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흔들린다. 하늘의 구멍으로 휘말려 사라진 오지의 뜨거운 볕은 바람으로 나타나 춤을 추고 있다. 바람의 몸짓은 가늘고 날렵한 콧날 양옆으로 힘겹게 벌어진 듯한 산티아의 처진 눈과 주름진 이맛살을 간지럽게 한다. 회색 두건을 쓴 섬 전체에 빛이 밝혀졌다. 너도밤나무의 등걸과 팔뚝, 그리고 잎겨드랑이 사이로 난 수꽃에서는 보드라운 숨소리가 들린다. 바람과 어우러져 볼을 간질이는 나무의 호흡이 낮에 나무를 타고 올라서 보았던 깃털구름같이 부드럽다. 오랫동안 양말을 신지 않아 각질이 일어나고, 칼날에 베인 자국처럼 갈라진 발이 주황빛으로 물들면서 따스해지자 산티아는 주머니에서 실과 바늘을 꺼냈다. 눈앞에서 타닥타닥 매운 연기를 내며 튀어 오르는 불꽃이 초점을 흔들리게 했다. 바늘구멍으로 실을 밀어 넣기가 어려웠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실을 반 가닥으로 접어 매듭을 지었을 때는 장작이 반이나 줄어들어 있었다. 벗어놓았던 장화를 신고 너도밤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오솔길, 길목에 세워진 곳간으로 달려가 통나무 한 묶음을 가져왔다. 너도밤나무의 조각난 몸뚱이는 눈앞에서 화염을 튀기며 서서히 갈색에서 고동색으로 고동색에서 검은색으로 변색해갔다. 불씨가 모자의 붉은 천에 옮겨 붙을까. 산티아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모습을 살아있는 밤의 생명체들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십 년이 넘도록 쓰지 못하고 벽장에 넣어두었다가 어제서야 꺼낸 빨간 벨벳 모자는 좀벌레에게 살점이 먹히고 바깥 부분은 때가 타서 자주색에 가까운 색을 띄고 있었다. 대충 먼지를 털어내고 거울 앞에 서서 고개를 저으며 모습을 확인했었지만, 그 때만해도 동전 크기의 터진 자국은 보이질 않았었다. 생유와 치즈가루를 넣어 걸죽하게 끓인 감자수프에 버터 바른 스틱 빵을 손잡이가 긴 나무바구니에 넣어 가지고 이야고 집에 가 크윽 헛기침을 한 뒤, 이봐, 몸은 괜찮아? 저녁을 가지고 왔다구, 외치면서 문이 열리길 기다릴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빨간 모자가 형편없이 망가져 있을 거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한달 사이에 이야고는 몸이 많이 불어 있었다. 부르는 소리에도 대구도 하지 않고 있다가 두어 번 나무문을 탕탕 두드리자 느린 걸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오래간만에 찾아온 말동무를 꺼려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살집 좋은 볼에 파묻힌 입술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이 사람아, 누구 집 쳐부수러 왔는가. 웃는 것 같으면서도 심술이 차서 부어오른 볼 언저리 살이 바라보기를 거북하게 했다. 산티아는 이야고의 등너머로 보이는, 처마에 둥지를 틀고 있는 후투티에게 눈길을 주고 나서, 춥다는 엄살을 피웠다. 빵이 하나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계속 서 있기가 버거웠다.
난 그때, 자네가 꼭 모자를 찾아서 돌아올 줄 알았다구. 스틱빵을 한 입에 구겨 넣은 이야고는 우유를 병째로 마시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앞에 앉은 손님의 빈 컵은 생각지도 않는 사람 같았다. 목이 말랐지만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미지근해진 수프를 다시 끓여 내놓는 동안, 이야고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빵과 우유에 섞여 목구멍 깊숙한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때문에 그가 가져온 빵을 남김없이 다 먹고 우유병의 마지막 방울을 털어넣기까지 산티아는 가만히 앉아 빈 컵을 보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참나무 활엽이 쌓인 뒷마당의 파라솔 아래로 들어가 앉았다. 부메랑과 밀짚모자가 두 사람의 그림자를 덮었다. 두 개의 브라이어파이프가 담긴 나무상자는 한달 전 모습 그대로, 파라솔 기둥 옆에 놓여 있었다. 산티아는 후투티의 노래에 맞춰 휘파람을 부르다 말고 부메랑을 집어 힘껏 내 던졌다. 너무 무겁게 말들어졌어. 산티아는 참나무 숲으로 사라지는 부메랑을 보며 중얼거렸다. 되돌아오는 것은 한 가지도 없어. 파이프에 담뱃잎을 넣고 난 이야고가 호주머니에서 꺼낸 성냥으로 불을 붙이면서 대답했다.
돌아오지 못하게, 추락하게 만드는 것은 질량이다. 되돌아오는 것들은 모두 가볍다. 간지러운 바닷바람에 보푸라기처럼 일어나는 후투티의 분홍 깃털은 가볍다. 흑백의 줄무늬가 있는 날개가 펄럭이면서 천천히 파도 모양으로 나갈 때, 새는 더 이상 새가 아니다. 다리를 버리고 날개를 선택한 새는, 이제 날개마저 버리고 구름이 된다. 구름은 안개가 되기도 하고 비가 되기도 하고 눈이 되기도 한다. 육지를 벗어난 후투티는 비가 되어 섬으로 귀향해 둥지를 치고, 오월의 햇살 아래서 뜨겁게 알을 깐다.
그리고, 되돌아오는 것들은 표적이 없다.
나무는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뻗는다. 길다란 가지를 타고 하늘에 닿은 잎은 에너지를 끌어와 지상의 생명들에게 젖을 물린다. 검은 땅이 꿈틀한다. 씨앗이 싹트고, 깊게 뻗은 뿌리만큼 줄기가 올라온다. 시간은 여러 방향으로 뻗어 역사(歷史)를 만들지만, 역사 이전의 처음으로 돌아가진 않는다. 프랑스 소설가 모파상이 태어난 1850년, 발자크가 죽었다. 누구도 1850년, 발자크가 태어났고, 모파상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뒤바뀔 수도, 역행할 수도 없는 시간 여행에 두 사람은 같은 표적을 남기고 죽었다.
되돌아오는 것들은 표적이 없다면, 그렇다면 1850년으로는 돌아가지 않았어야 했다.
멀리서 보는 대륙은 넓지 않았다. 나아가면 반드시 되돌아올 줄 아는 흔들이에 앉는 것처럼 산티아와 이야고는 시간이 흘러도, 언제나 같은 나이, 같은 얼굴로 한 자리만을 기점 삼아 주변의 산과 들과 언덕과 호수와 같이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알았다. 평행선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년 중 단 하루, 12월 24일 저녁이 되면 그 평행선을 벗어나,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수머리를 희게 염색하고 귀밑에 흰 옥수수수염을 단 그들을 사람들은 '산타'라고 불렀다. 소수의 '산타'들로 외교사절단이 구성되어 있는 '산타나라'에서 흰털로 얼굴을 치장한다는 것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가족, 이웃에게까지 명예가 됐다. 모두들 '산타'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렇다고 노력만 가지고 성사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여러 조건들 중 선천적인 소질과 지능을 평가하는 적성검사에 무사합격 하는 것, 한 가지에 불과했다. 시험은 매년 비슷한 난이도로 출제됐다. 지피지기와 백전백승이라는 모의 문제집에 응시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적중률이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말이 적성검사지, 암기력과 인내를 시험하는 검사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타고난 체격에 있었다. 180센티미터의 키는 '산타'가 될 수 있는 첫 번째 체격조건이었다. 더 커서도 안 되고, 더 작아서도 안 되었다. 그러나 응시생들 대부분이 더 크거나 더 작았다. 다음으로 몸무게가 90킬로그램 이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적성검사에 합격한 신장 180센티미터의 예비 '산타'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