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에는 고려(高麗)의 서쪽 경계인 서경(西京)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서경은 고려의 서쪽 경계로서 고려 인종 때 서경 천도 운동을 벌인 승려 묘청의 난(妙淸-亂, 1135년 1월 19일(음력 1월 4일) ~ 1136년) 사건으로 유명한 곳 입니다. 결국 묘청의 난은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에 의해 진압됩니다.
강단학계에서는 묘청의 난 사건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독립 운동가 단채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난을 두고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 할 정도로 중요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단재는 묘청의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여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서경의 옛이름은 평양(平壤)으로 강단 사학에서는 이 또한 북한의 평양으로 주장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강단사학에서는 평양이라고 하면 고대로 부터 무조건 북한의 평양 한 곳으로 만 비정하지만 역사 기록에는 수 많은 평양들이 있었으며 평양은 한 곳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 때 부터 수도의 명칭으로 계속 사용된 이름입니다.
이 서경의 이름에 대해 원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至王建,以平壤為西京
『元史』 왕건에 이르러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당시 평양을 서경으로 바꾸었다고 하는데 이 평양은 고구려의 마지막 평양의 위치로 판단됩니다.
평양의 연역에 대해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평양부를 보면 그 연역에 대해서 나오는 데...
단군조선부터 기자, 위만, 고구려 장수왕 그리고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다시 신라에 통합되는 내용이 나오며 또 고려 시대의 인종, 원종 때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인종) 묘청의 난 사건
仁宗十三年乙卯, 西京僧妙淸 柳旵、分司侍郞趙匡等叛
인종(仁宗) 13년 을묘 【송나라 고종(高宗) 소흥(紹興) 원년.】 에 서경(西京)의 중[僧] 묘청(妙淸)과 유참(柳旵) 및 분사 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이 모반(謀叛)하였다.
인종때 일어난 서경 천도 운동, 묘청의 난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2. (원종) 서경이 동녕부로 바뀜
元宗十年己巳, 西北面兵馬使營記官崔坦、三和校尉李延齡等作亂, 以西京及諸城叛, 附于蒙古。 元以西京爲東寧府
원종(元宗) 10년 기사에 서북면 병마사 영기관(西北面兵馬使營記官) 최탄(崔坦)과 삼화 교위(三和校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난(亂)을 일으키어 서경(西京) 및 여러 성(城)을 가지고 몽고(蒙古)에 붙으니, 원(元)나라에서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삼아 관리를 두었다.
원나라 시기에 최탄, 이연령의 난으로 이 서경이 몽고에 속하게 되고, 원이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바꾸었다는 기록입니다. 또한 원사의 기록을 보면
升高麗東寧府爲路.
『元史』卷8 本紀8 世祖5, 고려(高麗) 동녕부(東寧府)를 승격하여 동녕로(東寧路)로 삼았다.
동녕부를 다시 동녕로(東寧路)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결국 서경이 동녕로(東寧路)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즉 동녕로의 위치를 찾으면 고려 서경의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동녕로의 위치를 기록한 원나라 지도입니다.
즉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난 고려 서경(西京)의 위치는 요하 서쪽에 있었습니다. 당시 고려의 강역과 국경이 어디였는지를 알수 있는 부분입니다. 추가로 동경 요양부의 요양이 현재의 요하가 아닌 난하 부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원사의 동녕로 기록의 부분을 다시 보면 장수왕의 평양 위치도 알 수 있습니다.
東寧路,本高句驪平壤城,亦曰長安城.漢滅朝鮮,置樂浪、玄菟郡,此樂浪地也.晉義熙後,其王高璉始居平瓖城.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至王建,以平壤為西京.
『元史』 동녕로(東寧路)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녕로(東寧路),본래 고구려 평양성이며 다른 말로는 장안성이라고도 불렀다. 한나라가 조선을 멸하고 (평양에) 한사군을 설치했는 데 낙랑땅이다, 서진 의희 이후에, 장수왕이 평양에 도읍하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고 평양을 함락하자 그 나라를 동쪽으로 옮겨서 압록수(당시 고구려 압록수는 난하) 동남쪽 천여리에 있게 되었으니 (현재 평양은)옛 평양이 아니다. 왕건 때 이 평양을 서경이라고 했다.
즉 왕건이 서경으로 한 평양의 위치는 원이 설치한 동녕로 이고 장수왕의 평양성은 그 보다 서쪽으로 천리를 더 가서 압록수의 서쪽에 있는 다는 말이 됩니다.
기록에는 그 나라(고구려)를 동쪽으로 옮기고 또 압록수의 동남쪽 천여리로 이동했다고(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했는 데요. 이를 근거로 하면 평주가 장수왕의 평양성의 위치가 됩니다. 하지만 동쪽으로 옮겼다는 것과 동남쪽으로 또 이동한 것을 같다고 보면 동경부의 위치가 장수왕의 평양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먼저 기록된 통전의 하북성 노룡현 평양의 위치가 신뢰도가 더 높지 않을까 합니다.
첫댓글 처음 봤는데, 아주 흥미롭네요~
이런 내용이 왜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못하고 있을까요?
현 국사학계의 통설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역사 기록, 사료들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매장당합니다. 이게 현실이죠.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이런것들이 너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