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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 날짜가 가는 것은 무의미하다. 특히 날짜를 기억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도 한다.
그래서 마수드의 정확한 탄생일자는 없다. 그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살아있는 것이 바로 생일이라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마수드는 1950년대 초에 태어났다고 한다. 카불의 프랑스 학교인 에스트클랄 중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며 카불의 이공과 대학에서는 건축기사를 꿈꾸면서 2년을 보냈다고 한다.
18세가 되어서는 회교 청년단에 가입을 하였으며 회교 청년단 안에서는 아버지가 군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프간 군대의 장교들을 모집하는 비밀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그의 집은 다우드의 비밀경찰요원의 감시를 받았으며 이런 감시를 피하기 위해 마수드는 지하활동을 하며 살았던 것이다.
몸을 숨기고 밤이 되어서야 담을 넘어서 집으로 오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의 동생인 아흐마드 지아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동생은 형 마수드의 일을 돕게 되었다.
마수드의 라이벌은 바로 헤크마티야르였다. 두 사람은 뜻이 통하지 않은 사이였고 1975년에 판지셰르 봉기에 마수드는 참여를 하였다.
회교청년단은 판지셰르 계곡에서, 바다크산 지방에서, 팍티야 지방에서, 그리고 라그만 비장에서 작전을 벌이기로 하였다.
단원은 마수드를 포함하여 40명이었다. 이 활동의 목적은 최초의 공화국 대통령인 다우드가 제거될 수 있도록 카불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헤크마티야르가 준비한 것이었지만 후에 랍바니가 주도하는 자미아트 당은 찬성하지 않았다.
자미아트 당은 아프간 국민들에게 홍보활동을 벌여 공산당의 비중과 위험성을 설명하는 편이 더 낫다고 보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헤즈드 당은 신속한 군대로 지원을 약속하며 사태를 장악하려고 했다. 특히 헤크마티야르가 직접 나서서 단원들을 잘 배치해야 한다고 강조를 했다.
헤크마티야르는 어떤 날 어떤 진지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 마수드의 대원들에게 봉기후에 라디오를 듣고 명령을 기다리라고 하였지만 정작 헤크마티야르는 스스로 배신을 하여 마수드와 그 대원들을 위험에 빠트렸던 것이었다.
한편 헤크마티야르의 배신을 모르고 마수드와 40명의 동지들은 판지셰르에서 봉기를 하여 로카 구역을 점령하였다.
그들의 행동은 주민들에게 큰 거부감을 불러 일으켰고 동지들은 몇명이 살해를 당하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카불에서 방송되기로 되어 있는 그 유명한 메세지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결국 대원들은 계곡으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고 거기서도 마을사람들에게 공격을 당했다. 몇명은 부상을 당하였고 다른 몇명은 마을 사람들에게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수드와 대원들 무리는 산을 가로질러 도망치는데 성공을 하였다. 결국 판지셰르 계곡과 나란히 있는 그 이웃 계곡인 안다바르 계곡까지 도착하여 마수드는 몰래 카불로 다시 들어와 버렸다.
이렇게 하여 마수드와 헤크마티야르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은 혼동 그 자체였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잠재적인 반동주의자들로 간주되는 엘리트들을 그야말로 대량으로 학살하는 일에 몰두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일은 1978년 쿠데타 이후였다. 약 몇주일 사이에 회교도로 의심이 되는 지식인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군 장교들과 관리들이 강제 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대량학살을 당했다.
폴 에 샤르키에서, 잘랄라바드에서, 마자르 에 샤리프에서 사람들은 죽음을 당했고 암살을 당했고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불과 몇주일 사이에 약 2만 7천여명이 졌다. 따라서 대량 학살에서 벗어난 아프간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이민을 가버렸고 아프간에는 그야말로 못배운 무식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것이 아프간의 현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더욱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마수드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 다가왔다.
바로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문이었다. 그 날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달력이 따로 있었다. 태음력으로 마수드가 1328년에 태어났다고 하듯이 소련군의 침공도 그런 식으로 따지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양력으로 1358년도 즉 자디월 6일이라고 한다.
서구의 달력은 1979년 12월 이라고 한다.
이날 아프가니스탄에 소련군 지금의 러시아군이 밀고 들어왔던 것이다. 이때부터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적인 의미에서 투쟁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소련군은 무기와 각종 짐을 들고 들어왔지만 뚜렷히 싸울 이유가 없는 그런 나른한 상태에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던 것이다.
위에서 침공하라고 하니 침공했던 것이다. 혹 있을지 모르는 아프가니스탄 내의 러시아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은 해발 5200미터의 고지대가 즐비한 곳이었다. 이런 곳을 방패삼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소련군에 저항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젊은 사령관 마수드가 있었다. 시를 좋아하고 시를 쓰는 군사령관이었다. 전쟁이 위대한 장군을 탄생시키는 법인 것이다.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의식까지 바꾸어 놓았다. 전쟁 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행을 할 때 남자가 항상 맨 앞에서 서고는 하였다. 그것은 아프가니스탄의 전통이었다. 그 뒤를 노새가 따르고 말과 낙타가 뒤 따랐던 것이다. 여자는 맨 뒤에 따라가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고 전쟁이 격화되고 난 뒤의 상황은 이렇게 바뀌었다. 즉 여자가 제일 먼저 앞을 서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지뢰 때문이었던 것이다.
소련과의 투쟁은 계속 이어졌다. 그것은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의 도심을 점령했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역은 점령을 하지 못했다. 그저 먼산 바라보듯이 하는 상황이 연출이 되었다.
5600미터의 파프루크산 같은 곳은 접근 조차도 하지 못했다. 그런 곳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은신하면서 싸웠던 것이다. 파프루크산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조차도 늙은 미치광이 고개라고 표현을 했을 정도로 험준한 고개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파리얀 계곡은 천사의 계곡이다. 그 계곡은 판지셰르 계곡의 꼭대기 속하는 곳이었다. 이런 계곡을 중심으로 마수드의 병사들이 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판지셰르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거기에는 다치 리바트, 사피드 치르. 켄쉬, 아스타나, 보조라크 마을 같은 곳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그곳에서 마수드는 "아흐마드 샤"라고 불리고 있었다. 존경스러운 이름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젊은 마수드는 그곳 사람들의 말에 모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그들의 관심사에 일일이 대응을 해 주었다.
일방 소통의 그런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마수드는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책에서, 그리고 적을 관찰하면서 발견했어요. 우리는 전쟁을 하면서 전쟁을 배웁니다. 전쟁이야말로 최고의 학교지요. 전쟁 전쟁 전에 내가 관심있었던 것은 건축이었지요..."
30년 전에 마수드가 한 말이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는 너무나 많은 민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마수드가 속해 있는 타지크족을 비롯하여 우즈베크족, 투르크멘족, 하자라족, 키르기즈족, 파쉬툰족 등이었다.
그 밖에도 많은 민족이 있지만 대충 훑어 보아도 그런 것이다. 그중에서도 전쟁이 나기 전까지 파쉬툰족은 전통적인 지배민족이었다. 소련군이 오기 전에는 수많은 왕과 가장 많은 귀족이나 교양인을 배출한 민족이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인근 국가인 파키스탄은 타지크 족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수드의 말이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타지크족을 좋아하지 않아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을 사람들이에요. 오히려 그 반대지요. 그자들은 우리를 자기네 봉신으로 만들어 놓으려 하고 있어요. 하지만 판지셰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유인들이랍니다."
마수드의 말대로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이 독립하는 것을 사실 원치 않는 나라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런 나라가 곁에 있다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의 불행인 것이다.
그렇지만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의 피난민을 받아주는 나라였다. 거대한 산맥으로 국경을 이루고 있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접경은 사실상 국경이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피난을 간 아프간 사람들은 대거 아프가니스탄에서 파키스탄으로 들어가는 곳인 페샤와르 부락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여기는 마약 밀매자들, 무기 밀매자들, 인도주의자들, 기자들, 정보원들, 정치인들이 대거 모여있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아프가니스탄의 많은 인종들이 와서 훈련도 받고 부상도 치료하는 파키스탄 영내의 도시였다.
여기에서 저항군 4개 정교당이 하나로 통합이 되어 동맹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에는 헤크마티야르가 주도하는 헤즈브 에 이슬라미 당, 칼레스가 주도하는 헤즈브 에 이슬라미 에 아프가니스탄 당, 사이야프가 주도하는 이타이하드 에 이슬라미 에 아프가니스탄 당, 랍바니가 주도하는 자이아트 에 이슬라미 에 아프가니스탄 당이었다.
여기에 무자헤딘 동맹이라고 해서 3개의 정당이 더 합쳐져서 명실공히 대소련 저항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파키스탄은 미국의 엄청난 도움을 받아 이들을 조종하면서 삥땅을 치면서 살았던 것이다. 전쟁에서도 공짜가 없는 법이었다.
1982년 4월 23일 팍티야 지방에서 무자헤딘이 코스트 시에 대해 대규모 공격을 단행하였지만 소련과 아프간 정부군이 방어를 강화해서 무자헤딘은 이 도시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지 못하였다.
당시 소련군은 판지셰르 계곡에 대규모 공격을 단행하였다. 특히 8월 27일에 소련과 아프간 정부군이 대규모 공격을 시도하여 9월 7일까지 계속되었다. 이에 마수드와 그 군대들은 살랑 도로를 통해서 소련군의 공격을 막을 수 밖에 없었다.
소련군의 비행기는 판지셰르의 계곡의 모든 집과 건물들을 초토화시키는 방법 밖에는 다른 공격이 있을 수가 없었다.
1983년 1월에 마수드는 소련군 군장성들과 휴전협정을 체결한다. 1년간의 휴정협정으로 마수드는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게 되었다.
판지셰르에 대한 대표적인 공격은 1984년 4월의 제 2차 소련군의 공격이었다. 당시 소련군은 판지셰르 지역을 샅샅이 훑다시피하면서 공격을 하였다.
15일간이나 융단폭격을 하였고 그 결과 반경 100킬로미터 내에서 그 어떤 집이나 건물이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이미 마수드는 판지셰르의 10만 주민을 대피시켜 놓고 있었다. 그 지역에는 그와 그의 병사들만이 항전을 위해 남아 있었다.
이렇게 판지셰르 지역을 철저히 파괴한 소련군은 무려 2만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마수드와 그의 병사를 토벌하러 나섰다.
그러나 험준한 지형지물을 이용한 마수드와 병사들은 건재하였다. 마수드는 소련에 대항해서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수도 카불에는 다른 어용장군이 있었다.
우즈베크족이 지배하는 마자르 에 샤리프 지역의 지도자는 라쉬드 도스톰이었다. 그는 원래 정부군 소속의 군인이었지만 나중에 장군의 지위에 오른 자였다.
그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주둔을 할 때부터 수도 카불에서 민병대를 조직하여 지휘하면서 소련군에 협조한 인물이었다.
우즈베크인들로 구성된 이들은 소련군과 가까울 수 밖에 없었다. 소련이 침공을 한 이유도 바로 자국민인 우즈베크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던 것만 보아도 얼마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복잡한 인종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지 알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
악명을 날린 아프칸 민병대...이들은 대부분 보드카에 취해 있었고 품행이 항상 거칠었다. 그리고 공산체제를 도와서 소련군의 적들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있었다.
이 민병대는 당시의 소련이 지명을 한 어용 대통령을 위해서 사람들을 체포했고 살인을 했고 고문을 자행하면서 닥치는대로 사람들의 목숨을 유린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극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식인은 이미 사라졌다. 즉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해외로 도피를 했거나 다른 인근 나라로 이민을 갔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에는 일부 돈많은 사람들이나 돈이 없어 해외도 못가는 극빈자들인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만이 존재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오죽했으면 1984년에 마수드는 아프간에는 중산층이 없다고 했을까. 국민의 80퍼센트가 문맹자라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런 분위기이니 민병대가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이었다. 아마도 국민 대부분이 민병대의 정체도 모르고 있었고 오로지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와중에도 도스톰은 자신이 그래도 아프가니스탄인을 잊지 않았고 소련군에 대립하면서 버티고 있던 아프가니스탄 반군과도 교류를 하고 있었다.
1986년 6월에 미국은 소련과 싸우는 아프가니스탄 반군에게 대대적인 무기 지원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스팅거 지대공 미사일을 비롯한 값비싼 무기들이었다. 무려 1000여대가 넘는 지대공 미사일이었다.
그 중 절반은 파키스탄이 횡령을 하였고 그 나머지 반을 역시 헤크마티야르가 가져갔다. 나머지 몇십대만 마수드를 포함한 다른 부대에 주어졌던 것이다.
이는 자미아트의 당수인 랍바니 교수가 저지른 불법행위중의 하나였다. 그는 적과 아군에 관계가 없이 결탁을 하여 부정과 부패 그리고 비리를 저지르는 인물이기도 했다.
마수드는 그런 인물을 따르는 불행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수드 자체가 권력욕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1986년 마수드는 소련군과의 사이에 휴전 협정이 체결된 틈을 타서 북동부에 여러 부대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곳의 소련-아프간 정부군 진지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파르가르, 나린, 칼라프간, 보르카 나중에는 쿠란 에무잔에 이어서 토프 코나 진지까지 공격을 하였다.
결국 적의 진지가 방어가 철저하고 중무장한 상태였지만 하나씩 차례로 함락이 되었다.
그러나 도스톰은 건재하였다.
결과론적이지만 미국이 아프간 반군에 제공한 스팅거 미사일은 소련에게는 큰 충격이기도 했다. 그동안 제공권을 장악했던 소련군이 이제는 스팅거 미사일 때문에 그 행동반경이 상당히 제약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스팅거 미사일은 다루기가 쉽고 단 한사람이 발사할수 있는 것으로 소련 공군이 공포심을 갖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마수드가 받은 스팅거 미사일은 겨우 10대로 그것도 파키스탄이 미국으로부터 제공 받은 이후 거의 1년이 지난 후였다.
스팅거 미사일의 심리적인 영향이었을까. 그동안 절대우위을 지켜냈던 아프가니스탄 영공에서의 잇점을 살리지 못하게 되자 소련은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즉 1986년 7월 28일에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 주둔중인 소련군 6개 대대를 철수할 것을 발표를 했다.
8월 19일에는 로가르 지장에서 정부군의 공격이 무자헤딘에 의해서 격퇴가 되었고 27일에는 카불의 대형무기 및 군수품 창고가 무자헤딘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뒤이어 10월에는 소련군 6개 대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하였다. 10월 31일 유엔총회는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로부터 몇일후에 아프간 무자헤딘 이슬람 동맹의 대표단이 유엔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에 관하여 기자회견을 하였고 랍바니가 이끄는 이 대표단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당시 프랑스 국무총리 자크 시라크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1988년 2월 8일 고르바초프는 3월에 제네바에서 협약이 체결되면 6개월안에 소련군이 철수를 할 수 있다는 뜻을 피력했다.
1988년 6월 19일에 나지불러 정부의 실각이 뻔해 보이는 가운데 파키스탄에 망명중인 아프간 저항군의 7개 정당들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사이야프의 오른팔인 엔지니어 아흐메드 샤가 임기 4개월의 임시 대통령에 선출이 되었다.
10월에는 보르하누딘 랍바니가 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선출이 되었다. 그는 공사주의자들을 대표로 인정하라는 카불 정부측의 제안과 평화를 향한 대화를 거부하였다.
절망한 공산주의자들은 나지불라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결국 실패하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11월에는 잘랄라바드 도로상에서 무자헤딘이 사마르크헬 시를 점령하였고 보르하누딘 랍바니는 테헤란을 방문하여 이란의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만나고 이들은 랍바니가 지도자로 있는 무자헤딘을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다.
1989년 1월 1일 페샤와르에 기반을 둔 무자헤딘 동맹은 비록 어려운 일이었지만 저항군의 임시정부 설립을 의무로 하는 자문위원회를 조직하기 위해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1989년 2월에 소련군이 아프간 영토를 포기하고 떠날 때에도 도스톰은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과 마지막 접촉을 하였다.
이런 와중에 2월 23일에 단체 무자헤딘을 중심으로 한 아프간 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동맹의 7개 정당들은 유력자 460명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일명 슈라)에 임시정부 멤버들을 지명하였다. 다면 여기서 시아파 정당들은 배제가 되었다.
3월에는 무자헤딘이 잘랄라바드 시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단행하였지만 실패를 하였다. 그렇지만 무자헤딘은 팍티야 지방의 쉬와에서 임시정부를 소집하였고 헤크마티야르가 이 정부의 외무부장관이라는 직책을 갖게 되었다.
7월 9일에는 마수드의 동지들을 포함한 30명의 무자헤딘이 굴부딘 헤크마티야르가 주도하는 헤즈브 에 이슬라미 당의 사예드 자말이라는 사령관이 쳐 놓은 매복에 걸리고 만다. 결국 이들은 살해되고 마수드의 대원들은 수색작전을 벌이고 마수드군에 의해 붙잡힌 범인들은 몇달 후에 파키스탄에서 온 "울레마" 대표단에 의해 재판을 받았다.
1990년월 7일에 나지불라 임시정부의 국방부 장관 타나이가 굴부딘 헤크마티야르의 지원을 받아서 마수드 보다 먼저 카불에 도달하여 현 정권을 전복시키려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작전은 실패하고 연루된 장교들은 페샤와르로 피신을 하였다.
나지불라는 6월에 아프간 공산당의 개혁을 발표하고 아프간 공산당은 헤즈브 에 와탄(조국당)이라는 명칭을 취하였다. 나지불라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국민적 화해 정책을 부각시키려고 애를 썼다.
1990년 10월 5일 마수드는 당시 파키스탄의 골람 이샤크 칸 대통령과 베나지르 부토 국무총리 긜고 지하드(성전) 정당들의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 파키스탄을 방문하였다. 회담끝에 헤즈브 에 이슬라미 당과 자미아트 에 이슬라미 당 사이에 협약이 체결되어 각 정당의 사령관들이 통제하는 지대들을 행정적으로 분배하였다.
그중에서 마수드도 한명이었다. 그는 소련 항쟁의 영웅인 마수드야말로 아프가니스탄인들의 가장 폭넓은 사랑을 받는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991년 1월에 마수드는 아프간 북동부에서 북부동맹을 더욱 발전시켰다. 4월에는 마울라위 잘랄루딘 하카니의 지휘 아래 집결된 남부지대 무자헤딘이 판티야 지방의 코스트 시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곳은 2년전부터 정부군 주둔군이 그곳을 방어하면서 무자헤딘에 저항을 한 곳이었다.
1992년 4월 9일에 사우디아라비아 특수기관의 국장인 투르키 엘 파이살이 이슬라마바드를 방문하여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아랍 이슬람 적극적 행동주의자들의 존재를 고발하였다. 그는 파키스탄 국무총리와 무자헤딘에게 군사행동에 참여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1992년 4월 15일 수도 카불의 혼란과 어둠을 틈타 나지불라 대통령이 달아나려고 시도하지만 공항에서 체포가 된다. 그리고 유엔 대표부에게 넘겨진 나지불라는 오히려 안전한 생활을 프랑스 대사관 옆에서 하게 되었다.
4월 16일 마침내 아프간에서 공산체제가 종말을 고했다. 이에 무자헤딘이 용기를 얻어 자신들의 전략 요충지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남부의 역사적인 도시 간지가 저항군에 의해 함락이 되었다.
4월 17일 마수드는 나지불라 정부의 외무장관이었던 압둘 와킬을 맞아들이고 압둘 와킬은 아프가니스탄이 처해있는 국제적 입장에 대해 마수드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카불 동부로부터 약 7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샤말리 고원의 샤리카르 시에서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스마엘 칸과 그의 무자헤딘이 헤라트 시를 해방시켰다.
4월 18일에는 북동부 쿤두즈 시, 쉰단드 공항과 헬만드 지방이 무자헤딘의 통제권으로 들어갔고 4월 19일에는 잘랄라바드가 해방이 되었고 정부군 병사들과 장교들은 대규모로 탈주하였고 제 11사단은 저항군에 가담을 하였다.
4월 20일에는 폴 에 샤르키 감옥이 무자헤딘의 통제권으로 들어갔고 모든 포로들이 석방이 되었다. 이 참에 흉악범들까지 대거 석방이 되어 더욱 치안이 어렵게 돌아가게 되었다.
전날 에 알람이 해방이 되었고 4월 21일에는 칸다하르가 함락이 되었고 헬만드 지방의 칼라 에 나우 시도 함락이 되었다.
팍티야 지방의 가르데즈가 무자헤딘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이제 남은 것은 카불이었다.
4월 24일 페샤와르에서 저항군 임시정부가 카불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하자라족의 정당인 와다트 당은 이에 불참하였다. 모자데디가 다시 2개월간의 대통령이 되고 6개월간의 지하드 위원회 의장이 된다.
그러면서 지하드 위원회는 51명의 의원으로 구성이 되었고 또 하나의 위원회는 지도위원회가 탄생하였으며 여기에는 동맹 정당들의 모든 대표들이 포함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랍바니가 6개월 동안 의장으로 하기로 되었으며 또한 모자데디의 뒤를 이어 4개우러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하기로 약속이 되었다.
국무총리직은 굴부딘 헤크마티야르의 헤즈브 에 이슬라미 당에 주어졌다.
그러나 헤크마티야르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카불을 무력으로 점령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헤크마티야르의 행동을 방해하기 위해서 임시 대통령인 모자데디는 카불 안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6명의 의원을 여기에 참여시켰다.
바로 아흐메드 샤 마수드를 비롯해여 압둘 하크, 디다르, 하지 셰르 알람, 마울라위 세디쿨라, 샤 로크 박사 등이었다.
그렇지만 헤크마티야르는 바로 다음날 수도 카불의 수도 방위군에 대규모 공격을 단행하였고 도시를 해방시켰다고 선포를 하였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수도 카불을 통제하고 있는 세력은 카불 민병대의 도스톰이었다.
즉 마수드야말로 온건파이면서도 언젠가 카불을 점령할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마수드야말로 당시 대통령인 나지블라의 손에 들어 있던 공산체제를 뒤집어 엎을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온건한 마수드는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해 도스톰의 미래보장 조건을 받아들였으며 도스톰의 배신으로 인해 나지불라는 카불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리고 마수드는 전투 한번 없이 카불에 입성할 수 있었다.
대신 마수드는 도스톰이 과거에 카불에서 행한 악행을 면죄받고 카불에 대한 지배권과 돈을 보상받았다.
1992년 4월 30일에 마수드는 결국 대소련 항쟁의 선두에 서서 카불을 점령했다.
소련군이 떠나고 나서도 카불을 점령하기 위해 3년이란 세월이 지난 것이다.
소련군으로부터 무리를 인수인계받은 아프간 괴뢰정부가 3년간 버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도스톰 장군이 마수드에 협력을 해서 얻어낸 결과였던 것이었다.
그러자 마수드의 라이벌인 헤크마티야르는 자기 우방인 파키스탄과 미국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많은 무기들을 그동안 저장해 두고 있다가 마수드가 카불을 점령하자마자 엉뚱하게도 카불을 폭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마디로 헤크마티야르라는 자는 국가를 위한다는 것이 아닌 사적인 권력욕에 취해서 마수드를 제거할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인물들이 아프가니스탄의 군벌로 있으니 아프가니스탄이 제대로 굴러 갈 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는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이었다. 성웅 이순신에 대립하는 간신배 원균같이 생각하면 되는 인물이었다.
그외에 마수드를 싫어했던 파키스탄 같은 너절한 나라도 있었다. 인근 국가가 잘되면 배가 아픈 대표적인 심뽀의 나라가 바로 파키스탄이었던 것이다.
파키스탄은 마수드같은 좋은 사람이 정권을 잡는 것을 싫어하였다. 또한 정권을 잡기 싫어하는 마수드 장군같은 사람을 더욱 싫어하였다.
파키스탄으로서는 자신의 나라에 굴종적인 인물들을 좋아하였던 것이다. 마수드는 파키스탄이 제일 싫어하는 독립적인 인물의 대표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자유를 사랑하고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지지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위대한 인물이 아프가니스탄의 영웅이 되는 것을 극력 싫어한 나라가 바로 파키스탄이었다.
아예 파키스탄은 마수드를 제거하기 위해 원대한 계획을 짤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결과는 바로 나타나고 있었다.
마수드가 청년 시절에 가입한 회교 청년단은 랍바니가 주도하는 자미아트 에 이슬라미와 헤크마티야르가 주도하는 헤즈브 에 이슬라미라는 2개의 정당으로 분리가 되었다.
회교 청년단부터가 이렇게 문제가 있게 된 것이었다. 헤크마티야르 같은 자가 2개의 정당중에서 하나의 정당의 수뇌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수드는 자연스럽게 랍바니가 주도하는 자미아트 에 이술라미의 지지자가 되었다.
5월 6일에는 랍바니와 모히메디 그리고 사이야프가 카불에 도착하였다.
6월에는 카불에서 와다트 당의 하자라족과 이들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는 사이야프의 부하들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였다.
랍바니는 약속대로 6월 28일에 모자데디의 뒤를 이어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임기는 4개월이었다.
1993년 7월경에도 카불은 전쟁이 한창이었다. 도스톰의 부하들은 카불 공항을 장악한채로 마수드의 동맹군 노릇을 하였다.
이에 반하여 권력을 쟁취하려는 헤크마티야르는 도시에다 로켓포와 포탄 그리고 미사일까지 발사를 하였다.
여기에 반해 당시 마수드는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 모든 것을 정당의 리더인 랍바니에게 권력을 양도해 버렸다.
7월 29일에 랍바니가 부통령직에는 미르 함자를 임명하였다. 그럼으로써 내각에 자미아트 당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8월 10일경에 마수드와 헤크마티야르의 대립이 절정에 이르렀다. 카불에 더 많은 로켓포와 포탄이 떨어지고 탱크와 보병부대의 전투로 인해 남부의 여러 구역이 불타고 있었다.
결국 불타는 카불을 버리고 대다수의 외국 외교관들은 수도 카불을 떠나갔다. 다만 이란과 파키스탄만 외교 대사관을 존치시켰다.
8월 29일에 헤즈브 에 이슬라미 당과 정부간의 휴전이 이루어졌다. 9월 17일에는 헤크마티야르와 랍바니가 사이야프 군의 사령부인 파그만에서 회동을 하였다. 이 둘 사이에 협정이 맺어졌다. 내용은 아프간 수도에서 무질서를 획책하는 독립적인 군 민병대의 제거작업을 하기로 합의를 했던 것이다.
헤크마티야르는 카불의 전투를 민병대 탓으로 돌리면서 랍바니와 휴전을 했던 것이다. 랍바니의 무능력과 우유부단은 끝이 없었다.
차라리 마수드가 권력을 잡았으면 아프가니스탄이 그토록 혼란에 빠지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착한 마수드의 선택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