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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외씨버선길(3), 김주영 객주길
여행일 : ‘21. 2. 6(토)
소재지 : 경북 청송군 파천면과 진보면 일원
여행코스 : 신기리 느티나무→감곡저수지→수정사→마묻골저수지→너븐삼거리→동천지→각산저수지→월전리→고현지(소요시간 : 15.6km, 실제는 17.31km/ 4시간 4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오늘은 그 세 번째 구간인 ‘김주영 객주길’을 걷는다. 대하소설 ‘객주’를 지은 김주영이 이곳 진보면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해서 그의 이름과 대표작에서 이름을 따왔다. 그러나 가슴에 담아둘만한 특별한 볼거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여섯 개나 되는 저수지를 볼거리로 친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얘깃거리까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길은 객주의 주인공인 수많은 보부상들이 등짐을 지고 넘나들었을 터. 그들이 남겼을 수많은 애환을 상상해보며 걷는 다면 오래오래 좋은 추억거리로 남을 것이다.
▼ 들머리는 신기리 느티나무(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659)
당진-영덕고속도로(상주-영덕) 청송 IC에서 내려와 31번 국도를 타고 영양방면으로 올라가다 ‘신기1리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신기옹정길’을 따르면 잠시 후 들머리인 신기리에 이르게 된다. 시점은 1660년경 ‘인동 장씨’의 입향 시조가 심었다는 느티나무이다. 360년을 묵었다는 얘기이니 느티나무 치고는 젊은 편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천연기념물(제192호)로 지정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 나무가 품은 내력이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마을의 시조가 심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성시되어 정월 대보름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동네 제사를 지내왔다니 말이다. 나무의 아래와 윗가지에서 동시에 잎이 피면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단다.
▼ 외씨버선길의 세 번째 구간인 ‘김주영 객주길’은 파천면 신기리(느티나무)에서 시작해 진보면 고현리(고현지)에서 끝난다. 구간 전체가 산길과 임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특징이랄 수 있는데, 중간에 감곡저수지와 수정사, 마묻골저수지, 너븐삼거리, 동천지. 각산저수지 등의 주요 포스트를 지나게 된다. 하지만 ‘김주영 객주길’이라는 이름을 낳게 한 ‘객주문학관’과 ‘진보장터’는 다리품을 한참이나 더 팔아야만 만나볼 수 있다. 도상 거리는 15.6㎞. 그러나 실제거리는 17㎞를 훌쩍 넘겨버린다.
▼ 구간 안내도는 느티나무 옆에 세워져 있다. ‘2길’인 ‘슬로시티길(소헌공원→신기리 느티나무, 10.5㎞)’과 ‘3길’인 ‘김주영 객주길(신기리느티나무→고현지, 16.6㎞)’의 지도를 그려 넣고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주산지와 유사한 풍경을 연출하는 감곡저수지를 비롯한 뛰어난 풍광에다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더해지는 길이란다. 그 오른편에는 신기리의 느티나무와 함께 수정사와 객주문학관 그리고 고현지의 사진을 게시했다. 구간을 대표적할 수 있는 볼거리란 얘기일 것이다.
▼ 길을 나서려는데 시작부터 난감한 상황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에 길이 둘이나 되는 것이다. 요즘 트레커들이야 너나없이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하니까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은 헷갈릴 수도 있겠다. 아무튼 둘 가운데 왼쪽 길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 사과나무 밭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잠시 걷자 ‘신기천(新基川)’ 건너에서 ‘감곡 전통마을 숲’이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선조들이 마을의 재앙을 막기 위해 조성한 숲으로 마을의 서쪽 입구를 가리는 비보림(裨補林)이자 외부의 불길한 경관적 요소를 차단하여 강한 기운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염승림(厭勝林)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주민들은 아직도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이곳에서 당제(堂祭)를 지내오고 있단다.
▼ 700평 조금 못되는 공간에는 느티나무와 시무나무, 이팝나무, 소나무 등 19종 30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단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보호수’로까지 지정되어 있는 소나무라 하겠다.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게 나이도 260년이나 묵었단다.
▼ 숲에는 조형물도 세워져 있었다. 목화송이를 단 패랭이에다 등짐, 거기다 지팡이까지 짚었으니 틀림없는 ‘보부상(褓負商)’이다. 오늘 걷게 되는 ‘김주영 객주길’이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길이라더니 이를 형상화 했나 보다.
▼ 탐방로는 이제 ‘신기천(新基川)’가의 도로를 따른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외씨버선길의 안내판이 세워진 ‘감곡마을(신기2리)’ 앞을 지난다. 옛날 이곳에 절(가람)이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오래 전부터 제지마을로 알려져 온 곳이기도 하다. 참닥나무가 많고 물이 맑아서 신라시대부터 한지 생산을 생업으로 해왔다는 것이다. 한지 수요의 급감으로 인해 지금은 비록 옛날 이야기로만 남았으나 말이다. 들머리에서 이곳 감곡마을까지는 20분이 걸렸다.
▼ 도로를 따르던 탐방로는 ‘감곡저수지’ 아래서 숲속으로 파고든다. 감곡마을에서 20분 거리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저수지의 둑으로 빠져나온다. 이 저수지는 ‘리틀 주산지’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주산지(注山池)의 명성에 눌려 입소문을 타지는 않았지만 주산지의 상징이랄 수 있는 왕버들 수십 그루가 이곳에서도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왕버들은 매년 10~20cm씩 자라나며 주로 습지나 냇가에서 자라고 물속에서도 썩지 않고 살 수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 하지만 주산지의 풍경은 만나볼 수 없었다. 갈수기(渴水期)이어선지 버드나무 군락지가 온통 뭍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못내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버들피리를 불며 지친 다리를 잠시 풀고 있었을 보부상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 아쉬움을 달래볼 따름이다.
▼ 저수지를 벗어난 탐방로는 산자락(이정표 : 고현지 13㎞/ 신기리 느티나무 2.6㎞)으로 파고든다. 이어서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을 짧게 치고 오르자 탐방로는 콧노래라도 부르며 걷기에 딱 좋은 산길로 변한다. 솔가리 수북한 황톳길이 양탄자처럼 폭신폭신한데다, 한껏 들이키는 숨결에는 솔향까지 가득하니 어찌 콧노래 한가락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기분 좋은 소나무 숲길이 끝나자 낮은 야산에 아주 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일부러 깎아낸 것처럼 반반한 경작지가 흡사 고원(高原)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새참이라도 먹으려는지 가장자리에는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 이곳에서 ‘양심 장독대’라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났다. 항아리에 생수병을 가득 넣어놓고 목마른 탐방객들이 한 병씩 가져갈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그 항아리를 땅속에 묻어 둔 것은 물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생수를 챙기는 게 일상이 된 우리 부부에게는 불필요했지만, 외씨버선길 운영진들에게 글을 빌어서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 길옆으로 시야가 넓게 트이니 가슴도 열린다. 그나저나 이 일대는 고랭지채소밭으로 유명한 곳이다. 여름에라도 올라치면 강릉 안반데기의 배추밭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고 한다.
▼ 감곡저수지를 출발한지 30분. 작은 개울을 지나자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고현지 12.5㎞/ 신기리 느티나무 4.1㎞)와 함께 세워놓은 ‘황성옛터’에 대한 안내판이 눈길을 끄는 곳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황성옛터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 가요의 작사자인 왕평(이응호)의 무덤이 이 근처에 있단다.
▼ 삼거리에는 수정사의 일주문이 세워져 있었다. 문에 걸린 편액(扁額)의 ‘남각산 수정사(南角山 水淨寺)’라는 문구는 남각산에 위치한 수정사라는 뜻일 것이다. 절간 사람들은 배후산인 비봉산을 ‘남각산’으로 부르는 모양이다. 아무튼 탐방로는 일주문 앞에서 왼편으로 향한다. 그렇다고 나옹선사가 창건했다는 유서 깊은 절을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가득한 숲길을 잠시 걷자 개울가에 자리 잡은 수정사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고려 보장왕(1352~1374) 때 나옹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수정사’란 이름은 계곡물이 수정처럼 맑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전각은 대웅전(경북 문화재 자료 제73호)과 산신각, 요사가 전부다. 화려하지도 위압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전성기 때는 파천면과 인근 진보면 일대의 많은 토지를 소유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사찰이었단다.
▼ 절집 입구에는 또 다른 ‘황성옛터’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황성옛터는 청송 출신의 ‘왕평(이응호)’이 작사하여 1928년에 발표된 노래로, 폐허가 된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를 찾아 받은 쓸쓸한 감회를 그린 노래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금지곡 지정에도 크게 히트하였고 이후에도 고복수·남인수 등이 다시 부르기도 했다. 악극단 활동을 하던 이응호가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무대에서 쓰러져 숨지자 그의 아버지가 스님으로 있던 이곳 수정사 입구의 산기슭에 안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직접 찾아보지는 못했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잠시 후 탐방로는 비봉산 자락을 향해 급경사를 오른다. 이정표(비봉산 정상 2.3㎞)는 이곳이 비봉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의 입구임을 알려준다. 외씨버선길이 등산로의 일부를 빌려 쓰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비봉산(飛鳳山)’이란 지명은 산세가 봉황이 나는 모습과 흡사하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 능선(이정표 : 비봉산 정상 2.0㎞/ 수정사 0.3㎞)에 오른 등산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능선을 따른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탐방로는 고개를 넘어버린다. 그리고 임도를 건넌 다음 작은 계곡으로 내려선다. 이 길은 국도가 없던 시절 진보로 가는 유일한 우마차 길이었다고 한다. ‘객주길’. 이름 그대로 옛날 보부상들이 청송읍에서 진보장으로 넘어가던 길이다. 지금은 비록 시원하게 뚫린 국도를 따라 다니지만 옛날에는 이 길을 통해 물산과 사람이 오갔다고 한다. 때문에 비봉산 자락을 휘감아 도는 이 길은 한 많고 사연 많은 길이기도 했다. 그런 길이 청송이 낳은 김주영 작가의 글을 통해 다시 태어난 것이다. 작가의 고향이 오롯이 대하소설 ‘객주’의 무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 계곡에는 ‘마묻골저수지’가 축조되어 있었다. 저수지의 이름은 ‘마묻골’이란 지명에서 따왔다. 옛날 어느 장수가 타고 가던 말이 다쳐 쓰러지자 이 계곡에 묻고 갔다고 해서 ‘마묻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이 길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 적들이 황급히 달아나던 통로이기도 하고 피란민들의 고생길이기도 했다. 또한 진보로 가는 주요 통행로로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번성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교통이 발달되면서 잊혀져오다가 주민들의 노력에 의해 외씨버선길로 되살아났다고 한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계곡을 따른다. 계곡이 짧아서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물이 귀해서인지는 몰라도 물기 한 점 없는 전형적인 건천(乾川)이다. 그래선지 길은 계곡과 하나가 된 곳이 많다. 굴곡이 깊은 곳에는 다리를 놓기도 했으니 폭우 때는 통행이 불가능할 게 뻔하다. 길은 또 산골짜기 깊숙이 들어갈수록 좁아졌다. 그리고는 이내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 계곡이 끝나고 이어서 고개 하나를 더 넘자 ‘너븐 삼거리’이다. 수정사에서 30분쯤 되는 지점인데 널찍한 삼거리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참! 이곳의 명칭은 삼거리이나 사실은 사거리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객주문학관 연결로 및 비봉산 등산로가 양쪽으로 나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선지 이정표(고현지 10.9㎞) 외에도 김주영 작가의 ‘객주’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선택구간인 ‘객주 문학관’으로 연결되는 길목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지난 2014년에 문을 연 문학관에는 김주영 작가의 육필 원고와 개인 수집품, 그리고 조선 후기 보부상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고 한다. 하지만 1.7㎞라는 거리가 만만치만은 않다. 1시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니 일정을 고려해서 다녀와야만 한다.
▼ 안내판은 김주영 작가의 삶과 그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1939년 이곳 청송에서 태어난 김주영은 지독스럽게 가난한 시골에서 어릴 때부터 생존의 문제에 부딪혔다고 한다. 하룻밤을 자고나면 그날의 잠자리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떠돌이가 되었단다. 그리고 유년시절 시골장터에서 목격한 봇짐장수들의 고달프면서도 강인한 삶을 대하소설 ‘객주’에다 풀어 놓았다는 내용이다.
▼ 이곳은 비봉산(飛鳳山, 671m)을 올라가는 들머리이기도 하다. 외씨버선길과는 다른 이정표(비봉산 정상 2.2㎞/ 샘터 0.8㎞, 메산 정상 0.7㎞)와 함께 비봉산의 종합안내도를 세워놓은 이유일 것이다. 지도는 수정사 앞을 출발해 비봉산의 정상을 정복한 다음 이곳으로 내려올 수 있음을 알려준다. 아니 이따가 들르게 될 월전리로도 연결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외씨버선길을 잠시 내려놓고 비봉산 등산을 즐길 수도 있겠다는 얘기이다.
▼ 이후로는 소나무 숲길을 따른다. 탐방로는 한마디로 예뻤다. 커다란 소나무가 보드라운 흙길 양 옆으로 늘어서 적당한 그늘을 내줬고 나무 사이로 살랑살랑 바람이 불었다. 청송의 전형적인 풍경이 아닐까 싶다. 청송은 전체 면적의 82%가 임야인데 그중에서도 소나무가 가장 많다니 말이다. 청송(靑松)이라는 지명에 ‘소나무 송(松)’ 자까지 붙였을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참! 가는 도중 ‘옹기도막’이라고 적힌 소나무(이정표 : 고현지 9.6㎞)도 눈에 띄었다. 무형문화재인 옹기장 이무남 선생이 이 근처에서 옹기를 빚어 구워내고 있다더니 이를 이르는 모양이다. 참고로 이곳 진안리(진보면)는 옹기용 점토가 풍부하고 질이 좋아 예부터 옹기굴이 많았다고 한다.
▼ 그렇게 10분쯤 더 걷자 ‘매산’의 정상이다. 진보면 소재지의 정면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봉우리인데 꼭대기에다 각종 운동기구는 물론이고 벤치까지 놓아 주민들의 쉼터로 꾸며놓았다. 주민들의 놀이터답게 빈 가지 사이로 진보시가지가 내다보인다. 진보는 내륙 깊숙이 위치한 오지다. 그 옛날 바깥세상을 이어준 것은 하루에 한 번 다니던 버스(진보~안동)가 전부였다고 한다. 눈이 많이 오는 날엔 그마저도 없었단다. 그러니 5일마다 서던 장날은 명절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각지에서 온 장사꾼들은 시장 구석구석에 가져온 물건들을 진열했을 테고, 해가 중천에 올 즈음이면 새벽녘 안개를 뚫고 집을 나선 산골 사람들까지 합쳐서 장터는 북새통을 이루었을 것이다. 김주영은 자신이 어린 시절 보고 느꼈던 진보 오일장의 풍경을 토대로 조선 후기 보부상의 이야기를 담은 대하소설 ‘객주’를 썼다고 한다.
▼ 반대편으로 놓인 계단을 내려서는데 건강을 다지려는 듯 주민 둘이 헐떡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오르는 게 보인다. 옛날에는 생계의 수단으로 땔나무를 해다 팔기 위해 힘들게 오르내렸던 길을 말이다.
▼ 탐방로는 잠시 후 낙엽송 숲으로 들어선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나무들 사이로 언뜻언뜻 진보면 소재지가 내다보인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서울에서 청송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환승지로 이용하는 고을이다. 영양과 영덕으로 가는 버스가 진보를 거치기 때문에 차편이 곱절 많기 때문이다.
▼ 길은 매산에서 동천동으로 내려간다. 산길이라기보다는 오솔길에 가까운데 도중에 두 곳에서 갈림길(이정표 1 : 비봉산 정상→/ 매산 정상↓, 이정표 2 : 동천지↑ 0.5㎞/ 지장사← 0.27㎞/ 쉼터→ 0.14㎞/ 매산 정상↓ 0.26㎞)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걷자 시야가 한꺼번에 열리면서 ‘동천지’에 내려선다.
▼ ‘동천지’는 자그만 저수지이다. 하지만 아까 감곡저수지에서 아쉬워했던 그 풍경을 이곳에서 만났다. ‘주산지(注山池)’의 상징인 ‘왕버들’로 여겨지는 나무들이 건너편 둑 아래서 아랫도리를 물에 담그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비록 앙상한 가지만 남았지만 녹음 짙은 여름철이나 단풍철에라도 찾아온다면 인생샷 하나쯤은 너끈히 건질 수도 있겠다.
▼ 동천지를 지난 탐방로는 또 다시 산속으로 파고든다. 계단을 놓지 않고는 길을 내지 못할 정도로 경사가 가파른 산비탈이다. 그마저도 직선으로 놓지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之)’자를 만들면서 위로 향한다.
▼ 길고 긴 계단을 따라 능선에 오르면 잣나무 숲이 펼쳐진다. 잣나무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나무지만 잣의 집산지인 경기도가 아닌 경상도 지방에서 만나니 색다른 느낌이다.
▼ 잠시 후 탐방로는 임도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정표(고현지로 8.9㎞/ 신기리 느티나무 7.7㎞)와 함께 세워놓은 안내도에는 이곳의 지명을 ‘비봉산 갈림길’로 표기하고 있었다. 맞은편으로 난 산길이 비봉산 정상으로 연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비봉산 줄기를 오르내리면서 이어진다는 것 또한 ‘김주영 객주길’의 특징이다. 개중에 경사가 무척 심한 구간도 있다. 그러니 조금은 버거울 수도 있다. 하지만 봇짐이며 머릿짐을 지고 산을 넘었을 보부상들을 생각하며 걷는다면 피곤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 숲을 빠져나오자 대만 고스라니 남은 고추밭이 나타난다. ‘김주영 객주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마을 풍경은 어딜 가나 비슷했다. 야산을 개간해 사과나 고추, 인삼을 기르고 있었다. 20년 전만 해도 담배 농사가 흥했다는데 기후가 바뀐 탓에 요즘은 인삼밭이 더 많다고 한다.
▼ 사람과 우마차가 다니던 길이니 돌탑 하나 없겠는가. 그것도 짐 보따리를 이고 진 보부상들이 뻔질나게 다니던 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생김새로 보아 그들이 쌓아올린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뭐가 대수겠는가. 간절한 염원을 품은 돌멩이들이 하나하나 쌓였으니 이만하면 신앙의 대상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 걷는 도중 야생동물 포획 틀도 만날 수 있었다. 멧돼지나 고라니 등에 의한 농작물 피해가 보통이 아니라던 기사가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 동천지를 지난 지 38분 만에 ‘각산저수지’를 만났다. 감곡이나 마묻골, 동천지 등에 비하면 규모가 큰 편이나 특별한 볼거리는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저수지일 따름이다. 아니 수면 위에서 놀고 있던 철새 때가 볼거리일 수도 있겠다.
▼ 저수지 둑에서 바라본 ‘각산리(角山里)’ 풍경이다. 마을 지형이 동쪽은 탕건봉(岩巾峰)으로 각형(角形)을 이루고, 남쪽은 비봉산(飛鳳山), 북쪽은 북방산(北方山)으로 싸여 있는 산세의 형곡과 탕건봉(탄근봉이라고도 함)의 특별한 형세의 모양을 따서 각산(角山)이라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각산리로 내려가던 탐방로가 아스팔트도로를 만나는가 싶더니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산속으로 들어간다. 이때 문득 허기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점심때가 한참이나 지났다. 하지만 요기를 할 만한 식당이나 편의점은 눈에 띄지 않는다. 아니 3시간을 걸어오는 동안 그런 편의시설을 일절 만나지 못했다. 맞다. ‘김주영 객주길’은 작은 마을길이나 산길로만 이어지기 때문에 중간에 식당이 없으므로 출발하기 전에 이에 대한 준비가 필수이다. 그 옛날 보부상들이 봇짐 속에 먹거리를 챙겨 넣고 출발했듯이 말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내가 보부상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걸으면 조금 더 재미있는 여정이 되지 않을까 싶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농경지가 사방으로 널린 고원지대를 지난다. 고춧대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널따란 밭이 나오는가 하면, 검은 천을 겹겹이 두른 인삼밭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하나 같이 소박한 인생과 맞닿은 풍경이다. 때문에 이 길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100여 년 전에는 전국을 떠돌던 장돌뱅이의 한 많은 삶이, 그리고 지금은 야산을 일궈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 각산저수지를 지나면서부터는 심심찮게 수로(水路)를 만날 수 있었다. 도로가를 따라 물길을 내놓았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머리 위를 지나가기도 한다. 그런 길가에서 ‘한전진보변전소’가 나타났고, 또 스치듯 지나갔다. 참! 펑퍼짐한 길의 여유로움 탓인지 문득 ‘객주’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러자 새벽녘 나귀 세 마리를 끌고 길을 헤쳐 나가는 ‘천봉삼’ 일행이 또렷이 그려진다. 그리고 어설픈 짚신을 신은 보부상들이 숨을 할딱대며 내 앞을 스쳐 지나간다.
▼ 각산저수지를 지난 지 30분쯤 되자 국도 34호선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탐방로는 ‘월전리(月田里)’로 들어선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이름이 지어진 마을이다. 만월(滿月)이 되면 곧 반월(半月)로 기울어지므로, 이곳에 마을이 들어설 경우 마을이 쇠퇴한다는 이야기에 따라 마을 가운데를 농경지로 이용한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것이다. 치안센터와 교회, 주유소가 들어서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고을이기도 하다.
▼ 이 마을의 자랑거리는 두 그루의 ‘비술나무’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나무가 굵기(지름 144㎝/ 둘레 452㎝)까지 해서 그저 어마어마하다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정도다. 나이도 네 갑자나 넘겼단다. 보호수로까지 지정된 이유일 것이다. 참고로 ‘느릅나무과’인 비술나무는 함경북도 방언이라고 한다. 개느릅이나 떡느릅나무로도 불리는데, 한자로는 야유(野楡), 즉 야생 느릅나무란다. ‘참느릅’과 구별되는 느릅나무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가지와 잎, 꽃, 속껍질은 약재에 쓰고 어린잎은 없이 살던 시절 국으로 끓여먹기도 했단다. 거기다 목재를 건축재나 가구재, 선재 등으로 사용했다니 버릴 게 하나도 없는 나무라 하겠다.
▼ 월전리를 빠져나온 탐방로는 또 다시 구릉(丘陵) 위로 올라선다. 그리고 펑퍼짐한 능선의 한가운데를 꿰뚫는 포장길을 따른다. 이때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요 아래에 있는 ‘시릿골’ 마을의 당목(堂木)이 마을 뒤 언덕에 있다고 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둘러쳐져 있다는 흙벽돌 담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동제(洞祭)까지 지낸다는 그 소나무는 확실히 아니다. 다만 하도 잘 생겨서 당목으로까지 거론해 봤다.
▼ 아래 사진의 고개를 넘기 직전. 왼편으로 길 하나가 갈려나갔다. ‘시릿골’ 마을로 연결되는 길인데 다음이나 네이버에 올라온 ‘외씨버선길’ 지도는 모두 이 길로 들어서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눈에 익은 이정표가 보이지 않으니 섣불리 들어설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이를 무시하고 곧장 직진했던 이유이다.
▼ 결과적으로 우리 부부의 결정은 옳았다. 300m쯤 더 나아간 곳에서 눈에 익은 이정표(고현지← 2.2㎞/ 신기동 느티나무↓ 13.4㎞)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길이 나뉘는 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라는 지시를 하고 있었다.
▼ 덕분에 우린 예정에 없던 저수지 하나를 더 만났다. 둑에 세워놓은 ‘물놀이 금지’ 경고판에 이름도 적어놓지 않았을 정도로 자그마한 저수지이나 네이버 지도에는 ‘시릿골지’로 표기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또 저수지?’라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고현지까지 합칠 경우 모두 여섯 개나 되는 저수지를 만났으니 말이다. 이곳 진보면이 깊은 산골인데도 불구하고 물을 필요로 하는 경작지가 많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저수지를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시릿골’ 마을이 나타난다. 시량리(時良里)의 자연마을(이밖에도 샘재·송이골·진시골·엄거너미 등이 있다)이다. 참고로 ‘시량’이란 지명은 과거 시랑(侍郞) 벼슬을 했던 사람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이 마을의 역사는 엄청나게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랑이란 벼슬이 신라 및 고려(전기)에 있었던 관직이었으니 말이다.
▼ 탐방로는 마을 안길까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첫 번째 갈림길을 만나자마자 마을을 빠져나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조금 전 우리가 내려왔던 곳이 아닌 또 다른 구릉 위로 올라가더니, 진행방향 저만큼에 있는 ‘고현지’를 한눈에 담을 수 있도록 해준다.
▼ 고현지로 내려가는 길은 ‘청송 사과’의 참맛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길 양편으로 늘어선 사과나무들이 그동안 보아왔던 과목(果木)들보다 엄청나게 굵어진 것이다. 맛 좋기로 명성이 자자한 청송사과의 산 증인이 아닐까 싶다.
▼ 날머리는 고현지(청송군 진보면 시량리 296-10)
사과밭 사이로 내려서니 시량리의 또 다른 자연마을인 송이골에 이른다. 이어서 마을 안길을 통과하자 고현지가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외씨버선길의 구간 안내도는 마을안길(송이길)과 국도(34호선)가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 트레킹은 총 4시간 40분이 걸렸다. 함께 걸은 일행의 앱에 찍힌 거리는 17.31km. 구간 대부분이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외씨버선길의 세 번째 길인 ‘김주영 객주길’이 종료되는 ‘고현지’는 넓이가 1만평 정도 되는 저수지로 주민들에게 낚시터로 사랑받는 곳이다. 차량으로 5분 거리에는 ‘야송 미술관’과 ‘신촌 약수터’가 있다고 한다.(아래 사진은 함께 걸었던 몽중루님의 것을 빌려다 썼다)