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을 울던 땅꼬가 급기야 있는 힘을 다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건 삐딱해지기 시작하고 부터 일주일 정도 경과한 즈음이었다. 방음이 시원찮은 부실한 아파트 거주민 처지라 땅꼬가 질러대는 비명 소리에 고문당하는 동시에 혹시라도 인터폰이 울릴까 노심초사... 이중고에 시달리다보니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이불장에 넣어보기도 하고 제일 으슥한 방에 가둬보기도 했다. 일 때문에 외박을 해야 하는 밤에는 피로에도 불구하고 밤길을 운전해 돌아와야 했다.
다크 서클이 사정없이 늘어지면서도 나는 냉큼 중성화 수술을 선택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 감촉을, 그 감촉의 소명을 차마 뿌리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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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에 차차 익숙해지고 겨울은 깊어갔다. 책을 읽는 내 앞에서 같은 이불의 온기를 나누며 뒹구는 땅꼬를 쓰다듬는 기쁨을 알아가던 어느날. 곤히 잠들어 있는 땅꼬를 쓰다듬다가 부끄럽고 불순하지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에 이끌려 슬며시 땅꼬 배로 손길이 향했다. 그 순간, 느껴버린 것이었다. 세상 가장 보드랍고 따뜻하고 포근한... 온갖 세파가 차마 침범을 주저해야만 할 것 같은, 연약하지만 그래서 더 간절한 피안과 같은 적요와 평화. 그 순간 나는 커다란 몸이 녹아내려 오롯이 땅꼬 품에 파묻힌 손가락만한 존재가 되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아니 되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건... 땅꼬의 새끼가 되는 환상이겠지. 아니, 이 무슨 부끄러운 소망이란 말인가?
그 순간 땅꼬가 눈을 들어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책망의 눈빛. 아차! 정신 차리고 손을 거두면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부끄러운 짓이다. 감히 무슨 자격으로... 아니, 강인하고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아내려고 고군분투해 온지 50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으로서 키워온 자부심과 신념이 이렇게 무력하게 무너져내리다니... 나는 이토록 위태롭고 취약한 존재였더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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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란 참 영리하기도 하지.
길고양이로 태어나 살아내는 일이 얼마나 가혹한 고통인지 안다. 선택한 적 없는, 대부분이 고통인 삶으로 던져 넣으면서 저토록 완벽한 품을 준비해 두다니. 어미의 품이란... 저런 곳이어야 하는구나. 저토록 완벽하고 또 완벽해야 하는구나. 기억 저 편으로 사라져 버릴지라도 몸이, 온 감각이 기억하는 피안. 그래서 우리는 고통 속을 헤쳐가면서도, 행복과 구원의 희망을 믿는거로구나. 추억일지도 모를 희망. 추억의 감각을 희망으로 투사하면서 죽음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자연이 준비한 피안의 실체. 나는 그걸 만졌던 거구나... 이젠 내 어머니의 품도 마냥 피안일 수 없는 인간사. 이제 고작 6개월 남짓 작은 고양이의 품, 그 감촉에 무력하게 무릎 꿇는 나.
자연이 생명을 연민했구나.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죽음도 저 품과 같다면... 자연이 생명을 연민하여 저 품을 준비해 두었듯이 저 품으로 거두어 가지 않을까? 저런 감각이 아닐까? 그렇다면 좋겠다.
이렇듯 완벽한 품을 준비하고 있는 땅꼬. 저 품에 자연이 부여한 소명을 어떻게 무용하게 앗아버릴 수 있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설상가상으로 내가 그 겨울 땅꼬를 쓰다듬으며 탐닉한 책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이었다. 감히 자연을 지배하고 억압하려 하고 있구나. 내 속의 자연을 억압해야만 버텨낼 수 있었던 지난 날들. 아니 우리 모두의 운명. 신경성 위염으로 신음하는 몸을 어찌어찌 끌고 버텨온10여년의 세월로도 부족한거니? 내 외로움을 덜겠다고 땅꼬의 자연을 파괴할 수는 없다.
간절하게 묻고 싶었다.
"땅꼬야. 잘 들어. 두 가지 길이 있어. 네가 선택하면 나는 따를게. 선택하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건, 나는 너와 살고 싶지만 너의 아이들까지 키울 여력은 없어. 나는 직장도 다녀야 하고, 건강도 그리 좋지 못하니까.
첫번째 길은, 네가 지금 밖으로 나가면 짝짓기를 해서 새끼를 잉태하게 될거야. 그럼 너는 나와 살지 못하고 네 아이들이랑 다시 우리 아파트 중정에서 살게 되겠지. 그럼 나는 너와 네 아이들에게 밥을 줄 수는 있어.
두번째 길은, 너처럼 인간이랑 같이 살게 된 고양이들이 대부분 하는, 중성화 수술이라는 걸 하는 거야. 그러면 너는 한 번도 새끼를 낳지 못할거야. 대신 나는 네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는 날까지 함께 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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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왜 하느냐고?
왜냐하면 너희는 너무 많은 새끼를 너무 자주 낳아서 그 아이들이랑 다 함께 나랑 살기 어려우니까.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게 너희들 건강에도 좋데. 사실 암고양이는 평생 임신과 출산, 육아를 반복하는 삶을 살게 돼. 네가 원하지 않아도 네 몸이 그렇게 하게 돼 있어. 그러니 너희 삶도 고달프지. 길고양이가 되면 네가 낳은 아이들의 대부분이 병이나 굶주림으로 일찍 죽어버리거든. 그러면 너는 얼마나 슬프겠니? 그 슬픔을 더 이상 겪게하지 않으려고 중성화 수술을 하기도 해.
그러니 어떻게 할래? 나는 전적으로 너의 선택을 존중할거야. "
이렇게 ...
하지만 이렇게 묻는다 해서 땅꼬가 나를 선택하리란 확신은 추호도 없다. 자연의 명령 앞에, 생식의 사명 앞에서 나라는 존재가 안중에 있을 리 없다. 대체 내가 땅꼬에게 무엇이겠는가? 땅꼬가 자연의 소명에 충실할 때 그 아이가 만들어갈 그 아이의 세계와 관계. 혹시 모를 자긍심이 있다면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 세계를 박탈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 아이와 만들어 갈 세계 속에서 땅꼬는 행복할까? 어떤 자긍심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그 아이의 자연을 박탈하면서 내가 땅꼬에게 선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한 없이 작아지는 나.
아... 서울이 이스탄불처럼 덜 추운 곳이기만 해도... 이렇게까지 갈등하지는 않았을텐데.
내가 온갖 상념 속을 헤메며 갈팡질팡 하는 걸 알 리 없는 땅꼬는 지금 본능에 충실하다. 자연의 충복으로 그 어떤 암고양이보다도 출중하게 온 힘을 다해 악을 써대고 있을 뿐이다.
어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