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이진번(李振藩) 생년월일 : 1940년 11월 27일 사망월일 : 1973년 7월 20일
아버지 : 이해천(광동극 배우) 어머니 : 하금상(그레이스 리) 형제 : 3남 2녀중 차남 출생 : 미국 샌프란시스코(미국 국적)
부인 : Linda Emery 아들 : Branden Bruce Lee(이국호(李國虎)) 딸 : Shannon Lee (이향(李香)) - 결혼 : 1964년 1월, 씨애틀시의 프로 테스던트의 교회에서 했죠... 대학 : 1962년 씨애틀시 워싱톤 주립대학 심리학부 철학과 입학 → 중퇴 좋아하는말 : Walk On! 좋아하는노래 : And When I die
[일대기]
용자의 탄생.
이야기는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광뚱성에 이해천이라는 연극광인 젊은이가 있었다. 지금이야 영화나 텔레비젼이 보급되어 있지만 당시는 연극만이 연기에 의한 문화였다. 이 젊은이는 고생해가면서 무대 배우가 되었고, 월극의 4대 코미디언의 한 사람이 되어 명성을 날렸다. 이윽고 이해천은 광뚱에서 홍콩으로 옮겼다. 그당시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인구의 대부분이 중국인이고 그것도 광뚱인에 의해 차지되고 있었다. 월극은 오히려 광뚱보다도 활발했다.
그는 홍콩에서 상하이 출신의 상인의 딸 하금당을 알고 결혼했다. 그리고 두 딸이 태어났다. 1939년, 이해천은 가족과 극단을 이끌고 미국 공연에 나섰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곧 장남 이충탐이 태어났고, 이듬해인 1940년 11월 27일 두번째 아들이 탄생했다. 이해천 부인은 샌프란시스코의 병원에서 워싱턴에서 공연중인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이 아기의 이름을 <이진번>이라고 지었음을 알린다. <진>에는 뒤흔든다는 뜻외에도 수호한다는 의미가 있고 <번>은 중국어로 샌프란시스코를 나타내는 삼번 市에서 딴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수호자, 이가 뒷날 세계를 뒤흔들 "부르스 리" 이다. '부르스'라는 영어 이름은 출생계를 낼때 영어 명이 필요하다 해서 병원 간호사가 지어주었다. 이 이름은 그가 13살때 홍콩의 미션 스쿨 라사르 서원에 입학하기까지 쓰고 있지 않았다.
이소룡이라는 이름 석자....
1살인 생일을 맞이하고서 곧 일본 해군의 진주만 기습이 일어나고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직전 이해천 일가는 한 달 가까운 항해끝에 홍콩으로 돌아왔다. 약 2년만이었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나기 전 이해천은 그곳에서 제작된 광뚱어 영화<금문녀>에 작은 아기가 필요해서 1살도 되지 않은 부르스를 출연시켰다. 이것이 슈퍼 스타의 영화데뷔이다. 이 아기는 병으로 골골하기는 했지만 똑똑하고 야무지고 활발했다. 그런만큼 아버지는 유달리 귀여워하고 있었다. 이런 장점은 병골이었음을 제외하고서 성인이 된 부르스에게 계승되고 있지만 결점도 마찬가지였다. 떼를 부리기 시작하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고 또 언제나 바삐 돌아다니고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조급스런 아이였다. 자기 현시욕이 유별나고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뾰로퉁했다.
홍콩에 돌아온 이듬해, 동생 이진휘가 태어났다. 가족이 처음 거처를 마련한 곳은 쥬류반도의 쥬륭성이란 곳인데 현재는 계덕공한의 바로 좌측이고 무법지대로서 홍콩관헌도 출입을 삼가는 곳이다. 그러나 당시는 녹음이 우거진 중국 남부의 농촌으로 공기는 맑고 토지는 널찍널찍 했었다. 이해천은 틈만 있으면 태극권으로 신체를 단련시켰다. 태극권은 손발을 천천히 움직이는 전신운동으로 오늘날에도 대만이나 홍콩에선 거리에서 태극권을 하는 사람들을 볼수 있다. 어린이들도 흉내를 내며 태극권을 한다. 중국인 사이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이다.
이웃에 새비림이라는 이해천 만큼은 유명하지 않은 월극 배우가 살았고 부르스와 같은 또래의 사내 아이가 있었다. 평생의 친구이고 역시 쿵후 스타가 된 소기린이다. 두 아이는 언제나 함께 놀았다. 또한, 배우끼리 이웃에 살고 있어 양가에는 줄곧 제자나 무대 관계자가 출입하든가 때로는 젊은 배우가 식객으로 동거하고 있어 흡사 연극학교 같았다. 같은 무렵 , 홍콩에선 영화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중국 대륙이 공산군 손에 들어가고 주로 상하이의 영화인들이 쫓기거나 언론이나 사상통제를 두려워해 탈출해 왔던 것이다.
영화라는 새로운 오락이 등장했기 때문에 무대예술인 월극(越劇)은 타격을 받았고 월극 배우들이 잇달아 영화에 나가게 되었다. 이해천도 그 한 사람으로서 어느날 스튜디오에 부르스 리를 데리고 갔다. <세로상>이라는 광뚱어 영화로 9살쯤인 사내 아이가 주연인데 주역이 미정인채 촬영이 계속되고 있었다. 원작자인 원보운이 아무도 없는 스튜디오 사무실에서 재주를 훌쩍훌쩍 넘어가며 놀고 있는 브루스를 발견하고 주역에 안성마춤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부르스 리에게 영화에 나갈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빠에게 물어보세요"라는 대답이었다. 예명에 대해선 여러가지 의견이 있었다. 명배우 이해천의 아들이니까 신해천이나 소해천이 어떤가 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그렇다면 부모의 후광을 입는 것이 된다. 그런 어느날 쥬륭,유마치의 극장가를 걷고 있던 원보운의 귀에 가설극장의 손님끌기 외침 소리가 들렸다. "자, 보시오 보시오. 대룡이 소룡을 낳습니다. 진짜 용입니다. 당신이 세상을 알게끔 눈을 뜨고 이윽고 운명은 한마리의 용을 키우게 됩니다.!"
'옳지, 이해천이 대룡이라면 아들은 소룡이다.!' 이리하여 예명은 이소룡으로 결정되었다. 부르스가 9살때의 일이다. 영화에 출연한 그는 과연 이해천의 아들답게 연기 소질이 충분히 있는데다가 머리 회전도 빨랐으며 꽤나 잘 해냈다. 곧 다른 영화회사에서 출연 교섭이 있었으나 이해천은 영화보다도 공부가 제일이라고 생각하여 영화출연은 여름방학 동안만으로 국한시켰다. 부르스의 국민학교 시절은 개구장이로 소문이 났었다. 때때로 문제를 일으키므로 걱정한 부모는 다른 학교에 전학을 시켰지만, 개구장이 버릇은 고쳐지지않았다. "댁의 도련님은 요즘 어느 학교에 다니지요?" 이것이 배우 동료들의 이해천에 대한 인사처럼 되어버렸다. 마침내 여름방학의 영화 출연도 중지했다. 국민학생인 주제에 마치 거리의 주먹패 처럼 말썽만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그럭저럭간신히 초등학교를 마친 부르스리는 13살때 라사르 서원 중학부에 들어갔다. 이곳에는 4년간 있었다. 부르스로서 가장 오래 재학한 학교가 되었다.
같은 해 <인해고홍>이라는 홍콩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컬러 영화에 출연했다. 또한 본격적으로 쿵후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이 해부터이다. 쿵후를 시작한 동기에 대해 부르스는 이렇게 말했었다. "나보다 훨씬 약하다고 생각한 소년에게 호되게 당했다. 그가 쿵후를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전혀 다른 뜻에서 쿵후수업을 허락했다. 쿵후는 정신 수양이 기초로 되어있고, 부르스에게는 정신 수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쿵후를 배워도 정신 수양쪽은 엉망으로, 주먹이 세진 만큼 마음이 뒤따르지 않아 불량소년의 우두머리가 되어 학교가 끝나면 왕각지구를 누비고 다녔다. 얌전한 급우들은 백염(백가지나 싫은 점이 있는 녀석)이라는 별명을 붙이며 싫어했다.
운동신경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댄스에 있어선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당시는 차차차가 전세계에 걸쳐 유행하고 있었는데 13세때 출연작<인해고홍>에서도 화면 가득히 춤을 추었는데 15살때에는 영국식민지 차차차 콘테스트에서 우승했다. 어쨌든 핸섬하고 영화출연도 하고 있으며 누구 보다도 주먹이 센 데다가 댄스도 잘 하니 만큼 걸 프랜드는 얼마든지 있었다. 매일처럼 데이트가 있고 언제나 상대가 달랐다. 데이트를 하러가기 전에는 퍼마드를 바른 머리를 빗어넘기고 커다란 거울 앞에서 온갖 포즈를 취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형의 말이다.
라사르 서원의 환경은 최고로 좋았으나 해마다 부모가 불려가서 주의를 받는 횟수가 늘었고 고등부에 진학하고서 얼마 안 있다가. "더이상 맡아 가르칠 수 없습니다." 하는 퇴학이나 다름없는 처분을 받고 부득이 서민가인 왕각의 센트.자비엘 서원에 전학했다. 이 학교에는 1년이 조금 넘게 있었지만 불량소년이나 깡패들과 어울리는 습관은 조금도 고쳐지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라 버려두면 살해될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진번에서 부르스 리로.....
그래서 이해천은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기로 결심한다. 부르스는 원래 미국태생이고 18세 성인이 되었을 때 미국에 있으면 시민권을 쉽게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1958년 11월말, 쥴류의 부두를 떠난 미국 여객선 프레지덴트,클리블란드호 3등 선실에서는 포켓에 100달러를 넣고 있을 뿐인 부르스가 있었다. 인생을 첫 출발부터 다시 시작하여 참인간을 만들기 위해 아버지가 귀여운 자기 자식에게 가한 엄한 시련이었다. 긴 항해를 거쳐 부를스는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했다.
우선 아버지의 친구집에 신세를 졌지만, 이 노인과는 뜻이 맞지 않아 곧 뛰쳐나오고 형이 있는 시애틀로 갔다. 시애틀 은 샌프란시스코ㅡ 홍콩에 이어 제3의 고향이 되었고 지금 부르스의 무덤은 그곳에 있다. 시애틀에선 고생을 했다. 아침에는 신문사에 가서 인쇄된 신문을 접고 분류하는 일에 이어서 자전거로 신문을 돌렸다. 중화 요리점 숙식 점원이 되고 웨이터나 접시닦이도 했다.
영어도 다시 배웠다. 에디슨 직업 하이스쿨에 3년간 다녀 졸업 대학 입학자격을 얻었다. 그리하여 1962년 시애틀의 워싱턴 주립대학 심리 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부르스는 왜 철학과를 택했을까? 그 이유로 두 가지가 생각되고 있다. 첫째로 장차 무도가가 되려고 마음먹은 부르스는 겨우 정신면의 충실을 기하려 했다. 둘째는 수학이 질색으로 수학을 하지 않아도 될 학과를 택했다. 형 이충탐은 반대로 수학이 장기. 워싱턴 주립대학 이학부 천문학과로 진학했다. 부르스는 비록 가난 했지만 미국은 지내기에 쉬운 곳이었다. 물론 아르바이트는 계속하고 있었다.
절권도의 창시자...
아버지가 아무리 유명한 배우라도 홍콩에서의 수입은 뻔하다. 많은 가족을 거느리고 있는데다가 시애틀에 있는 아들에게 송금 한다는것은 커다란 부담이었다.
아버지로선 학비 정도 붙여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고서의 부르스는 이미 방과후 거리를 배회하는 불량소년이 아니라. 무도를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다. 교실에서 책상이나 의자를 차기 해본다든지, 발레의 레슨 뺨치게 포즈의 연구를 하든가, 매트에서 덤블링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홍콩시절에 배운 쿵후를 바탕으로 처음에는 급우를 상대로, 이어서 신문 안내란에 작은 광고를 내어 일반 미국인에게도 가르치게 되었다.
여기서 비로소 부르스 리가 자기의 쿵후에 붙인 명칭 '절권도' 등장한다. 최초의 절권도 교실 '진번숙'은 캠퍼스 가까운 주차장 한구석이 었고 이어서 작은 빌딩의 지하실로 옮겼다. 시애틀에서 부르스는 두 명의 동양인과 알게 되었다.
하나는 한국인 무도가 이준구 또 하나는 일본인 2세인 기무라였다. 이준구는 태권도의 대가로서 부르스에게 인생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고, 아무리 테크닉이 뛰어나도 정신 수양이 따르지 않는다면 무도가 아님을 깨우쳐 주었다. 기무라는 제자의 하나로서 부르스로서 배운게 많았다. 어쨌든 부르스는 정신 수양이 테크닉보다 중요함을 비로소 알았다.
부르스 리가 창시한 절권도는 그가 기성의 유파에 없는 새로운 형을 창시한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이 어렸을 적부터 배운 중국권법을 베이스로 하여 세계각국의 격투기중에서 실전에 유효한 기술을 채용하여 통합시킨 이소룡의 무도철학이다.
즉 절권도란[적의 공격을 <절>끊어 가로막아 쳐 쓰러뜨리는 <권>권법의 도를 의미하여 실전에 있어 어떠한 상황에 놓였을 때라도 형식에 얽매이는 일 없이 상황에 따라 가장 효과적인 기술을 써서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방법이다.
부르스는 이 절권도의 비결을 '무형의 형' 혹은 "無法으로서 有法을 삼고 무량으로서 유량을 이룬다"라고 설명했었다. 이제까지의 중국 권법가나 공수가들은 자기 유파의 선인들이 남긴 전통의 형을 반복 연습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저마다의 유파에 전해지고 있는 형은 유파의 선배들이 실전의 체험이나 연구의 쌓아 올림에 의해 완성시키고 후세에 전한 것들이지만, 형속에 포함되는 비전은 극히 소수의 제자에게만 전해지고 있어서 이미 형의 정확한 용법이나 비전이 망실되어 무술로서 전혀 가치가 없어진 것도 많다. 이와 같은 본질을 잃어버린 형을 부르스는 '유파에 전하는 단순한 의식'이라 하며 경멸했고 또 이렇게 잘라 말했었다. "무술 수업에 있어 유파나 전통의 형은 그것이 최종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유파나 형에 얽매어 있는 동안은 한낱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 수도자인 무술 수업자는 어디 까지나 연습과 체험의 쌓아 올림에 의해 하나씩 진실을 발견하고, 나아가선 그것을 완성시켜 유파나 형을 초월하며 자기 자신을 표현할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부르스의 의견은 전통의 형을 일문의 보물로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무술가들로부터, "전통을 모독하는 건방진 젊은이." 라고 적대시 되었지만, 그가 경멸한 것은 권법의 형이 아니고 의미없는 형 연습에만 만족하고 있는 수행자에 대해서 였었다.
옛날부터 무술 수업은 '수,파,리'의 3단계를 거쳐 완성된다고 일컬어진다.
첫째의 수는 , 한 유파를 졸업하기까지는 스승의 가르침을 수(지킨다.)하며 수행한다. 둘째의 파는 , 유파를 졸업해야 비로소 파(밖으로 나간다)하여 다른 유파를 널리 연구한다. 셋째의 리는 , 과거의 연구를 집대성하고 유파를 리(떠나는 것, 초월하는것)하여 독자적인 경지에 도달한다.
이런 점을 비추어 볼 때 부르스는 무술 수도자로서 옳은 길을 걸은 셈이고 오히려 형식화된 무술을 본래 모습으로 되돌렸다고도 할 수있다. 부르스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홍콩에서 아버지로부터 태극권을 배운것을 비롯하여 13살부터 영춘권의 종가인 엽문에게서 배웠다.
이 밖에는 당랑권, 공격권 등 각파의 권법을 연구했고, 도미한 뒤로는 한국인 이준구로부터 태권도를 배웠다. 즉 그는 태극권의 유연성, 영춘권의 세밀한 손기술, 당랑권의 재빠른 손발 놀림, 태권도의 위력있는 차기 기술을 종합했고 복싱의 풋,워크도 살리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영화나 무도대회에서 데먼스트레이션(모범연무)을 할때 보기에도 시원스럽고 아름답게 보이는 높은 차기 기술을 많이 썼고 , 그중에서도 태권도의 진수라고 할 적의 눈앞에서 갑자기 몸을 돌리고 뒤로부터 발을 크게 돌려서 적의 얼굴을 발뒤꿈치로 차는 기술을 많이 사용했었다.
다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액션이 절권도 그 자체가 아님은 브루스 자신이 생전에 말한 바 있었다. "영화에선 화려하지 못한 펀치나 작은 차기보다도 보기에 시원스런 높은 차기 기술을 많이 쓰기로 하고 있다. 다만 실전인 경우 부질없이 높은 차기를 시도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밸런스를 무너뜨리기 쉽고 동작이 크기 때문에 쉽게 비켜지고 만다. 실전에선 낮고 작은 차기가 오히려 효과적이다."
실전 본위를 내세운 절권도는 갖가지 기구를 사용하여 근육을 단련하든가 큼직한 샌드백을 쳐가며 펀치나 킥의 힘을 강화하고 글러브나 프로텍터(방호장구)를 몸에 장착하고 두 사람이 서로 치고 막는 연습을 하고 있었지만, 중국 전통의 연습법 가운데서도 뛰어난 것은 채용했었다.
이를테면 영춘권이나 태극권의 수도자가 서로의 손목을 접촉시켜 반사신경을 양성하는 '청경' 연습법과 옛날부터 중국 권법가들이 타격연습에 사용하는 목인도 사용했다. 실제로 치고 막기하는 연습법도 무턱대고 하는 게 아니라.
1.찬스를 놓치지 않는다. 2.연속기(공격이 비켜지면 재빨리 제2,제3의 공격을 한다.) 3. 스피드와 힘 배분 관계. 4.중심등을 생각하고 제자에게 가르쳤다.
또한 부르스는 기술면 뿐 아니라 중국의 북방 무술가들이 비전으로써 배우는 기공법도 연구했던 모양이다. 그 방법은 호흡과 정신 통일에 의해 인간의 근육이 아닌 내면의 힘을 양성하고 외면의 힘과 일치시키는 연습법이며 이것을 완성시키면 무서운 힘을 발휘하게 된다. 또 무술이 단순한 투쟁 기술이 아니고 禪(선)과 마찬가지로 깊은 道임을 탐구하기 위해서, 또 절권도에 사상적인 뒷받침을 위해 선이나 철학을 연구하고 철학과를 택한것도 그 때문이었다.
린다와의 만남
1953년 7월, 지하실 도장에 한 백인 여성이 나타났다. '린다 어메리'라고 하는 워싱턴 주립대학 의학부 학생이었다. 부르스의 제자로 중국인 여학생이 있어 재미있는 것을 보여 주겠다고 데려온 것이었다. 그로부터 린다는 때때로 도장에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절권도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연습이 끝난 뒤 모두들 즐겁게 시내로 나가서 지껄이는 그룹에 참가하기 위해서이다. 린다는 금발의 푸른 눈동자를 가진 조용하고도 차분한 여성이 었다. 왁자지껄 떠들고 있어도 그녀는 별로 말이 없었으며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한편 부르스는 언제나 그룹의 중심으로 풍부한 유우머로 항상 지껄여대고 있었다.
성격적으로 정반대인 부르스와 린다는 어느덧 사랑에 빠졌다. 11월쯤 부터 두 사람은 매일 만나게 되고 그룹이 아닌 단 둘만이 행동했다. 12월의 어느날 부르스는 린다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린다의 어머니가 강력히 반대했다. 린다의 아버지는 영국인으로 그녀가 4살때 죽었고, 스위스계 어머니 혼자의 손으로 키워져 대학까지 진학했다. 반대 이유는 첫째로 두 사람 모두 아직 학업 도중이라는 것, 둘째로 어머니 자신이 백인끼리의 국제 결혼을 한 경험상 외딸이 하필이면 동양인과 결혼하는데 강한 저항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르스는 말 수단이 좋은 사나이였으나 이때만은 진심으로 성의껏 린다어머니를 설득했다. 덕분에 마지못한 승락을 받았고 두 사람은 1964년 음력 정월, 시애틀의 신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작은 집을 빌어 살았다. 결혼과 거의 동시에 두사람은 대학을 중퇴했다. 도장 경영을 본격화 시키기 위해선 학업과 양립시킬 수가 없었다. 그뿐인가. 신혼 여행을 갈 돈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이준구의 도움으로 부르스는 오클랜드에 대도장을 갖게 되었다. 오클랜드 도장의 경영은 시애틀 이상으로 어려웠다. 린다 부인이 안경을 깨뜨렸을 때 얼마동안 안경알을 갈아끼울 돈마저 없었던 것이다. 이왕 말이 나와서인데 부르스도 책을 지나치게 읽은 탓인지 근시안이었다.
세상으로의 용트림
부르스는 도장 선전을 위해 한바탕 기를 높이 들 필요가 있었다. 여기저기 무도 토너먼트에 출장했지만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이준구 소개로 출전한 1964년도 롱비치의 세계 무도 토너먼트 대회였다. 여기선 시합에 참가하지 않고 절권도의 모범연무만 했을 뿐인데 그 멋들어진 폼, 날카로운 기술이 주목을 받았다. 부르스의 절권도에 매력을 느낀 젊은이 중에 제이 세블링이라는 이발사가 있었다. 그는 헐리웃 스타나 감독을 단골로 머리를 깎아주는 사나이로 곧 텔레비젼 시리즈 베트맨의 프로듀서 윌리암 도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도저는 부르스를 20세기 폭스사의 무술 지도계로 고용했다. 겨우 가난의 고비를 넘긴 부르스는 린다와 같이 로스엔젤레스로 옮겼다. 폭스사의 일 외에도 차이나 타운에 도장을 열었다. 이번에는 필리핀의 봉술가인 '다니 이너선트'와 콤비가 되었다. 다니는 부르스에게 쌍절곤의 활용법을 가르쳐 준 사나이다.
1965년 2월 린다가 장남 이국호(브랜든 리)를 출산했다. 같은 주 홍콩에선 아버지 이해천이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기를 끌은 배트맨에 이어 윌리암 조너는 텔레비젼 시리즈 <그린 호네트>를 기획했다. <그린 호네트>에서 부르스는 운전수로 출연하여 주역인 반 윌리암즈와 동연했다. <금문녀>로 부터 25년 만에 미국제 필름에 출연한 셈이다.
부르스로선 다시 없는 찬스였고 그는 단단히 움켜잡았지만 동시에 <그린 호네트>를 통해서 텔레비젼의 한계를 알게 되었다. 물론 <그린 호네트>에서는 언제나 검은 마스크이긴했지만, 부르스는 장기인 발차기도 보여주었고 쌍절곤의 위력도 실험했다. 그러나 절권도는 손발의 움직임이 크고 빨라 영화에는 알맞지만, 텔레비젼의 작은 화면에서는 곧 튀어나가고 만다. 부르스는 감독으로부터 몇번이나 주의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절권도의 진짜 위력을 보여주자면 텔레비젼으로선 안 되고 옆으로 긴 시네마스코프 사이즈의 극장용 영화가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로스엔젤레스의 도장은 비싼 수업료를 받고 개인 교수 중심으로 체제를 바꾸었기 때문에 차츰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린호네트>덕분에 헐리웃의 영화인들이 잇달아 제자로 입문했다.
스티브 맥퀸, 리 마비느,제임즈 가너같은 유명 스타나 농구선수인 카렘 앱도울 쟈바도 제자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오래 계속된 것은 제임즈 코반과 시나리오 라이터인 스타링 실리판트였다. 그 무렵, 1968년엔 장녀 이향응(샤논 리)이 태어나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부르스는 제자들을 통해 어떻게든지 극장용 영화에 나가려고 초조해 했다. 조바심을 내면 낼수록 오히려 잘 되지 않았다. 코반이나 실리판트가 기획한 주연작도 아이디어 선에서 그쳤다. 단 하나 불과 3분간이나마 출연에 성공한 것은 실리판트가 시나리오를 쓰고 가너가 주연한 <귀여운 여자>였다. 철저히 때려부수고 행패를 부리는 악당역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한 활약을 해도 미국영화가 미국인을 위해 만들어 지고 있는 이상 동양인이 주인공이 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용의 전설
1970년 4월 부르스는 5살이 된 아들 브랜던을 어깨에 무등 태운 채 홍콩의 계덕 공항에 내려섰다. 어렸을 적 친구 소기린이 열렬히 환영해 주었고 큰힘을 주었다. 그 무렵 홍콩에서는 이미 쿵후 영화가 붐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왕우 주연 작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헐리웃에서 만든 텔레비젼 시리즈 <청봉협>에 주연한 중국인인 이소룡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르스가 겨냥했던 동남아시아 최대의 영화회사 소씨형제공사는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적룡이나 강대위등 쿵후 스타를 거느리고 있는데다가 출연료 1만달러는 너무나도 엄청났다. 홍콩에선 소기린의 소개로 텔레비젼에 출연하여 브랜돈 군을 상대로 절권도의 연무를 해보였을 뿐으로 그는 크게 실망하고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운명이란 알수없는것으로서, 텔레비젼을 본 영화관계자 중 이 사나이라면 1만달러라도 좋다고 생각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 해 소씨형제공사와 싸우고 뛰쳐나와 스스로 가화전영공사를 설립한 '레이먼드 조'라는 인물이었다.
이리하여 부르스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1971년7월16일 부르스는 혼자서 로스엔젤레스를 떠나 태국의 방콕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자동차로 2시간쯤인 시골 마을 빼이충으로 갔다. 이튿날부터 제 1작(당산대형)의 로케가 시작되었다. 상대 여자배우인 의의는기자에게 말했다. "텔레비젼에서 본 부르스는 크고 강해 보였지만 우리들 앞에 나타난 그는 작고 빈약했습니다. 그러나, 상반신 나체가 되어 트레이닝을 시작했을때 발레처럼 아름다운 킥이나 번갯불같은 펀치스피드에 우리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부터 난 부르스를 숭배하게 되고 말았던 거예요."
부르스는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사나이였다. 상대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좋은 사람은 어디까지나 다정한데 싫어하는 사람과는 얼굴을 마주쳐도 모른 척 한다. 감독인 나유와는 배짱이 맞지 않는 편이었다. 처음엔 쌍방에서 비위를 맞추었으나 차츰 불화가 깊어졌다. 홍콩에 돌아와 스튜디오의 세트에 들어갔을 무렵부터 격론을 벌이게 되었고 제2작<정무문> 에서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당산대형>이 홍콩 영화사상 온갖 기록을 깨는 대 히트가 되었을 때 그 공로자가 부르스냐 나유냐 하고 홍콩의 매스컴이 두 사람의 불화설을 써댔다. 이래서 <정무문>은 더 큰 히트가 되었다. 그리고 제3작 <냉면호>에선 마침내 두 사람의 사이가 결렬되었다. 부르스는 나유가 쓴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대답도 않고서 버려 두었다. 대만에서 일본에 걸쳐 4개월의 로케 스케쥴이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유는 급히 주역을 왕우로 바꾸어 출발했다. 이것을 전해 들은 부르스는 격노했다.
부르스를 달래고 타 회사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레이먼드 조는 새로이 협화전영공사를 창립하였다. 부르스는 출자자가 되고 순이익의 반을 받는다는 조건이었다. 협화의 제1작으로서 부르스는 스스로 시나리오를 쓰고 스스로 감독하며 로마 로케에 주연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작품이 <맹룡과강>이다. 부르스는 이 영화를 만듦에 있어 두가지 조건을 레이먼드에게 요구했다. 첫째는 묘가수를 자기 상대역으로 해줄 것 둘째는 조감독으로 식휘창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둘다 나유를 따라 일본에 갔고<냉면호>에 출연중이라 어려운 문제였었다. 레이먼드 조 사장은 나유에게 양보를 청하는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묘가수는 나유가 발견하고 키운 여배우였고 의리의 부녀관계를 맺고 있었다. 나유는 당연히 반대했지만 그녀는 부녀의 정까지 끊어가면서 식휘창과 함께 로마로 날아왔다.
<맹룡과강>은 1972년 5월 7일, 2주일의 로마 로케를 개시했고 9월 16일 홍콩에서의 세트 촬영을 끝냈다. 정월 프로로 상영되었고 다시금 정무문이 세운 모든 기록을 갱신하는 대 히트가 되었다. 이 작품 직후 부르스는 협화의 제 2작<사망유희>에 착수했고 4주일의 세트 촬영 및 1주일의 홍콩 근교 로케를 실시했다. 역시 각본,감독 겸임이었다. 미국에 있는 제자중에 검은 거인 카렘 앱도울 쟈바르와 필리핀 친구인 다이너선트를 불렀고 한국에선 합기도 고수인 지한재를 불러들였다. 11월 한국에서 로케하기로 예정되고 있었는데 부르스가 과로로 인해 몸 상태가 좋지않은 데다가 그는 추위에 약했으며 워너브라더스사와의 합작<용쟁호투>의 이야기가 급속히 진전되었기 때문에 이듬해로 연기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 부르스가 재개 준비중 급사 했기 때문에 액션 씬만 찍고 미완성이 되었다. 한편 <용쟁호투>는 1973년 1월 부터 스타트를 했다. 비록 홍콩에서 촬영되기는 했지만 헐리웃의 대 메이져 워너 브러더스와 협화의 대등한 합작이었으므로 부르스의 염원은 거의 완전하게 실현되었다고 해도 좋으리라.
용이 되어 하늘로의 승천.....
1973년 7월 20일 금요일 이날은 태풍이 홍콩에 접근하여 찌뿌등하게 흐렸고 때때로 소나기가 뿌렸다. 밤10시 30분쯤 쥬륭 마두통도 구급센터에 전화가 걸려왔다. 팽덕삼 간호원은 앰뷸런스를 몰고 필가산도의 맨션에 약 10분뒤 도착했다. 그곳은 여배우 정패의 집으로, 인사불성이 되어 혼수상태에 빠진 남성 하나를 들어내고 퀸 엘리자베스 병원으로 날랐다. 엘리자베스 병원 구급실 의사 말에 의하면 11시쯤에 도착한 환자를 진찰했더니 이미 맥박과 고동이 멎어 있고 동공도 열려있는 사망 상태로 강심제를 주사했을 뿐인 처치로 끝내고 11시 30분 사망을 확인 했다. 손쓸 여지가 없었던 셈이다. 이 남성은 중국인으로 본명 이진번 예명 이소룡으로서 32살. 12시반이 지나서 레이먼드 조사장과 린다 부인에 의하여 부르스 리의 죽음이 매스컴에 발표되었다. 믿으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다는게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 모든 사람들의 심정이었다.
당산대형,정무문 ,맹룡과강이 각각 홍콩영화사의 기록을 갱신하고 협화와 워너의 합작영화 용쟁호투가 겨우 완성 되었을 뿐 그런 무적의 사나이가 죽다니, 더우기 갑작스럽게 죽으리라곤 누구도 못한 일이었다. 동남아시아 뿐이 아니라, 같은 날 런던에서 공개된<정무문>은 역시 그 극장의 신기록을 수립하고 있었다. 100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런던 시민으로서도 믿어지지 않는 뉴스였다. 죽음이 전해졌을 때 관중은 기립하여 명복을 빌었다. 미국에서도 적지않은 이소룡영화 팬들은 오보라고 생각했다. 쓰러진 장소도 나빴다. 애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여배우의 침실이었고 사인도 뇌출혈이라고 밖에 발표되지 않았다. 더욱 나빴던 것은 린다부인과 레이몬드 조 사장이 의논하여 자택에서 쓰러졌다고 발표한 일이 며칠뒤 신문기자에 의해 정패 집이라고 폭로되었기 때문에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깊어질 뿐이었다.
홍콩 정청은 9월 3일 부터 6일까지 4일간 사인 규명을 위한 '검시재관'을 열었다. 린다부인 ,레이먼드 조사장, 정패를 비롯해 관계의사 수명및 해부에 입회한 의사, 검사관등 10명이 증언했고 다시 런던에서 법의학 귄위자 데일박사가 초청되었다. 이 재판은 의학적 화학적 분석이 중심이 되었다. 그 결과밝혀진 것은 자살도 피살도 아닌 자연사였었고 이전부터 뇌종양을 일으키고 있다가 무엇인가의 원인으로 급사했다는 것뿐이었다. 그 원인은 성행위나 위장 및 소장에서 발견된 마리화나와도 관계가 없고, 두통을 호소한 뒤 정패가 준 자기의 두통약 에과제식의 성분중 환자가 어느쪽인가에 과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이야기는 <맹룡과강>의 로마 로케로부터 돌아와 홍콩에서 세트 촬영을 시작했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촬영중 부르스가 갑자기 머리를 싸안고서 세트 구석에 웅크렸고 몇 분간 아픔을 참는 일이 있었다. <사망유희>촬영이 시작되자 그 횟수는 좀더 많아졌다. 5월 부터 11월에 걸쳐 맹룡과강,사망유희의 두 작품의 각본,감독,주연을 함으로서 꽤나 지쳐 있었다. 10월에 그때까지 살고있던 셋집에서 대지 250평 가량의 멋진 저택을 새로 짓고 이사한 과로도 겹쳤다. 시애틀 시대부터 매일 아침 계속하던 런닝도 11월초 스톱했다.
1973년 초 가화공사가 연 신년파티에 나타난 소룡의 건강은 좀 나아 졌지만 수염이 덥수룩했었다. 또 한가지 같은 시기에 정패와의 교제가 본격화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시애틀 시대부터 홍콩시대에 걸쳐 20대인 부르스의 여성관계는 비록 린다부인과 같은 현모양처가 있어도 어지러웠던 모양이다. 그만큼 활력에 넘쳐 있는 사나이니만큼 부득이 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린다 부인은 보고도 모른척 했던것 같다. 상대인 여성도 정패 하나가 아니었다. 다만 부르스는 공사를 구별하는 사나이었다. 의의나 묘가수 같은 상대역과는 서로 아무리 좋아하더라도 우정을 지켰고 손을 대지 않았다. 정패도 처음에는 공연의 예정자였고, 용쟁호투에 나갈 터이었으나 그녀가 입원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정패가 부르스의 애인으로서 클로즈업된 것은 그가 쓰러진 장소가 어쩌다가 정패의 집이었기 때문으로서 사후에 있는 일 없는 일 구설수에 올랐었다. 그러나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의 예명처럼 승천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