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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강해(17) 2023. 11. 12
주의 크신 긍휼로
느헤미야9:6-22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쓴 ‘인생의 길’이라는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두 여인이 노인 앞에 가르침을 받으러 왔다. 한 여인은 젊었을 때 남편을 바꾼 일에 대해 괴로워하면서 스스로를 용서 받을 수 없는 큰 죄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한 여인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도덕적으로 큰 죄를 짓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었다. 노인은 앞의 여인에게는 큰 돌을, 뒤의 여인에게는 작은 돌들을 여러 개 가져오라고 했다.
두 여인이 돌을 가져오자, 노인은 들고 왔던 돌을 다시 제자리에 두고 오라고 했다. 큰 돌을 들고 왔던 여인은 쉽게 제자리에 갖다 놓았지만 여러 개의 작은 돌을 주워 온 여인은 원래의 자리를 일일이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노인이 말했다. "죄라는 것도 마찬가지니라. 크고 무거운 돌은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기억할 수 있어 제 자리에 갖다 놓을 수 있으나, 많은 작은 돌들은 원래의 자리를 잊었으므로 도로 갖다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큰 돌을 가져온 너는, 한때 네가 지은 죄를 기억하고, 양심의 가책을 겸허하게 견디어 왔다. 그러나 작은 돌을 가져온 너는, 네가 지은 작은 죄들을 하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 모두 잊고 살아온 것이다. 그러고는 뉘우침도 없이 죄의 나날을 보내는 것에 버릇이 들었다. 너는 다른 사람의 죄를 이것저것 말하면서 자기가 더욱 죄에 깊이 빠진 것을 모르고 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는 많은 작은 돌을 가져온 여인처럼, 죄에 무감각하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입니까? 죄를 깨닫지 못하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편지하면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가장 큰 벌은 죄를 깨닫지 못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롬1: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8절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죄가 죄인 줄 깨닫지 못하게 하신다면, 그 결과는 자명합니다. 방향을 틀 기회조차 없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은 때, 들을 때, 묵상하고 기도할 때, 우리가 지은 작은 죄가 생각나면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 회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성화)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민족적 회개 운동>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이러한 은혜가 임했습니다. 에스라를 통해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곱째 달 24일,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민족적인 회개 운동’을 벌였습니다.
첫째, 금식했습니다. 둘째, 굵은 베 옷을 입었습니다. 셋째,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썼습니다. 넷째, 선 채로 (즉시) 회개하였습니다. 다섯째, 스스로 자복하였습니다(공개적). 이렇듯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은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이방 사람들과의 잘못된 관계를 모두 끊고서, 자기들의 죄와 자기 조상들의 죄를 자백하기 시작합니다. 누가 억지로 시킨 것이 아니고, 스스로 죄를 자복한 것입니다.
<레위인들의 공중기도>
그때 그 회개 기도회를 인도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레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큰 소리로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온 백성들을 대표하여 공중기도를 드렸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긴 기도문입니다(6~38).
이 기도문에서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쭉 회고하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패역을 드러내어 회개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긍휼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고백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 기도의 내용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
먼저 레위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먼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처음 알려 주셨습니다.
출6:2(바로에게 보내시며)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그런데 경전에 기록할 때, 자음만 기록하였습니다(יהוה, YHWH). 십계명 중 제3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따라, 경전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 내어 읽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대신 '아도나이'(주님)라고 발음했습니다. 문제는 세월이 지나 본래의 발음을 잊었다는 것입니다(모음의 위치에 따라 야훼, 또는 여호와). 대한민국 대부분 개신교 교단은 여호와, 가톨릭은 야훼라고 발음합니다.
왜 구약의 하나님, 유대인들의 하나님, 이스라엘 종교의 여호와 하나님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도 우리의 참 하나님으로 고백하느냐?'라고 묻는다면, 사실은 딱 하나의 대답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이 참 하나님이라고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새번역)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나님이 바로 구약의 하나님과 동일하신 ‘여호와(야훼) 하나님’이십니다. 그 증거가 바로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시면서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기 때문입니다. 마22:31~32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출3:6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시면서 모세에게 임하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하시는 하나님과 같은 분이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다면, 구약의 하나님을 섬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였다면, 그분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도 참 하나님으로 영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요14:9(빌립이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하나님도 참 하나님으로 영접하여야 할 것입니다. |
그러면, 레위인들이 고백한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창세기도 포로기 이후 문서화).
태초에 천지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하신 만물을 보존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이 창조신앙은 기독교 신앙으로 입문하기 위한 첫 번째 돌다리입니다. 창1:1은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의 근원(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돌다리를 건너지 못하면 다음 돌다리를 밟을 수 없습니다. 믿음의 진행이 중단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한 마디로 온 ‘우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과 함께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을 과학적인 안목을 가지고 증명하려 들면 안 됩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창1장의 목적은 '세상의 기원에 대한 신앙 관점에서의 해석과 고백'의 차원이지, 그것의 구체적인 생성 원리 등에 대해서 설명하는 과학 연구의 결과물은 아닙니다. 그래서 과학적 방법으로는 증명할 수도, 증명해서도 안 됩니다. 이는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고백 되어야 합니다. 진화 역시 위대한 하나님의 창조 과정 중 하나일 뿐입니다.
또, 창조 신앙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윤리의 원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식물들과 달리 존귀하게 구별되는 이유를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창조 신앙을 통해 인간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존귀한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람(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신 분이십니다.
7~8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8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의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매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람’을 선택하셔서 갈대아 지역의 우르에서 인도해내시고, 그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아브람’이 큰아버지란 뜻이라면 ‘아브라함’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창17:5).
그럼 하나님이 아브람과 맺으신 언약은 무엇입니까? 장차 가나안 땅을 그의 자손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400년 동안 이방인의 압제를 받을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창15장에 나오는 ‘횃불 언약’입니다. 언약식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 등을 가져오라 하셨고,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았습니다. 그러자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언약’(베리트)의 기본 의미는 ‘자르다’(cut)입니다. 고대 중근동 지역의 풍습상, 언약 체결은 짐승을 잡은 후에 그 고기를 잘라 양쪽으로 나눠놓고, 그 사이를 언약 당사자들이 지나갔습니다. 이 같은 언약 체결의 의식이 갖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만약 언약 당사자 가운데 누군가 언약을 어긴다면, 그자는 희생 동물의 고기처럼 기필코 죽임을 당한다는 뜻이었습니다. |
셋째,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이십니다.
9~12절 “주께서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10 이적과 기사를 베푸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나라 온 백성을 치셨사오니 이는 그들이 우리의 조상들에게 교만하게 행함을 아셨음이라 주께서 오늘과 같이 명예를 얻으셨나이다/ 11 또 주께서 우리 조상들 앞에서 바다를 갈라지게 하사 그들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 같이 통과하게 하시고 쫓아오는 자들을 돌을 큰 물에 던짐 같이 깊은 물에 던지시고/ 12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이 행할 길을 그들에게 비추셨사오며.”
그들이 애굽에서 고난받는 것을 감찰하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셔서 이적과 기사를 일으키셔서 그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특히 홍해를 가르시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주신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넷째,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시내산 계약을 언급합니다.
13~14절 “또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그들과 말씀하사 정직한 규례와 진정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그들에게 주시고/ 14 거룩한 안식일을 그들에게 알리시며 주의 종 모세를 통하여 계명과 율례와 율법을 그들에게 명령하시고.”
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셔서, 열방에 ‘제사장 나라(민족)’으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출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것이 아브람을 부르고,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제사장 나라(민족)’의 역할은 하나님과 열방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참 소중한 사명입니다.
그런데 전제 조건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배반의 역사 회고>
자, 그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잘 준행하였을까요?
아뇨. 그랬다면 지금까지의 고난도 없었을 것입니다.
레위인들은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반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회개합니다.
그 시작은 광야에서부터입니다. 레위인들은 두 가지 배반의 사건을 예시합니다(18절 먼저).
첫째는,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입니다.
18절 “또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한 신이라 하여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였사오나.”
출3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40일간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 기다리던 백성들이 모세가 죽은 줄로 알고, ‘애굽인들이 풍요의 신으로 숭배하는 황소 우상 아피스(Apis)’를 본떠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생각입니다. 애굽인들의 숭배를 받는 신이 애굽인들을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시켰겠습니까? 나아가 영이신 하나님을 짐승으로 상징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32:9~10)고 말씀하시고는 속히 내려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모세가 급히 내려와 보니 가관이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주변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대노하였습니다. 시내산에서 받아 온 돌판을 던져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갈아서 가루를 물에 타서 먹입니다. 금송아지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노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백성들을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 하였습니다. 3차에 걸쳐 기도하는데, 생명을 걸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출32:31-32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생명책은 하나님 보좌 앞에 놓여있는 명부인데, 하나님의 백한 백성의 이름 즉 영생을 얻은 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 이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이 삭제되더라도, 다시 말하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보살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토록 애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출32: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출33:1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이제 다시 함께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휘관인 모세를 죽이고, 자기들끼리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한 사건입니다.
15~17절 “그들의 굶주림 때문에 하늘에서 그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들의 목마름 때문에 그들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또 주께서 옛적에 손을 들어 맹세하시고 주겠다고 하신 땅을 들어가서 차지하라 말씀하셨사오나/ 16 그들과 우리 조상들이 교만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17 거역하며 주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이 내용은 민 14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드디어 가나안 땅의 남쪽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란 곳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북쪽으로 곧장 들어가기만 하면 약속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눈으로 정탐해보고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자신들의 기대에 충족하지 않는다면 들어가지 않겠다는 뜻이 됩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해놓으신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오래전부터 준비해놓으신 땅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좋고 나쁨’을 스스로 판단하여 ‘들어갈지 말지’를 선택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이미 불신앙의 싹이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열두 명의 정탐꾼을 파견합니다(민13:17-20).
40일 동안의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정탐꾼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민13:27-29).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맞지만, 그 땅의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특히 거인족인 아낙 자손을 보았는데 그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메뚜기’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나서서 분위기를 바꾸어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민13:30-33).
결국, 부정적인 보고가 그들을 압도하였고, 백성은 밤새도록 통곡하였습니다(민14:1-3).
그리고 쿠데타 음모를 꾸밉니다. 민14: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그들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를 제거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들을 대표할 지도자를 세우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더 이상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자신들이 주권자가 되어 자신들의 길을 개척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의 반역을 지켜보시던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들을 전염병으로 진멸하시고, 다른 민족을 세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민14:11-12). 이때 모세가 나서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요청합니다.
민14:15-19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하나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여러 나라가 말하여 이르기를/ 16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 19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
모세의 간절한 기도에 감동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십니다. 물론 정탐한 날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해야 했지만(민14:34), 다음 세대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맺는 말씀 – 주의 크신 긍휼로>
제사장들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19~22절 “주께서는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며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이 갈 길을 비추게 하셨사오며/ 20 또 주의 선한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가 그들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목마름을 인하여 그들에게 물을 주어/ 21 사십 년 동안 들에서 기르시되 부족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사오며/ 22 또 나라들과 족속들을 그들에게 각각 나누어 주시매 그들이 시혼의 땅 곧 헤스본 왕의 땅과 바산 왕 옥의 땅을 차지하였나이다.”
이스라엘의 배반에도 하나님은 메마른 광야를 지나는 40년 동안 시시때때로 항상 필요한 것들을 대어주셨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만나, 반석에서 물을 내시며 40년을 부족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그러했기에, 우리 조상들은 옷이 해어져서 누더기를 입은 적도 없고, 신발이 없어 발이 부르튼 적도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은 우리 조상들을 요단강 동편의 헤스본 왕 시혼의 땅과 바산 왕 옥의 땅을 차지하게 하셨고, 마침내 일찍이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해 주셨던 요단강 서편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돌아보며, 조상들의 죄를 돌아보며 자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문구가 있습니다. 바라 ‘주의 크신 긍휼로’(19)입니다. 레위인들의 기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반복적으로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마음과 같습니다. 자신을 배신한 아들을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 달라”(삼하18:5)고 부탁합니다. 이 다윗의 마음이 이스라엘을 향한, 아니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다시 세워주십니다.
성경은 완성된 제자도를 그리고 있지 않습니다.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회개할 때, 다시 우리를 품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록한 책입니다(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도 여러분,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회개를 통해 다시 새로워지고,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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