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비천한 노예상인 '존 뉴턴'을 목사로 변화시킨 하나님
유년과 청년시절
존 뉴톤[John Newton:1725~1807]은 1725년 경건하고 체험있는 그리스도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뉴톤의 어머니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들 교육에 드렸다. 많은 기도와 눈물로 아들을 돌보며, 그를 목사로 기르고자 했다. 그러나 뉴톤이 6살 때, 그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뱃사람이었는데 뉴톤의 어머니가 죽자 그 다음해에 바로 재혼을 하였다.
이 일 이후 뉴톤의 행실은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열 한 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항해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종교에 거의 관심이 없어서 쉽게 매우 주변의 나쁜 영향들을 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연히 성격이 거칠게 되어 방탕한 삶을 살게 되어, 자연히 부도덕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후 그는 잘못을 저질러서 감옥에 갇히기도 하여, 나중에는 '완전히 구제 불능 인간'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사회에서 격리가 되다시피 하여, 일평생을 노예선을 타고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회 심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아니하셨다는 것이다. 세상은 그를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아니하셨던 것이다.
드디어 그에게도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다. 그는 노예무역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폭풍우를 만나게 되어, 배가 파선하게 되었다. 그는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그는 즉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것은 1748년 5월 10일,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노예무역상으로서 지난 날 지었던 추악한 죄들이 낱낱이 떠 올랐다. 그가 흘리는 회개의 눈물은 휘몰아치는 폭풍우보다 더 격정적이었다.
그는 후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그날에 주님께서는 기고만장한 나를 끌어 내리시고, 깊은 물속에서 나를 구원하셨다"고 하였다. 회심 후에도 그는 한동안 노예선의 선장으로서 일했으나, 이제는 전의 무자비하던 모습이 변하여 노예들을 인간적으로 대하게 되었다.
<존 뉴 턴>
결혼 및 신학 공부
뉴톤은 17세의 어린 나이 때에, 어머니 옛 친구의 딸인 3살 아래의 메리 캐트랫(Marry Catlett)과 정혼 하였었는데, 8년 후인 1750년 25세 때 그녀와 결혼하였다. 그녀를 통하여 읽게 된 토마스 아캠피스(Thomas A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은 그의 회심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후에 그는 리버풀에서 조수(潮水) 측량사 직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측량 기사의 자리는 그가 원하던 자리였고, 그것은 그에게 많은 여가와 스스로의 방법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뉴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가시간을 어떻게 하면 잘 활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를 작정하곤, 이 주 목적에 도움이 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이러한 목적에 대한 첫 시도로, 신약과 그리스어 역(譯)[헬라어] 구약성경(SeBt-uagint)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스어를 충분히 배우는 것이었다. 여기서 어느 정도 진보를 이룬 후, 다음 해에는 히브리어를 배웠고, 2년 후에는 시리아어[아람어]까지 공부를 시작하여, 성경을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이 모든 연구들과 더불어, 라틴어, 영어, 그리고 배에 있을 때 독학으로 배운 불어로, 신학 부분의 최고 서적들을 계속 읽어 나갔다.
2∼3년 후에는 주로 글을 쓰는데 시간을 보내면서, 주로 성경 이외에는 다른 책들을 많이 읽을 시간을 갖지 못했다.
뉴톤은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라는 갈라디아서 1장 23∼24절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공중 앞에서 증거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고, 이 희망 때문에 성경 원본을 계속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목사 존 뉴턴
이제 존 뉴톤은 좀더 광범위하게 일할 수 있도록, 목사의 직에 종사할 것을 희망하는 많은 이들의 요청에 따라, 목사가 되기 위해 1758년 33세 때 요크의 대주교에게 안수를 요청하였으나 거절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공부하며 목사 수업을 받는 한편, 1755년부터 1760년까지 리버풀에 머물면서, 유명한 설교가 조지 휫필드를 알게 되어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으며, 존 웨슬리와도 교류하였다.
뉴톤은 드디어 링컨의 감독에 의해 목사 안수를 받아, 버킹햄셔 지역의 울니(Olney)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1764년 39세 때, 드디어 어머니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이후 43년간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였다.
그 후 1764년 39세 때에, 뉴톤은 오올리의 목사로 와달라는 제의를 받고 ,오올리 교구의 목사가 되어 15년간 목회사역을 감당하였는데, 자신의 마지막 일터에 대한 커다란 감회를 이렇게 말하였다.
"가장 무지하고,
가장 비천하고,
가장 무참히 버려진 노예 중의 하나인 내가,
아프리카 연안의 참혹한 생활로부터 건지워져,
마침내 세계의 도시 중에서도 으뜸 가는 교구 목사로 지명된 것은,
여기서 그러한 은혜를 증거할 뿐만 아니라,
그 은혜의 특이한 증거와 기념으로 서기 위함이요,
역사 설교 및 저술을 통하여,
널리 세계에 그 은혜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
실제로 이러한 감회는 그의 생각 가운데 너무도 깊이 들어 있어서, 어떤 곳에서든, 단 하루도 그 기이한 사건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야기하지 않고는 지나는 법이 없었다.
1779년 54세 때 올니를 떠나 런던에 있는 메리 울노스(St. Mary Woolnoth)교회에 부임한 그는, 가난한 자들과 상인은 물론, 부자들과 유력인사들과 교류하며 목회하였다. 특별히 당시 영국 하원의원으로서 노예폐지운동을 이끌고 있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활동은, 이전 노예무역상으로서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뉴턴으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으며, 선교사 윌리엄 케리와 헨리 마틴 등도 뉴톤과의 교류를 통해 더 큰 확신을 얻었다.
"놀라운 주님의 은총(Amazing Grace)"
영어로 불려지는 성가 가운데 가장 세계적으로 널리 불려지는 이 곡은, 존 뉴턴이 1779년에 가사를 쓴 곡이다.
뉴톤은 1767년 42세 때, 시인 윌리엄 쿠퍼(William Cowper)를 만나 곧 친구가 됐다. 쿠퍼는 뉴톤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우기 시작했다. 또한 두 사람은 올레니 찬송가(Olney Hymns)를 편찬하는 일에도 힘을 모았다.
그 결과, 뉴톤이 1779년 54세 때 쿠퍼의 시 68편과 뉴톤의 시 280편이 수록된 "신앙의 회고와 소망"이라는 찬송가 제1집이 출판되었다. "놀라우신 주님의 은총(Amazing Grace)”은 이때의 작품으로, 작곡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노예들에 기원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추악하고 더러운 범죄 가운데서, 자신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늘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기초하여, 찬송가 4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등의 찬송가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정열적이고 감동적인 목회 활동
존 뉴턴은 목사가 되어서 일평생 동안, 자기와 같은 죄인까지도 버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았다. 아울러 자기처럼 죄에 매여서 종살이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내기 위해서, 전심전력으로 복음을 전했다.
이를 위하여 다정하고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성격인 그는, 그의 집을 모든 계층과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개방하여,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그의 친구들 특히 젊은 목사들과 목사 지망생들에게 격려와 교훈을 주곤하였다.
1780년 55세 때 그는 런던의 성 메리울노스 교회로 옮겨서, 82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27년간을 성도들의 신앙성장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목회사역을 하는 동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의 설교는 많은 이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말년
뉴톤은 82세를 사는 동안,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살았다. 그는 한 때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였으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뉴톤이 팔십이 넘자, 그의 친구들 중에서는 그가 공중 사역을 너무 오래 계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그만 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음성을 높이며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멈출 수 없네! 아니! 어떻게 옛 아프리카의 신성 모독자가, 말을 할 수 있는데도 입을 다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존 뉴턴에게도 나이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이제 나이가 많아져 자연히 기억력이 감퇴하게 되어, 심지어는 설교를 하면서도, 전도를 하면서도, 자기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조차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정도가 되었다. 또한 그는 생애 말년 약 2~3년 동안 시력을 상실하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내가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내가 과거에 엄청난 죄인이었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기 때문에,
나는 내 목숨이 다하는 그 시간까지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다.”
1807년 12월 21일, 죽기 한달 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리고 육체와 마음이 쇠할 때, 우리 마음의 힘이요, 우리의 기업으로서 영원히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나는 내가 의뢰한 분을 알며, 그 분이 내가 그에게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후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니, 그것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께서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다. "
또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더 밝은 빛, 더 큰 사랑, 더 큰 자유며, 이 후에 내 눈이 이 세상에서 눈 감을 때에, 나는 더 좋은 세상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을 기대한다. 전능하신 이의 날개 그늘 아래 사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뉴톤은 1807년 12월 21일 82세로 런던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했다.
노예선의 키를 잡았던 그가, 구원의 방주에 몸을 싣고 말씀의 키를 잡은 채,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존 뉴턴의 묘비명
존 뉴톤은 자기가 죽은 후, 자기묘비에 다음과 같이 적게 하였다. 특별히 그는 여기서 자기를 목사라 부르지않고, 심부름꾼이라 부르게 하였다.
Newton's tombstone reads,
"John Newton, Clerk(심부름꾼), once an infidel and libertine, a servant of slaves in Africa, was, by the rich mercy of our Lord and Saviour Jesus Christ, preserved, restored, pardoned, and appointed to preach the faith he had long labored to destroy."
“...심부름꾼 존 뉴톤은
우리의 주님 되시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로
보존되고 회복되고 용서받고
또 자기가 오랬동안 대적하고 파괴하려 했던 믿음을
오히려 전하게 되었습니다…”
단 하나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05장은 존 뉴턴이라는 목사님이 지으신 노래이다. 그는 원래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가 백인들에게 파는 노예상인으로, 못된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 중생하고 나서는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맙고 놀라워"라는 귀한 가사를 만들어 부흥회를 인도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목사님이 되었다.
그 당시 함께 은혜를 나누던 한 성도가 뉴턴 목사님께 물었다고 한다. "목사님, 만일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 뉴턴은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선택해 주시기를 요구하겠습니다"
라고 놀라운 답변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필요도 아시고 나의 약함도 아시며 나의 미래까지도 아시니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시기를 맡기겠다는 것이다. 선택의 절대적 필요성을 하나님께 반납하는 것이다.
-곽선희 목사 예화집에서-
(명언)
진리 없는 열심은 어둠 속을 탐험하는 것과 같다. <존 뉴턴>
윌버포스의 소명을 '정치가'로 바로 잡아준 존 뉴턴
영국의 노예제도를 폐지시킨 위대한 정치가 윌리암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사랑의교회 '정감운동'의 표준 모델]가 ,하마터면 간발의 차로, 자신의 원대한 소명을 모두 잃을 뻔하였다.
윌버포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평생에 걸친 개혁 열정에 불을 지펴 주었다. 한때 그는 69개나 되는 의안을 주도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그 중 여러 개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안들이었다.
그러나 1785년 25세 때 회심했을 때, 그는 정치를 집어치우고 전적으로 기독교 사역의 길로 접어들 뻔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윌버포스 역시 '영적인' 일이 '세속적인'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한 목사가, 하나님은 그가 기독교 사역보다는 정치 영역에 남기를 원하신다고 월버포스를 설득했다.
그는 노예 상인으로 일하다가 회심하여, 찬송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작사한 존 뉴턴(John Newton)이었다. 당시 60세인 뉴턴은
"나는 주님이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당신을 세우셨다고 믿고 있으며,
또 그렇게 되길 기대합니다"라고 적극 그를 설득했다.
윌버포스는 많이 기도하고 숙고 한 끝에, 존 뉴턴의 조언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나님은 그를 정치가로서 억압받는 자들의 자유를 옹호하라고 부르고 계셨다.
1788년 윌버포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 길은 공적인 길이며, 내가 일할 곳은 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함께 어울려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섭리에 따라 맡겨졌다고 생각했던 그 직책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