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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19) 2024. 12. 1
백성이 칭송하더라
사도행전 5:11-16
<비극적일 사건을 통해 얻는 교훈>
초대 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각종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고,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그중에서 더욱 은혜로운 일은 성도들이 서로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재물을 팔아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주기도 했습니다. 정말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비극적인 사건이 터졌습니다. 바나바가 재산을 팔아 구제한 일로 칭찬을 받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질투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밭을 판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만 아까운 생각이 들어 일부를 숨기고 마치 전부를 판 것처럼 사도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가 부부가 다 죽는 비극이 발생하였습니다. 성령님을 속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큰 죄였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에도 사탄은 역사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이라도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얼마든지 잘못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사랑할 수 있는 몇 가지 선물> 지난 시간에 언급하지 못하였기에, 여기서 잠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통해 ‘결혼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몇 가지 선물을 주셨습니다.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둘째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셋째가 남녀가 서로 만나 하나가 되는 ‘결혼’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창2:18). 예, 부부가 하나 되어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주어야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속성상 여자의 특징은 ‘깊이’, 남자의 특징은 ‘넓이’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의 깊이’를 남자들은 따라갈 수 없습니다. 반면 근육의 힘이나 사회생활의 활동 범위는 남자가 더 넓은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통해 상호 보완적으로 성숙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아내는 남편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사고의 너비를 더해 가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해 나가는데 부부는 상호 보완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바른길을 갈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진리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상호 보완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고, 함께 악한 일을 모의하는 ‘불의의 공범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속이는 일에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부가 다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서로 진리 안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이해하고, 바른 생활의 중심을 잡아주는 ‘진리의 동역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재철 목사님 글에서 요약 인용> |
<두려워하는 사람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일어나리라고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예루살렘 전체에 퍼져 나갔습니다.
행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여기에서 처음 사용된 ‘교회’라는 단어는 ‘에클레시아’인데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유대교의 ‘회당’(시나고그)과 구분되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가리키는 특별한 용어로 사용된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도,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모두 ‘크게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지금까지 적당히 거짓말하고 하고 살아왔을 텐데요.
올가을 ‘튀르키에 그리스 성지순례’ 당시 있었던 일입니다. 튀르키에 어느 상점에 들렀는데, 그 안에서 물건을 팔던 할아버지가 우리 일행이 한국인인 것을 알아채고는 계속해서 “우리가 남인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교회 장목사님이 흥정을 해서 물건값을 깎았습니다. 그 할아버지도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카드 계산 후, 영수증을 보니 깎지 않은 가격이 찍힌 것입니다(어차피 한 번만 들르는 관광객). 영수증을 확인 안 하고 출발했으면, 그냥 손해 보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항의하고 다시 계산했습니다만, ‘우리가 남인가’라는 정겨운 말조차 속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든 작든 거짓말을 하고 삽니다.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자신들과 대비시켜 보았을 것입니다.
남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아니 자신들은 그들보다 못합니다. 자신들에게도 곧 닥칠 일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두려움이 생겨났습니다. 이전까지는 외부의 박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이제는 사도들에 대한,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더 좋지 않은 소문이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원래 나쁜 소문이 더 잘 퍼지는 것입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얼마나 뻥튀기를 해서 이런저런 소문을 퍼뜨렸을까요(예수 믿다가 죽었대….).
그리고 늘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자신들은 감히 가지 못할 곳으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명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얼마나 공격하기 좋은 호재였을까요. 그들은 생각하기를 ‘교회 안에서 사람이 둘이나 죽었으니, 이제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라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도 초대교회에 큰 위기가 닥친 것처럼 보입니다. 전도가 안 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의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빨리 퍼지고, 많이 모이는 교회를 상상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우는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탐욕에 기생하는 종교가 아닌, 하나님께 대한 ‘경외’(敬畏)를 바로 가르치는 교회를 꿈꾸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지만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성령을 속이고 성령을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다가는 큰일 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진짜 ‘종교’를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가 나타남 – 생명을 살리는 종교>
그러면 그 비극적인 사건 이후, 예루살렘 교회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12절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예루살렘 교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비극적인 사건보다 생명을 살리는 기적적인 사건들이 훨씬 더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것과 같은 ‘표적’과 ‘기사’가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많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살리는 기적, 생명의 역사가 많이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만일 그런 죽이는 일만 일어난다면 아마도 초대교회가 부흥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야만 교회는 부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오신 목적을 설명하면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의 종교’가 아니라 ‘생명의 종교’입니다.
여기서 ‘표적’은 일종의 ‘싸인’('sign')인데, 교회가 ‘생명의 종교’ 임을 드러내는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표적과 기사의 구체적인 내용>
‘표적’과 ‘기사’가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많이 일어난 구체적인 예를 기록했습니다.
15~16절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16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어마어마한 치유의 역사가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사도들의 손이 미처 미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났습니다(‘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 행19:12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감).
베드로의 그림자에 무슨 영험한 능력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라도 해서 병 고침을 받고 싶어 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나아와 ‘다 나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나 사도들이 가진 어떤 능력으로 치유의 기적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선포한 것은 언제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행3:6)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선포할 때에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 종류의 사람들>
그러자 다시 예루살렘 교회에 부흥의 문이 다시 열렸습니다. 세 부류의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첫째, 먼저 ‘믿는 사람’들입니다.
12절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다 마음을 같이 했다’는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이후 ‘두려움’ 가운데 분열되었던 마음이 다시 하나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입니다(믿는 사람 중에서도 흔들리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는 것은 공개적인 예배와 가르침이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행각’은 베드로와 요한이 행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일으켜 세운 후,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바로 그곳입니다. ‘솔로몬 행각’은 그 당시 랍비들이 사람들을 가르쳐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으로 성전 동편에 있는 행랑이었습니다. 이제는 공개적으로 솔로몬 행각에서 교회가 정기적인 모임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 멥버들입니다.
릭 워렌(Rick Warren)목사님이 쓰신 책 중에 ‘새들백 교회 이야기’(The Purpose Drive Church)란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교회의 교인을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합니다(알파벳 ‘C’로 시작하는).
첫째는, ‘지역사회’(The Community)입니다. 교회는 나오지 않지만, 장차 나오게 될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군중’(The Crowd)입니다. 예배에만 참석하며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믿지 않고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등록 교인’(The Congregation)입니다. 세례를 받고 등록하여, 교회의 정식 멤버가 된 사람들입니다(입교인).
넷째는 ‘헌신된 자’(The Committed)입니다. 아주 성숙한 크리스천들입니다. 예배와 기도와 말씀뿐 아니라, 함께 돕고 서로 섬기며 많은 일을 함께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가 ‘핵심 멤버’(The Core)입니다. 평신도 사역자로서, 교회의 모든 결정을 함께 내리는 핵심 리더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좋은 교회이거나 그런 게 부흥이 아니라, 핵심 멤버가 많은 교회, 헌신 된 자가 많은 교회입니다. 교회에서만 헌신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가정과 생업에 나아가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라고 부릅니다.
혹시 여러분이 스스로 보시기에 ‘나는 아직 군중인 것 같다’, 또는 ‘나는 등록 교인이지만 헌신된 자나 핵심 멥버는 아니다’라고 생각되시면, 조금 더 주님 앞에 나오시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하여 함께 사역하고 함께 섬기며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나아가는 방향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 ‘감히 그들과 상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13절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그 나머지'라고 하는 말은 교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킴입니다.
그들은 ‘감히’ 사도들(성도들)과 상종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감히’라는 말 속에는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지만, 여전히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적인 죽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은 부도덕하여 그 공동체에 들어갈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경기도 광주에서 교육전도사 시절 경험한 일 – 불량한 청소년들. 교회에 들어가자고 하니 ‘자신들은 교회에 들어가면 벼락을 맞을 것’이라고 거부.
그래서 ‘감히’ 그들 모임에 합류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백성이 칭송하더라!”
감히 믿는 사람들의 모임에 직접 합류하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욕하거나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모습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성취해야 할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교회의 참모습입니다(세상의 빛과 소금).
한국교회가 당한 현실 –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엊그제 뉴스 – 분당의 어느 교회에서 패싸움).
하용조 목사님의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자동차 운전면허를 처음 따고 운전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밤에 운전하고 있는데(잔뜩 긴장하며), 교통 경찰관이 갑자기 손짓을 하며 잡더랍니다. 겁을 먹고 떨리는 목소리로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경찰관이 그러더랍니다. “불 좀 켜고 다니세요!” 그렇습니다. 주변이 밝아 자신이 헤드라이트를 끄고 다니는지도 몰랐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차들이 다 불빛을 내고 다니고, 또 가로등도 밝게 켜져 있으니 운전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남의 불빛에 의지해서 그냥 스텔스처럼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불 좀 켜고 다니시오!”
<벤허>라는 영화를 아실 겁니다. 젊은 유대인 귀족인 유다 벤허가 우연한 사고로 로마군의 반역자가 됩니다. 노예로 팔려 로마군 전함의 노 젓는 노예가 됩니다. 그때 해전이 일어나고 배가 난파되는데, 그 난파된 배의 함장이 로마 해군의 사령관격인 아리우스 제독이었습니다. 조각난 배의 파편을 의지해서 벤허가 아리우스 제독을 구해줍니다. 제독은 로마가 해전에서 패한 줄 알고 칼로 자결하려 하는데, 벤허가 그것을 막습니다. 패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겨서 군함이 이들을 구하러 옵니다. 그때 아리우스 제독이 벤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믿는 너의 하나님은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로마에 승리를 주었구나.”
이게 얼마나 놀랍습니까? 벤허를 구하시기 위해서 로마에게 승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들어야 할 칭송입니다.
바라기는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지 않도록 조심하고, 오히려 ‘빛과 소금’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칭송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새롭게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4절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전도의 문이 막힐 것이라는 제 생각이 틀렸습니다.
위기를 가져왔지지만, 그러나 참 교회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이 옳으셨습니다.
높은 기준이 세워졌음에도 새롭게 믿고 주께 나아오는 자가 더 많아졌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남녀 할 것 없이 도처에서 모여와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부흥의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기준을 낮춘다고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롱거리로 전락할 뿐입니다.
참된 성도들로 교회가 세워질 때, 신실한 사람들로 인정받을 때 교회는 도리어 부흥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기 뒤에 더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크고 넓으신 분입니다. 우리의 짧은 판단력으로 하나님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비극적 사건도,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참된 교회의 모델을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여기서 우리가 초대교회의 역사를 우리 시대의 역사로 다시 재연시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감히’ 두려워하고, 성도들을 칭송하는 교회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바리기는 우리 사도교회와 온 성도들이 ‘열세 번째 사도’로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거짓 없는 참된 삶으로 세상의 칭송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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