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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동요를 찾아서 18]
메아리(1954)
작사·유치환 작곡·김대현
산에 산에 산에는 산에 사는 메아리
언제나 찾아가서 외쳐 부르면
반가이 대답하는 산에 사는 메아리
벌거벗은 붉은 산엔 살 수 없어 갔다오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
산에 산에 산에다 옷을 입히자
메아리가 살게시리 나무를 심자
메아리 메아리 메아리가 사는 산
언제나 찾아가서 외쳐 불러도
아무도 대답없는 벌거숭이 붉은 산
메아리도 못 살고서 가버리고 없다오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
산에 산에 산에다 옷을 입히자
메아리가 살게시리 나무를 심자
서언
이 동요는 1954년에 발표된 청마(靑馬) 유치환이 쓴 시에 김대현이 곡을 붙인 곡이다.
보통 알고 있기로는 식목의 노래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이 곡은 나무를 심는 것을 장려하는 노래가 아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 황폐된 강산의 모습을 보고 시인이 쓴 노랫말로 시인이 동요에 관심을 갖고 지은 몇 편 되지 않는 작품 중 하나라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 산림은 극도로 황폐했고, 땔감으로 쓰기 위한 무분별한 나무 베기도 심각한 문제였다.
‘벌거벗은 붉은 산엔 살 수 없어 갔다오’라는 가사는, 6·25전쟁 직후 황폐한 조국강산의 벌거벗은 딱한 모습을 보고 이를 어떻게 그냥 두고만 볼 수 있겠느냐며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 / 산에 산에 산에다 옷을 입히자’고 역설하는 작가의 목소리다.
지금의 아이들은 ‘메아리’보다는 ‘에코(echo)’라는 영어에 더 익숙한 세대로 친숙함이 덜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이 노래가 불려지는 것은 2/4박자로 시작하여 4/4박자로 자연스레 변박하는 경쾌한 선율과 시적인 가사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요즘에는 메아리를 외치는 모습을 그다지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메아리가 드문 것은 산이 헐벗은 탓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예전에는 산꼭대기에 이르면 으레 '야호~'하고 외쳐 메아리를 불렀지만, 요즘은 그런 것이 드물어진 탓에 메아리도 옛처럼 바로 응답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제는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숲이 울창한 산들이 주위에 가득함을 보게 된다.
안타깝게도 지난 산불로 인하여 넓은 지역에 있는 산들의 나무들이 불에 타버려 황폐하게 된 것이다.
해마다 4월이면 식목의 의미를 되살리는 마음을 갖게 한다.
이 동요가 비록 식목을 장려하는 노래가 아니라고 해도 울창한 나무들로 숲을 이루면 동심에 젖었던 메아리도 살아나리라는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
작사자·유치환 (柳致環, 1908~1967)
호는 청마(靑馬), 경남 거제 둔덕에서 출생하여 동래고보를 나와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다.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靜寂)’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6년 <조선문단>에 ‘깃발’을 발표,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서 동인지 ‘생리’를 간행했다.
그러나 ‘시인부락’ 동인으로는 활동하지 않았다.
허무를 극복하려는 남성적, 의지적인 시를 썼다.
1960년대에 부산에 정착, 부산고, 경남여고 등지에서 교사, 교장으로 근무했다.
시집으로 <청마시집, 1940), <울릉도, 1948), <보병과 더불어, 1951), <예루살렘의 닭, 1953), <유치환 시초, 1958), <유치환 시선, 1958),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1960), <미루나무와 남풍, 1964) 등이 있다.
작곡자·김대현 (金大賢, 1917~1985)
김대현은 1917년 함경남도 흥남에서 출생하여 1937년 함흥 영생고보와 1942년 일본 제국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1942년에서 1945년까지 만주에서 한국인 합창단을 지휘하였고, 1945년에서 1947년까지는 함흥의 관북관현악단과 1948년에서 1950년까지는 원산 실내악단을 지휘하였다.
1955년부터 서라벌예대에서 후진을 양성 양성하였으며, 서라벌예대가 중앙대학교로 편입되자 중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임 하였다.
동요 작곡은 ‘자전거’, ‘새나라의 어린이’, ‘자장가’ 등을 작곡하여 어린이 동요보급에 앞장섰다.
1951년 오페라 <콩쥐팥쥐>와 이듬해 오페레타 <사랑의 신곡(神曲)>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교향시곡 <광복10년, 1955년), 칸타타 <글로리아, 1961년) 등과 수많은 영화음악을 작곡하였다.
만년에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주로 성가곡을 작곡하였으며, 작품집으로는 <김대현 작곡집, 1973), 김대현 작곡선집 <들국화, 1977), 김대현 작곡성가집 <영광송, 1977), 김대현 동요작곡집 <자전거, 1982) 등을 남겼다.
식목일 유래
식목일의 유래는 미국의 네브래스카주에서 산림이 헐벗은 것을 본 개척민이 산림 녹화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매년 주민 전체가 하루를 식수를 위한 봉사일로 정한 것이 시초이다.
J.S.모턴이 1872년 4월 10일 본격적으로 제1회 식목행사를 진행했다.
1872년 4월 10일 제1회 식목 행사를 하고 이것이 그 후 미국 각주 및 캐나다에 보급되었고, 나아가 전 세계 각국에서 이를 본받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식목일 시작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인 1493년 조선 성종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성종은 왕과 세자, 문무백관들과 함께 동대문 밖 선농단에서 밭을 일구는 행사에 참여했는데, 이는 농사의 중요성과 백성들과의 유대를 강조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후 1910년 순종이 친경제를 거행하면서 식목 행사가 역사적으로 이어지게 한 기록이 남이 있다.
이러한 전통은 단순한 농경문화의 유산을 넘어, 자연을 존중하고 환경을 가꾸는 정신의 뿌리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우리 민족의 생활 깊숙이 녹아 있는 자연애와 생태주의가 바로 식목일을 통해 구현되어 왔다.
4월 5일을 식목일로 정한 유래는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우리 민족이 일본의 통치로부터 해방되면서 헐벗은 우리 강토에 나무를 심어야겠다는 절실한 요망이 국민의 의사로 집약되었다.
사실 일제감점기 시절인 1911년 조선총독부는 4월3일을 식목일로 택하여 새 학기를 맞이한 학생들에게 1주 정도 나무를 심는 ‘식목 방학’이 있었다.
1946년 미군정청은 4월5일을 식목일로 정했다.
광복된 다음 해인 1946년 정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날(문무왕 17년 2월 25일, 양력 4월 5일)과 조선의 성종이 선농단에서 직접 논을 경작한 날(양력 4월 5일)을 기원으로 해서 식목일을 정했다.
이에 따라 1949년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건’에 따라 공식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당시의 지정은 단순한 자연 보호 캠페인 이상의 의미가 있었으며, 국가 차원에서의 환경 의식을 고취하는 정책적 장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정부는 국토 황폐화와 산림 파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나무를 심는 운동을 전개했고, 식목일은 그 상징적인 기념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많은 국민들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나무심기 운동은 식목일을 단순한 휴일이 아니라 환경보호 실천의 장으로 만들었다.
여기서 한가지 언급하고 지나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산림 훼손이 일제 수탈과 6·25 전쟁으로 인한 것이 주원인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사실 일제가 1907년부터 50여 차례나 산림녹화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일제 강점기에도 산림목화를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민둥산은 조선 시대에 이미 민둥산이었다.
1894년 초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은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한성(서울) 주변의 산이 모두 벌거벗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 선교사 헐버트박사도 『대한제국 멸망사』에서 “반도의 어느 곳을 가나 벌거숭이산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광경은 활엽수로 가득 찬 일본의 풍경과는 극히 대조적”이라고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보아 확인할 수 있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맞이한 뒤에 국가 질서가 바로 잡히지 않은 틈을 타서 벌채 허가를 남발했고, 전국 방방곡곡에 즐비하게 서 있던 나무들이 훼손을 당해 장작과 숯으로 팔려나간 것이 주된 원인으로 지목한다.
그리고 1950년에 일어난 6·25전쟁 중에 또 한 번 소중한 산림이 마구잡이로 훼손당했다.
그 민둥산이 푸른 옷을 입게 된 것 역시 <새마을 운동> 덕분이다.
불과 60년 전의 일이다.
통계가 그것을 입증한다.
1984년 임업통계요람은 남한 전체 임목면적의 84%가 20년생 이하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나무 10그루 중 8그루 이상이 박정희대통령 시대의 산림녹화 정책에 의해 심어졌다는 것이다.
유엔은 일찍이 한국을 이스라엘과 함께 20세기의 대표적 녹화사업 성공국으로 꼽았다.
전 세계를 통틀어 국토 전체가 헐벗었다가 성공적으로 복원된 것은 처음이자 거의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1972년 7월 26일 태풍 ‘리타’가 한반도의 남쪽을 휩쓸고 지나간 피해로 막심한 수해가 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현옥 내무부장관을 대동하고 헬리콥터로 수해 지역의 참상을 시찰한 이후 산비탈과 계곡의 복구를 ‘새마을 부서에서 담당케 하라’고 했다.
이 임무를 맡은 내무부 새마을담당관이 현지 군수들과 함께 절개지를 시멘트로 메우고 지반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심는 새 공법을 시행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10개년 조림계획 기간에 전국의 산지 100만 헥타르에 210억 그루의 묘목이 심어졌다.
전남 장성의 편백나무 조림 성공지
숲은 물을 저장 공급해 주고, 수질을 정화해 주며, 토사 유출을 방지해 산사태를 예방하고, 온실가스를 흡수하는 한편 산소를 생산하여 대기오염을 개선한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주는 심리적 위안감은 돈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가치다.
한 마디로 우거진 숲은 국부(國富) 그 자체요, 선진국의 상징이다.
지구상에 살기 좋은 나라들은 모두 울창한 숲을 가지고 있다.
식목일은 1960년 3월15일을 ‘사방(沙防)의 날’로 대체 지정하여 공휴일에서 뺐다가 이듬해 식목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공휴일로 환원됐다.
2006년 주5일 근무제도로 바뀌자 식목일은 기념일로 바뀌었고, 다시 공휴일에서 제외되기에 이르렀다.
애림가(愛林歌)
식목일을 상징하는 <메아리> 이전에는 김화준(1890~6·25때 납북?)의 ‘애림가(愛林歌)’가 불려지고 있었다.
북으로 백두 남으로 한라
우리의 강산은 모두가 산일세.
울창한 나무는 나라의 보배니
우리의 손으로 심으고 심으세.
한재(旱災)와 수재 나무로 막고
미묘한 경치도 나무로 덮나니.
울창한 나무는 나라의 보배니
심고 또 심어 큰 숲을 이루세.
산마다 얼마나 나무가 없었던 그때 그 시절 민둥산에 학생들과 어른들은 나무를 심으며 이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이 노래를 아는 사람들에겐 아마도 뿌듯한 추억의 노래로 남아있을 것이다.
1953년 경상북도가 발행한 '애림보국' 달력. 한국의 산림녹화 노력이 이승만 정부 때 시작된 것임을 보여주는 자료다.
이후 전쟁이 끝나자 폭격으로 산야가 다시 황폐해지자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어서 메아리도 사라져 버렸다는 안타까운 가사로 나타난 것이 <메아리>였다.
그 시절 우리 주변의 산은 지금의 북한처럼 온통 민둥산이었다.
너무나 사실적인 가사여서 아이들은 아무 거부감 없이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
요즘은 이 노래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학생들은 여름 방학이면 숲속 체험 학교를 다녀오고, 어른들은 숲길에서 삼림욕을 즐기고, 지방 어디를 가나 도로변에 숲이 우거져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산에 나무가 없어 메아리가 사라졌다는 노랫말을 이해될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사실 민둥산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아마도 노래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 대형 산불로 인한 피해로 넓은 지역의 산들이 화재로 피해를 입었고, 이 지역의 산림녹화를 위해 나무심기운동이 지속되어야 함을 알게 한다.
우리나라의 나무로 가득찬 아름다운 산야를 누가 조성하였는지를 돌아보는 날이 올 것이다.
식목일은 단지 나무를 심는 날이 아니라,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자연의 소중함과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교육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첫댓글 청마 유치환선생님이 메아리 작사하신 것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어렸을 적 많이 불렀습니다
우리 여고 교가도 작사하셨구요
모교 교장선생님으로도 계셨습니다
'사랑하셨으므로 행복하였노라'를
가슴 설레며 암송했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70이 넘었습니다
성훈: 덕분에 오랜만에 잊고 있었던 동요를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박기철: 이번에 불이났을때 생각났었던 노래였어요~
어릴때 식목일이면 꼭 나무심자고 부모님과 나무심었던 추억이 있어요~!
최정미: ㅎㅎㅎ 바로 흥얼거려집니다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장의원: 어릴때 많이 불렀던 노래인데, 작사자가 유치환이라는 사실은 몰랐네요.(미소)
남송우: 시의적절한 동요 전해주셔서 고맙습니다.그런데. 청마가 태어난 곳은 충무가. 아니라 거제 둔덕입니다. 세살 때. 둔덕에서 충무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 성장했습니다ㆍ지금. 둔덕에는 청마 기념관과 생가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청마의 무덤도 둔덕으로 이장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청마가 살았던 유년기 청소년기에는 당시 행정구역이 거제충무가 충무로. 통합되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출생지가 충무로. 인식되어왔던. 것입니다
자세한 정보 감사합니다. 본문 내용 수정합니다.
박윤: ✌️예쁜노래👏
오래오~래~ 전,
회복시켜 주셔서
고맙고 감사합니다!!
김성봉: 잊고 있었던 노래.
새삼스럽게 들으니까
옛날 뒷동산이 기억납니다.
서은경: 정말 아름다고 곡도 신난 동요들이 이리 많은데
초등교과서에 이런
동요가 여전히 실리고 있나예?
예전엔 "가난" 이라는
띠가 우리를 감싸고 있었지만
지금 모든 것이 풍족한 때
이런 쉽고 예쁜 동요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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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동요가 올 때마다
그 시절로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