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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충주전통문화회 원문보기 글쓴이: 동수마루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괴산
충청북도 중앙부에 있는 괴산군(槐山郡)은 동쪽으로는 백두대간 분수령을 경계로 경상북도 문경·상주시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음성군·충주시, 서쪽으로는 진천·증평·청원군, 남쪽으로는 보은군에 접한다.
백두대간 등에 업고 가슴에 괴강 품은 고을
우선 ‘길’ 이야기로 괴산을 풀어보자. 1920년대에 깔린 조치원~충주간 충북선 철로는 처음엔 괴산의 청안면 중심부를 지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러나 괴산 주민들은 양반마을이 번잡해진다며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 결과 노선이 바뀌어 역이 들어선 허허벌판은 신청안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경부선이 공주를 비껴간 것과 사정이 같다. 청안 주민들은 이 일로 해서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청주로 볼일을 보러 나가기 위해서는 십리 길을 다리품 팔아야 했으나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신청안은 나중에 증평읍이 되었다가 인구가 가파르게 늘어나자 몇 년 전 증평군으로 승격해 떨어져 나갔다. 아직도 괴산 주민들은 증평을 분가한 ‘작은집’ 정도로 여기고 있다. 큰 길이 아니라 마을을 잇는 작은 길을 낼 때도 당산은 반드시 지켰다. 그리고 풍수상 마을 입구가 조금 허(虛)하다는 평가가 나오면 반드시 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이런 나무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마을을 상징하는 당나무가 되었다. 지금도 괴산 지역을 지나다보면 마을 어귀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나 은행나무, 그리고 소나무들이 서있는 광경을 쉽사리 목격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단지 당나무와 숲을 둘러보는 테마로 괴산으로 들어서곤 한다. ]
500년쯤 전에 조성했다고 하는 문광면 전법 마을의 느티나무 숲엔 고목만 10여 그루가 있다. 마을 근처에 위치한 양곡저수지 옆으론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있다. 또 청안초등학교에 있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165호)나 괴산도서관 앞에 자라고 있는 느티나무는 1,0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주민들과 동고동락해왔다. 읍내 검승리 기곡 마을의 개울가에 선 느티나무도 수령이 1,000년쯤 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목이다. 낙영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공림사 느티나무도 제법이다. 수백 년 수령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20~30그루가 병풍을 치듯 절집 앞의 허전한 계곡을 넉넉하게 가려준다. 이 느티나무 숲이 없었다면 공림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공허하게 보였을 것이다. 이 중 한 그루는 절집 마당 한쪽의 바윗덩이 옆에서 자라고 있는데, 하늘을 향해 용틀임하며 오르는 나무의 자태와 절집 풍광은 잘 어우러진다. ]
장연면 오가리의 수령 800~1,000년의 느티나무 고목들인 삼괴정(三槐亭·천연기념물 제382호)은 괴산의 얼굴로까지 대접받는 신목(神木)이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마다 하괴목 아래에서 성황제를 지내고 있다. 여기서 가까운 신촌 마을에도 수령 900년쯤 된 은행나무가 우뚝하다. 이렇듯 괴산의 당나무를 읊는 데도 숨이 가쁠 지경이지만, 겨울부터 이른봄까지는 웬만한 미적 감각을 가진 이가 아니라면 실망하기 쉽다. 물론 요즘 같은 봄날엔 연둣빛 신록으로 물들어 가는 나무도 감동이긴 하지만, 사실 이런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를 보려면 아무래도 낙엽이 지는 늦가을이 제격이다.
이럴 때 한겨울에도 푸른 소나무가 빠지면 섭섭하다. 청천면 삼송리의 왕소나무(천연기념물 제290호)가 지닌 또 하나의 미덕은 ‘힘’이다. 마치 두 마리의 거대한 용이 서로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듯한 자태에선 거역할 수 없는 엄청난 기가 가득 넘친다. 당연히 신목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렇듯 나무를 빼놓곤 괴산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괴산을 일컬어 ‘나무의 고을’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웬만한 마을엔 아름드리 느티나무 몇 그루쯤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다. 그래서 괴산이 진정한 나무의 고을이 되기엔 뭔가 2%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이런 결핍을 채워주는 게 바로 미선나무와 망개나무다. 특히 미선나무는 괴산의 품위를 한 단계 높여주는 소중한 자원이다.
우리나라가 자생지인 미선나무는 물푸레나무과의 낙엽관목으로 세계적으로 1속 1종밖에 없는 특산종이다. 1919년 이웃의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나 그 후 그곳에선 멸종되었고, 이후 괴산에서 계속 발견되었다. 1955년 장연면 송덕리, 1965년 장연면 추점리, 1967년 칠성면 율지리에서 자생지가 학계에 보고된 것이다. 이후 이웃의 영동과 보은, 그리고 북한 대성산에서도 자생지가 보고되고 있으나 괴산의 얼굴은 단연 미선나무라 할 수 있다. 괴산에선 가로수를 이 나무로 조경하고, 18년 동안 미선나무의 연구와 육성에 매달려온 인물도 있다.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 나들목으로 나오면 감물을 지난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절한 김시민(金時敏·1554-1592)과 그의 숙부인 김제갑(金悌甲·1525-1592)의 위패를 모신 충민사(忠愍祠)에 들러 향 사르고, 사당 앞으로 흐르는 괴강을 바라본다.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발원해 보은·청원·괴산·충주를 적시고 남한강에 합류하는 달천은 일찍이 조선팔도에서 가장 맛이 좋은 물로 알려져 왔는데, 괴산 사람들은 이 강물을 따로 괴강이라 부르며 아낀다. 괴강 주변엔 고산정·황니판·관어대·은병암·제월대·창벽·영객령·영화담·고산정사를 고산9경이라는 명소가 있다.
우리는 괴강 기슭에서 현대사의 수레바퀴에 맞물려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한 인물을 만난다. ‘임꺽정’이라는 역사소설로 널리 알려진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1888-1968)다. 괴강에서 멱을 감고 낚시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벽초의 생가는 읍내 동부리에 있고, 제월대가 있는 제월리엔 잠시 머물던 옛 집터가 있다.
벽초의 집안은 대대로 조선왕조 양반 사대부 계층이었다. 증조부 홍우길은 이조판서요, 조부 홍승목은 병조참판을 지냈다. 한일합방 당시 금산군수였던 부친 홍범식(洪範植·1871-1910)은 이에 항거해서 ‘나라가 파멸하고 임금이 없어지니 죽지 않고 무엇하리’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맨 우국지사다. 벽초는 부친의 뜻을 받들어 민족의 자주 독립과 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일제시대에 ‘조선의 3대 천재’라고 불린 그는 일찍이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다가 귀국하여 1919년 3·1운동 때 자신의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만들고 3월19일 괴산 장날에 봉기하여 괴산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1년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그 후 일제 최대의 항일운동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여 좌우합작의 민족협동전선론으로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자 노력했다. 8·15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월북한 뒤 영영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조선시대 민중들의 삶에 대한 의식과 정조를 일관되게 형상화했다는 평을 듣는 ‘임꺽정’은 벽초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 역사 소설이다. 1928년부터 10여 년 간 연재된 ‘임꺽정’은 아쉽게도 끝내 완결을 보지 못했다.
벽초는 생애에 단 한 편의 소설을 썼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한국문학사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한국 근대 역사소설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으로서 ‘한국 리얼리즘문학의 최고봉’이요, ‘순우리말의 보고(寶庫)이자 대해(大海)’로 평가받는다. 누가 뭐라 해도 이렇듯 ‘임꺽정’에 대한 평가는 최고다. 어디 이뿐이랴. 이 소설엔 순수 우리말을 비롯해 문화·지리·풍속·음식·의상·건축·놀이·무술 등 순수한 조선 백성들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한동안 ‘홍명희’라는 이름은 물론 그의 작품 ‘임꺽정’은 남한에서 금기의 대상이었다. 월북작가라는 이유였다. 그것도 북한에서 아주 크게 성공한. 벽초의 월북 당시 가족들도 1948년 8월 여러 차례 나눠 모두 북으로 갔는데, 벽초 집안은 북한에서도 제법 대우를 받고 명문 집안으로 성공했다. 아들 홍기문은 이조실록을 완역한 유명 국학자, 홍기무도 북한 사회과학원 소장을 역임했다. 손자인 홍석형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함경북도당 책임비서이고, 홍석중은 ‘황진이’를 쓴 유명 소설가다.
이로 인해 고향인 괴산에서조차 한동안 홍명희라는 실명 대신 ‘홍모씨’란 익명으로 불렸다. 괴산군민회관 오른편에 떡 버티고 선 ‘홍범식 추모비’에서 괴산 주민들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는데, 추모비는 그러나 1998년에야 세워졌다. 홍명희가 한일합방에 항거해 자결한 최초의 우국지사임에 비춰봐서 늦어도 한참 늦은 셈이다. 아들 벽초가 월북했다는 데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벽초의 생가와 옛집터, 기념비 등 벽초와 관련 있는 모든 일에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벽초 생가 근처인 옛 장터 자리에 1985년 만세운동유적비가 세워졌으나 당시 홍명희 이름은 빠져 있었다. 지금의 유적비는 이념 대립의 그림자가 조금 희미해진 1998년에 다시 건립된 것이다. 여기엔 만세운동을 앞에서 이끌었던 벽초의 이름이 당당히 새겨져 있다.
또 있다. 괴강이 휘감아 도는 제월대에 지난 1998년 홍명희문학비가 세워졌지만 그 이듬해 5월 철거해야만 했다. 홍명희라는 인물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단체의 반대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양측은 서로 한 발씩 양보해 비석을 다시 세우기로 했는데, 비문에 대한 의견을 여러 차례 주고받은 끝에야 다시 들어설 수 있었다.
그의 문학비가 생가가 아닌 제월대에 서게 된 것은 괴강이 바라다보이는 이곳에 벽초가 낚시를 즐겼던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문학비 앞엔 ‘통일의 그 날까지 더불어 한 마음’, ‘끊어진 허리를 이어 눈물 씻는 그 날이여’ 등 전국의 문인 등이 통일을 기원하며 보낸 글귀를 새긴 노둣돌 95개가 박혀 있다.
제월대의 부드러운 오솔길은 빼어나지는 않으나 강물과 어우러진 광경은 참 소박하다. 고풍스런 고산정도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주차장 한 켠에 달랑 서있는 홍명희문학비가 조금 썰렁하게 보인 것은 때마침 불어닥친 짙은 황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왕에 기념비를 세우려면 주변을 조금 넓게 하거나 제월대 정자 근처의 오솔길 옆에 자리 잡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도 이념 대립의 흔적일까?
제월대에서 벽초를 생각하며 맑은 괴강을 굽어보았다면 이젠 읍내의 생가로 갈 차례다. 제월대에선 걸어서 20여 분이요, 승용차로는 금방이다. 괴강의 지류인 동진천 옆의 도로변에 있는 벽초 생가는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사대부집이다. 1727년 건립되었고, 1861년 증축된 이 집엔 증조부와 조부가 기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랑채와 안채 등은 이미 복원했고, 현재 행랑채와 창고 등도 복원 중에 있지만, 그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벽초 생가는 1919년 이우현이라는 사람에게 팔렸다. 벽초가 괴산만세운동을 주도하여 감옥에 갇힌 후 가세가 기울자 이 집을 내놓고 선산이 있는 제월리 산수골 안쪽으로 이사했던 것이다. 그 뒤 이씨의 아들이 이곳을 지켰으나 1997년 세상을 떠나면서 줄곧 비어 있었다. ‘소설 임꺽정 저자 홍명희 생가’라는 표지판도 반대 단체에 의해 철거되는 등 관리 부실로 눈에 띄게 폐허로 변하던 집을 우여곡절 끝에 군에서 매입했다.
세상이 많이 변해 매년 가을 성황리에서 열리는 홍명희문학제도 벌써 10회를 넘겼다. 월북작가 벽초는 자신의 고향땅에서 완전히 복원된 것일까. 아쉽게도 아직은 아니다. 괴산은 소설의 주인공인 ‘임꺽정’과 아내인 ‘황운총’을 군의 마스코트로 삼았으면서도 복원중인 그의 생가는 정작 ‘동부리 고가’라는 애매한 용어로 핵심에서 비껴가고 있다. 조만간 완전 복원 후 드러날 벽초 생가의 명칭은 우리에게 드리운 이념 대립 상처의 치유 여부를 가늠하는 표본이 될 것이다.
길의 영향도 있다. 이 백두대간 분수령은 대부분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도계를 이루는데, 선유동 상류인 문경 완장리 일부, 화양동 상류인 상주 입석리, 신월천 상류인 상주 운흥·중벌리는 백두대간 서쪽의 한강 수계이면서도 행정구역 상 경상북도에 속한다. 이 마을들을 이어주는 길이 이렇게 행정구역을 넘나들기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복잡해 보이는 계곡길이 더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실제로 길손도 이번 여정에서 길을 여러 차례 잘못 들기도 했다.
괴산은 계곡의 고을이다. 큼직한 계곡만 손꼽아도 문장대에서 발원한 신월천, 눌재에서 발원한 화양천, 장성봉과 악희봉 사이에서 발원한 쌍곡천, 조령과 백화산에서 발원한 쌍천 등이 있다. 또 이 물줄기는 여러 개의 지류를 품고 있으니 그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괴강의 고산구곡을 비롯해 화양구곡, 갈천구곡, 쌍곡구곡 등 계곡의 미학을 일컫는 9곡을 가장 많이 품고 있는 고을이 바로 괴산일 것이다. 그래서 사실 괴산은 여름 나들이에 아주 적합하다. 이렇게 본다면 괴산의 봄은 미선나무요, 여름은 청정 계곡, 가을은 나무숲이라는 볼거리가 더해지는 것이다. 산악미 넘치는 백두대간의 겨울 설경은 두 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괴산의 계곡 중 화양동(華陽洞)만큼 영욕을 넘나든 계곡도 없을 것이다. 백두대간 늘재에서 북으로 곧게 뻗어내리던 작은 실개천은,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왕소나무가 뿌리내리고 있는 삼송리 지나고, 대야산에서 발원한 선유동을 받아들이면서 덩치를 키운 다음 화양동이란 이름을 얻는다. 깨끗한 물과 기묘한 바윗덩어리가 조화롭게 절경을 이룬 이곳은 맑은 기운이 넘쳐나는 백두대간의 별천지다.
백두대간 기슭의 깊은 산중에 은자처럼 숨어있던 이 계곡을 역사의 전면으로 드러나게 한 이는 조선시대의 유학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000번 이상 언급된 송시열은 83세의 나이에 ‘죄인들의 수괴’라는 죄목으로 정읍에서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한국의 유학자 중에서 우암만큼 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그를 추앙하는 이들은 ‘사문(斯文)의 종사(宗師)’, ‘아동(我東)의 주자(朱子)’, ‘태산교악(泰山喬嶽)’이라 하고, 반대쪽에 있는 이들은 ‘당쟁의 화신’, ‘권력욕의 화신’, ‘골수 사대주의자’ 등이라 비난한다. 그를 일컫는 송자(宋子)에 대한 해석은 극단적이다. 송시열을 추앙하는 이들에겐 공자·주자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존칭하여 쓰는 말이고, 비난하는 쪽은 욕할 때 쓰이는 ‘놈 자(者)’라는 최하급의 비칭으로 ‘송자(宋者)’라 부른다. 그에 대한 평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단어다.
이런 송시열은 일찍이 화양동 경치를 사랑하고 즐겼다. 회덕에서 가끔 이곳을 찾아오던 그는 60세가 되던 1666년(현종 7) 여름에 금사담 위에다 ‘바위에 틀은 둥지’라는 뜻의 암서재(巖棲齋)를 짓고는 아예 정착해버렸다. 화양동주(華陽洞主)라는 송시열의 또 다른 호에서 그가 화양동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현재 화양동의 대표 경치로 꼽히는 화양구곡(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도 정계에서 은퇴하고 이곳에 은거하던 우암이 손수 명명했다.
화양동을 들어서서 물가에 높이 솟은 경천벽과 구름 그림자 잠겨있는 운영담을 지나면 길 양쪽으로 어린이 키 만한 돌기둥 두 개가 보인다. 조선시대에 화양서원을 찾은 지체 높은 양반들이 말에서 내리던 하마소(下馬所)다. 조선 말기 한량으로 전국을 떠돌던 대원군 이하응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문지기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이곳을 지나면 곧 화양서원(華陽書院)이다. 화양서원은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죽은 후 갑술옥사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송시열에 대한 신원(伸寃)과 추모사업이 시작되면서 1696년(숙종22) 노론계 관료와 유림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처음엔 화양동 밖의 만경대에 지었는데, 나중에 화양동 안 만동묘(萬東廟) 옆으로 이건했다.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1703년(숙종 29)에 화양동에 세워진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의 신종, 그리고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했다.
만동묘 오른쪽 전면에 자리한 서원은 마치 만동묘를 보호하듯 북향하는 건물배치를 하였다. 대부분의 집이나 사찰 사당·서당이 햇볕을 받는 동향이나 남향, 동남향으로 짓는데, 화양서원과 만동묘 사당을 굳이 북향으로 지은 것은 명나라를 향한 사대의식의 발로였다고 한다.
어쨌든 송시열을 배향한 화양서원은 영조 때에는 관찰사로 하여금 봄가을로 제사지내게 하는 등 17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나라 안에서 가장 힘을 자랑하는 서원으로 자리 잡았다. 서원은 원래 유생의 사학기관으로서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유학을 장려함을 목적으로 세워졌으나, 조선 중기 이후 유생들이 곳곳에 서원을 짓고 이를 근거로 정쟁을 일삼으며 백성을 못살게 괴롭히는 폐단이 크게 나타났다. 말썽 많은 화양서원이 그 대표격이었다.
화양서원은 국가적인 지원에다가 노론 관료들과 유생들의 재산 기증이 이어짐에 따라 서원의 재산은 갈수록 불어났고, 그사이 이곳은 유생들의 세력 근거지로 변해가면서 민폐의 온상으로 변해갔다. 대표적인 게 화양묵패(華陽墨牌)다. 이는 만동묘와 화양서원에서 제사 지내는 데 들어가는 비용조달을 위해 인근 고을의 수령들에게 보내는 사사로운 세금청구서였다. 만약 이를 거부할 경우, 화양동 유생들은 수령을 축출하거나 백성들에게 사사로이 처벌을 가하는 일을 자행했다. 화양동에서 된통 망신을 당해 서원을 ‘도둑놈 소굴’이라며 이를 갈던 대원군은 훗날 섭정을 시작하자 1870년 서원철폐령을 내렸다. 당연히 가장 먼저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철폐되었다.
굳게 닫힌 화양서원 앞 물가엔 읍궁암이 있다. 북벌을 꿈꾸던 효종이 승하하자 우암이 새벽마다 올라가 활처럼 웅크려 절하며 울었다는 사연이 전한다. 금빛 모래가 펼쳐져 있는 금사담(金沙潭) 주변은 참으로 절경이다. 우암은 처음엔 2곡인 다섯 칸 짜리 화양계당(華陽溪堂)을 지었다가 그 후 다시 4곡인 이곳으로 옮겼다. 옥빛 청수 너머의 큼직한 바위엔 우암이 제자를 가르치던 아담한 암서재가 앉아 있다. 자연과 인공의 절묘한 조화는 화양동의 백미를 이룬다. 송시열은 이곳의 절경에 시 한 수를 지었다. ‘푸른 물은 성난 듯 소리쳐 흐르고, 청산은 찡그린 듯 말이 없구나, 조용히 자연의 뜻 살피니, 내 세파에 연연함을 저어하노라.’
우암의 대표적인 저서인 ‘송자대전’의 ‘암서재 중수기’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이 골짜기로 들어오면 심신이 상쾌해져 마치 선경에 있는 것 같다. 여기서 회덕을 돌아보면 회덕은 참으로 진세(塵世)더라. 어찌 다시 무릉도원을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다. 우암에 대한 평가는 냉정할 필요가 있겠으나, 분명한 사실은, 백두대간이 빚은 화양동 계곡의 아름다움은 재평가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3~4km 정도의 화양동을 산책한 후 되돌아나와 승용차로 선유동을 지난다. 선유동은 화양동의 길이에 절반쯤 되는 1.5km 정도지만 화양동 미학에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는 절경에 호젓함까지 갖추고 있다. 이곳의 아홉 경치를 꼽은 선유구곡(仙遊九谷)은 퇴계 이황이 절묘한 경치에 반하여 아홉 달을 돌아다니며 지은 것이라 한다. 이 경치를 완상하며 걷는다면 참으로 적절한 계곡 답사가 된다.
선유동을 나와 517번 지방도를 타고 쌍곡계곡을 지나 34번 국도를 타면 연풍(延豊)으로 간다. 연풍은 괴산의 일부가 되기 전엔 현이 있던 고을이다. 연풍현의 관아 건물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고, 동헌인 풍악헌만이 연풍초등학교 교정 한쪽에 남아 있다. 연풍은 문경과의 사이에 조령과 이화령을 두었으나 성황을 이뤘던 문경과 달리 비교적 한적한 고을이었다. 지금은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면서 연풍 나들목을 만들어 놓았으나 역시 호젓한 편이다.
조금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여기서는 단원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를 생각하게 된다. 단원은 46세의 나이로 그의 마지막 벼슬살이인 연풍 고을 원님(1791-1795)이 되었다. 현감으로 있을 당시 몇 년간 삼남지방을 휩쓴 가뭄을 현명하게 극복해내기는 했으나 매 사냥을 일삼으며 사람을 동원했다는 탄핵을 받고 3년여를 봉직하다 물러났다.
단원의 자화상격인 ‘호귀응렵도(豪貴鷹獵圖)’는 연풍 현감 시절에 즐긴 매 사냥 장면을 그린 것이라 한다. 미술사학자들은 단원의 그림 분위기가 연풍 고을 원님을 거치면서 화원풍에서 사대부들의 문인화풍으로 바뀌었다고 진단한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고을인 것이다.
우리나라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원풍리 마애불상군(보물 제97호)을 지나면 조령이다. 우리 조상은 백두대간 산줄기에 수많은 고갯길을 만들며 서로 문물과 정을 교류했다. 남한 땅에만 해도 대관령·조령·추풍령·여원재 등 백두대간은 지리적·역사적·문화적으로 중요한 큰 고개를 많이 거느리고 있다. 이 가운데 조령(새재)은 조선시대에 가장 큰 고개로서 명성을 드날렸다. 조령은 고려시대 전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으나 본격적으로 개척된 것은 조선 태종 때다. 조령은 여러 뜻을 지니고 있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높은 고개’라는 유래가 가장 흔히 알려져 있다. 그래서 새재다. 조령(鳥嶺)은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또 옛 문헌에 기록된 초점(草岾)에서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고도 해석한다. 그리고 ‘새’를 ‘사이’로 풀면, 새재는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고개가 되고, ‘새로운’으로 이해하면 계립령 대신에 ‘새(新)로 개척한 고개’로 해석할 수 있다.
괴산의 입장에서 보면 아쉬움이 많다. 조선팔도에 널리 이름 날린 ‘새재’라는 이름도 문경이 선점(?)한 상태라 괴산쪽 사람들은 입에 힘을 주고 ‘조령’이라고 고집하고 있다. 문경은 옛길을 흙으로 복원하고, KBS 영화촬영장을 끌어들여 대박을 터뜨렸으나 괴산은 예나 지금이나 상대적으로 한산하다. ‘태조 왕건’ 오픈 세트를 지을 당시 촬영팀에서 괴산에 먼저 오픈세트장 건립을 제안했으나 이를 거절하는 바람에 문경으로 넘어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쉽긴 해도 괴산쪽 고갯길도 나름대로 장점을 지니고 있다. 문경쪽에서 옛길을 걸어 올라온 사람들은 조령3관문에서 발길을 멈춘다. 그러나 고개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로 완성이 되는 법이 아니겠는가. 조령3관문이 끝이 아니라 옛길을 소조령까지 잇거나 이게 마땅치 않다면,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받고 초가를 지어 행궁으로 삼았다는 수옥폭포까지 가는 길이나마 온전히 잇는다면 비로소 조령이든 새재든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닐까. 황사 자욱한 날, 조령 고갯마루가 어두워지고 있다. 길손은 조선시대 나그네처럼 저무는 해를 긴 한숨으로 바라본다. [ 글·사진= 민병준] 괴산댐은 괴산군 칠성면의 남한강 지류인 달천을 가로질러 만든 수력발전용 댐이다. 171m 길이에 높이가 28m인 이 댐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착공해 57년에 완공한 것으로 충북 내에 세워진 첫 발전소이자 나라 안에서 설계와 시공 등 우리 기술만으로 세워진 첫 수력발전소다.
괴산 주민들은 달천을 따로 괴강이라고 부른다. 괴강 기슭엔 여러 명소가 산재해 있는데, 고산정·황니판·관어대·은병암·제월대·창벽·영객령·영화담·고산정사를 고산9경이라 한다. 고산은 넓은 들판 가운데 하나의 산이 돌출하고 괴강의 푸른 물이 이를 감싸고돌아 태극의 형상을 이룬다. 고산정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멀리는 속리산에서 발원한 푸른 물이 정자 밑을 돌아 흐르고, 남으로는 작은 봉우리들이 마치 말을 탄 수천의 군사가 진을 친 듯하다.
화양동계곡
우암 송시열은 이곳에 은거하면서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화양구곡을 지었다. ①기암의 형세가 길게 뻗치고 높이 솟은 것이 하늘을 떠받친 듯하다는 경천벽, ②물이 소를 이루어 구름이 비친다는 운영담, ③효종대왕이 돌아가심을 슬퍼한 우암 송시열이 새벽마다 올라가 통곡했다는 읍궁암, ④첩첩이 겹쳐 장관을 이루는 첨성대, ⑤금빛 나는 모래가 널리 펼쳐져 있는 금사담, ⑥구름을 찌를 듯한 2단으로 된 시냇가의 큰 바위인 능운대, ⑦용이 누워 꿈틀거리는 듯한 와룡암, ⑧학이 둥지를 틀었다는 낙락장송이 운치 있는 학소대, ⑨넓은 시냇가에 바위가 용의 비늘처럼 이어져 있어 티 없는 옥반처럼 느껴진다는 파천이 그것들이다. 입장료는 어른 1,600원, 청소년 600원, 주차료는 4,000원. 전화 속리산 국립공원 화양동 관리사무소 043-832-4347
선유동계곡
각연사 경내엔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433호)이 있다. 통일대사탑비(보물 제1295호)는 고려 전기의 승려인 통일대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비석으로, 각연사 동남쪽의 보개산 계곡을 따라 1㎞쯤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통일대사탑비에서 동남쪽에 있는 보개산 주봉을 향해 약 30분 정도 올라가면 중봉 능선 상에 통일대사부도(보물 제1370호)가 있다. 전화 043-832-6148.
공림사 6·25전쟁으로 8동의 건물 중 영하문(暎霞門)과 사적비만 남고 모두 소실됐고, 1966년 법당과 요사채를 재건했다. 극락전엔 조선 초기 작품인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공림사엔 20여 그루의 느티나무 고목이 바위산인 낙영산 암봉과 잘 어울린다. 전화 043-833-1029.
원풍리 마애불상군 두 불상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불상 전체가 평면적으로 새겨졌는데, 곱슬머리 위로는 펑퍼짐한 살상투가 솟아 있으며 약간 넓적한 얼굴에는 가늘고 긴 눈과 길게 다문 입을 표현하고 입가에는 미소를 가득 담고 있어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라 하는 세겹 목주름이 희미하게 나타나 있고 신체는 반듯한 어깨에 평평하고 형식적인 가슴이 표현됐다.
양어깨를 걸치는 법의는 통견(通肩) 형식이며, 옷주름은 무딘 선으로 나타냈다. 불상을 둘러싸고 있는 후광인 광배엔 화불(化佛)이 배열되어 있는데, 여러 곳이 닳아 없어져 자세하지 않다. 전설에 따르면 통일신라 말기에 범어사의 고승인 여상조사가 조성했다고 하며, 고려 말기에 나옹선사가 조성했다고도 한다. 조각기법으로 보아 고려 중엽인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안사 삼층석탑 석탑의 각 부분이 훼손되지 않은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탑신부가 균형을 보이고 있어 안정감을 준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이 3단으로 줄어들고 뭉툭하게 표현된 점이나, 기단이 완전하지 않고 간략하게 표현된 점 등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충민사 자연 경사 언덕을 따라 외삼문·내삼문·사당이 일렬로 서 있다. 바깥마당에는 김시민장군신도비와 박종화가 짓고 이상복이 쓴 김시민장군유적정화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단층 정자로 마룻바닥을 따라 평난간(平欄干)을 둘렀다. 처마 밑에는 이원(李元)이 쓴 ‘孤山亭(고산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안에는 명나라 사신으로 온 주지번(朱之蕃)이 1606년(선조 39)에 쓴 ‘湖山勝集(호산승집)’, 역시 명나라 사신인 웅화(熊花)가 1609년(광해군 1)에 쓴 ‘孤山亭舍記(고산정사기)’ 등의 편액이 있는데, 이 편액은 명필로 이름이 나 있다.
칠충사
애한정
도명산 마애불
청천 미륵산성
연풍성지
조령산 자연휴양림
망개나무 자생지
왕소나무(용송)
삼괴정
읍내리 은행나무
용추폭포
수옥폭포
갈론계곡
쌍곡계곡
일정별 길라잡이
●동부권(연풍권) 옛날 연풍현에 속하던 지역이다. 조령3관문, 수옥폭포, 마애불좌상, 연풍성지 등과 장연면의 미선나무 자생지, 삼괴정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연풍 나들목에서 바로 연결된다.
●남부권(속리산권) 전체가 속리산 국립공원 권역에 속한다. 우암 송시열이 은거했던 화양동을 비롯해 선유동, 쌍곡 등 이름난 계곡이 펼쳐져 있다. 보물 4점이 있는 각연사, 느티나무가 좋은 공림사, 웅장한 왕소나무 등이 있다. 달천 주변의 명승지도 이 권역에 넣을 수 있어 실질적으로 괴산 여행의 중심권이 된다.
●서부권 불정면의 정인지묘, 청안면의 보안사 3층석탑, 청안향교 등이 있다. 괴산 중심부로서 벽초 홍명희 생가, 괴강유원지 등이 있는 괴산읍도 이 권역에 넣는다.
●1박2일 화양동 주변이나 조령산 자연휴양림에서 숙박한다. 추천 일정은 괴산 나들목~괴강~화양동(숙박)~선유동~쌍곡계곡~조령3관문~연풍 나들목. ●2박3일 괴산을 대부분 돌아볼 수 있는 일정이다. 추천 일정은 괴산 나들목~괴강~충민사~고산정~홍명희 생가~전법 마을 느티나무~화양동(1박)~선유동~쌍곡계곡~조령3관문~조령산 휴양림(2박)~연풍성지~연풍 나들목.
접근드라이브코스
●고속·시외버스
●군내버스
숙식
●남부권 유명한 계곡을 중심으로 화양동·선유동·쌍곡 이렇게 3개 권역으로 나뉜다. 화양동 입구 강변에 세느파크(832-9985), 화양동 입구 삼거리 민박촌에 삼화민박(832-4574), 느티나무집(832-4983), 정준웅민박(832-4567) 등이 있다. 매표소 안쪽의 화양동계곡에도 민박집이 있다. 운영담 근처에 산장민박(832-4365), 금사담 앞에 금성민박(832-4351)과 화양민박(832-2136), 능운대 옆에 삼화민박(832-4574) 등이 있다. 작은방 20,000~30,000원선. 선유동 입구엔 숙식할 곳이 그리 많지는 않다. 선유동민박(833-8074) 등 몇 집이 민박을 친다. 선유동휴게소(833-8008)에서도 민박과 식사 가능. 쌍곡계곡은 도로변의 계곡을 따라 펜션, 민박, 식당 등 숙식할 곳이 많다. 등산로 입구에 큼직한 주차장과 휴게소가 있다. 통나무집 민박집인 칠보산장(832-5594), 밸리하우스(832-0955), 보개산장(832-8002) 바위산장(832-9984), 군자산가든(832-1990) 등이 있고, 정수철민박(043-832-6721), 장영춘민박(832-5998), 김충식민박(832-6566) 등이 있다. 7~8월엔 야영장을 운영한다.
●서부권 청안·소수·사리·불정·문광면이 이 권역에 속하는데, 유명 관광지에서 벗어나 있어 숙식할 곳이 그리 많지 않다. 사리면 수암리에 보광산관광농원(833-3333 ), 청안면 읍내리에 청안파크(836-1013) 등이 있다. |
첫댓글 선생님 덕분에 자리에 편히 앉아서 충청도일대를 한눈에 본듯합니다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