(寧遠)·평로(平虜) 등에 진(鎭)을 설치하는 등 국방에도 힘썼다.
변경에서 돌아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에 올랐고, 수사도 수국사 상주국(守司徒修國史上柱國)이 더해졌다가 곧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로 옮겼다. 문종이 즉위하여 문하시중이 되자 율령서산(律令書算)을 정하였고, 곧 수태보(守太保)가 더해졌다.
1050년(문종 4)에 개부의동삼사 수태부(開府儀同三司守太傅)가 더해지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또한, 시중으로 도병마사를 겸하게 되자 서북 주(州)·진(鎭)의 공역(工役)의 금지를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으며,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053년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이를 만류하는 조서가 내려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문하시중 상주국 치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門下侍中上柱國致仕)라는 훈작이 내리고, 1055년 내사령(內史令)을 삼은 뒤, 다시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이라는 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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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寅>子 成泗(성사)<子 陽曙>
字大卿靖宗朝人 配李氏父茂
자는 대경이고 정종(1033~1046) 때 사람이다. 부인은 이무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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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眞>子 佑鐸(우탁)<子 碩挺>
字樂明同正 配李氏父師東
자는 락명이고 동정을 지냈다. 부인은 이사동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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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燁>子 兌一(태일)<子 南赫>
三司副使
配鄭氏父夢弼
삼사부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몽필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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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七世(33)
<成雨>子 日曙(일서)<子 匡國>
字顯明登第朝靖大夫僉議府左司議大夫左文閣大提學亞中大夫輕車都尉臨海侯從朴陽臣使於遼又使於宋爲國柱石 配完山郡夫人崔氏父禮賓主簿頓 ○墓鳥嶺先山下
자는 현명이고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대부/첨의부/좌사의대부/좌문각대제학/아중대부/경차도위/임해후를 지냈다. 박양신[1]을 따라 요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고 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와서 나라의 중요한 인물(柱石)이 되었다. 부인은 완산군 부인 최씨로서 예빈경을 지낸 최돈[2]의 따님이다. 묘소는 조령의 선산아래에 있다.
[1]박양신(朴良臣); 고려 때 소부소감(少府少監)을 지냈다고 한다.
[2]崔頓; 정종(定宗) 1년(139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에 장원한 최진성(崔進誠)의 증조부(전주이씨, 崔頓->崔贄->崔瀁->崔進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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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洙>子 萬濟(만제)<子 慶雄>
字道元 配崔氏父左僕射熙
자는 도원이고 부인은 좌복야를 지낸 최희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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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泗>子 陽曙(양서)<子 邦寶>
字君平 配洪氏父生員繼振阿
자는 군평이고 부인은 생원 홍계진아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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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佑鐸> 子 碩挺(석정)<子 啓夏>
字奇老都監判官 配朴氏父世煥
자는 기로이고 도감판관을 지냈다. 부인은 박세환의 따님이다.
<佑鐸> 子 碩抽(석추)
면주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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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兌一> 子 南赫(남혁)<子 重鉉>
字叔光侍中 配李氏父兆年
자는 숙광이고 시중을 지냈다. 부인은 이조년[1]의 따님이다.
[1]이조년(李兆年, 1269(원종 10)∼1343(충혜왕 복위 4); 고려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 농서군공(#농17西郡公) 장경(長庚)의 아들이다.
1294년(충렬왕 20) 향공진사(鄕貢進士)로 문과에 급제하여 안남서기(安南書記)에 보직되고, 이어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비서랑(?書郎) 등을 지냈다.
1306년 비서승으로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을 때 왕유소(王惟紹)·송방영(宋邦英) 등이 충선왕을 모함하여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 전(瑞興侯琠)으로 충렬왕의 후계를 삼으려 획책하다가 충선왕의 세력이 커지자 처벌되었는데, 이때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단지 충렬왕을 보필하고 있었으나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그뒤 귀양에서 풀려나와 13년간 고향에서 은거하면서 한번도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지 않았다. 당시 충숙왕은 5년간이나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심양왕 고(瀋陽王暠)가 왕위 찬탈을 음모하자 홀로 원나라에 들어가서 중서성(中書省)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이러한 음모를 분쇄하였다.
1325년(충숙왕 12)왕이 귀국하자 감찰장령으로 발탁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郎)으로 관동지방을 안무(按撫)하였다.
1327년 충숙왕이 원도(元都)에 있을 때 왕을 도운 공로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서 이등공신이 되었으며, 이어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하였다.
이때 충숙왕은 심왕당(瀋王黨)의 끊임없는 모략으로 왕위를 심왕에게 선양(禪讓)하려 하였으나 한종유(韓宗愈) 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여 이를 저지시켰다.
1330년 충혜왕이 즉위하자 장령이 되었고, 그뒤 여러 번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내왕하였다.
1339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그 이듬해 정당문학에 승진하였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충혜왕의 음탕함을 여러 번 간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이듬해에 사직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에 녹권되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1수가 전한다. 뜻이 확고하고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으며, 이런 엄격한 성품 때문에 꺼림을 받았다. 역임한 관직에서 많은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되고,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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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八世(34)
<日曙>子 匡國(광국)<子 宗柏>
字彦忠登第翰林學士朝靖大夫僉議府左司議大夫集賢殿大提學 歷事文宗宣宗順宗避遼之亂作南京於三角山西岳之南居田退庄以卒 配朴氏父平章事龜壽 ○墓在月城山
자는 언충이고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학사[1]/조정대부/첨의부[2]/좌사의대부[3]/집현전[4]대제학을 지냈다. 문종(1046~1083), 선종(1083~1094), 순종(1083~1083)을 모셨다. 요나라의 <침입을> 피하여 남경에 갔다가 삼각산 서악의 남쪽 시골에 살다가 죽었다. 부인은 박씨로서 평장사를 지낸 박귀수의 따님이다. ○묘소는 월성산에 있다.
[1]翰林院; 국왕이 하달하는 지시문을 작성하는 일을 맡은 관청. 본래 원봉성(元鳳省)이라 하던 것이 뒤에 학사원(學士院)으로 바뀌었다가 현종(1010~1031년) 때 다시 한림원으로 바뀜.
[2]僉議府; 1275년(충렬왕 1년)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도성(尙書都省)이 합쳐 만들어진 관청. 이 때는 없었음.
[3]左司議大夫;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4품 벼슬. 1116년(예종 11년)에 간의대부(諫議大夫)를 고쳐 부른 이름. 이 때는 없었음.
[4]集賢殿; 연영전(延英殿)이 1136년(인종 14년)에 집현전(集賢殿)으로 이름이 바뀜. 이 때는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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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濟>子 慶雄(경웅)<子 道意>
字斗柄都觀郞奉命濟活江陵以此贈秩 配洪氏父司徒晋遠墓廣州
자는 두병이고 도관랑을 지냈으며 명령을 받들어 강릉사람들을 보살폈다. 이 공로로 녹봉을 받았다. 부인은 사도를 지낸 홍진원의 따님이다. 묘소는 광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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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曙> 子 邦寶(방보)<子 兌顯>
女眞之亂入金華山 配金氏父振鐸
여진의 난 때 금화산에 들어갔다. 부인은 김진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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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挺> 子 啓夏(계하)<子 昌海>
字平仲號敬安軒官嘉靖大夫 配尹氏父國憲
자는 평중이고 호는 경안헌이다. 관직은 가정대부를 지냈다. 부인은 윤국헌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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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赫> 子 重鉉(중현)<子 德相>
字夏三司馬 配吳氏父慶起
자는 하삼이고 사마를 지냈다. 부인은 오경기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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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九世(35)
<匡國> 子 宗栢(종백)<子 繡>
字四元號蘭撓翁睿宗朝國學監試後登第三重大匡都僉議府左政丞判典理事老年趣切山水與郭處士輿入金州而居有詩曰江湖一竿翁長釣金城東不量生計薄櫛髮渭陽風 配樂浪郡夫人尹氏父右政丞宣佐 墓上同
자는 사원이고 호는 란요옹이다. 예종(1105~1122) 때 국학감의 시험을 보아 합격하여, 삼중대광/도첨의부/좌정승/판전리사를 지내고 늙어서 산수를 즐기는 취미를 끊고 곽처사[1]와 같이 금주로 들어가 살았다. 전해오는 시에서 ‘강호에서 피리를 부는 노인이 긴 낚싯대를 가지고 금성의 동쪽에서 살아가니 생계는 어려워도 머리카락 빗질하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는구나.’하였다. 부인은 낙랑군부인인 윤씨로서 우정승을 지낸 윤선좌[2]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月星山).
[1]곽여(郭輿, 1058~1130); 고려 전기의 문신
[2]윤선좌(尹宣佐); 1265(원종 6)∼1343(충혜왕 복위 4). 고려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순수(淳?). 문하시중 관(瓘)의 7대손이다. 나면서부터 영특하여 7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1288년(충렬왕 14)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김해장서기(金海掌書記) 가 되었다가 비서랑(?書郎)·직문한서(直文翰署)에 보임되었다. 충선왕초에 좌정언에 임명되고, 이어 우사보(右思補)·내서사인(內書舍人)·선부의랑(選部議郎)에 전직되었다.
그뒤 전라도지방을 안찰할 때 강직함이 알려져 도율령(都律令)으로 승직, 충숙왕이 평소에 그의 이름을 듣고 즉위하여 성균좨주에 제수하고 부인(符印)을 관장하게 하였다. 곧 이어 사헌집의가 되어 윤신걸(尹莘傑), 백원항(白元恒)과 더불어 《자치통감 資治通鑑》을 진강하였다.
그뒤 일시 파직되었다가 다시 집의에 임명되었다.
1322년(충숙왕 9)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 등이 왕을 폐하고 심왕 고(瀋王暠)를 대신 세우려는 책동을 부리자 이를 극력 반대하고 대간·문한(文翰)들의 서명을 받지 못하게 하여 그 계획을 좌절시켰다. 왕이 원에 머문 지 5년이 되어 재정이 부족하였는데 심왕 고의 일당이 사정을 알고 부고(府庫)를 봉하고 운반을 저지하자, 감찰관 조관(趙琯)을 움직여 운송하도록 하였다. 왕이 귀국하자 판전교(判典校)가 되고, 민부전서(民部典書)로서 한양윤(漢陽尹)을 겸하였으며, 1331년(충혜왕 1) 이윤(伊尹)의 고사를 들어 앞당겨 치사하였다.
1335년(충숙왕 복위 4) 다시 계림윤(鷄林尹)에 임명되고, 이듬해 첨의평리(僉議評理)·예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藝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에 제배(除拜)되었다가 치사하였다.
1343년 자녀들에게 가업을 공평하게 나누어주고 화목할 것을 훈계한 뒤 죽었다.
경학에 밝고, 노장(老莊)·형명(刑名)의 학도 연구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당대 표전(表箋)을 많이 지었다.
[비고]곽여와 윤선좌는 동 시대의 사람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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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雄> 子 道意(도의)<子 夢龜>
字子三肅宗朝登第翰林學士太中大夫平章事 配貞敬夫人奇氏父泳墓上同
자는 자삼이고 숙종(1095~1105) 때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학사/태중대부/평장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경부인 기씨로서 기영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廣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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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邦寶> 子 兌顯{賢}(태현)<子 一興>
官都觀郞 配宋氏父碩補
관직은 도관랑을 지냈으며 부인은 송석보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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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啓夏> 子 昌海(창해)<子 成麗>
以孝被徵不就 配韓氏父有迪
효성이 알려져 조정에서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부인은 한유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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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鉉> 子 德相(덕상)<子 振溟>
字相甫奉事 配李氏 墓在尙州
자는 상보이고 봉사를 지냈다. 부인은 이씨이고 묘소는 상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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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世(36)
<宗栢> 子 (繡(수)<子 以琢>
字文仲號設門齋檢校神龍虎衛上將軍 ○仁宗丙午五月李資謙囚十八子之讖欲圖不軌公與卓 俊卿討平之十三年乙酉西京守趙匡叛攻討之 配平壤國夫人鄭氏父代言知常 墓上同
자는 문중이고 호는 설문재이다. 검교[1]신룡호위 상장군을 지냈다. ○인종 병오(1126)년 5월 이자겸[2]이 18명의 아들들을 가두고 비결서대로 실행하고자 법을 따르지 않아, 공이 탁준경(拓俊京의 오기?)과 같이 토벌하였다[3]. 13년 을유(1165) [4]년에는 서경(평양)의 수령으로 있던 조광[5]의 반란을 토벌하였다. 부인은 평양국부인인 정씨로서 대언을 지낸 정지상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月星山).
[1]檢校; 고려 말~조선 초기, 어떤 관청에 정원외에 임시로 벼슬아치의 수를 늘렸을 때나 실지 사무는 보지 않고 이름만 가지고 있는 벼슬아치의 관직 이름 앞에 붙이는 말. 이 때는 없었음.
[2]이자겸의 난 ; 고려사 열전-인종 공효대왕(仁宗 恭孝大王) 갑진2년 편 참고
(1126년 2월 내시 김찬(金粲)과 안보린(安甫鱗)은 동지추밀원사 지녹연(智祿延)과 공모하여 왕에게 아뢰고, 상장군 최탁(崔卓)과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장군 고석(高碩)과 함께 이자겸과 그의 일당인 척준경(拓俊京;그는 당대의 실권자 이자겸(李資謙)의 아들인 지원(之元)의 장인 )을 제거하려는 거사에 나섰다. 약속된 날 밤 그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 척준경의 동생인 병부상서 척준신(拓俊臣)과 아들인 내시 척순(拓純) 등을 살해했다. 이를 알게 된 이자겸과 척준경은 무리를 이끌고 가서 궁성을 포위한 뒤 불을 지르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에 놀란 왕은 두려워하여 이자겸에게 선위(禪位)하고자 했으나, 이자겸은 양부(兩府)의 의논을 겁내었으며 더구나 재종형제간인 이수(李壽)가 반대하여 저지되었다.)
[3]내용이 이상함
[4]을유가 아닌 을묘(1135년)임
[5]조광의 난; 113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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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意> 子 夢龜(몽귀) <子 旻精>
字士久 吏部侍郞 配姜氏父啓夏 ○墓慶州
자는 사구이고 이부시랑을 지냈다. 부인은 강계하의 따님이다. 묘소는 경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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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兌顯> 子 一興(일흥) <子 世煥>
文名檀世累擧不中獎進後學 配李氏父厚榮 ○墓松山
글 솜씨가 세상에 알려져 여러 번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중앙에 나가지 않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부인은 이후영의 따님이다. 묘소는 송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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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海> 子 成麗(성려) <子 謜振>
司馬 配金氏父玩
사마를 지냈으며 부인은 김완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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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相> 子 振溟(진명)<子 萬雄>
配李氏父賢道
부인은 이현도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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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一世(37)
<繡> 子 以琢(이탁) <子 瑞天>
字君昇號淸源先生官侍御史毅宗庚寅鄭仲夫作亂大殺賢良橫屍滿街公奏請除屍奸黨惡之被誣以卒 配貞夫人申氏父評理司事彛 墓水洛洞今開豊郡靑郊
자는 군승이고 호는 청원선생이다. 관직은 시어사로서 의종(1146~1170) 경인(1170)년에 정중부(1106~1179)가 난을 일으켜 어질고 착한사람들을 많이 죽여 시체가 길거리에 가득 차자, 공이 시신을 수습하기를 청하였으나 간당들이 무고한 죄를 씌워 죽였다. 부인은 정부인 신씨로서 평리사 신이의 따님이다. 묘소는 수락동인데 지금의 개풍군 청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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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夢龜> 子 旻精(민정) <子 嶠齡>
字淸遠官左軍兵馬 配金氏父殿 墓楊州
자는 청원이고 관직은 좌군병마를 지냈다. 부인은 김전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주에 있다.
<夢龜> 子 漢精(한정)
字明遠 配金氏
자는 명원이고 부인은 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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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興> 子 世煥(세환) <子 泳>
字君實官密直司 配李氏父仁植 墓在楊根
자는 군실이고 관직은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이인식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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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麗> 子 謜(원) <子 重文,重武>
官司馬 配李氏父成三 墓在江西
관직은 사마를 지냈고 부인은 이성삼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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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振溟> 子 萬雄(만웅) <子 德河,成河>
字君彦號竹川官執義 配鄭氏父德弘 墓原州
자는 군언이고 호는 죽천이며 관직은 집의를 지냈다. 부인은 정덕홍의 따님이다. 묘소는 원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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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二世(38)
<以琢> 子 瑞天(서천) <子 陽喆>
字汝成志切雪讎無意仕宦明宗八年戊戌與將軍慶大升合謀率家奴討殺鄭仲夫以復其讐後登第朝靖大夫行禮賓卿追封金紫光祿大夫守司空右僕射 配碧珍郡夫人順興安氏父按察使瑛
자는 여성이다. 원수를 갚고자 벼슬에도 뜻을 두지 않았다. 명종 8년 무술(1178)년 장군 경대승과 같이 모의하여 집안의 노비들을 이끌고 정중부를 살해하여 그 원수를 갚았다. 그 후에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대부/행예빈경을 지내고 금자광록대부/수사공 우복야에 추봉되었다. 부인은 벽진군부인 순흥안씨로서 안찰사를 지낸 안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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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旻精> 子 嶠齡(교령) <子 天起>
字士成官止按察使 配淸州韓氏父琦竣 墓鹿洞
자는 사성이고 관직은 안찰사에 이르렀다. 부인은 청주한씨로서 한기준의 따님이다. 묘소는 록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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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煥> 子 泳(영) <子 益成>
字明叔右軍兵馬使 配金氏父伯秋 墓上同
자는 명숙이고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김백추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楊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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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謜> 子 重文(중문) <子 守仁>
官上將軍
配貞夫人姜氏父咸 墓上同
관직은 상장군을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강함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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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謜> 子 중무(重武)
配李氏父啓涵
부인은 이계함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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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雄> 子 得河(득하) <子 致仁>
字汝宗右軍兵馬使 配趙氏父弘珍 墓上同
자는 여종이고 우군명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조홍진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原州).
<萬雄> 子 成河(성하) <子 致賢>
字敬爾 配朴氏父秀夏 墓原州
자는 경이이고 부인은 박수하의 따님이다. 묘소는 원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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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三世(39)
<瑞天> 子 陽喆(양철) <子 是秋>
字慶補翰林直學匡靖大夫判厚德府事右文館大提學平章事 配西平郡夫人密城朴氏父禮賓袛侯再華 墓上同
자는 경보이고 한림<원>직<제>학/광정대부/판후덕부사/우문관대제학/평장사를 지냈다. 부인은 서평군부인 밀성박씨로서 예빈저후를 지낸 박재화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水洛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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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嶠齡> 子 天紀(천기) <子 命海>
字仁叟中書注書 配徐氏 墓上同
자는 인수이고 중서주서를 지냈다. 부인은 서씨이고 묘소는 위와 같다(鹿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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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泳> 子 益成(익성) <子 尙慶>
字士汝江陵道按察使 配李氏父湛 墓上同
자는 사여이고 강릉도안찰사를 지냈다. 부인은 이담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楊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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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文> 子 守仁(수인) <子 友珏>
字仁彦監察 配丁氏父應夏 墓光山南岡
자는 인언이고 감찰을 지냈다. 부인은 정응하의 따님이다. 묘소는 광산의 남쪽언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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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河> 子 致仁(치인) <子 聲玉>
字美哉上將軍 配金氏父洪 墓先山左岡
자는 미재이고 상장군을 지냈다. 부인은 김홍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산의 좌측언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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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夏> 子 致賢(치현) <子 鳴玉>
字信哉 配鄭氏父仲擧 墓上同
자는 신재이고 부인은 정중거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原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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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四世(40)
<陽喆> 子 是秋(시추) <子 鎭國, 定國>
字孟雲早入國學登第修文殿太學士判典理司事世子師致仕 配義城郡夫人金氏父三司事㺶 墓上同
자는 맹운이고 일찍이 국학에 입학하였다. 과거에 합격하여 수문전태학사/판전리사사/세자사(세자의 스승)에 벼슬이 이르렀다. 부인은 의성군부인 김씨로서 삼사사를 지낸 김두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水洛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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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紀> 자 命海(명해) <子 重有, 德有>
字伯三官司徒 配李氏父琇 墓上同左岡
자는 백삼이고 사도를 지냈다. 부인은 이수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은데(鹿洞) 좌측 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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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成> 子 尙慶(상경) <子 命虯>
字達甫武科主簿 配李氏父義行 墓江西
자는 달보이고 무과에 합격하여 주부를 지냈다. 부인은 이의행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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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成> 子 重慶(중경)
字達道 配金氏父相觀
자는 달도이다. 부인은 김상관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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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仁> 子 友珏(우각) <子 命秋>
字德文太保 配金氏父應秋 墓上同
자는 덕문이고 태보를 지냈다. 부인은 김응추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光山南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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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致仁> 子 聲玉(성옥) <子 重鎰, 大鎰>
字自寧中郞將 配光山金氏父潤 墓上同
자는 자녕이고 중랑장을 자냈다. 부인은 광산김씨인 김윤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先山左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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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治賢> 子 鳴玉(명옥)<子 大鎰>
字好徵 配崔氏父世重
자는 호징이고 부인은 최세중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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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五世(41)
<是秋> 子 鎭國(진국) <子 奎詳>
字士信號鷲嶺先生登第重大匡禮部尙書贈銀靑光祿大夫 配淸州郡夫人鄭氏父密直提學休 墓上同
자는 사신이고 호는 취령선생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중대광/예부상서를 지내고 은청광록대부를 증직받았다. 부인은 청주군부인 정씨로서 밀직제학을 지낸 정휴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水洛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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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秋> 子 定國(정국) <子 奎瑞>
字子安號孤軒官密直事忠宣王五年己卯胡元統一中國國事不安王與叔昌元妣會于金文衍之家引見諸縉紳曰卿等察時事否公拜而對曰宋朝已亡元兵大肆國憂已長矣以此憤發而卒
자는 자안이고 호는 고헌이다. 관직은 밀직[1]사을 지냈다. 충선왕(1308~1312) 5년 기묘(1279)년에[2] 원이 중국을 통일하여 나랏일이 불안해 지자 왕이 숙창원비와 김문연[3]의 집에서 회동을 하여 공을 만나보고 여러 신하?(縉紳)들에게 말하기를 ‘경 등이 살펴볼 때 어떠한가?’하자 공이 절하고 대답하기를 ‘송나라 조정은 이미 망하고 원나라 병사가 아주 방자하여 나라가 근심하고 있는 것이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하였다. 이로서 분통을 터트리며 죽었다.
[1]密直; 1275년(충렬왕 1년)에 추밀원사를 고쳐 부른 이름. 1356년(공민왕 5년)에 다시 추밀원사(樞密院使)로 불렸다가 1362년(공민왕 11년)에 또다시 밀직사사로 고쳐짐. 따라서 1362년 이전에는 밀직이라는 벼슬이 없었음.
[2]충선왕 때 기묘년은 없음
[3]김문연(金文衍, ?∼1314(충숙왕 1); 고려의 척신. 본관은 언양.
할아버지는 취려(就礪)이며, 아버지는 양감(良鑑)이다. 어려서 승려가 되었으나 환속하였다. 여동생 숙창원비(淑昌院妃)가 충렬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기회로 30세에 좌우위산원(左右衛散員)이 되었고, 그뒤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에 이르렀다.
1305년(충렬왕 31)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송방영(宋邦英)·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충선 두 왕의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책동하고, 충선왕비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를 서흥후 전(瑞興侯琠)에게 개가시키려는 것을 보고 원나라의 중서성에 그 내용을 고하였다.
또한, 왕에게 환국할 것을 종용했으나, 공주의 노여움을 사서 장형에 처해졌다.
1307년에 충선왕의 명으로 고려에 돌아와 국정쇄신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새로이 80여인의 관리를 임명하여 실권이 충선왕에게 돌아가게 하는 데 공이 컸다.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재즉위한 뒤 첨의중호(僉議中護)가 되었으며, 원나라로부터 신무장군 진변만호(信武將軍鎭邊萬戶)에 언양군(彦陽君)으로 봉해졌다.
그뒤 진변만호부달로화적(鎭邊萬戶府達魯花赤)이 더해졌으며 원나라에 다녀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호는 영신(榮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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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海> 子 重有(중유) <子 達曙>
字極重 集賢殿副提學 配高氏父翰林漢齊 墓先兆南岡上同
자는 극중이고 집현전 부제학을 지냈다. 부인은 한림을 지낸 고한제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의 남쪽언덕으로서 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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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海> 子 德有(덕유) <子 彦誠>
字君益監務 配高氏父華齊 墓先兆南岡上同
자는 군익이고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고화제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의 남쪽언덕으로서 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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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慶> 子 命虯(명규) <子 景伯>
字日曙監務 配金氏父重伯 墓上同
자는 일서이고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김중백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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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友珏> 子 命秋(명추) <子 時元>
字兌巨○時宋亡元興恥奉年號曰竹綠松靑節士可去避居山谷以卒
자는 태거이다. ○이때 송이 망하고 원이 흥하자 연호를 받드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말하기를 ‘대나무는 푸르고 소나무는 청청하니 절개 있는 선비는 떠나야 하는구나.’하며 산골짜기에 피하여 살다가 죽었다.
[비고]송(남송)의 멸망이 1279년이므로 대략 1270년대~1280년대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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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聲玉> 子 重鎰(중일) <子 尙秋>
字輝元官門下侍中 配密城朴氏父仲燁 墓楊根
자는 휘원이고 관직은 문하시중을 지냈다. 부인은 밀성박씨인 박중엽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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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聲玉> 子 大鎰(대일) <子 慶三>
면주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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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六世(42)
<鎭國> 子 奎祥(규상) <子 道浹>
字士甫號竹塢先生登第翰林學士朝靖大夫僉議府左司議大夫寶文閣大提學 忠宣王朝時事不平謝仕還鄕 配貞烈夫人安東金氏父右政丞文衍
자는 사보이고 호는 죽오선생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학사/조정대부/첨의부/좌사의대부/보문각대제학을 지냈고, 충선왕(1308~1312)때 나라가 평온하지 못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인은 정렬부인 안동김씨로서 우정승을 지낸 김문연[1]의 따님이다.
[1]김문연(金文衍); ?∼1314(충숙왕 1). 고려의 척신. 본관은 언양.
할아버지는 취려(就礪)이며, 아버지는 양감(良鑑)이다. 어려서 승려가 되었으나 환속하였다. 여동생 숙창원비(淑昌院妃)가 충렬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기회로 30세에 좌우위산원(左右衛散員)이 되었고, 그뒤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에 이르렀다.
1305년(충렬왕 31)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송방영(宋邦英)·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충선 두 왕의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책동하고, 충선왕비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를 서흥후 전(瑞興侯琠)에게 개가시키려는 것을 보고 원나라의 중서성에 그 내용을 고하였다.
또한, 왕에게 환국할 것을 종용했으나, 공주의 노여움을 사서 장형에 처해졌다.
1307년에 충선왕의 명으로 고려에 돌아와 국정쇄신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새로이 80여인의 관리를 임명하여 실권이 충선왕에게 돌아가게 하는 데 공이 컸다.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재즉위한 뒤 첨의중호(僉議中護)가 되었으며, 원나라로부터 신무장군 진변만호(信武將軍鎭邊萬戶)에 언양군(彦陽君)으로 봉해졌다.
그뒤 진변만호부달로화적(鎭邊萬戶府達魯花赤)이 더해졌으며 원나라에 다녀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호는 영신(榮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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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國> 子 奎瑞(규서) <子 道洽>
官閣老時宋亡恥奉胡元年號棄官還鄕 配洪氏 墓水原
벼슬은 각로[1]에 이르렀다. 이 때 송나라가 망하자 부끄럽게도 오랑캐인 원나라의 연호를 받들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인은 홍씨이다. 묘소는 수원에 있다.
[1]閣老; 일종의 정승급 벼슬?
[비고]우각의 자 명추(命秋)의 면주와 비슷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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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有> 子 達曙(달서) <子 汝虎>
字瑞爾號隱岩康宗朝登第翰林學士知制誥 配淑人平壤趙氏父侍郞潘 墓河陽
자는 규이이고 호는 은암이다. 강종(1211~1213) 때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학사/지제고를 지냈다. 부인은 평양조씨로서 시랑을 지낸 조반의 따님이다. 묘소는 하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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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有> 子 彦誠(언성) <子 鉉祚>
字仲叔 配李氏父植 墓忠州
자는 중숙이고 부인은 이식의 따님이다. 묘소는 충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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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虯> 子 景白(경백) <子 文淵>
配丁氏 墓水原
부인은 정씨이고 묘소는 수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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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秋> 子 時元(시원) <子 三擧, 重擧>
字自鳴監務 配平山申氏父欽 墓晉州
자는 자명이고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평산신씨로서 신흠의 따님이다. 묘소는 진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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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鎰> 子 尙秋(상추) <子 在行>
忠烈王朝奉使如元以直言忤旨謫于碧潼以卒 配完山李氏父禮敬 墓松岳
충렬왕(1274~1308) 때 사신으로서 원나라에 갔다가 직언을 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벽동으로 유배를 당하여 별세하셨다. 부인은 완산이씨로서 이례경의 따님이다. 묘소는 송악(지금의 개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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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鎰> 子 慶三(경삼) <子 相恂>
字子三 配李氏
자는 자삼이고 부인은 이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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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鎰> 子 榮三(영삼) 无后 --누락
字華敬 配朴氏
자는 화경이고 부인은 박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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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七世(43)
<奎祥> 子 道浹(도협) <子 湯雨>
字聖巨號白巖先生登第朝靖大夫禮賓卿贈金紫光祿大夫特進尙書省左僕射 配貞烈夫人南陽洪氏父平章事球 墓先塋下
자는 성거이고 호는 백암선생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대부/예빈경을 지내고 금자광록대부를 증직받았고 상서성 좌복야로 특진하였다. 부인은 정렬부인 남양홍씨로서 평장사를 지낸 홍구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 아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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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奎瑞> 子 道洽(도흡) <子 聖雨>
字邦輔監務 配朴氏父重茂 墓上同
자는 방보이고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박중무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水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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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奎瑞> 子 道潤(도윤)
配吳氏父契周
부인은 오계주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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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達曙> 子 汝虎(여호) <子 致三>
字敬叟重大匡吏部尙書 配貞夫人晉陽鄭氏父侍中顯 墓福州
자는 경수이고 중대광/이부상서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진양정씨로서 시중을 지낸 정현의 따님이다. 묘소는 복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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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彦誠> 子 鉉祚(현조) <子 元禮>
字自善左軍兵馬使 配申氏父相觀 墓上同
자는 자선이고 좌군명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신상관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忠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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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白> 子 文淵(문연) <子 處賢>
上將軍 配李氏父僉使智相 墓上同
상장군을 지냈고 부인은 첨사를 지낸 이지상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水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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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元> 子 三擧(삼거) <子 世彰>
字樂卿 配樂安金氏父監務粹澄 墓水原
자는 낙경이다. 부인은 낙안김씨로서 감무를 지낸 김수징의 따님이다. 묘소는 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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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元> 子 重擧(중거) <子 世明,世煌>
字伯擧密直使 配鄭氏父日瑞 墓上同
자는 백거이고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일서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晉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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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秋> 子 在行(재행) <子 鼎夏,鼎禹>
無意仕宦遯世以卒 配南陽洪氏 墓上同
벼슬에 뜻이 없어 세상을 등지고 살다가 별세하셨다. 부인은 남양오씨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松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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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三> 子 相恂(상순) <子 成八>
字恂用僉正高麗朝大有功終不登用退居田里 配洪氏父尙翰 墓楊根
자는 순용이고 첨정을 지냈으며, 고려조정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끝내 등용되지 못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다. 부인은 홍상한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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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八世(44)
<道浹> 子 湯雨(탕우) <子 萬瑞>
字禱霖登第三重大匡都僉議左政丞判典理司事贈銀靑光祿大夫特進上柱國 配彦陽郡夫人金氏父直提學屹 墓上同
자는 도림이고 과거에 합격하여 삼중대광/도첨의 좌정승/판전리사사를 지내고 은청광록대부를 증직받았으며 상주국[1]으로 특진하였다. 부인은 언양군 부인 김씨로 직제학을 지낸 김흘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先塋下).
[1]주국(柱國); 고려 시대에, 훈위(勳位)의 둘째 등급. 문종 때 종이품으로 정하였다가 충렬왕(1275~1308) 때 훈제(勳制)를 혁파하면서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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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洽> 子 聖雨(성우) <子 萬詳,萬裕>
密直使 配姜氏父景三 墓上同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강경삼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水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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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汝虎> 子 致三(치삼) <子 鎭兌,錫兌>
字命甫僉議府左司議 配淑夫人光山金氏父潤基 墓福州
자는 명보이고 첨의부 좌사의를 지냈다. 부인은 숙부인 광산김씨로서 김윤기의 따님이다. 묘소는 복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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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鉉祚> 子 元禮(원례) <子 世綱>
字允而有文名 配柳氏 墓月城山先塋下
자는 윤이이고 글로서 이름이 알려졌다. 부인은 류씨이다. 묘소는 월성산의 선영아래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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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淵> 子 處賢(처현) <子 守澤>
左軍兵馬使 配崔氏父仁齊 墓先山南駕洛洞
좌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최인제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산의 남쪽 가락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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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擧> 子 世彰(세창) <子 兌豪>
字汝煇都觀郞 配申氏父監務珹 墓上同
자는 여휘이고 도관랑을 지냈다. 부인은 신씨로서 감무를 지낸 신성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水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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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擧> 子 世明(세명) <子 兌起>
官奉禮 配慶州李氏父天興
관직은 봉례를 지냈다. 부인은 경주이씨로서 이천흥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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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擧> 子 世煌(세황) <子 兌精,兌憲>
字天澄江陵道按察使 配安東金氏父淵宅 墓先山下
자는 천징이고 강릉도 안찰사를 지냈다. 부인은 안동김씨로서 김연택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산 아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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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行> 子 鼎夏(정하)
配李氏父震益 墓在上同
부인은 이진익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松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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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行> 子 鼎禹(정우) <子 淸輿>
因朝野之亂入居智異山以卒
조야의 난으로 인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살다가 별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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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恂> 子 成八(성팔) <子 處海>
字益煇司馬 配李氏父岡 墓上同
자는 익휘이고 사마를 지냈다. 부인은 이강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楊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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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九世(45)
<湯雨> 子 萬瑞(만서) <子 師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