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주막의등불
 
 
 
카페 게시글
조선통신사 스크랩 토끼비리길
양효성 추천 0 조회 93 16.08.30 12: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토끼비리길

 


 


영남대로 문경구간

 



토끼비리(兎遷)길, 串岬遷 잔도

 




1. 鎭南橋畔은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있다.

점촌에서 문경~ 충주방면으로 난 3번 국도를 따라 10Km쯤 달려가면 문경탄광 폐광지가 나온다.

계속 S자형으로 굽은 강변을 끼고 3Km쯤 더 달리면 오른쪽 강변을 따라 병풍처럼 펼쳐진 기암괴석과 층암절벽이 이어진다.

맑고 푸른 강 위에는 가지런히 철교와 함께 3개의 교량이 나타난다. 이곳이 진남교반이다.

‘교반’이란 말은 다리 주변이란 뜻이다. ‘진남교반’은 ‘진남교를 중심으로 한 일대’라는 뜻이다. 


진남교반은 潁江의 물줄기와 오정산(804.9m)의 산줄기가 어우러져 태극 형상을 이루고 있다.

그야말로 산태극 수태극, 弓弓乙乙이다.  

고모산을 끼고 흘러온 조령천이 부산을 돌아나온 농암천을 이곳에서 만나 영강이란 이름을 얻는다.

조령천과 영강이 어울려 굽이도는 강변에는 모래벌과 아름드리 노송이 우거진 진남숲이 있다.

강변 일대는 야영장이 있어 야유회, 각종 수련대회 장소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활짝 피어 꽃대궐을 이룬다. 계절따라 여러 모습으로 변한다하여 문경의 소금강으로 불린다.

1993년 대구일보사 주최로 경북8경을 선정할 때 이곳 진남교반이 단연 1위로 선정되었다.

진남휴게소 폭포 왼쪽 암벽에 ‘경북팔경지일’이라 새긴 돌비가 있다. 

 

이곳에 다리 6개가 있어 마치 다리 전시장 같다. 아쉽게도 우왁스런 다리들로 인하여 아름다운 풍광은 많이 사라져버렸다.  


2. 토끼비리(명승 제31호)는 고모산성을 끼고 오정산의 층암절벽을 깎아 만든 길이 2km, 폭 1m 가량의 벼랑길이다.

지금은 국도 3호선 진남휴게소에서 오른쪽으로 몇 발 더 가면 토끼비리 길이 시작되는 작은 고개가 나온다.

이 길은 경상남도 물금의 황산잔도와 삼랑진의 작원잔도와 함께 영남대로 950리 중 가장 험하다.

문경새재까지는 15km쯤 떨어진 곳이다. 문경새재는 사실상 여기에서 시작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29권 문경현 산천 조에,

 

“龍淵 동쪽 언덕인데 兎遷이라고도 한다.

돌을 파서 사다릿길[棧道]을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6~7리나 된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쳐 와서 이곳에 이르니 길이 없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갈 수가 있었으므로 토천이라고도 한다.’

그 북쪽의 깎아지른 봉우리에 돌 성터가 있는데, 옛날 지키던 곳이다.”

 

<같은 책> 제29권 문경현 형승 조에,

 

“벼랑에 의지하여 사다릿길를 만들었는데, 函谷關 같이 장하고 촉나라의 길처럼 험하다.”

 

본디 팃재이(톳재이)배리라 했다. ‘톳재이’는 토끼의 사투리이다.  

이 지방 사투리로 ‘토끼비리’라 한다.

'비리’는 이 지방 사투리로 강이나 바닷가의 위험한 낭떠러지'라는 뜻이다. '벼랑'과 비슷한 말이다. 

토끼가 낸 길이라 하여 ‘토끼비리’라 한다.


棧道는 험한 벼랑에 나무로 선반을 달아내어 만든 길이다.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알려주었다 하여 兎遷 또는 串岬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적었다. 한자로는 兎遷 또는 串岬遷이라 한다. 

<아언각비>에 따르면 ‘벼루’를 ‘遷’으로 옮겼다. “천 이란 물이 양쪽 산길에서 나와 그 양쪽 언덕에 임박하는 길을 말하는데, ……천을 방언으로 벼로 別吾라 한다.” 


① 이 잔도의 개척은 고려 태조 19년(936) 9월 고려군이 후백제의 신검과 벌였던 일리천(오늘날의 서산읍 앞을 흐르는 甘川)전투를 위한 원정군의 파견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게 맞다면 관갑천 잔도는 고려군 공병대가 건설하였으며 한반도 재통일의 계기가 된 통일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잔도 입구의 고모산성에서 신라 토기가 발견된 점으로 보아 고려 이전에도 길이 있었거나 근처에 다른 통로가 있었을 것이다.  


② 길은 암반으로 된 부분과 토석으로 덮인 부분이 있다.

길 폭은 넓은 곳은 약 1.5m, 좁은 곳은 20~30cm에 불과하였다. 과거에는 좁은 장소마다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난간을 설치하여 사람과 말이 지날 수 있을 정도의 길 폭을 유지하였다.

 

바위에 옛 사람들의 발자국이 남아있다.

발 디딜 곳조차 제대로 없어 한 곳만 집중적으로 밟았기 때문에 화석처럼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토끼비리는 바위를 U자 모양으로 깎아 만든 고갯길에서 끝난다. 이곳은 암석을 약 3m 정도 절개하여 약 2m 폭의 길을 낸 인공 鞍部이다.

이 안부 오른쪽으로 잔도가 이어졌는데, 지금은 폐광된 문경탄좌의 갱도로 인하여 막혀버렸다.

총 길이 2km 남짓했던 관갑천 옛 잔도 가운데 현존하는 구간은 토끼비리의 500~600m에 불과하다.

 

이 안부에서 오른쪽으로 난 옛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潁江 하류 犬灘이 한 눈에 들어온다.

견탄은 마을 앞 냇가 웅덩이에 개들이 자주 가서 헤엄치며 놀았다는 데서 이름붙었다.

나루터가 있으며 남쪽으로 흘러서 함창현의 경계로 들어간다. 


<같은 책> 驛院 조에 권근이 쓴 記文이 있는데,

 

“서울에서 경상도로 가려면 반드시 큰 재가 있는데, 그 재를 넘어서 약 100리 길은 모두 큰 산 사이를 가야한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관갑에 이르러 비로소 커지는데, 이 관갑이 가장 험한 곳이어서 낭떠러지를 따라 사다릿길로 길을 열어서 사람과 말들이 겨우 통행한다.

위에는 험한 절벽이 둘러있고, 아래에는 깊은 시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떨고 무서워한다.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그 내를 건너는데, 그것이 犬灘이다.

견탄은 호계현의 북쪽에 있는데 나라에서 제일가는 요충이요, 경상도에서 가장 험한 길이다.”

 

용연은 현의 남쪽 22리, 가은과 소야 두 내가 합하는 곳에 있다.

犬灘은 용연의 하류이다. 나루터가 있으며 남쪽으로 흘러서 함창현의 경계로 들어간다.  


③ 관갑천 잔도는 조선시대에도 영남으로 들어가는 목구멍 역할을 하였다.

험한 문경 새재를 넘어 넓은 마성들을 지나면 바로 관갑천 잔도가 나타나는데 이 험한 길을 지나야 비로소 영남 각지로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새재를 오르기 전에 먼저 통과해야 하는 관갑천 잔도는 여러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적으로 지나갔다.

18세기의 화가 權信應의 그림 鳳生川에 이런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권신응의 화첩 <暮景興奇>에 <문경10승>이 있다. 두 번째가 교귀정, 열 번째 그림이 봉생천이다.

이 화첩은 그의 할아버지 玉所 權燮(1671~1759)이 소장한 것이다.

 

 

권신응의 그림 <봉생천>,

왼쪽 산기슭에 사람이 자나가는 것이 보인다.


 

  

④ 관갑천 잔도는 영강 수면으로부터 5~10m 높이의 절벽을 깎아 만든 길이다.

토끼비리 쪽은 동 · 남쪽이 막혀 그늘지기 때문에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 위험하며, 여름에는 큰 비가 오면 동쪽의 오봉산 사면에서 쏟아지는 물로 길이 막힐 수도 있다.

개통 당시에는 일시적인 병력이동이 목적이었으므로 간단하게 공사를 마무리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는 사람과 우마의 통행을 위하여 보수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따르면 이 도로의 보수와 관리를 국가가 아닌 승려들이 맡았다.

유럽에서는 알프스의 험로를 가톨릭 수사들이 맡았고, 카라코름의 天竺路에서는 佛僧들이 인도를 오가는 여행자들을 위해 봉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승려들은 산중의 험로에서 행려병자를 보살피고 길을 닦는 일 등 길 布施를 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역원조에,

 

“여울 위에는 전에 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퇴락한지 오래되어 길손이 쉴 곳이 없다.

華嚴大師 眞空이 일찍이 여기를 지나다가 개탄하여, 퇴락한 것을 다시 일으키려고 곧 그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띠를 베어 거처할 집을 짓고 또 길손들을 접대해 가면서 여러 사람을 잘 달래어 재물과 사람의 힘을 모아서 재목을 찍고 기와를 굽는 등 공사를 일으켜 몇 칸 집을 세워 걸어다니는 길손의 머물러 자는 곳으로 하였다.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자리를 달리하고, 사람과 가축의 처소를 따로 하였다.

또 그 남쪽에 누각 몇 칸을 지어서 길가는 이는 거기서 쉬어가고 더운 사람은 시원하게 하려 하였다. 몇 해 안되어 준공하였다.

또 그의 제자들과 함께 모진 돌을 까서 치우고 비탈을 깎아 평평하게 하여 관갑의 길을 보수하였으므로 좁은 길, 위험한 사다릿길이 모두 평탄해졌다.

그리하여 다니는 사람들이 평지를 밟는 것 같아서 걸어가도 몸을 구부릴 필요가 없고, 타고 가도 마음이 떨리지 않아 다시는 떨어질 위험이 없게 되었으니 대사의 마음 씀이 부지런하다 할 것이며, 사람에게 이롭다 할 것이다.”

 

眞空大師(855~937)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산 사람이다.

소백산사(비로사)에 있을 때, 남방으로 원정길에 오른 고려 태조를 찾아보았고, 931년에는 태조가 비로사로 그를 찾아가 법문을 들었다.

937년 대사가 개경으로 가 왕에게 자문을 하기도 했다.

그가 돌아가자 고려 태조는 진공대사라는 시호와 보법이라는 탑호는 내렸다.


비로사에 그의 탑비 眞空大師普法塔碑(경상북도 도유형문화재 第4號)가 있다. 비문은 당대의 대학자 崔彦僞가 썼다.

비편 한 조각이 떨어져 없어졌는데, 2008년 5월 떨어져 나간 비 조각을 찾았다. 비 조각에는 182자가 있다.



비로사진공대사 보법탑비

 

 

⑤ 관갑천 잔도는 지형적으로 험한 곳에 위치하므로 전략적으로도 중요시되었다.

1760년에 간행된 <문경현지>에 따르면 조일전쟁 당시 이곳에 이른 왜적들은 조선군의 매복이 있을까 두려워 망설였다가 지키는 병력이 없음을 알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지났다고 하였다.

 

⑥ 이 길은 1925년 신작로 이화령이 개설되기 이전에는 국도 영남대로의 한 구간으로 사람과 물자의 이동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길이었다.

옛 국도3호선(이화령길)이 개통되면서 옛 진남교가 생기자 토끼비리는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옛 진남교에 자리를 내준다. 옛 진남교는 진남교반 최초의 다리이다. 지금은 인도로만 쓴다.

이곳을 지나는 국도 3호선은 1978년 2차선으로 확장되었다가, 1999년 다시 4차선으로 넓혀지고 길이 180m, 폭 19m의 진남2교가 놓였다. 이 길이 토끼비리의 한 자락을 뚫고 지나간다.

옛 진남교가 놓였던 자리는 본디 나루터였다. 일제강점기까지도 이곳에 소금배가 올라왔다고 한다.


3. 姑母山城은 신라 제8대 아달라니사금(154~184 재위) 3년(156)년 계립령길을 개설했던 시기에 쌓은 것으로 보인댜.

문경은 2C 중엽 계립령이 개통되면서 군사전략지로 등장한다.

북으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 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성의 둘레는 1.27m로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성의 높이는 낮은 곳은 1m, 높은 곳은 11m쯤 되고, 폭은 동쪽에 암문 1개가 남아있다. 남쪽으로 1km쯤 가면 토기비리가 시작된다.

 

1차발굴 때 5C 무렵의 지하 목조건물과 성문 2개소를, 2차발굴 때 저수지 2개소, 우물 2개 등 성내시설 발굴했다. 토기, 목기 등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저수지 바닥 에서는 ‘沙伐女 上’이라 적힌 청동장식품도 나왔다.

유물로 보아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초까지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모산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마고산성, 고부산성, 희양산성 등 여러 산성이 있다.

 

고모산성이 있는 이곳은 북쪽으로는 주흘산이 막고 있고, 고모산 자락을 돌아 영강이 흐른다.

남쪽으로는 불정지역 외에는 다른 곳으로 길을 낼 수 없어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하는 길목에 위치한다.

당시에는 이 아랫길을 통하지 않고는 영남과 한양을 오갈 수 없었다

신라는 고모산 자락을 돌아 흐르는 영강을 해자로 삼아 진남교 일대를 거점으로 고모산성을 쌓았다.

고모산성에 오르면 진남교반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일전쟁, 갑오농민혁명, 의병항쟁 등의 시기에 전략적 요충지로 사용되었다.

 

 

고모산성

 

 

 

고모산성에서 진남교반을 내려다 보았다


   

? 석현성은 조일전쟁 이후 쌓았다. 석현성은 고모산성의 翼城이다.

고모산성 동남쪽을 향해 새의 날개 모양으로 401m가량 뻗어있다. 남쪽에서 오는 적을 차단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조일전쟁 중인 선조 29년(1596)에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현성의 동쪽 끝은 토끼비리의 단애로 이어진다. 

성문을 복원하여 鎭南門이란 현판을 걸었다. 남쪽을 진압한다는 뜻이다. 

조일전쟁 때 문경새재 성 3개가 허무하게 뚫린 비극을 교훈삼아 사전에 외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 한다.

그러자 성을 쌓은 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석현성 진남문


 

4. 진남문 뒤쪽에 초가 2채로 이루어진 주막거리가 있다.

예천의 삼강주막과 문경 영순의 달지주막을 재현했다고 한다. 지금은 버려진 채로 귀신 나오는 집처럼 을씨년스럽다.

 

 

 


 

5 몇발 더 가면 돌고개 마루에 성황당이 있다.

성황당 앞뒤에 5~6m 높이의 느티나무 2그루가 서있다.

앞에 있는 느티나무는 의병장 이강년이 1896년 일본군과 이 고모산성에서 싸울 때 불에 탄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안에는 모녀의 초상화가 있다.

이곳에 살던 떡장수 모녀라 한다.

본디 서낭당이라 하여 돌무더기였는데, 300년쯤 전에 이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6. 성황당 아래 돌고개마을(석현마을)부터 포장길이 나 있어 문경새재 1관문으로 이어진다.  





소 재 지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산8 외
지정면적 397,478㎡
지 정 일 2008년 12월 26일


하늘재는 북쪽으로 포암산(962m), 남쪽으로 부봉(925m)과 월항삼봉(847m) 등으로 이어지는 산맥 사이에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는 고갯길로, 동달천 지류와 산북천 지류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다. 동달천 지류는 하늘재에서 서류하여 수안보면 미륵리를 거쳐 제천시 한수면 송계계곡으로 이어지고, 산북천 지류는 동류하여 경상북도 문경군 문경읍 관음리를 지나 황정마을에서 남류한다. 또한 산북천은 경상북도 문경시 조령천의 지류이므로 하늘재는 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 된다. 계립령 중 미륵리 절터에서 문경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칭하는 하늘재 고갯길은 임진왜란 이후에 폐쇄된 길로서 이미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옛길이며, 지금도 충청북도 충주시 구간은 비포장 도로로 남아 있어 옛길의 정취를 잘 보존해 오고 있다.


하늘재 부근 포암산 방향에는 한훤령 산성이 있는데, 이 성은 길이 480m의 석성으로 언제 축조되었는지 알 수 없다. 성은 폭 1.8~2.4m, 높이 1.1~3.7m의 규모로 성벽 주위에서 신라계의 연질 토기와 경질 토기가 발견되었다. 또한 하늘재 옛길 주변으로 중원미륵리사지(사적 제317호), 중원미륵리오층석탑(보물 제95호), 중원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96호) 등 국가지정 문화재와 다수의 시도유형문화재 및 문화재자료가 있어 매우 풍부한 문화경관 요소를 지니고 있다. 하늘재 서쪽 수안보면 미륵리 56번지에 있는 사적 제317호 중원미륵리사지는 고려초기에 조성된 80,454㎡ 규모의 큰 사찰터로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가 당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계립령은 이 옛길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작은 계곡과 주변에 펼쳐지는 월악산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옛길의 정취를 더해주는 역사적, 경관적 가치가 큰 명승이다.

 


충주 계립령로 하늘재는 충청도 충주와 경상도 문경 사이의 가장 낮은 고갯길로서 신라시대 초기인 156년(아달라왕 3)에 개척되었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 분쟁 역사가 전해오는 오랜 역사의 옛길로서, 백두대간을 넘는 최초의 통행로가 된 길이다. 하늘재에는 많은 전설과 유래가 깃들어 있고,『 삼국사기』·『삼국유사』·『문헌비고』·『증보문헌비고』·『만기유람』·『동국여지승람』등 다수의 고문헌 자료에 나타나고 있는 옛길이다. 하늘재는 고개가 하늘에 맞닿을 듯 높아 붙여진 명칭이라 한다. 한자로는‘천치天峙’라 표기하기도 하고, 우리말로는 하니재·하닛재 등으로 발음을 달리 하여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높은 고개라는 뜻에서‘한치’라고 했다고도 한다. 신라시대에는‘계립령’·‘마목현’이라 불리었으며, 고려시대에 계립령 북쪽에 대원사가 창건되면서 절의 이름에서 따와‘대원령’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고개 부근에 한훤령 산성이 있으므로‘한훤령’이라고도 불렀으며, 시간이 지나면서‘한원령’으로 변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말기 왜구가 창궐하면서 조운漕運이 육운陸運으로 바뀔 무렵부터 지금의 조령鳥嶺인 초점草岾이 크게 개척되면서 가치가 상실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조령이 중요한 구실을 하면서 새재에 관방시설을 설치하고 인근의 다른 통행로를 폐쇄할 때, 하늘재 옛길도 패쇄되어 이미 오랫동안 행인의 왕래가 없어진 길이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