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돌아온 그녀는 지금 〈웨딩싱어〉의 히로인 줄리아 설리번으로 무대에 오른다. 첫 공연을 앞둔 충무아트홀에서 그녀를 만났다. 청바지에 검정색 셔츠를 입은 그녀는 서른을 앞둔 나이에도 청순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스물한 살 되던 해 〈드라큘라〉의 앙상블을 시작으로 뮤지컬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지하철 1호선〉 〈찰리 브라운〉 등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 그동안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 〈컴퍼니〉 〈헤어스프레이〉 〈아이러브유〉 〈그리스〉 〈찰리브라운〉 〈드라큘라〉 〈가스펠〉 〈모스키토〉에 출연했고, 연극 〈8인의 여인〉 〈귀신의 집으로 오세요〉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 출연했다.
“뮤지컬은 극적인 부분을 노래로 표현하면서 더 극적으로 전달하는 재미가 있어요. 춤과 노래, 연기가 하나로 합해지면서 생기는 힘이 있지요. 그에 반해 연극은 순수한 극적인 요소로만 표현되는 깊이가 있는 것 같아요.”
2004년 시작된 ‘뉴욕 뮤지컬 페스티벌’은 ‘뮤지컬계의 선댄스’라고도 불리는데, 새로운 작품, 배우를 발굴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주목받는 공연 중 하나인 〈넥스트 투 노멀(Next to normal)>과 오프브로드웨이에서 2000회 이상 공연을 거듭하고 있는 〈알타 보이즈(Altar boyz)>, 2008년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타이틀 오브 쇼(Title of Show)>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작품들이 뉴욕 페스티벌을 통해 발굴됐다 한다.
박용우, 최강희 주연의 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을 뮤지컬로 번안한 〈마이 스케어리 걸〉은 섬뜩한 비밀을 감추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여자와 처음 사랑을 하는 순진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 사랑을 두고 밀고 당기는 두 사람의 달콤한 줄다리기 가운데, 여자의 정체가 하나씩 밝혀진다. 그녀는 수상한 여주인공 역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하하…. 뉴욕 무대에 선다는 데만 정신이 팔려 상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열흘 동안 현지 밴드랑호흡을 맞추고, 또 시차 적응하느라 다른 것은 신경쓰지 않았지요.”
공연을 마친 후 브로드웨이 관계자들과 교류하거나 배우들을 격려하는 파티가 열리는데, 그때 ‘반응이 좋구나’ 하는 느낌은 받았다고 한다. 〈마이 스케어리 걸〉은 로맨스에 호러를 접목시킨 소재가 신선한데다 블랙 코미디 요소가 관객과 잘 소통돼 뉴욕에서도 공감을 얻었다고 한다.
“뉴욕 무대가 다른 점은 우선 웃음소리가 다르다는 거예요. 육중하고 걸쭉하다고 할까요? 웃음이 터지는 포인트도 달라요. 가령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에서 우리나라 관객은 진지한데, 미국 관객은 박장대소해요.”
한국어 공연에 영어 자막을 내건 것도 특이했다. 과연 뉴욕은 다양성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것을 실감했단다.
공연을 마친 후인 10월 29일, 뉴욕 뮤지컬 페스티벌(NYMF)은 2009 ‘BEST of BEST’ ‘OUTSTANDING NEW MUSICAL’상으로 〈마이 스케어리 걸〉을 선택했다. 페스티벌에 참여한 전 세계 28개 작품 중 선정된 것. 서구의 눈으로 볼 때 변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한국 뮤지컬의 쾌거임에 틀림없다. 한국 창작 뮤지컬의 위상을 보여준 이번 작품은 ‘Talkin’ Broadway Festival Citations’에서도 최우수 신작 뮤지컬에 선정됐고, 최고 극본(강경애), 연출(변정주) 부문에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뮤지컬 〈마이 스케어리 걸〉은 뮤지컬 헤븐과 인터파크의 공동제작 작품이자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의 창작 지원작이다.
“이번에 맡은 〈웨딩싱어〉의 줄리아 설리번 역할은 사랑스럽고 긍정적인 캐릭터예요. 이 뮤지컬을 연습하는 내내 세상의 따뜻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지요. 가정을 소중히 생각하고 행복한 결혼을 꿈꾸는, 〈마이 스케어리 걸〉과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예요. 저 역시 이렇게 행복한 결혼을 꿈꾸니까요. 여성 관객이라면 아마 100% 공감할 거라 생각해요.”
〈웨딩싱어〉는 2007년 미국 투어를 시작으로 스웨덴・스페인・영국・일본・핀란드・독일・오스트레일리아 등 전 세계 무대에 올랐지만, 한국에서는 초연이다. 그녀는 돈은 많지만 속물인 약혼자 글렌 굴리아와 진실한 로맨티스트 로비 하트 사이에서 고민하는 줄리아 설리번 역으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로비 하트 역에는 황정민과 박건형이 번갈아 출연한다.
성실하게, 책임감 있게 배우의 길 걷겠다
그녀가 배우의 삶을 택한 데는 카메라맨이던 아버지의 역할이 컸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고민할 때 아버지께서 ‘연극영화과를 가면 어떻겠니?’ 하고 권유하셨어요. 처음부터 뮤지컬 배우를 꿈꾼 것은 아니고,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연극을 하면서 무대에 매력을 느꼈어요. 어릴 때 부모님이 녹음기를 사다 주셨는데, 전래동화를 극으로 만들어 녹음하며 놀았던 기억이 나요.”
그녀는 1남 3녀의 둘째 딸. 형제가 많은데다 할머니까지 모시고 사는 대가족이라 집은 늘 북적였고, 항상 이야기를 많이 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지금도 가족은 그녀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다. 어느 날 아버지는 공연이 끝난 후 그에게 제각각 색깔이 다른 일곱 송이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
“열 송이도, 스무 송이도 아니고 왜 일곱 송이일까 궁금했어요. 여쭈어 보았더니 그날이 제가 일곱 번째 공연하던 때여서 그러셨다고 해요. 계속 이렇게 주실 거냐고 물었더니 ‘이제 네 남편 될 사람한테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시더라고요. 음 … 그 후 그런 꽃은 못 받아 봤어요. 이번 상을 받을 때도 아버지가 굉장히 기뻐하셨어요.”
그녀에게 영감을 주는 배우는 〈사운드오브뮤직〉의 여주인공을 맡았던 줄리 앤드류스. 고민이 생길 때마다 힘을 주었던 선배는 〈지하철 1호선〉에서 곰보 할매 역할로 열연했던 고소현 씨로, “배우란 계속해서 인격을 완성해 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늘 충고했다 한다.
“배우는 세상에 대해 자신을 열어 놓고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우생활을 하다 보니 모든 게 소재이고 자양분이에요. 그중 사람을 사랑하는 게 가장 큰 자양분이고요. 또 하나, 전 자연을 참 좋아해요. 틈날 때마다 집 근처에 있는 일산 호수공원에 자주 가요. 최근 읽은 책 중 인상에 남는 것은 한비야 씨가 쓴 《그건 사랑이었네》예요. 저도 앞으로 환경보호 활동을 하고 싶어요.”
지구 온난화나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은 그녀는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카페에서 종이컵을 줄 때마다 “밖으로 들고 나갈 것도 아닌데 왜 이걸 주죠?’라며 따지곤 한다.
“이제까지 계단 올라가듯 차근차근 밟아온 것 같아요. 스물여덟, 스물아홉 살쯤에는 슬럼프가 오기도 했어요. 물이 고이듯 정체되어 있는 것 같고, 비슷한 캐릭터를 계속 맡을 때는 발전이 없는 것 같아 힘들기도 했어요. 연기는 연애하듯 매번 불태우지는 못한다고들 해요. 성실히, 덤덤히, 책임감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요. 저는 지금 참 행복해요.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작업하고 싶어요.”
무대에서 내려오면 너무 편안한 차림으로 다녀, 극장에 갔다 “여기 사세요?”라는 말도 들었다는 그녀. 그녀의 가녀린 어깨에 한국 뮤지컬의 미래가 얹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