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진 교육위원의 <학부모를 위한 교육학 강의> 내일신문 팔공신문
학부모를 위한 교육학 강의 19
최초의 사학 고구려의 경당
기원 372년인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태학(太學)이 세워진다. 태학에서는 유학을 가르쳤다. 물론 유학이 소수림왕 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아니다. 기원전 19년에 즉위한 유리왕이 지은 노래 황조가가 시경(詩經) 관저편과 유사하든가, 유리왕이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긴 뒤 사냥을 나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신하들이 "대왕께서 천도를 한 이래 민심이 채 안정되지 아니한 이때 치안행정 사업을 돌보는 데에 전념하지 아니하시고 말을 달려 사냥만 일삼으시니 나라정사가 거칠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임금의 업적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다"며 유교이념에 입각한 충언을 하였다는 최초의 기록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유학이 가르쳐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태학이 요즘말로 하면 국공립학교인데 반해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교육기관인 경당( 堂)이 고구려에 세워진 것은 장수왕 15년(기원 427년)이다. 장수왕은 평양 천도를 계기로 각 지방에 경당을 건립하였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전(東夷傳) 고려조(高麗條)에 '큰집을 거리마다 짓고 경당이라 하였다(各於街衢 造大屋 謂之 堂)'라고 기록한 표현이 바로 그것을 나타낸다. 동맹제를 수도에서 거행하고 지방에서도 각각 그 지방에 맞게 동맹제를 지냈던 고구려는 그 제사를 지내기 위해 큰집[大屋]을 지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큰집이 바로 제사를 지내는 곳이면서 동시에 제사 의식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기도 하였던 듯하다. 게다가 태학이 세워지던 해에 공인된 이래 점차 사찰을 확대해온 불교가 제사 지내는 역할을 맡게되자 자연스레 경당에는 (여전히 국가의 제사를 관장하기는 했겠지만) 유학을 공부하며 무술을 닦는 기능이 강화되었을 터이다. 을지문덕과 같이 문무를 겸비한 사람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추구했던 고구려는 경당을 통해 '자제들이 결혼할 때까지 밤낮으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다(子弟未婚之前 晝夜於此讀書習射,『舊唐書 東夷傳 高麗條』)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고구려가 '거리마다' 경당을 지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근래 들어 우리나라에는 경제적 논리에 입각하여 소규모 학교를 통폐합하는 바람이 불고 있다. 인건비, 유지비 등을 감안할 때 소규모학교를 유지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경제논리가 교육정책을 지배하고 있는 결과이다. 그러나 교육은 어디까지나 학생의 입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승용차를 타고가는 어른이 볼 때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도 어린아이의 입장에서는 까마득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교 가는 길이 고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고구려가 왜 경당을 거리마다 세웠을 것인가. 학교가 많으면, 집 근처에 학교가 있어 즐겁게 등·하교를 하는 아이들이 많아지면 사회가 원숙하게 통합된다는 진리를 고구려 사람들은 이미 장수왕 때부터 꿰뚫어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 근처의 학교에서 문무(독서와 활쏘기)를 두루 습득한 학생들이 많아질 때 어찌 우리 사회공동체가 발전을 거듭하지 않을 것인가. 그런 점에서 요즘 시대의 학원은 고구려의 경당에 해당된다고 할 만하다. 따라서, 학원 종사자들은 국가교육의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는 책임감과 자부심을 가져야 하고, 국가는 마땅히 이들 현대판 경당들을 행정적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또 감독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