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백인 정부는 눈엣가시였던 그가 해외에 여행할 수 없도록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다. 82년 9월에야 여행증명 서류를 발급받아 미국을 방분했다. 이 때 그는 아직까지 미국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넬슨 만델라와 올리버 탐보를 알렸다. 83년에는 비인종적 반 아프르트헤이트 조직인 통일민주전선(UDF)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국내외에서 저술과 강연을 통해 아파르트헤이트의 부당성을 알리려 노력했는데, 그는 이를 나치즘에 비교해 설명하곤 했다.
1990년 2월 웨스턴케이프 대학교 부총장 자커스 게르웨와 함께 데스몬드 투투 교육재단을 설립해 교육 발전 프로그램을 지원하기도 한다. 남아공은 1948년부터 시생된 아파르트헤이트를 1991년 결국 폐지하는데, 특히 90년 만델라가 석방되면서 백인 정부와 협상이 이루어져 보복이 아닌 화해에 의한 공존이 목표가 되었다. 94년 남아공 최초의 다인종 선거에서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다. 새 정부의 가장 큰 과제는 인종간 화합이었고,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가 설치되어 투투가 의장으로 임명된다. 이에 그는 국가와 국민을 통합하기 위한 무지개 국가를 제안한다. 이는 인종적 차이와 문화적 폐쇄성에 기초한 남아공의 과거를 청산하고, 다양성 속의 통일을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TRC의 주요 임무는 샤프빌 대학살이 일어난 1960년 3월 1일부터 1994년 5월 10일까지의 중대한 인권 침해를 조사하고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는 가해자의 책임을 면제하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제안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용서와 화해, 협력과 통합. 피해자들의 정신적 충격에 대한 치유, 가해자들의 죄과에 대한 치유, 국가의 도덕적, 역사적 차원의 치유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하여 수백만 남아공인에게 자행된 잔학 행위에 대한 사과를 너무 쉽게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의 노력이 남아공의 상처를 치유하고 일치된 국민의식을 심어 주었다는 데에 대부분 동의한다.
그는 명실상부 남아공의 도덕과 양심이라 할 수 있다. 만델라는 그를 두고 '날카로울 때도 있지만 대체로 부드럽고,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며 유머가 거의 없는 사람이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조용하면서도 뚜렷하게 다가온다.'고 평했다.
만델라가 은퇴한 이후 트투는 새로운 흑인 정부에도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다. ANC가 주도하는 정부의 부정부패와 비효율성에 대해서도 날선 비판을 가한다. 가난에 대한 정부의 대처가 미흡함과 흑인 거주지내 제노포비아 관련 폭력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제노포비아 : 낯선 것, 이방인을 뜻하는 제노(Xeno), 싫어한다는 뜻의 포비아(Phobia)의 합성어. 이방인 또는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의미한다. 악의가 없는 상대를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경계, 배척하는 것으로, 자기 과보호 또는 열등의식에서 기인한다. 경제 대공황으로 서구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혐오주의가 등장했고, 이것이 경제적 빈곤 속에서 자신들과 동등하거나 더 잘 사는 타 민족에 대한 혐오로 변질되어 나치즘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2007년 7월 18일 만델라가 요하네스버그에서 지미 카터, 코피 아난, 메리 로빈슨 등과 함께 세계원로회의를 출범시켰을 때 투투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높은 도덕성과 용기를 갖춘 세계의 원로들이 세계적인 이슈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세계적 원로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그가 2007년 9월 21일 마하트마 간디 글로벌 비폭력상 수상식에서 한 발언이다.
'우리가 사는 곳은 도덕적인 세상이다. 비록 우리가 악이나 불의, 억압이 종식되게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 정의와 선이 이기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이런 믿음이 옳았다는 것은 아파르트헤이트 가 무너지고, 자유와 민주주의가 제 자리로 돌아오게 된 현실이 명백하게 입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